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5. 4. 21:19

낡은 옷과 새 포도주 (누가복음 5:34-39)

낡은 옷과 새 포도주

2010년 5월 2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5:34-39

(눅 5:34, 개정)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눅 5:35, 개정)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그들이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눅 5:36, 개정)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눅 5:37, 개정)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눅 5:38, 개정)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눅 5:39, 개정)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해하는 내용, 즉 천국이 얼마나 멋있는 곳이냐에 대해서 언급을 하셔야 할텐데 예수님은 거기에 관한 내용보다는, 헌 옷, 새 옷, 묵은 포도주, 새 포도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천국이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지 아니하면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신을 바꾸기 위해 아무리 거울을 들여다 보아도 그런한 것은 자기 가꾸기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마치 인형처럼 자신을 자꿉니다. 하지만 인형을 뜯어보세요. 거기에는 스프링이나 태엽이나 헌조각이나 솜같은 것들이 들어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늘 가꾸지만 의사들 눈에는 그냥 육질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누가 제대로 실제를 보고 있는 겁니까? 의사들입니다. 인간의 내부를 따게보면 그 안에 육질의 부속품만 잔뜩 들어있을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사회에 나가보면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꾸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하지만 그 어떤 분야든 그 분야의 대가들이 따로 있습니다. 도저히 보통 정신으로는 따라붙일 수도 없는 재주꾼과 노력꾼들이 상주해있습니다. 등산이나 낚시나 사업이나 그 어떤 방면에서는 평생을 그것을 위해 몸 바친 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사람이란 대상을 누구로 고르냐에 따라 자신을 정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들 라이벌을 염두에 둔다면 기껏 인간의 힘으로 따라붙이다가 평생을 다 보내게 됩니다. 자신이 부러워하고 존경하는 인간도 결국 죽음 밑에서 다 고꾸라집니다. 천하의 미인도 죄와 죽음의 힘에 굴복하게 마련입니다. 죽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는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변화산 이야기가 성경에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도 해같이 빛나고 엘리야, 모세도 거기서 사십니다. 아무리 넓고 좋은 집이라고 할지라도 변화산 정상보다 못합니다. 아예 집조차 필요치 않을 정도로 그 천국은 좋은 곳입니다. 이처럼 새로운 피조물이란 오직 예수님만을 자신을 아는 대상체로 삼는 자입니다.

세상에 있는 같은 인간들끼리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 유일하게 예수님 앞에 자신을 세우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피조물이란 딴게 아니라 자신을 ‘탕자’로 보는 자입니다. 스스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는 자로 보는 겁니다. 바로 이런 탕자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옛것과 새것을 대비하시면서 신랑을 중심에 둡니다. 이것은 곧 신랑의 등장으로 인해서만 옛것과 새것이 구분됨을 받아들이는 자가 진정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겁니다. 옛것에 속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등장 앞에서 자신을 내세우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모습만 고려하고 염두에 둘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는 겁니다. 그들은 그 방면에서 최고봉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성경대로 그대로 살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자기쪽에서 자신을 변화시켜 천국으로 밀어붙이려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바리새인들 앞에서 예수님은 보란 듯이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금식의 의미란, “나 부족합니다. 나 죄인입니다. 나 불실한 것이 많습니다. 따라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라는 뜻에서 하는 겁니다. 대단히 겸손해보이지만 이들의 잘못은 자기 앞에 금식하고 있는 자신을 세운 것에 있었습니다. 신랑으로 오신 예수님의 등장 자체에서 은 기쁨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취지는 이러합니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나를 대상으로 세우게 되면 모두 죄인으로, 탕자로 정립된다는 겁니다. 이 점을 기준점으로 하여 새로운 피조물과 아닌 자를 구분짓게다 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찢어짐’, ‘터뜨림’, 같은 표현은 옛것과 새것이 화합이 안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옛것을 용납하지 않는 채 새로움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새것은 옛것과 전혀 타협할 의사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로서 새것은 옛것을 버리고 받든지 아니면 옛 것을 그대로 고수하든지 해야지, 옛것 속에 새것을 섞어넣으려고 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옛것은 무엇이며 새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들이 잘 압니다. 예수님의 등장 앞에 자신을 세우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생각하며 사는 것이 곧 옛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 등장 앞에 자신을 세우면서 살아가는 자들이 새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9-12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여기서 누구와 누구를 대비시키느냐 하면,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사람을 기쁘게 하는 복음을 대비시킵니다. 즉 예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특징은 결코 ‘사람을 기쁘게 하는 내용이 아니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누구를 기쁘게 하는 겁니까? 여기서 이제 문제가 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전혀 사람은 복음에 대해서 기뻐해서는 아니된다 는 말인가 라는 문제가 거론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러합니까? 고린도후서 1:19-20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우리의 행함은 모든 것이 “아니오”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실으시고 천국으로 달려가고 있고 우리는 오로지 그 예수님만 쳐다보고 탕자로서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이러한 동일한 방향성이 곧 새로운 피조물의 특징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내세우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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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강-눅5장34-39(낡은 옷과 새 포도주)-luk100502

