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6. 19:33

의사와 환자의 관계 (누가복음 5:27-32)

의사와 환자의 관계

2010년 4월 25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5:27-32

(눅 5:27, 개정)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눅 5:28, 개정)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눅 5:29, 개정)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눅 5:30, 개정)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눅 5:31,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눅 5:32, 개정)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것은 ‘천국’이 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들이 어디서 어떻게 살든지 상관없습니다. 그 부르심의 목적에 쓰임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부릅니다. 그 역시 천국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런 호출은 일방적인 호출입니다. 천국이란 인간들이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 안에 계시는 분이 일방적으로 호출하는 자에게만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못들어가는 자들은 어떻게 될까요? 서울이 가면 덕수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덕수궁 돌담이 유명합니다. 데이트 코스로서 운치가 있답니다.

과연 덕수궁 돌담을 부지런히 걸었다면 과연 덕수궁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여기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세 종류의 사람이 나타납니다. 덕수궁 돌담을 보듯이 교회가 뭐라는 것을 늘 살피고 구경하는 자들입니다. 교회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교회 구경꾼들끼리 몰려다니면서 덕수궁 밖에 서성이는 자들입니다. 제직회는 어떻게 여느니, 직분은 어떻게 세워지느니, 어떤 식으로 교회 재정이 돌아가느냐에 관심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한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덕수궁에 들어가는 출입구를 일러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천국에 갈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점을 남들에게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덕수궁의 출입구가 어디다는 알지만 결코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들어갈 생각도 없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28절에 보면,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호출에 의해서 덕수궁 안으로, 즉 천국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사람들이 덕수궁 출입문은 알았지만 그 밖에 서서 결코 들어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바로 ‘모든 것을 버린다’라는 점 때문에 주춤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주춤할 것입니다. 이 ‘주춤’은 인간의 힘으로 극복이 안됩니다.

자기를 극복하고 십자가로 들어갈 위인이 아무도 없습니다. 과연 ‘자기의 모든 것을 것을 버린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자기 것을 잘라내는 것을 의미할까요? 아닙니다. 명의이전을 하는 겁니다. 즉 그동안 ‘나의 것’이라고 여긴 것을 모두 ‘예수님의 것’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6:19-20에 보면,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것이란 아예 없습니다.

잘라낼 필요도 없고 이혼하거나 자식들과 헤어질 필요도 없습니다. 다 주님의 것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의 몸도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 호출당한 몸인 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은 예수님으로부터 호출당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십자가 안에 있는 천국에 도착한 사람입니다. 이 때부터 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가능성은 인정받지 못하고 오로지 불가능한 일들만 받게 되는 사람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이 다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입니다.

따라서 덕수궁 안, 즉 천국 안은 예수님의 행하심의 혜택을 은혜로만 받아 누리면서 사는 세계입니다. 이러한 천국 안은 천국 밖에서 호출당하기 전에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자신의 가능성 뭉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을 인형으로 간주합니다. 인간처럼 가꾸면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모든 행함도 오로지 자신을 절대적인 자신의 사랑하는 인형을 키우는데 전력을 다 기울이게 됩니다. 거기에 비해,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의 집합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헌신해서는 아니되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육들을 보세요. 한마디로 말해서 ‘인형 가꾸기’입니다.

부모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들에게도 각자 자신의 인형을 예쁘게 치장하라고 요구하고 주입합니다. 인간이 일상에서 화를 내는 경우는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아라는 인형이 타인이나 하나님에 의해서 손상을 입을 때입니다. 결코 인간들은 자신이 하나님께 헌신하지 못함에 대해서 화내지 않습니다. 이러한 대비되는 성향의 원인이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악과에 대해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따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에서 ‘죽으리라’가 가져다주는 현실이 이제는 인간의 몸 안에서 제대로 실제 상황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것도 모르고 “따 먹고 신이 될련다”에 정신이 팔여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왜 인간이 꼭 죽어야만 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한 대상일 뿐입니다. 

이 ‘죽으리라’ 사실 앞에서 ‘나’라는 인형은 아무런 소용없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산다’는 것은 일시적 현상이며 착오입니다. 인간은 ‘산 적’이 없는 존재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 그 자체를 위해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인간임을 아는 순간은, “나는 어떻게 하면 삽니까?”라는 질문이 아니라 “나는 왜 꼭 죽어야 될 존재입니까?”라고 묻는 질문에서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레위보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내가 너를 제대로 죽여주겠다”는 겁니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순간부터 레위 본인의 의사나 가치나 의미는 박탈당합니다. 예수님이 하시고 벌리시는 일을 보여주기 위해 호출당한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은 이 작업을 죄인들과 ‘함께’ 하심으로서 수행하십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보면,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므로서 죄인 곧 죽을 자로서 함께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를 ‘살려주시는 영’이 되십니다. 이 관계 외에 다른 식으로 예수님은 함께 하시지를 않습니다.

로마서 5:8-9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은 단순한 환자 정도가 아니라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 받아야 될 환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의 피를 내어주시는 그런 의사분이십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만이 진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목사에게 거짓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원치 않고 거짓말만 해주기를 원합니다.

