2010. 1. 25. 14:44

성전에서의 예수님 (누가복음 2장 41-52절)

성전에서의 예수님

2010년 1월 24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2:41-52

(눅 2:41, 개정)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눅 2:42, 개정)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눅 2:43, 개정)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눅 2:44, 개정)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눅 2:45, 개정)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눅 2:46, 개정)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눅 2:47, 개정)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눅 2:48, 개정)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눅 2:50, 개정)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눅 2:51, 개정)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그 어머니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두니라』
(눅 2:52, 개정)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의 가족들은 그들만의 영역을 따로 갖고 있었고 거기에 예수님을 예속시키려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세계관마저 자신들의 세계관 안에다 집어넣고자 시도했다는 말입니다.  개인들이 모여서 가족이라는 덩어리가 되면 개인은 그 가족이라는 조직의 부속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개인이란 바로 로마서 5장에 의하면, 죄가 발산되는 개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간이란 아담의 재탕에요 아담의 재현이라고요. 죄지은 아담의 그 성격과 성질은 딴 데로 새지 않습니다. 고스라니 우리에게로 전달되어 이 신체를 통해서 발산됩니다. 그 죄악된 성격이란 바로 자기 있는 쪽으로 뭐든지 끌어당기는 ‘집중화’를 말입니다. 주변에 있는 것들을 긁어모아 나 있는 곳으로 잡아당겨서 그것은 또 하나의 ‘나’로 삼게 됩니다. 가족이라는 것도 예외가 아닙니다.

로마서 5;12에 보면,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주체는 어떤 영적 힘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죄의 힘입니다. 이 죄의 힘들을 규합해서 인간은 자기 고유의 세계를 형성해나갑니다. 그것이 바로 개별적인 신체→가족, 가족→직장, 직장→국가 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 중앙지점은 여전히 자신의 신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이 예수님을 사흘 동안이나 찾아다녔다가 실패했다는 오늘 본문 이야기는 결국 사람이 중심이 되는 가족이나 교회에 있어 과연 예수님께서 반드시 속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시합니다. 즉 어린 예수님께서 비록 요셉의 가정에서 살지만 실질적으로 하숙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평소에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으로 살게 하시는 힘은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힘이 예수님을 예수님답게 살게 하십니다. ‘성전에서 나오는 힘’이란 곧 ‘말씀 성취에서 나오는 힘’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세 사람이 주목을 받으면서 등장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리에 또 다른 분은 경기의 주심을 보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판정이 인간으로서는 최종적인 판정이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은 성전에 가서도 성전의 의미를 모릅니다. 자신의 행함에 주목하고 거기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도적질이나 간음이나 부정한 짓을 하지 않았다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판정관이신 예수님의 판정은 명쾌했습니다. 세리가 바로 의인이라는 겁니다. 성전 안에서 내려진 최종 판정입니다.

성전이란 바로, 자기 자신의 행함에 의미를 두고 곳이 아닙니다. 거기에 누군가가 계십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님의 아버지가 계시는 곳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자기 백성의 주체로서 자기 백성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깁니다. 아담에 속한 인간으로서는 자력으로 에수님 쪽으로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 50절에서는 ‘깨닫지 못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은 12년 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여전히 무지합니다. 깨닫지 못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자기 구조의 일부로 간주해서 예수님을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식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을 내 집안의 사람으로, 예수님을 내 교회의 사람으로 간주하는 집중력을 보이게 되면 아무리 오랫동안 교회 다녀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마치 학원처럼 간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양재 학원, 태권도 학원, 피아노 학원 같이 말입니다.

교회를 학원으로 간주하는 이유는, 거기서 천국갈 수 있는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이나 교회를 사람들이 자기쪽으로 끌어당기는 식으로 이해했기 나온 결론입니다. 교회란 실은 폐회가 된 유적지에 해당됩니다. 거기에는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발굴당하지 못한 채 흙더미 속에 깊숙이 묻혀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습니다.

성전에서 출발하여 성전으로 끌어당기는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나타나서 자기 백성 발굴에 나섭니다. 예수님은 12제자에게 당부하기를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라”고 했습니다. 즉 고기가 알아서 그물에 걸려주는 법은 없습니다. 그물이 먼저 와서 던져주면 그때사 걸리게 마련입니다.

이렇게 그물이 낚인 사람은 그 때부터 자신의 주체됨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함을 압니다. 성도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주체됨을 평생 멈출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신체란 아담으로 물러받은 신체이기에 그 아담의 죄성을 발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뭐든지 자기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성향을 보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자신의 본질이 죄인 줄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발굴단을 유적지를 까발려서 자기 백성을 찾아내면 그 사람은 비로소 자신이 그동안 세상 죄에 빠져서 자기 밖에 몰랐던 것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작업정신은 오직 성전의 성전으로서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는 예수님에게 발굴당한 오래된 유물에 해당됩니다.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죄성을 고스라니 간직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이런 인간이 예수님의 작업을 깨닫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벼락을 맞아야 합니다. 성령의 벼락을 맞아야 합니다.

비가 쏟아져내리는 밤, 홀로 건물 꼭대기에서 번개를 맞아야 하는 피뢰침처럼, 성도도 이런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십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십자가 계시를 홀로 받아야 합니다. 십자가 복음이란, 사람의 목숨만을 거론합니다. 즉 “나 예수님이 이렇게 죽는다. 이는 내가 볼 때에 너도 이미 죽은 목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는 대화만 허용될 뿐입니다.

다른 세상적이고 교회적인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은 사람을 흥정에 나서지 않습니다. 오로지 “나 죽었다. 그래서 실은 너도 죽은 자다”라는 이 복음적 관계 이외의 대화는 하나님께서 시도하지 않습니다. 천 만번 지진이 일어나도 너는 할 말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 발굴된 유물보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하옵소서. 감히 하늘을 쳐다 보지도 못한 새까만 죄인 인 것을 아는 게시의 피뢰침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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