2010-05-03 12:20:27   이름 : 오용익  

 
026강-눅5장34-39(낡은 옷과 새 포도주)-luk10050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5장 34절에서 39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5:34-3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그러나 그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예수님은 천국에서 오셨습니다. 천국에서 오게 되면 ‘천국은 이렇게 살기 좋다. 천국은 걱정 근심 없이도 산다. 천국은 기온도 섭씨 20도를 유지하고 있다. 습도도 아주 쾌적하다.’ 이렇게 우리가 흔쾌히 빠질만한 내용으로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면 ‘아, 그 좋은 세상에 가고 싶다.’ 하게 되겠지요.

사실은 모든 종교가 다 그래요. 꾀이는 것이지요. ‘죽어서 좋은데 갈 수 있으니까 살아 있을 때 잘해라.’ 이렇게 하고 ‘죽어서 좋은데 가기 싫거든 살아 있을 때 아주 개판으로 살든지 멋대로 하고 만약에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거든 정신 바짝 차리고 살아라.’ 하는 이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협박 공갈에 겁이 나서라도 종교에 몰입하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천국에서 사셨고 그 천국에서 오셨다면 우리가 혹할 수밖에 없고 당기는 요소를 줘야 우리 가슴에 와 닿는데 오늘 이야기가 신랑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헌 옷 조각 이야기하고 새 옷 이야기하고 부대에 담는 포도주 이야기하고 부대이야기를 하고, 그런 식으로 예수님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뭐냐, 사람이 바뀌지 아니하면 아무리 천국이 좋다 할지라도 받아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바뀌었다, 안 바뀌었다, 그 기준은 뭘 로 알 수 있느냐, 신랑에 대해서 기뻐하고 신랑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면 바뀐 사람이고 ‘저는 그런 신랑 주문한 적 없습니다. 그런 신랑을 나는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고 신랑의 존재가 있으나 마나 해버리면 그 사람은 안 바뀐 사람이 되는 겁니다.

신랑이란 결혼식에서 주인공이 되겠지요. 신랑이 왔다, 그러면 결혼식은 주인공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오늘 윤 ○○님 예배 마치고 결혼식장에 가신다고 양복으로 쫙 빼입고 오셨는데, 만약에 결혼식장에서 전부다 신랑한테 박수치고 신랑과 사진 찍고 분주한데 간만에 양복입고 왔는데도 안 알아줄 때 약간 기분 나쁘려 하겠지요.

사람은 인형처럼 자기를 다듬으며 살아갑니다. ‘나’를 천국에 넣어줘야 천국답다는 거예요. 양복 입는 나, 그 ‘나’를 구원해야 하나님답다는 거예요. 이것은 신랑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이에요. 사람들은 인형같이 자기를 꾸미는데 인형을 뜯어보세요. 그 안에 스프링 들어 있고 천 조각 들어 있습니다. 기계적인 작동이 되도록 태엽이 감겨 있어요.

책상 위에 있는 인형을 바닥에 탁 내쳐서 깨버리면 한 순간에 그 안에 들어 있는 나사, 태엽, 스프링 다 튀어 나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의사들이 더 잘 알지요. 아주 고상한 체 하지만 째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들이 치질 걸리면 부끄러워서 병원에 못가겠다고 하는데 의사는 여자로 보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의 육질? 고깃덩어리?

누가 제대로 현실을 보는 사람인지, 자기 자신을 곱다고 우기는 사람이 자기 현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노골적으로 ‘진짜 쪼개봅시다. 당신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천 조각인지 스프링인지 뭐가 들어 있는지 봅시다. 아니면 뼈 조각이 들어 있는지 쪼개봅시다.’라는 쪽이 너무 솔직한 것인지, 너무 현실을 제대로 보는 것인지, 어느 쪽인가요?