즉 육에서 영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육에서 풍요한 육의 생활에 필요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해달라고 목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 안에 들어간 목사라면 더 이상 사기를 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행함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피로서만 구원됨을 말해줄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한채 천국 가고자 하는 자조차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자들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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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5강-눅5장27-32(의사와환자의관계)-luk100425

2010-04-26 14:39:05  이름 : 오용익


025강-눅5장27-32(의사와환자의관계)-luk1004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5장 27절에서 32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7쪽입니다.

누가복음 5:27-32

“그후에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나를 좇으라 하시니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앉았는지라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하고 제자들의 만남이 하나하나가 의미가 있어요. 보통 우리가 사람 만나는 것은 친목, 친교, 친구가 되어서 서로 살기 편하게 하기 위해서 만나는데 예수님께서 사람을 불러 내는 이유는 이 세상에 ‘천국이라는 것이 어떤 세계냐, 천국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천국이 어떻게 구성되는가?’ 그걸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을 뽑습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을 주께서 뽑으셨다면 우리보고 폼을 내라든지 우리의 잘난 것을 내세우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 하늘나라가 저런 사람들의 것이구나. 아, 하늘나라가 저런 사람들로 인하여 채워지는구나.’라는 그것을 나타내 주기 위해서 우리를 뽑아 세운 겁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냥 교회 나왔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다듬어 나가요.

조각가가 돌을 다듬어서 작품 하나 만들 듯이 화가가 도화지에 붓을 놀리면 그림이 하나 나오듯이 주님은 우리를 하나의 도화지로 사용하고 재료인 돌로 사용해서 깎아서 ‘지옥 가야될 인간도 이렇게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간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야.’라고 우리를 가지고 보여주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본문 2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하는 말이 “나를 좇으라.”고 합니다. 일방적인 호출입니다. 천국이라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호출된 사람만 갈 수 있어요. 누가 우리를 불러줄 때 가는 것인지 우리가 가겠다고 나서면 천국에 못갑니다. 덜렁 나서봐야 소용없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광주강의에서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교회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어요. 그 이야기를 위해서 덕수궁의 예를 들었어요. 저는 아직 서울의 덕수궁 안에 들어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곳이 ‘덕수궁 돌담길’이라는 노랫말처럼 데이트하는 곳이라 해서 가봤는데요, 천국 안, 덕수궁 안에는 안 들어가고 덕수궁 돌담길만 뱅뱅 도는 사람이 있어요.

목사 뽑을 때는 전교인의 삼분의 이 이상이 찬성해야 된다, 그런 것은 잘 알아요. 교회에 장로가 두 종류가 있고 집사도 안수집사와 서리집사가 있는데 서리집사에서 진급하면 안수집사 된단다, 그런 이야기들. 교회 어느 목사가 교회 돈을 등쳐먹고 도망갔다는 이야기, 덕수궁 안에는 안 들어가고 그 근처에서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 그런 것에 빠삭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도대체 덕수궁이 어떻게 생겼는데?” 하면 “안 들어가 봤어요.” ‘천국이 어떤 곳인데?” 하면 말을 못해요. 천국 안에 어떻게 생겼는지 말은 못하는데 그 천국을 품고 있는 돌담길, 그 돌담길은 너무 잘 아는 거예요. 그래서 천국가라고 하면 절대 안가고 그 돌담길만 구경하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게 첫 번째 사람입니다. 덕수궁은 들어가 본적도 없고 돌담길만 구경하고 그냥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두 번째 사람은 천국의 입구에 서서, 그러니까 덕수궁 정문만 바라보면서 “아, 이게 십자가래.” “아, 이게 십자가야?” “그래, 저 길로 들어가야 천국 갈 수 있대.” 십자가는 실컷 구경했어요. 참 재미있는 이야기죠. 십자가가 뭔지는 알아요. ‘십자가라는 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고 그 피로 구원받는대.’

십자가는 잘 아는데 십자가 문을 열고 들어가지를 못해요. 십자가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자기를 부인해야 되기 때문에. 그것은 미쳐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용납 못해요. 아직도 시집안간 딸이 있고 아직도 장가 안간 아들이 있고, 할 일이 많아요. 십자가속까지 들어가 버리면 안돼요. 들어가 버리면 ‘나’라는 자존심을 찾을 길이 없어요.

십자가정문에서 그 안에서 들리는 소리를 들어보니까 그 안에서 예수님이 설교를 하고 있거든요. 그 덕수궁 정문에서 예수님 설교는 잘 들어요. 그런데 그 안에 들어가지는 않아요. ‘자기를 부인하고 날 따라라.’ ‘아, 저거구나.’ 잘 듣는데 절대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했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래.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래. 하여튼 부자들 지옥가도 마땅해.”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지만 절대로 그쪽 안에는 안 들어가요. 그러다가 “엄마, 거기서 뭐해? 덕수궁 문 닫는다. 빨리 집에나 가자.” “그래, 어서 가자, 집으로.” 그리고는 집으로 가버려요. 절대 그 안에 안 들어가요.

