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2. 13:40

예레미야의 구원 (예레미야 15:16-21)

예레미야의 구원

2010년 3월 1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6-21

 
(렘 15:16, 개정)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렘 15:17, 개정) 『내가 기뻐하는 자의 모임 가운데 앉지 아니하며 즐거워하지도 아니하고 주의 손에 붙들려 홀로 앉았사오니 이는 주께서 분노로 내게 채우셨음이니이다』
(렘 15:18, 개정) 『나의 고통이 계속하며 상처가 중하여 낫지 아니함은 어찌 됨이니이까 주께서는 내게 대하여 물이 말라서 속이는 시내 같으시리이까』
(렘 15:19,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네가 만일 돌아오면 내가 너를 다시 이끌어 내 앞에 세울 것이며 네가 만일 헛된 것을 버리고 귀한 것을 말한다면 너는 나의 입이 될 것이라 그들은 네게로 돌아오려니와 너는 그들에게로 돌아가지 말지니라』
(렘 15:20, 개정) 『내가 너로 이 백성 앞에 견고한 놋 성벽이 되게 하리니 그들이 너를 칠지라도 이기지 못할 것은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하여 건짐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15:21, 개정)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는 의미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잔뜩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월등한 카리스마와 힘을 가진 자’이라는 인상을 예레미야마저 지울 길이 없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가 가지는 위상에 대해 예레미야는 기존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로서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는 식으로 하나님에게 따지고 들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매우 난처한 입장으로 깊숙이 몰리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날이 갈수록 그의 몸은 아파옵니다. 그리고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일부러 자신을 속이고 있는 듯한 인상을 갖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믿습니다. 따라서 그 말씀에 준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는 말씀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느냐 하며는, 비록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고 외톨이가 된다 할지라도 말씀만 함께 있다면 그것으로 그의 생을 즐거워했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이런 자신의 생활에 대한 보상이 예상 밖의 처참함으로 계속 주어지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이 말씀대로라면 예레미야는 결코 악인이 받아야 하는 재앙이나 저주를 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도리어 그는 복을 누구보다 더 듬뿍받아야 될 대상자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도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도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누구보다 더 심하게 묵상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행위가 결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데’ 있어 손색이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처지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정반대이기에 하나님께서 도리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까지 합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를 악한 자의 손에서 건지며 무서운 자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즉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구원을 제대로 알려면 ‘악한 자’의 손에 붙잡혀 있어야 하고 ‘무서운 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하나님의 구원이 뭔가를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는, 자신이 기대한 축복을 획득하는 자가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아의 고난 모습을 미리 보여주는 것으로 구원의 의미를 발산해야 할 위치에 놓인 자를 말합니다.

이것은 곧 절망을 말합니다. 어느 정도로 절망적이어야 하느냐 하며는, 기존에 그가 알았던 모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 회의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깊은 절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해서 출-애굽 사건을 통해서 다시 검토되어야 합니다. 분명 애굽 나라가 없이는 이스라엘 나라도 없습니다.

애굽 나라가 하나님으로부터 10가지 재앙과 저주를 받는 가운데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애굽=재앙 받은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과연 이스라엘이 이 재앙의 의미를 모르고서 제대로 출-애굽 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애굽 나라가 받은 재앙은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즉 애굽의 바로왕은 이스라엘 백성을 곱게 보내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그냥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강퍅케 하셨습니다. 그 강퍅의 수위가 높아질수록 재앙의 강도로 세어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진정 자신의 구원의 의미를 알려면 이 재앙의 강도를 접해야 하고 이 재앙의 강도는 강퍅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진 것은 그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고 있는지를 확인시켜 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구현됩니다. 거기에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습니다. 그리고 저주받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는 예수님은 자신의 미래 전부를 아버지에게 일임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자세에 참여되어야 하는 것이 참 이스라엘이요 성도입니다. 이 참여는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면서 실시됩니다. 인간은 매사를 자기 편한대로, 그리고 더 살고싶어하는 본능이 작용하는 가운데 말씀을 대합니다. 말씀을 대하면 대할수록 더 편하고 다복스럽게 살고 싶은 본심이 발각되는 겁니다.

하지만 원래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죽게 하신 그 말씀들’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말씀을 대하는 순간, 힘으로 구축된 자아는 벗겨져서 살고자하는 본연의 자아가 그 정체를 드러내게 됩니다. 하박국 3:17-18에 보면,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얼른 보게 되면 사진의 인화지처럼 한 장으로 되어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인화지를 자세히 보면 사진면과 매끈한 뒤쪽 면을 조심스럽게 분리해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각자에 대해 이 인화지처럼 둘로 쪼개어 벗겨내십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곡해부분이 왜 발생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즉 은근히 인간은 말씀을 통해 힘을 축적해서 마치 힘 있는 자가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대표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세하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부분을 절망으로 연결시켜 버립니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전적으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뿐입니다. 우리 본인은 당연히 재앙 받아 마땅한 강퍅한 자인 것을 자인하게 됩니다. 이럴 때 하나님의 자비에 의한 구원은 빛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버림받았음에서 오는 아픔에 저희들이 동참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늘 새롭게 느끼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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