천국에 계셨던 주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는 우리의 말을 듣지를 않습니다. 우리의 요구사항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지난시간에 했습니다. 예수님이 의사로 왔다는 것은 우리를 처음부터 환자로 보겠다는 겁니다. 안 고치면 죽는 환자, 주님께서 손 안대주면 끝까지 환자로 살다가 환자로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환자, 이것이 천국에서 우리를 보고 있는 안목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사람이 대상이 없으면 자기가 정립이 안 된다.’고 했어요. 사람이 나와 비교할 대상을 설정하지 않으면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자기가 맨 날 거울 앞에서 서도 늘 상 보는 자기 모습입니다. ‘나는 항상 훌륭하다. 예쁘다.’ 하는데 가끔은 일반인들이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만나면 놀란다고 하잖아요. 저렇게 얼굴이 조그맣고 예쁜 줄 몰랐다는 거지요.

TV로 맨 날 볼 때는 비교대상이 안되다가 막상 보게 되면 ‘아, 난 인물도 아니구나.’ 하고 안다는 겁니다. 사람이 비교대상을 누구를 자기 앞에 세우냐에 따라서 진짜 자기모습에 가까이 가느냐, 아니면 멀찍이 떨어져 사느냐가 결정되는 겁니다. 진짜 자기 모습.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다고요? 그러면 천국에서 오신 분 앞에 우리 자신을 세우세요.

같은 인간들끼리 같은 인형이라고 우겨대는 그 인간들끼리 비교하지 말고요. 누구를 비교대상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본인의 진솔한 면이 깨끗하게 다 드러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신랑 동원시키고 그 다음에 헌 옷 조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여기서 신랑과 헌 옷 조각과 새 포도주 이런 것을 조립해서 어떤 결론에 도달해야 되느냐 하면 ‘우리가 사람 안 바뀌면 천국에 못 가는구나.’ 하는 결론을 끄집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아, 내가 바뀌어야 되는구나. 나 혼자 잘났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구나. 내가 죽어서 좋은데 가겠다고 요청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우선 내 자신부터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대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놈입니까, 라고 자기 정립이 우선되어야 하는구나.’라는 결론에 도달해야 됩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이사를 했다고 해서 입주예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변화 산 이야기를 했어요. 저는 좋은 일 있다고 해서 부르면 초치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넓은 아파트에 이사를 했으니 기분이 좋았지요. 목사를 모시고 예배를 하는데 본문을 마태복음 17장의 변화산 이야기를 뽑아서 했습니다.

‘세상의 집이 좋다, 좋다.’ 해도 변화 산에서 예수님이 엘리야와 모세와 함께 등장했던 해같이 빛나는 그 집보다 더 좋은 집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요. 비교대상을 전에 살던 초라한 집 또는 다른 사람들이 사는 집, 도곡동의 삼성아파트 이런 것들과 비교하지 말고 진짜 제대로 비교하려면 예수님이 살던 변화 산 그 집과 우리 집을 비교해 보자 그 말입니다.

그 집은 사람들마다 해같이 빛나요. 직장에서 피곤에 절은 모습으로 초인종 딩동, 하고 그 집에 문 열고 들어가면 무조건 해같이 빛나요. 베드로는 그 변화 산에 올라가서 얼마나 좋았던지 ‘집이 필요 없는 집입니다.’라는 고백을 했어요. ‘여기가 좋사오니 제가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라고 한 거예요. 그 말은 ‘우리는 거적을 덮어도 괜찮습니다.’ 한 거예요.

‘그냥 가마니 깔고, 아니 그것마저 없어도 우리 주님하고 모세와 엘리야 세분만 있어도 좋습니다. 저는 그 조명발, 해같이 빛나는 그것만으로 여기서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이 변화 산 이야기를 왜 했겠습니까? 사람들이 비교할 대상을 자꾸 주변에서 찾아요. 교회 와서도 ‘내가 인생을 평생 어떻게 살았지?’하고 옆에 있는 분들하고 비교를 해요. 그런 것은 스스로 아쉬움과 자괴감만 남깁니다.