세 번째 사람은 주님의 뜻에 의해서 그 안에서 멱살을 당겨서 덕수궁 안에 들어와 버렸어요. 덕수궁 안에 들어와 보니까 그 안에는 인간이 가능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헌금 하는 것, 기도하는 것, 이것 전부 다 소용없어요. 예배 참석하는 것 전부 다 소용없어요. 거기에는 불가능만 있어요.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거기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누리는 세계밖에 없어요. ‘내가 뭘 했습니다.’ 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것도 내 덕으로 산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앞으로 살 것도 마찬가지에요. 숟가락으로 밥을 뜨는 것도 내 힘으로 못 떠요. 주께서 주시는 힘으로 산다는 것을 덕수궁 안에 들어가 봐야 알아요.

거기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성령님이 계셔서 도와주고 있어요. 거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최고입니다. 예수님이 주가 되셔서 모든 죽고 사는 힘, 용서의 힘은 예수님으로부터 그냥 주어지고 우리는 그냥 받게 되어 있습니다. 덕수궁 바깥에서는 ‘기도해야 복 받는다. 헌금해야 복 받는다. 예배 참석해야 복 받는다. 전도를 해야 된다.’ 이런 소리가 유행하는데 막상 천국 안에 들어가 보니까 모든 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다루기 나름이에요.

어떤 사람은 일 년에 전도 두 사람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교회 다니고 천국에 와도 평생 한명도 전도 못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어서 천국에 온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강도가 되어서 천국에 온 사람도 있고 창녀가 거기 와 있고 죄인이 거 기 와 있어요. 어떤 사람은 목사 되어 가지고 천국에 온 기적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평 교인인데 예배 참석 딱 두 번 했는데 천국에 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께서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각양각색 사람들을 다 끌어 모았어요. 흑인도 있고 백인도 있고, 모든 것이 자력으로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확연하게 보여주는 동네가 덕수궁 안입니다. 바깥에서는 이 내막을 몰라요. 덕수궁 안에 들어오지를 못한 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내가 다 안다.’ 이렇게 합니다.

‘돌담길에서 들어보니 안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던데.’ 그 사람들은 천국 안에 그런 소리가 있다는 것, 성경책에 그런 문장이 있다는 것은 알아요. 그런 글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런데 그런 삶을 실제로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어요. 그것은 십자가 문안으로 끌려 들어가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일같이 십자가 구경하고 집에 가고 십자가 구경하고 집에 간 거예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이 세리를 일방적으로 호출합니다. 27절에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고 28절에 보면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라고 합니다. 바로 이 뒤에 있는 말, 예수님을 좇으라, 할 때 우리는 좇아 갈 수 있어요. 행여나 좋은 것 줄줄 알고 맛있는 것 줄줄 알고 그냥 갑니다. 그렇게 가는데 문제는 그 뒤에 나오는 말씀, “모든 것을 버리고” 여기에 주춤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의 문제점은 누가 자기를 ‘좇으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것이 현대인들의 치명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사나이가 오든지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너는 나를 좇아와.’라고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어요. 현대인의 모든 교육은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거예요. 자립도, 자립을 하는 의지만 키워놓았어요.

누군가를 정신없이 좇아가는 것을 절대로 하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세 살 네 살짜리 아이들한테 ‘어떤 아저씨가 맛있는 것 사준다고 오라고 하면 절대로 따라가면 안 된다.’고 교육을 그렇게 받았습니다. 가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누굴 좇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좇아가면 자존심이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이야기는 다릅니다.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다시 이야기할까요? 하나님께서 천국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전부 다 뽑아 세운 거예요. 뽑아 세웠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아하, 천국은 이런 동네구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까 이야기했지요. ‘덕수궁 안에는 인간의 가능성은 일체 없다. 불가능성만 있다.’ 그게 우리 내부에서 지금도 작동하고 있어요. 우리의 내부 안에서 우리가 가능하다고 하는 것과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과 싸우고 있습니다. 가능해서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능해서 천국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가능성이 있는 그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를 불러요, 호출합니다. 호출 알지요? ‘아무개, 이리와!’ 하고 불러내는 거예요. 불러내게 되면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안에 들어갈 때는 우리가 내 것이라고 여기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됩니다. ‘그러면 자식도 버리고 남편도 버리고 전부 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나 할까?’ 하는데 그 남편과 자식이 여러분 것이라면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애초부터 여러분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등기만 새로 하세요. 버리지 마시고,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여기지 마시고. 호출을 받는 순간은 ‘아, 나를 빛내기 위한 내 몸이 아니고 천국이 무엇이냐를 보여주기 위한 주님의 덩어리, 근육덩어리, 고깃덩어리구나.’라고 생각하고 등기를 바꿔주세요.

‘나’라는 등기에서 주님의 등기로 바꿔주시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말이에요. ‘너는 이제 내 것이 되었기에 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된다.’ 이렇게 우리는 등기를 바꿔주시면 우리의 기존의 모든 것을 버린 것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바꿔주시고 들어가게 되는데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보이느냐? 바로 죄인이 되는 겁니다.

