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11. 18:33

예수님과 문둥병 (누가복음 5:12-16)

예수님과 문둥병

2010년 4월 1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5:12-16


(눅 5:12, 개정)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눅 5:13, 개정)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눅 5:14, 개정) 『예수께서 그를 경고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눅 5:15, 개정)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눅 5:16, 개정)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병들인 사람과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은 이 만남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사람으로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는 예수님에게 자신의 병을 고백합니다. 즉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정상인임을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훌륭함을 보이면서 ‘자기 증인’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이 망가져버린 자임을 밝힙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이 예수님을 대하는 방식과 다른 방식입니다. 양쪽 다 독자적인 입지를 고수하면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둥병자는 자신을 포기하듯이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진정 예수님 앞에서의 성도의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문둥병자에게 단순히 병만 고쳐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꺼내놓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에게 있어 이 문둥병자와의 만남이란 말씀 성취를 위한 조치였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는 바도 이런 데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이 기대하는 힘과 능력을 얻고자 합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에게서 나올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성취성 뿐입니다. 이 성취성에 있어 예수님을 만나는 인간은 누구나 병든 자이어야 하고 마땅히 죄인이며 죽음의 냄새를 피우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독자적인 자기 가치를 가지고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대는 짓는 다 헛짓입니다.

성도란 자생력으로 버티는 자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덕으로 사는 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희생 앞에서 비로소 자신들이 스스로 버텨봐야 소용없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와 만난 것은, 이 문둥병이라는 것이 그 당시, 하나님의 저주의 징표로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친히 저주한 병이란 인간의 힘으로 치료될 수 없으며, 치료는 오로지 병을 주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줄 때만 성립된다고 여기고들 있었습니다.

이러한 긍휼과 희생은 인간의 요청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하나님은 늘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일을 하실 때는 하나님의 오른쪽 자리, 곧 주의 자리에서 세상에 나서게 되는데 이 주님의 하시는 일에 대해서 인간들은 걷잡을 수 없을 지경으로 공격하고 달려들고 미워하고 저주하고 참살시켜 버립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염두에 둔 하나님상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럴 때 비로서 인간이란 저주받아 마땅한 존재임이 노출됩니다. 하나님의 긍휼이란 바로 이런 인간들을 구원하지 않아도 무방한 하나님에게서 나오게 됩니다. 제대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아 하나님을 아는 자라면, “나 같은 인간, 지옥불에 집어 넣으셔도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비롭고 정의로우신 분입니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긍휼이란 어디까지나 나의 형편을 고려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의에 의한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참된 성도는 늘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문둥병자의 만남의 초점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예수님에게 달성되느냐를 보여주자는데 있습니다.

레위기 14:2-9에 보면, “문둥병 환자가 정결하게 되는 날의 규례는 이러하니 곧 그 사람을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영에서 나가 진찰할지니 그 환자에게 있던 나병 환부가 나았으면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제사장은 또 명령하여 그 새 하나는 흐르는 물 위 질그릇 안에서 잡게 하고 다른 새는 산 채로 가져다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와 함께 가져다가 흐르는 물 위에서 잡은 새의 피를 찍어 문둥병에서 정결함을 받을 자에게 일곱 번 뿌려 정하다 하고 그 살아 있는 새는 들에 놓을지며 정결함을 받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모든 털을 밀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니 그 후에 진영에 들어올 것이나 자기 장막 밖에 이레를 머물 것이요 일곱째 날에 그는 모든 털을 밀되 머리털과 수염과 눈썹을 다 밀고 그의 옷을 빨고 몸을 물에 씻을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백화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는 피를 젖시고 뿌리기 위한 도구들입니다. 현재 우리에게는 저주의 피가 흐릅니다. ‘선악과를 따먹는 것이 죄였다“는 소리를 고래고래 치면서 온 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면서 저주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을 어긴 존재로 살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전서 1:2에 보면,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고 되어 있습니다. 새 두 마리 중에 한 마리를 물에 잡아서 그 피를 다른 살아있는 새의 쭉지에 바르게 되면 그 새는 비로소 창공을 향해 자유로이 날아갈 수가 있습니다.

바로 오늘날 성도는 바로 이런 새에 해당됩니다. 사도행전 20:28에 보면,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도란 이처럼 사람의 피가 아니라 하나님의 피 뿌림을 받은 자입니다.

이렇게 받게 되면 그의 미래는 이미 확정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피는 인류의 미래를 고정시켜버렸습니다. 그 피의 효능과 피 없는 자의 저주스러운 심판날로 미래가 결정나버렸습니다. 성도는 내름대로의 새로운 미래상을 꿈꿀 필요조차 없습니다. 성도의 미래는 이미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바대로 갑니다. 그 미래상은 바로 ‘죄씻음 받은 의인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런 긍휼과 희생이 통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자력으로 버티려고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몸과 정신은 ‘자력으로 버틸 때까지 버텨보기’입니다. 결코 희생이니, 봉사니 하는 것을 용납되지 않는 세계에 적합한 몸으로 변형되었습니다. 우리가 곧 문둥병자입니다.

출애굽기 4:5-7에 보면, “이는 그들에게 그들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에 문둥병이 생겨 눈 같이 된지라 이르시되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의 손이 본래의 살로 되돌아왔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안목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뱀과 하나님과 벌리는 전투장이요, 그 와중에서 우리는 문둥병자이며 우리를 둘러싼 세상이란 죽음의 세상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피 뿌림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고린도전서 15:42-44에 보면,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다시 산다’는 말이 반복되어 있습니다. ‘다시 산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렇게 심각한 미래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다시 살면됩니다. 왜요?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의 세상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희생과 긍휼을 품고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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