그러지 말고 예수님이 사신다는, 예수님이 주신다는 그 천국과 비교해 보세요. 그러면 어떤 사람이 되느냐, 세상의 넓은 아파트 도곡동에 있는 그 삼성아파트 보다 더 좋은 집이 바로 우리의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은 사람의 능력으로 알 수 없는 것을 갖게 된 능력자입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서는 우리는 천국에 못갑니다. 보통사람들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에 종사하고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국은 물 건너갔습니다. 남는 것은 지옥밖에 남지 않아요. 사람이 차마 못하는 것, 도저히 할 수 없는 것, 아무리 해도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바로 변화 산의 집이 내 집보다 더 좋다는 것을 알아서 눈치 채는 그 일, 그게 바로 천국에 들어갈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우리 주님께서 천국을 만들어 놓으시고 거기에 들어갈 사람을 모집할 때 보통 사람들 뽑아서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 뽑는 게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다 해?’라고 하늘나라에서 감탄이 늘어지는 그런 사람만 골라, 골라 뽑아서 천국에 보내줍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대표적인 사람이 탕자에요. 아버지의 재산 다 날리고 기생과 더불어 허랑방탕 다 해놓고 보통 사람은 자살이라도 할 수 있는데 뻔뻔스럽게도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그 일, 그리고 자기를 탕자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일, 그 일이 사람의 힘으로 될 성 싶습니까? 보통 사람들은 맨 날 자기인형 꾸미는 일에 정성 다하고 진력을 다 하는데, 자기 몸에서 스프링 뽑아내고 천 조각 다 흩어놓고 매일 같이 자기를 분해해서 말씀 앞에 산산조각 다 끄집어내서 ‘주여, 저 탕자입니다.’라고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사람, 그게 인간의 힘으로 가능할까요?

지난 이틀 동안에 TV에서 방영하는 이 휘소 박사 이야기를 다 봤어요. 세계적인 물리학자입니다. 전자기력과 약력이라는 것이 있어요. 아인슈타인이 통일장이론에서 실패했는데 모든 우주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 실패한 그 이론을 후배 과학자들이 채워나가는 거예요. 전 세계의 모든 힘을 하나로 모으는 그 작업의 선두주자가 이 휘소 박사였습니다.

그 사람이 수학과 물리학 우주의 힘에 대해서 인간으로서는 최첨단을 걸으면서 노벨물리학상 감으로 최고였는데 평소에 ‘내가 왜 죽어야 될 인간인가?’ 하는 것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수학은 잘하고 인간이 할 수 있는 물리학은 잘해요. 그러나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그 사람은 해내지를 못했습니다.

똑똑한 내 머리 쪼개버리면 거기는 물컹한 것의 구조밖에는 나오지 않아요. 분자현미경으로 아무리 들여다봐도 ‘내가 왜 죄인이며 내가 왜 죽어야 되며 왜 사람은 힘들게 인생을 살아가는지 왜 이 세상이 지옥인지’에 대한 해답이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맨 날 자기가 자기를 쳐다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상, 누구 앞에 날 세우느냐의 그 대상을 잘못 고른 거예요.

아인슈타인, 세계적인 물리학자를 대상으로 삼고 ‘내가 따라 붙을 테니까 너는 기다려라.’ 이런 식으로 아인슈타인을 자기대상으로 삼고 아인슈타인에 준하는 대 물리학자가 되고 싶어 했던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의 구세주가 아닙니다. 그분은 천국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사람들의 비극, 불행은 죽어서 비극이 아니고 죽어서 불행이 아닙니다. 천국과 무관한 일에 종사한다는 것이 불행이에요. 말씀과 상관없는, 말씀 앞에 자기를 세우지 못하는 그 일에 24시간 매진하고 있다는 그것이 눈물의 씨앗이고 불행의 씨앗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은 ‘제발 너희들끼리 비교하지 말고 꼭 내가 보낸 하나님 앞에서 너의 진짜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세워보라고 우리에게 보내주신 거예요.

제가 짧은 인생이지만 살아보니까 어느 분야에도 반드시 도사가 있습니다. 등산 좀 한다고요? 팔공산 정복했다고요? 오 은선 대장 앞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마세요. 어디서 그 앞에서 등산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낚시요? 낚시 도사들 많습니다. 오토바이 타는 사람들이요? 오토바이에 대해서 귀신들 많고 오디오 마니아들 독일 가서 오디오 부속 들여오는 사람들 많습니다. 클래식음악 하는 사람들, 정명훈 같은 사람들 수두룩합니다. 바둑? 이 세돌 앞에서 바둑을 논하지 마세요.

어느 분야에서 내가 어떤 목표를 잡는다, 그 목표 잡아봐야 그 목표하는 분야에 도사들 다 있고요, 도사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하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해야 기껏 흉내나 낼 지경 됩니다. 어느 특수 분야에서 잘한다, 그 말은 그 사람 불행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 하나 얻기 위해서 다른 것 다 포기했습니다. 오 은선 대장은 남편도 자식도 없는 것 같아요. 둘을 가질 수가 없어요. 하나를 가지려면 다른 하나를 버려야 돼요.