첫 번째, 호출하는 것이 있어야 되고, 두 번째, 등기 바꾸는 것, 나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 세 번째,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 되고 환자가 돼요. 30절에 보면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라고 되어 있지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를 때 우리를 무슨 역할 하라고 부르느냐 하면 ‘너는 죄인역할을 해야 된다.’라고 해서 우리를 부른 겁니다. 그런데 제 말에 어폐가 있지요. 죄인역할을 하라고 해서 죄인이 아니고 원래부터 우리는 죄인이었어요. 우리는 타고 난 것이 자기를 잘난 존재로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위주로 살기 때문에 절대로 우리는 스스로 자기를 죄인이라고 간주를 하지를 않습니다.

제가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했지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그 행동에는 다 이유가 밑받침이 되어 있는데 그 이유란 ‘이래서 나는 잘난 사람이다.’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람은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어떤 인간도 ‘나는 이렇게 못난 놈입니다.’라고 행동하는 경우는 한 경우도 없어요. 식구들 있는데 방귀를 뀌어도 자기 잘난 것을 보여주는 방귀를 뀌는 겁니다.

왜? ‘나는 방귀를 뀔 만해서 뀌는 거야. 그러나 너는 방귀를 함부로 뀌면 안 돼. 나는 그냥 앉아서 뀌어도 괜찮지만 너는 나가서 뀌어야 해.’ 항상 모든 행동은 자기는 이럴 만 해서 이것을 하고 남들은 절대로 그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그것이 딱 갈라지면서 사람의 행동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옆집에 202동 아저씨가 있어요. 연세가 70이 넘은 분입니다. 담배를 굉장히 많이 피웁니다. 그런데 작년에 302동 할아버지가 이사를 왔어요. 얼마나 그 할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지, ‘그 할아버지는 우리 빌라에서 나가야 돼.’ 할 정도로 심하게 말을 해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빌라에서 담배를 피우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나는 담배를 피워도 살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지만 너는 담배를 피우면 내 앞에서 죽어야 돼.’ 그거거든요. 이것은 인간이 타고 났습니다. 교회를 백년 다니고 성화되었다고 해서 소용없어요. 모든 인간은 죽을 때까지 이것을 유지하고 있어요. 이것, 고칠 생각을 하지 마세요. 이걸 안고치기 때문에 주님한테 유용한 겁니다. 제 말 잘 음미하셔야 합니다.

이걸 고치지 마세요. 이걸 안 고쳐 줘야 이것이 천국을 보여주는데 멋들어지게 이 성질이 활용될 수가 있어요. 우리는 끝까지 나만 챙겨야 됩니다. 오늘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말도 안 되는!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하는데 자기부인이 아니라 우리는 끝까지 자기 잘난 맛에만 살아가는 그것을 고수를 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라야 쓸데 있느니라.” 천국이라 하는 것은, 덕수궁 안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만 돋보이는 곳입니다. 우리가 생각했던 덕수궁 바깥에서의 천국은 주님도 돋보이고 나도 돋보이고, 양쪽 다 돋보여서 둘 다 자존심이 사는 그런 세계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줄곧 죄인 되고 주님은 늘 우리를 용서하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남는 세계, 그 세계를 인간은 타고난 성격으로는 동참되지를 못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왜?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너무 너무 속상해서. 신앙 없는 사람들이 짜증내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신앙이 없는데 네가 왜 신앙이 있느냐.’고 짜증을 내는 겁니다.

복음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짜증을 많이 내는데 왜 그런가, ‘내가 모르는 복음을 네가 왜 알고 있느냐.’ 그 말이에요. 또 아는 것 까지는 좋아요. ‘나는 그 복음이 뭔지는 알지만 안 믿는데, 그리고 좋아하지도 않는데 너는 내가 싫어하는 복음을 왜 좋아하는데? 정말 밉다, 미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럴 때는 또 우리가 복음 안다고 눈치 없이 툭툭 한소리씩 하지요. ‘그것은 내가 십자가 앞에서 죄인이거든.’ 그런데 그 말로 인해서 상대방이 약이 더 오릅니다. ‘나는 내가 죄인인 것을 인정 못하겠는데, 나는 항상 내 잘난 맛에 살아가는데 너는 나하고 똑같은 인간주제에 뭔데 왜 건방지게 네가 죄인인 것을 아느냐.’ 이래서 또 짜증을 내네요.

그래서 더 웃기는 이야기를 합니다. ‘네가 죄인 되어서 더 잘났나?’ 이런 소리를 해요. 그것을 글로 한번 적어보세요. ‘네가 죄인 되어서 네가 잘났나?’ 그런 말을 하는 인간은 뭐냐, ‘나는 나를 잘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죄인이구나.’ 이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더 이상 어려운 말은 하지 맙시다. 하여튼 이겁니다. 덕수궁 안에는 안 들어가고 돌담길에서 구경이나 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 ‘나는 잘났어. 나는 잘났어.’ 하면서 자기가 잘난 입장에서 ‘천국이 뭘까?’ 호기심을 가지고 서성대고 기웃거리고 있는 거예요. ‘들어갈까 말까, 들어갈까 말까?’ 아직도 자기는 잘났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뿐만이 아니고 우리들도 내가 잘났다고 하는 죄인 중에 괴수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천하에 잘났다고 하는 우리를 강제로 멱살 쥐고 천국 안으로 집어 넣어버리니까 정말 내 스스로 잘났다고 우기는 이것이 나를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는 정말 못난 짓이 되는 거예요. 정말 있을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짓, 하나님이 안보이니까 서로 서로 잘났다고 우겼지만 막상 하나님 앞에 딱 서니까 그동안 내 위주로 살았고 나밖에 모르는 이 고치지도 못할 성격, 안 고쳐지는 이 성격을 지닌 이 자체가 주님 앞에 정말 못난 죄인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세우신 거예요. ‘너는 내 앞에서 나는 의사가 되어야 되고’, 의사란 고쳐주는 자잖아요, ‘나는 누구를 고쳐주는 의사가 되어야 하고 너는 내 앞에서 고침을 받아야 될 환자가 되어야 된다. 왜? 너는 환자 맞으니까.’ 그리고 하는 말이 “나는 의인을 부르러 완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해서 그 환자가 단순히 몸이 아픈 환자가 아니고 인생이 꼬인 환자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어 마땅한 저주받아야 될 죄인이라는 의미에서 환자라는 겁니다.

