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25. 15:27

저주받는 세상 (예레미야 16:5-9)

저주받는  세상

2010년 3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5-9

(렘 16:5, 개정)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초상집에 들어가지 말라 가서 통곡하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지 말라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16:6, 개정)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자기 몸을 베거나 머리털을 미는 자도 없을 것이며』
(렘 16:7, 개정) 『그 죽은 자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자와 떡을 떼며 위로하는 자가 없을 것이며 그들의 아버지나 어머니의 상사를 위하여 위로의 잔을 그들에게 마시게 할 자가 없으리라』
(렘 16:8, 개정) 『너는 잔칫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앉아 먹거나 마시지 말라』
(렘 16:9, 개정)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보라 기뻐하는 소리와 즐거워하는 소리와 신랑의 소리와 신부의 소리를 내가 네 목전, 네 시대에 이 곳에서 끊어지게 하리라』

오늘 본문 8절에 보면, ‘너’와 ‘그들’과 구분 짓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 세상을 둘로 나누기 위함입니다. 하나님편에 속한 사람과 세상 편에 속한 사람을 따로따로 가려냅니다. 따라서 만약에 이런 성경을 아예 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전혀 구분될 하등의 이유가 없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말씀과 성경을 보지도 않고 듣지도 않는 이 세상 풍조는 이미 정상이 아닙니다. 모두 정신병자들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그들의 죽음은 울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일찍부터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죽을 자가 죽은 것 뿐입니다. 당연히 저주받을 자가 저주받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11:17에 보면,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제대로 읽을 줄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피를 불어도 왜 피리를 부는지, 예수님이 슬피 울어도 왜 울어야 하는지를 모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볼 때는 반드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뒷 배경을 깔고 봐야 합니다.

그래야 눈에 뜨이지 않는 두 개의 이질적인 갈라짐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 나무와 생명나무의 존재 의미는, 죄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즉 선악과가 죄에 의해서 훼손당하므로서 말미암아 비로소 죄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죄란 바로 피조세계가 창조주를 공격하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나무는 이러한 공격을 피해 피신한 셈이 됩니다. 오늘날 이 세상이 정상이 아닌 것은 바로 하나님에 대한 저돌적인 공격을 보편화하고 있는 분위기 때문입니다. 신을 씹고, 신을 공격하는 것이 참으로 인간다움의 표상처럼 간주되는 세상입니다. 서양 중세 때는 아무리 무식한 농부라도,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졌고 인간의 삶의 목적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있음을 건성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은 곧 인간의 존재 이유와 목적에 대해서 나름대로 정돈한 바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에서는 신에 대해서 언급만 해도 몰매를 당하는 분위기입니다. 신을 짓밟고, 신을 모독하고 신을 때리는 것으로서 인간의 자긍성을 극도로 상승시키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런 세상 분위기에 조금이라고 하나님에 의한 경외심을 표한다면 왕따 당하기 십상입니다. ‘인생은 미완성’이라는 대중가요에 이런 가사를 나옵니다. “외로운 사슴처럼 기대어 살자” 즉 인생이란 상호 의지하며 사는 것이 최고라는 겁니다. 식사할 때 마주보는 상대가 있고, 잠자리를 같이하고 드라마를 같이 보며 웃고 울고, 스포츠 중계를 같이 보며 같이 흥분하고 신나게 외쳐보는 그런 기대며 살 사람을 원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무슨 하나님의 갈라짐이 환영받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볼 때는, 선악과를 공격해서 훼손시킨 죄의 세상으로 보십니다. 이것은 최고의 적개심을 가지고 세상을 대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3:46에,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 크게 출세하고 성공했다고 자부해도 하나님 시선으로 보면, 예수님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머물러 있을 뿐입니다. 바로 선악과와 생명나무의 관계를 모르게 되면 왜 하나님께서 이런 저주의 시선을 세상을 날리는 지를 모르게 됩니다. 어떤 도박꾼이 큰 돈을 잃고 난 뒤에 자신의 손가락을 자릅니다. 다시는 도박하지 않겠다는 각오로서 말입니다.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안 잘린 손으로 도박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5:29-30에 보면,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 손으로 큰 돈을 벌었으면 그 손에 뽀뽀라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죄라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궁리해도 모르게 되어있습니다. 이 말은 스스로의 힘으로 생명나무를 획득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십니까? 신명기 8장에 그 해답이 나옵니다. 곧 광야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는 곧 ‘언약의 떡’입니다. 이 떡을 하늘에서 내리신 것은 마음을 낮추기 위함입니다. 신명기 8:11-14에 보면, 네가 배불리 먹고, 양이 늘어나고 좋은 집고 살면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하나님께서 걱정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만나를 내려주신다는 겁니다.

곧 만나의 의미는 이곳이 광야에 해당됨을 인식시키는 작업과 병행됩니다. 나의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때, 그리고 먹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을 때, 우리는 우리 것이라고 우기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잊을 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만나만 의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공된다는 것은 곧 만나가 제공되는 것을 의미하고 이것은 현재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이 저주받을 광야라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애굽에서 살던 행세를 하면 안됩니다. 그 때는 여호와의 언약이 없을 때였습니다. 즉 하나님이 필요치 않고 힘대로 능력껏 살던 데였습니다.

그래서 신명기 8:17에서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오늘 본문 5절에서, “내가 이 백성에게서 나의 평강을 빼앗으며 인자와 사랑을 제함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언약이 개입되었습니다. 사랑과 인자와 평강의 언약이었습니다.

이 언약을 잊어버리면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이방나라처럼 저주받게 되어있다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병자들만 가득찬 이 세상이 참 좋은 세상이 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만나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현 세상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세상이며 동시에 광야같은 기능을 하는 좋은 세상인지를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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