그런데 백날 버려봐야 나중에 죽음은 우리보고 ‘네 대단한 물리학 업적을 내는 그 두뇌와 몸까지 내놓아라.’ 해서 죽음이 우리를 가져갑니다. 로마서 5장의 이야기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왕 노릇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왕 밑에 있는 졸개에 불과합니다. 아무리 도망쳐도 우리는 죽음에서 못 도망쳐요.

로마서 5장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리 훌륭해도 죄의 종이 되어서 죄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사람은 죄에서 못 벗어난다.’고 합니다. 등산해서 죄에서 못 벗어납니다. 바둑 두고 낚시하고 물리학을 해서는 죄에서 못 벗어납니다. 우리는 도대체 누구와 비교해야 내 자신의 모습이 드러나는지를 우리 자신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회사 설립해 봐야 그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 따로 있습니다.

본문이 상당히 어려워요.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을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데 핵심은 이미 나와 있어요. ‘인간이 바뀌어져야 한다.’ 그런데 인간을 바꾸어서 천국에 가고자 하는 최고 고수들이 또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바꾸어지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예수님과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했어요. 바리새인보다 더 뛰어나고 반듯하고 거룩하게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최고의 고수중의 고수, 등산으로 치면 오 은선 대장 같은 최고의 고수 그게 바리새인입니다. 바리새인이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헉헉거리면서 근처도 못가지만 그는 최고의 지점에 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인간으로서는 최고의 거룩한 생활을 하는 그 사람과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과 만남의 장, 그 틈새에서 천국은 이런 곳이라는 것이 비로소 우리 눈앞에 펼쳐집니다. 바리새인들이 뭘 했느냐, 금식을 했어요. 그것은 예레미야에 나와 있습니다. 금식하라고 이사야에도 나와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4월말이면 하는 것이 있지요. 고난주간이라 해서 금식하라고 합니다. 저도 다 해봤습니다. 월요일부터 금식 들어가면 금요일 밤만 기다리며 금식합니다. 금요일 밤만 되면 피자 시켜 먹고 싶어서 환장합니다. 그동안 굶었던 것 한꺼번에 다 먹는다고. 왜 금요일 밤에 금식을 그만두느냐, 금요일 밤에 십자가에 죽었기에 애도기간이 끝나는 거예요. 천안 함 장례식 끝나고 토요일부터 다시 방송에서 노래 나오지요. 애도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꼭 바리새인 같아요.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해서 내 힘으로 나를 다른 인간으로 바꿔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가는데 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뭐 하라, 뭐 하라, 뭐 하라.’는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의로운 인간으로 탈바꿈되어서 거룩한, 깨끗한, 속되지 않은 인간이 되어서 천국에 골인한다, 는 이것이 최고 정상에 선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숨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보란 듯이 예수님께서는 자기 제자들을 끌고 ‘어이, 술 가져와라.’ 해서 잔치 집에 술 빠지면 안 되니까 술 마시고 그 금식의 기간, 절기에 날짜와 시간정해서 하는 그 금식기간에 보란 듯이 금식을 안했습니다. 저희들도 보란 듯이 금식을 안 하는 사람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단 누구 앞에서? 금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오늘부터 한 번 시험해보시기 바랍니다. 고난 주일에 놀러 다니시고 고난 주일에 노래 부르시기 바랍니다. 다른 날 하지 마시고.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놓고 폭격을 했지요. ‘다 금식하는데 너는 무슨 통뼈냐? 네가 뭔데 금식 안 해?’ 유대인들은 금식하면서 하는 소리가 있어요. ‘나 부족합니다. 내 탓이오. 나는 죄인입니다.’ 하는 거예요.

얼른 보면 십자가 복음 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나 부족합니다. 나 부족합니다. 나 겸손합니다. 나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이럽니다. ‘까불지 마라.’ 겸손을 가장한 교만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것이 새사람이냐? 겸손 앞에 교만해야 그게 새사람이고 교만 앞에 겸손해야 그게 새사람이에요.

꼭 반대로 살아요. 꼭 반대로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반대로 살아가느냐, 그 방법이 뭐냐를 알려드린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을 보면 돼요. 여러분 자신이 신랑 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기뻐했다면 예수님이 있으나 마나 했던 그 시절이 여러분의 옛사람이었습니다.