지금까지 죽 이야기를 했는데 차가 밀리는지 아직 도착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어서 설교의 핵심이 자꾸 지연되고 있어요. 이해해 주세요. “그러면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이목사 당신의 주장에 의하면 ‘인간이라 하는 것은 본래는 가치가 없고 하나님 앞에 쓰이는 그것을 인간은 가치 있다.’ 결국 그 말이지?”라고 저한테 물을 거예요. 딩동! 맞아요. 그 말이에요.

제가 구약성경을 죽 보게 되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나와요. 그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될 집합입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 될 사람들의 집합이에요. 그걸 전에도 제가 알고 있었지만 새삼 그걸 보고 화들짝 제가 놀랍니다. 인간은 태어나면 자기가 자기한테만 헌신하지 누구에게 헌신하는 법이 없거든요.

누구에게 헌신하는 법이 없는 인간인데 하나님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가지고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 헌신할 입장이 못돼. 네가 만들어진 목적과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께 헌신하라고 만들어진 집단이야.’라는 것이 네 자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인간들은 어떻게 교육받고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나의 인형입니다. 애가 놀면 그것은 꼬마인형이에요. 꼬마인형 하면 생각나지요. 최 진영이 부른 꼬마인형, 전부다 인간은 인형입니다. 인형은 혼자서도 잘 놀아요. 그래서 우리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요새 젊은 분들이 시집 장가가기 힘든 이유가 혼자서도 잘 놀기 때문에 그래요. 왜? 자기가 인형이기 때문에.

바비인형, 이 옷 입혔다가 또 다른 옷 입히고 자기가 자기한테 이야기해가면서 혼자서도 잘 놀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 만날 때는 그 본색, 죄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너는 네가 평생 만든 인형 갖고 나오고 나는 내가 평생 갖고 나온 인형을 가지고 나와요. 나는 50된 인형을 가지고 있고 저쪽이 60대라면 60된 인형을 들고 나와요.

그래서 ‘고개 숙여. 주민증 까라. 내 나이 지금 60인데 네가 50이면 나한테 굴복해.’ 각자 만든 인형을 가지고 옵니다. 인형이 맘에 안 들면 견적내서 수술하고 턱뼈도 깎고, 사람들은 전부 다 ‘나’라는, 자아라는 인형만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니까 이 두 인형이 만나서 부부가 될 리가 있습니까? ‘내 인형 예쁘다.’ 할 때까지만 살다가 어느새 내 인형에 관심 없으면 갈라서는 거예요.

왜? 어떤 경우에도 내 인형 다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마귀가 인간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네가 선악과 따먹으면 독자적으로 너는 하나님이 될 수 있다.’ 독자적으로 절대자가 될 수 있으니까 절대적으로 나만의 인형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뒤따라오는 주님의 뜻은 ‘너희들은 말려들었다. 왜?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너는 죽으리라.’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심어놓은 목적이 뭐냐,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인간을 헌신케 하기 위함입니다. 제가 어렵게 했지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죽음이 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게 한 거예요. 인간은 죽음이 뭔지도 모르고 하나님 되는 것만 좋아했거든요.

인형같이 독자적으로 ‘나’라는 인형만 있으면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는, 내 것 내가 가지고 있다는 그 재미로 살아가는데 하나님의 뒤따라오는 것이 있었어요. ‘그럴 경우에 너는 죽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왔다는 말은 ‘너, 제대로 한번 죽여줄게. 제대로 한 번 죽여줄게.’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한 이스라엘의 특징이 뭐냐,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질문자체가 ‘나라는 인형이 왜 죽어야 하는가? 내가 평생토록 가꾸어온 이 예쁘장한 인형, 이 곱디고운 인형, 애지중지하고 가꾸면서 간직했던 이 인형, 내 자식이라는 인형, 내 딸이라는 인형, 내 남편이라는 인형, 이 인형이 왜 죽어야 하는가?’ 그러면 주께서 ‘내가 죽인다. 왜!’

그러니까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알려면 ‘어떻게 삽니까?’를 질문해서는 안 되고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을 수 있습니까?’ 그 질문을 하는 것부터 인생을 새롭게 출발해야 된다는 거예요. 모든 것이 새로 출발해야 되요. 모든 성경해석도 다 그렇게 출발해야 됩니다. ‘하나님이여, 어떻게 하면 제가 죽을 수 있습니까?’

왜? 우리는 죽기 위해서 헌신해야 될, 죽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헌신해야 될 하나의 도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질문을 이렇게 해야 돼요. ‘어떻게 하면 삽니까.’를 질문하면 안돼요. ‘내가 지금 품고 있는 죽음이 어떤 색깔이고 어떤 모습입니까?’ 그런 질문을 해야 돼요. 죽기 위해서 결혼해야 돼요. 서로 서로 마찬가지로.

그 결혼 생활 행복 안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행복합니다. 남편이 출근하면서 “여보, 오늘도 내가 당신을 위해서 죽을게.” 그러면 아내가 “내가 설거지 하면서 내가 죽어줄게.” 이렇게 하는데 부부싸움이 될 리가 있습니까? “여보, 내가 오늘 출근해서 내가 죽더라도 당신은 좋은 남자 만나서 살아야지.” “아니야, 당신이 내 꼴 보기 싫거든 당신이 좋은 여자 만나.” 이렇게 서로 인사하는데 그게 부부싸움이 될 리가 있습니까?

도저히 우리 입에서 나올 수 없는 그것, 나올 수 있는 것은 가능이거든요, 나올 수 없는 것이 불가능이라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불가능을 집어넣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가?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보면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했습니다. 살려내는 영이라는 말은 우리가 지금 죽어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만 가꿔요. 아침에 눈만 뜨면 자기 가꾸고 잠잘 때도 자기 껴안고 꿈속에서도 자기인형 돌보고 보살피는 꿈을 꾸면서 24시간 항상 자기인형을 자기가 다듬는 것에 몰입하고 올인 합니다.

그래서 그 인형에 누가 때를 묻히거나 손대면 난리가 납니다. 차에 작은 흠집만 나도 차 세워놓고 싸우잖아요. 어제 이 앞 도로가 막혔어요. 팔공산 내려가는 도로가 그렇게 붐비는데 자동차 사고 나서 차 부딪힌 채로 도로 한복판에 세워놓고 둘이 따지고 있어요. 그 차가 자기 몸이 아닌데 왜 그렇게 신경 씁니까? 차가 자기 인형이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신경 쓰는 인형이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스치기만 해도 인연이라 해서 다 뜻이 있다고 했잖아요. 요즘은 스치면 시비입니다. 그게 시비 거는 것으로 보여요. ‘왜 내 인형 옷을 건드리냐.’ 그 말입니다. 부모들이 자식들을 인형으로 키웠기 때문에 자식들도 어릴 때부터 부모 이용하는 것밖에 모르지요. 부모한테 헌신한다는 것이 없습니다.

헌신하는 것을 배운 적도 없고 그렇게 가르친 적도 없고 애는 그렇게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태생이 자기밖에 모르는데다가 엎친 데 덮친 식이라, 불난데 기름을 붓는 격이에요. 부모가 아무리 도와줘도 잘된 것은 자기가 훌륭해서 잘되었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그 인형 만들기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 그것을 몰라요. 그렇게 만들면 만들수록 점점 더 죽음 으로 가까이 가는 거예요. 결국 죽을 때는 ‘나를 왜 죽이나.’ 하고 죽어버려요.

주님께서 의사가 되시고 우리는 환자가 되어서 주님이 우리를 치료하는데, 치료라 하는 것은 건강한 사람을 만든다는 목적이 있잖아요. 의사가 ‘당신 병은 이런 병이니까 내 치료를 받으면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 건강의 모델이 뭐냐, 어떤 상태를 가지고 건강이라고 하느냐? 어떤 상태를 가지고 온전해졌다고 할 수 있느냐?

그게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 사랑입니다. 그러면 사랑이 어느 정도 되느냐 하면, “빨리 죽고 싶어요.” “왜?” “사랑하는 주님이 보고 싶어서.” 얼마나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신했으면 내가 지금 이 땅에 사는 것이 궁금증이 없어요. 이 땅에 대해서 아무 궁금한 것이 없어요. 사는 것 자체가 뭔가 이제는 싫어. 빨리 죽어서 사랑하는 주님을 어서 보고 싶을 정도로 주님이 살아 있다는 것이 확신돼요. 그 상태가 될 때 그 사람을 가지고 ‘건강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로마서 5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주사 한 방 놔주고 약 조제해 주면서 ‘식후 30분에 약 먹어라. 그러면 낫는다.’ 하면 될 텐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하느냐?

본문을 봅시다. 5장 30절에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여기에 ‘함께’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인과 함께 하시는 의인이신 주님, 주님은 의인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과 함께 하셔서 천국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함께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함께 했다는 그 이유 때문에 어떻게 우리가 구원을 받느냐? 그것이 알고 싶다. 그것이 신기하다. 어떻게 그러한가? 그 함께 하심을 로마서 5장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함께 했다는 것이 약 몇 봉지 쥐어주고 주사 한 방 놔주고 ‘기도하세요, 전도하세요.’ 이게 함께 하심이 아니라 ‘너의 죽음이라는 병은 어느 정도로 지독한지 내가 너를 위해서 피 흘리지 아니하면 너는 천국에 못갈 정도로 지독한 난치병이 걸려 있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함께’가 성립되려면 우리가 저주받고 진노 받아 마땅한 인간으로 함께 있는 것이고 우리 옆에 있는 함께 계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피를 제공하시는 분으로서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덕수궁 안, 천국안의 사정입니다. 이것 외에 다른 식으로 천국 가는 방식도 없고 구원받는 방식도 없어요.