옛사람은 내 앞에 나를 정립할 수 있는 기준으로서 예수님을 세우지 않고 내가 하는 일에 나보다 더 똑똑하고 내가 하는 업무에 있어서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을 내 앞에 세워놓고 그것에 대해서 목표를 정해서 따라 붙겠다고 24시간 그 사람을 라이벌로 여기고 따라잡는데 ‘신이시여, 내가 얼마나 겸손하고 얼마나 믿음이 좋은데 저 놈 하나 못 따라붙습니까?’라는 식으로 살아왔던 그것이 옛 생활 옛 인간으로서 교회 왔던 사고방식이에요.

기도원에 가보세요. 기도 도사들 많습니다. 기도 두 시간 하고 내려오지 마세요. 그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거기는 도시락 싸들고 매일같이 출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남도에 가서 창 한다는 소리 하지 말라는 소리가 있어요. 전라도에는 거기 가서 주먹 쓴다는 말, 돈 자랑 하지 말고 인물 좋다 소리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고수들이 다 있어요.

어느 지점에 가도 도저히 내가 못 따라붙을 아주 뛰어나고 숙달된 조교들이 있어요. 그들 앞에 나와서 ‘그래, 너 그렇게 훌륭해라. 나 탕자 할게.’ 이렇게 나오면 그 사람 새사람입니다. 새 사람이라는 조건이 뭐냐, 신랑 때문에 아무것도 필요 없다는 겁니다. 묻거나 따지지 않아요. 완전히 이 순재 보험이에요.

신랑이 왔다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신랑이 있음으로서 우리는 졸지에 탕자가 되고 탕자가 됨으로서 우리는 천국에 가는 사람 되는 거예요. 훌륭한 사람에서 탕자로 바뀌는 것은 내가 탕자 짓을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는 인간을 정립할 때 내 앞에 어떤 대상을 세우느냐, 그 문제입니다.

내 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분을 내 앞에 세워버리면 우리는 안 죽어도 돼요. 살아 있어도 죽은 자가 되니까. 사람은 자기가 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를 꼭 비교하기 위해서 그 그룹에 참여합니다. 국악 하는 사람들 평생을 다 바칩니다. 가정도 돌보지 않고 다 바칩니다.

그런데 국악 하는 사람들이 자기보다 더 인생을 바친 선배들 앞에 가면 기가 팍 죽어버려요. ‘나는 언제쯤 따라 붙나.’ 그런데 천국에 갈 새사람은 따라 붙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 탕자기 때문에. 항상 열심히 해도 제자리에 불과하거든요. 안에는 스프링이 들어 있고 천 조각이 날리는 인형,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죽은 자가 되었으니까 평생을 살아도 죽은 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죽으심 앞에서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아, 나는 날 때부터 죽은 자고 죽을 때 비로소 그것이 그렇다, 하는 것이 표가 나는 구나.’ 애쓰거나 더 열심히 할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앞에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주님이 서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우리교회 사이트에서 올라온 글을 보니 이런 것이 있어요.

누가 썼는지는 모르겠는데 글 중에 ‘이 근호도 더럽고 다 더럽다.’고 써놓았어요. 다른 교회 사이트 같으면 큰일 납니다. 당회장 목사보고 더럽다니. 우리가 자기 앞에 어떤 목표점을 둘 때 예수님을 목표점으로 두게 되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고 가기 때문에 예수님이 당하는 모든 아픔과 고난은 예수님이 자기 행동을 잘못해서 당하는 아픔이 아니고 사실은 그 일을 우리가 저질러놓았는데 우리가 더럽게 저질러놓은 죄 때문에 그 죄를 싣고 앞에 가는 거예요.

5톤 트럭에 우리 죄를 싣고 가니까 우리는 그걸 맨발로 좆아 가는 거예요. 왜, 우리 죄가 거기 있으니까. 그러면 살아갈수록 성화되는 것이 아니고 살아갈수록 우리 죄가 더 풍성해지고 만발하고 아주 오색찬란하지요. 우리 죄가 컬러풀하게 부채 살처럼 펼쳐지는 거예요.

그런데 신랑 되시는 주님께서 그걸 해결하러 우리 신랑으로 오셨다 이 말이죠. 더 이상 그 앞에서는 우리의 대상이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우리 죄를 대신 가져가신 분이 부처도 아니고 공자도 아니에요, 대통령도 아니고 이 근호목사도 아니고 우리 죄를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기 때문에 ‘조오~타!’고 평생을 예수님만 좆아 가는 거예요. 자기는 탕자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뭐라고 하느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맨 날 아침마다 거울 보면 자기 모습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면 무슨 다른 수가 없어요. 내가 나한테 어떤 조치를 취해서 나로 하여금 새사람 만드는 방법 외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만든 조치는 뭐냐, 내 앞에 있는 말씀을 들고 할 수 밖에 없어요. ‘하라’고 하면 그대로 하면 되고 ‘금식하라’고 하면 금식하면 되고 ‘기도하라’고 하면 기도하면 되고 ‘전도하라’고 하면 전도하면 되고 ‘하나님 찬양하라.’고 하면 찬양하면 되고, 기껏 내놓는 것이 ‘행함’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오셔서 제자들에게 ‘행함이냐, 아니면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것을 보고 즐거워하느냐.’ 그 둘을 내놓습니다. 옷 파는 사람이 옷 하나 가지고 입어보라고 하면 절대로 안삽니다. 꼭 옷 두벌을 내놓아요. 사람 약 올리는 것 같아요. ‘이겁니까, 아니면 이겁니까?’ 하고 아예 옷 파는 주인이 질문을 던져요. 답변은 이미 고정되어 있어요.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보다 이것이 나은 것 같은데.’ 그러면 그것을 사야 돼요. 뭘 해도 그래요.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행함이냐, 날 믿을래?’ 그 둘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자기의 목표로 삼지 않으면 예수님보고 ‘비켜라.’ 합니다. ‘예수님은 부담되니까 비키고 나는 내가 나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들어서 그래서 이 든든한 인간을 변화 산 같은 천국에 내가 보내겠다.’고 우깁니다. 그게 바로 자기가 자기에게 모든 손을 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형 만들기를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하루 종일 꿰매고 단추 떨어지면 다시 달고, 자기 가꾸는데 온 신경을 거기에 다 씁니다. 이게 뭐냐, 이게 헌옷이에요. 낡은 옷입니다. 36절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낡은 옷에 새 옷이 들어가면 안 된다.’ 하는 거예요.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그리되면 이것이 찢어진다는 겁니다. 새 옷이면 새 옷 값을 해야 되는데 새 옷에는 새 직조물, 그 새 원단만 있어야 되고 헌옷이 들어가면 안 됩니다. 헌옷과 새 옷 이야기할 때 예수님께서 신랑이야기를 했거든요. 이것은 헌옷 새 옷, 옷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 신랑이 존재한다, ‘신랑이 있다, 없다.’를 가지고 헌옷이냐 새 옷이냐, 헌 포도주냐 새 포도주냐를 가름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새 사람이다, 헌 사람이다.’ 그 기준이 뭐냐, 내가 나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느냐, 그걸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누구 앞에 서느냐, 아니면 내가 내 거울 앞에 서느냐, 그거에 달렸다는 겁니다. 내 모습만 보일 때는 여전히 그것은 옛 사람이고 옛 피조물이라는 거지요. 그런데 예수님 앞에 날 세워버리면 이것은 내 쪽에서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겁니다.

내 쪽에서 아무것도 할 게 없다는 말은 달리 이야기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고린도후서 1장 19절에 보면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였으니 저에게는 예만 되었으니라.” 20절에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이 말은 ‘예’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만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거예요. 예수님만이 새로운 옷, 새로운 포도주를 만드는 겁니다. 따라서 그 앞에 있는 우리는 뭘 해도 ‘아니오’만 되기 때문에 우리는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지금 이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눈치 보고 있어요.

내가 내 일을 스스로 조절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조절해 봤자 이미 ‘아니오’에 해당되는 기쁨이 있어야 돼요. 뭘 해도 나는 이미 ‘아니야’라는 것이 확정된 데서 오는 자유함과 기쁨 즐거움, 기도 하나 안하나, 헌금 하나 안하나, 모든 것이 해도 ‘아니오’ 안 해도 ‘아니오’ 모든 것이 ‘아니오’에요.

여러 번 든 예가 있는데 전에 대덕교회에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어떤 착한 부인되시는 분이 ‘목사님, 남편이 등산 가자고 하는데 따라 갈까요, 말까요?’ 따라가도 ‘아니오’고 안 따라가고 혼자 예배참석해도 ‘아니오’에요. 왜냐하면 모든 것이 예수님한테만 예가 되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때문에 우리는 뭐든지 ‘주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가 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오직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그 천에 예수님의 공로만 예수님의 사랑만 다 염색이 돼요. 다 염색이 되어서 어떤 구석에 들어가도 전부 다 새 옷이 돼요. 왜? 주님의 새로운 사랑의 염색이기 때문에.