제가 목사가 되어서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더 이상 사람들을 속이기 싫어서 그래요. 대중들 속이고 관중들 속여가면서 목사로서 밥 먹고 살기가 싫다, 그 말입니다. 육에서 영으로 전환되어서 구원받고 천국 가는데 문제는 교회들이 육에서 영으로 옮겨가는 방법이 없으니까 그냥 육에서 육으로만 가는 방법으로 목사들이 높은 강단에 서서 수백, 수천, 수십만을 속이고 있어요.

‘이렇게 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자꾸 속이고 있어요. 속이는데 어떻게 속이느냐,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하시면’이라고 속이는 거예요. ‘여러분 하기 나름에 따라서 구원되기도 하고 구원 안 되기도 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저는 더 이상 그런 사기를 치지를 못하겠다 그 말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해서 구원된다.’는 그것은 없는 거예요.

그냥 저주받는 인간으로 피 흘리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 돼요. 함께 있으면 누가 해주는가, 여러분 곁에 있는 주님이 여러분에게 해 줘서 여러분이 구원되는 겁니다. 전도하고 선교하고 헌금하고 기도해서 구원되지를 않아요. 예배드린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사람이 목사 된다고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에요.

지난 목요일에 비는 떨어지는데 등산 간다고 황간에 갔어요. 그 산에 달도 머문다고 해서 월류봉인데 거기 올라가면 한반도 모양이 보인답니다. 제가 등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점심을 먹게 되었어요. 식당에서 우리 일행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 식당에 있던 한 분이 “목사님 되십니까? 참 수고 많지요?” 그래서 제가 무심코 “부끄럽습니다.” 했어요. “아니 목사님인데 왜 부끄럽습니까?” “구원은 주님이 했는데 목사가 대접받으니까 제가 부끄럽습니다.” 했어요. 제 입에서 어떻게 그런 놀라운 고백이 나왔는지.

주님이 피 흘렸는데 저는 피 흘린 적이 없거든요. 저는 설거지 하다가 피보고 그런 것밖에 없는데, 설거지도 자주 하는 것도 아닙니다만 하여튼 주님이 피 흘려서 저주받은 사람을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한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제가 지어낸 약속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행동하셔서 구원시켜 주는 겁니다.

목사가 목사 질 한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에요. 목사나 집사나 관계없어요. 일반 평신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입장입니다. 주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고 주께서 피를 주지 아니하시면 아무리 교회 충성봉사하고 땅 바치고 집 바쳐서 예배당 세워도 지옥 갑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우리교회에서 거의 9년간 계속 했어요.

왜 나갑니까? 왜 나갔어요? 이 소리가 안 들리는 곳으로 갔어요. 결국 뭡니까? ‘목사님, 우리는 진실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고 우리는 거짓말이 듣고 싶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거짓말을 듣고 싶어 하는 거예요. ‘이렇게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실제로 기도해서 잘 되었습니다. 이렇게 목사 섬기면 잘됩니다. 실제로 내 자식이 이렇게 잘되었습니다.’ 그런 거짓말이 듣고 싶은 거예요.

그게 왜 거짓말이냐, 문제자체가 ‘하나님이여, 저는 왜 죽어야 됩니까?’ 죽음을 가지고 문제를 삼아야 될 것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내 딸이 살고 내 아들이 살고, 자꾸 사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까, 그게 목사 입에서 안 나오니까. ‘어떻게 기도하면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전도하면 살 수 있습니까? 어떻게 헌금하면 복 받아서 잘 됩니까?’ 전부 다 사는 이야기만 자꾸 해달라고 하기 때문에 저는 더 이상 거짓말로 사기를 칠 수 없는 거예요.

그런 사기꾼들은 많이 있습니다. 이 밑에도 있고 많이 있어요. ‘목적으로 이끄는 삶.’ 얼마나 좋아요. ‘하면 된다.’ 그 말 아닙니까? ‘I can do, 나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로 하여금 ‘너는 안 돼. 왜? 너는 저주받아야 마땅한데 저주받는 인간이 뭘 해?’라는 식으로 그쪽으로 몰아가요. 자꾸 깎아버려요. 자꾸 깎아서 우리 인형을 완전히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버려요.