인생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사느냐, 이거예요. 유명한 시가 있지요.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간 사람.’ 우리 인간은 내 행함만 남겨놓고 인생을 떠나면 안 됩니다. 나 같은 인간을 사랑하신 사랑만 남겨주면 돼요. ‘주님, 사랑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지 못합니다. 이게 안 되는 거예요. 왜냐? 인간은 자기 행한 것에 대해서 의미를 주기 때문에 항상 ‘이것은 잘했다, 이것은 잘못했다.’ 자기가 분간을 해요.

우리는 그러지 말자는 거예요. 인간이 기껏 하는 것은 ‘이렇게 살았으니까 나는 잘 살았다. 이렇게 살았으니까 못살았다. 잘못 살아서 저주받아서 집안 이 모양 이 꼴 되었다. 내가 잘살아서 복 받았다.’ 맨 날 하는 것은 내가 나를 측정하는 것이고 판단하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손대는 헌 조각에 불과한 겁니다.

그 헌 조각 남들은 속아 넘어가는데 문제는 천국에서 안 받아줍니다. 교회라 하는 것은 주님만 사랑하면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이라 하는 것은 사랑만 남겨놓고 가면 되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보고 야속한 사람이라고 안합니다. 사랑만 남겨놓고 떠나가도 우리는 야속하지 않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했습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기준이에요. ‘너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만 묻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간음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고 무슨 율법이 있더라도 사랑하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합니다. 로마서 13장 8절부터 10절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면 그런 것은 다 덮여지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겁니다.

사랑을 할 때는 이유가 있어야 되거든요. 이렇게 하시면 되지요. ‘저는 주님에 의해서 새로운 조각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천이고 새로운 포도주입니다.’라고 고백하면 돼요. 이것은 인간이 훌륭해서 될 수가 없는 겁니다.

본문 36절에 보면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에서 ‘찢어’가 나오지요. “새 옷을 찢을 뿐이요” 그 다음에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합하지 않는다, 찢어진다.’ 37절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찢어지고 터뜨려’지지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이 세상을 살면서 어디를 가도 이 ‘찢어지고 터뜨려지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행여 찢어질까봐 터뜨려질까봐 염려하는데 우리가 늘 탕자가 되고 늘 인형조각에 불과해서 안에 있는 스프링이 막 튀어 나오고 천 조각이 나온다면 우리는 항상 주님의 사랑 앞에 늘 터뜨려지고 찢어져도 감사할 수밖에 없지요.

갈라디아서 1장 9절에서 12절에 보면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사람을 기쁘게 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무슨 말이냐,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안 터뜨리려고 하는지 압니다. 하나님 쪽에서 좋은 소리 하면 그들은 이것이 안 찢어지고도 천국에 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사도바울의 복음은 우리를 단속 하는 인간을 찢어버리고 터뜨려버리는 겁니다. 아무것도 남겨두지 아니하고 갈기갈기 찢는 거예요. ‘이런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 배운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웠다.’ 제가 두 달 전쯤에 개혁신학회 박사들 모인 자리에서 논문을 발표 했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 다 박사들입니다.’ 하대요.

그러니까 불만이 많은 어떤 사람, 안 찢어지고 안 터뜨려진 사람이 ‘여기 다 박사인데 왜 건방지게 이야기하느냐.’고 해요. 제가 건방진 것 없었거든요. 그냥 논문만 발표 했어요. ‘여기 다 박사다.’ 하는 거지요. 박사, 그거 찢어져야 됩니다. 안 그러면 이 휘소 박사처럼 큰 트럭에 받혀죽습니다. 우리는 늘 찢어져야 됩니다. 박사고 뭐고 다 박살나야 돼요.

우리가 자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사랑으로 왔다는 것, 우리 죄를 이삿짐처럼 싣고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고 우리는 그냥 따라갈 뿐이라는 것, 그게 바로 행복이고 그게 바로 축복입니다. 어떤 대상을 세우느냐에 따라서 내가 누구냐가 밝혀지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앞에 우리 행함을 섞지 말게 하옵소서. 옛것에다 새것을 끼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는 그 죽음 앞에서 겸손이니 교만이니 그런 말도 말게 해주시고 그저 쳐다보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평생 사는 것은 뭘 해도 천국에서 ‘아니오’라는 평가를 받을 것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이 하는 모든 일, 모든 것이 우리한테 ‘아멘’이 되고 ‘예’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