여러분, 정육점에 있는 살점 보세요. 전기톱으로 고깃살을 잘라보면 그것이 살점으로 보이지만 나중에 국 끓어보면 다 깨지잖아요.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늘 난도질을 해버립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는 명절 되면 도마 위에 고기 놓고 다다다다, 칼질을 하지요. 요즘에는 연세 많아서 못하시지만 옛날에는 얼마나 빠른 솜씨로 잘했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안 된다니까, 안 된다니까, 안 된다니까.’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덕수궁 돌담만 구경하는 사람은 ‘안 되면 그러면 우리는 뭐 하란 말인가? 하지 말란 말인가, 하지 말란 말인가, 하지 말란 말인가?’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죠. “당신은 당신을 보는 것을 당신을 인형 만들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예쁜 인형 만듭니까?’라는 쪽으로 보지만 ‘하나님의 관점은 왜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까?’ 그런 관점에서 너 자신을 치료 받아야 될 환자로서, 살려내야 될 죽은 자요 저주받을 자로서 십자가앞에 세우는 거예요.

예전에 대구에서 안동으로 출퇴근할 때 일입니다. 꼭 건장한 사내 둘이 올라와서 “자, 공짜로 금장시계를 드리겠습니다. 이제 번호표를 나눠드리겠습니다.” 번호표를 죽 나눠주고서는 “자, 지금 호명하는 분들은 공짜로 50만 원짜리 금장시계를 받게 되겠습니다. 7번, 14번, 28번 당첨되었습니다. 시계 드리겠습니다. 공짜입니다. 받으세요.” 그러면 촌의 아주머니들이 “공짜입니까?” “예, 공짜입니다. 그냥 드립니다.” “너무 미안해서…….” “괜찮습니다. 지금 선전기간인데 당첨되었습니다. 그런데 다 공짜인데 세금만 돈 3만원 내셔야 됩니다.”

그렇게 사기 치는 것을 본 기억이 있어요. 저는 그것은 안속아 넘어갔고 다른 것 속았습니다만 이게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 부흥시키는 방법이에요. 아무것도 안 해도 구원받으면 교인들은 헌금도 안할 것이고 교회 말아먹고 문 닫기 십상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목사 밥 먹고 살기는 글렀잖아요.

만약에 제가 지금 5천명쯤 모이는 교회 당회장이 되었다 합시다. 이 복음 설교 해보세요. 석 달 지나면 한 10명 남아요. 그러면 그 장로님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교회 전기세는 누가 냅니까? ‘당신 하나 때문에 교회 말아먹었다.’ 하지 않겠어요. 그 전에 이미 저는 잘려나가겠지요. 어느 신학교출신이냐고 또 따져 물을 것이고.

우리가 얼마나 평소에 길이요, 진리, 진리 되시는 예수님 말씀보다도, 덕수궁 안에 들어가는 것보다도 그 바깥의 남 교회 엉터리로 하는 그것 험담하면서 그걸로 즐거워하면서 ‘나는 역시 잘났어. 나는 방귀뀌어도 되는데 너는 안 돼.’ 이런 식으로 얼마나 자기 옹호하는 식으로 살아왔습니까? 그러면 그것은 계속 덕수궁 돌담길 뱅뱅 도는 것밖에 안돼요.

주께서 함께 하시면 우린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되면 꼬마인형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여, 오늘도 주님을 위해서 이런 헌신과 희생을 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몸을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저는 죄인이요 죽을 자로 바치겠사오니 주께서 어떤 식으로 살린다는 사실을 내 몸을 통해서 빛나게 하옵소서. 주님이 빛나게 하옵소서.’

그것을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죄인이 되어서 의인되시는 주님을 증거 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 참된 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사 저주받아야 될 인간에게 뭘 요구하지를 않아요. 저주받은 인간이 해봐야 죄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어떤 집사님들이 복음 전하면서 ‘기도해도 죄고 설교해도 죄입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그쪽에서 하는 말이 ‘어떻게 기도한 게 죄가 되고 설교한 것이 죄가 되느냐?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답답해서 ‘십자가 앞에 서면 다 죄인이다.’ 이렇게 깨달은 대로 이야기를 하니까 그쪽에서 하는 말이 약이 올라서 ‘십자가 앞에 너만 섰나? 나도 십자가 앞에 섰다.’ 자기가 선 십자가는 덕수궁 출입구 구경하는 거예요. ‘이게 출입구인데 여기 들어가시면 구원받습니다.’ 말은 하면서도 자기도 안 들어가고 들어가는 사람도 다 막아버리고 자기는 덕수궁 돌담길만 뱅뱅 돌면서 사기 치면서 돈벌이하는 목사, 장로, 집사들, 평교인들, 그들은 오늘도 자기육체의 욕망이 원하는, ‘하면 복 받는다.’는 그 소리만 들려오기만을 고대하는 겁니다.

‘헌신하면 복 받겠습니까, 낮추면 복 받겠습니까, 성경 읽으면 복 받겠습니까?’ 이렇게 지금보다 더 예쁜 인형, 남에게 꿇리지 않는 인형,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인형, 그 인형이 오늘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이 말씀으로 토막 나시기 바랍니다.

다 토막 나서 ‘죄인 여기 있습니다.’라고 달려가서 이제 그리스도께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거짓말만 원하고 사기 쳐도 좋으니까 우리에게 소망과 희망을 달라고 부르짖는 그 대중들에게 더 이상 저희들이 거짓말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고 그 다음에 심판이 있는데 심판에서 면제되는 것이 진정 사는 것이고 안 죽는 것이 안 죽는 것이 아님을 저희들이 깨달아서 살든지 죽든지 우리가 주의 것으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