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9. 12:14

땅의 가족 (예레미야 16:1-4)

땅의 가족

2010년 3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1-4

(렘 16:1,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렘 16:2, 개정)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맞이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지니라』
(렘 16:3, 개정) 『이 곳에서 낳은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머니와 그들을 낳은 아버지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오니』
(렘 16:4, 개정)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이라는 것이 고정되어 있지만 자꾸만 어디론지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 움직인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 움직임이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말씀에 준해서 움직인다는 점입니다. 즉 세상이 아무리 변화되어서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주도하는 바대로 이끌리게 됩니다.

이 이끌림에 의해서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유다 백성은 참혹한 심판이 들이닥치게 됩니다. 사람들은 심판이 들이닥치면 그 심판의 심오한 이유를 알아볼 생각보다 자기 가족부터 먼저 챙겨서 심판을 면해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하는 계획 자체를 고마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벌내리심만 어쨌든 피하고 보자는 식이 됩니다.

예레미야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가족 단위의 심판을 언급했다면 거기에 반발해서 예레미야의 처신을 되묻는 자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예레미야가 말하기를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큰 재앙을 받게 됩니다”고 했다면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은 “예레미야 당신도 같이 심판 받을 것이 아니요?”라고 대꾸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에게 하나님께서 결혼도 하지 말고 자식을 낳지 말라고 했습니다.”고 답변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땅에 자식을 가진 가정과 예레미야처럼 자식이 아예 없는 자와의 대비가 이루어지면서 심판과 구원으로 갈리워지게 됩니다. 물론 예레미야 쪽이 구원 쪽이요 자식이 있는 쪽은 심판 쪽입니다.

이와같은 대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심판과 구원을 설명하시는 저의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자꾸만 마지막 결정적 차원을 향하여 세상을 끌고 가고 몰고 간다는 겁니다. 즉 신약 때에 오면 이 ‘자식 있음’과 ‘자식 없음’이 ‘육’과 ‘영’이라는 대비되는 상태를 말해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란 존재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일상의 삶을 사는 힘이 가정에서 나온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구원의 힘은 말씀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자기 존재의 뿌리도 육적인 가족에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에 붙어있는지 가름되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만남과 충돌을 가지고 ‘영과 육의 충돌’로 간주합니다.

갈라디아서 6:8에 보면,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위한 심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육을 가진 인간으로서 눈에 보이는 육을 키우는 것을 소홀히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에 충성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이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는 것은 인간이 영을 찾아가는 식이 아니라, 영이 육을 찾아오시는 경우뿐입니다. 즉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겁니다. 육으로 새삼 만들어지는 가족이 아니라 이미 구성된 가족과 상봉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2:46-50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뜻대로’란 아버지의 능력이 임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영의 가족이든 육의 가족이든 공통점이 있다면 다같이 인간으로 구성된다는 겁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육으로 난 자식과 부모관계를 하나님은 영적 관계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육으로 난 것은 육이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가족의 반대말이 ‘약속의 가족’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마리아라는 육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이유는, 새로운 약속의 가족과의 대비를 분명히 해두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결코 현재 육에서 나오는 생존의 힘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부정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말씀으로 사는 것이지 가족끼리 행복을 도모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란 육적인 가족을 보는 순간은 하늘 나라에 계시는 예수님을 잊지 마련입니다. 같은 식구라는 이름으로, 화목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의 건강과 평화와 여유로움 속에서 세상 사는 맛을 만끽하려는 바로 그것이 이 세상을 불심판으로 이끌고 가는 말씀의 깊은 뜻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말씀으로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처럼 살고 자식 있는 자들은 자식이 없듯이 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곧 사람이 살아가는 행복과 보람은 결코 육신적인 안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성취 차원에서 주어진다는 것을 늘 인정하는 것으로 산다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결혼하지 않는 예레미야와 이 땅에서 자기 자식을 가진 자들의 특징은 바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겁니다. 길이 다르면 그 골인 지점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목사가 교회를 열중하면 그것은 천국을 통하는 다른 길을 교인들에게 소개하는 바가 됩니다. 요한일서 2:27에 보면,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교회 자체가 아니라 말씀 자체에 성도들을 매이도록 하십니다. 결코 목사에게로 모으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으로 모으게 하십니다. 육에서 나온 자식은 4절에 나와 있는 것처럼,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묻어 주지 않아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의 밥이 되리라”가 됩니다.

그것은 출현된 육을 둘러싸는 외부 환경이 이미 심판과 저주받기로 된 환경입니다. 마치 달에 가서 우주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비 쓰고 어항을 뒤집어쓰면 모양새는 비슷할지 모르지만 달에 가면 무용지물일 것입니다. 이처럼 종교 행위로 우리 육의 가정을 지키려고 하지말고 온 식구가 말씀에 의해서 산다는 것을 늘 알려줄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육의 가족을 세상에 내놓고 자랑하려고 하지 말고 세상이 말씀대로 움직여가고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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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4강-렘16장1-4(땅의 가족)-jer100317

2010-03-19 11:34:15   녹취 : 오용익
 
 
054강-렘16장1-4(땅의 가족)-jer100317-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6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6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6:1-4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생산하지 말찌니라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


뭔가 이 세상이 자꾸 움직이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에도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은 세상이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현재 끌려가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이야기해보면 세상 사람들은 피식 웃습니다. 왜냐하면 영화 <아바타>에 나온 것처럼 세상 사람들은 세상이라 하는 것은 지구, 태양계나 은하계 이렇게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탐구의 대상이기에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니 천국이니 지옥 같은 것은 아예 없다고 여깁니다.

이것을 학생들도 어릴 때부터 배우고 있으며 심지어 기독교 가정에서도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하지 않은지가 참 오래 되었지요.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에게 천국 간다고 하면 상당히 기분 좋아하지만 만약에 예수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 하면 애들이 가만있지 않습니다. 지옥이 얼마나 뜨거운지, 지옥의 온도가 몇 도나 되는지를 묻게 될 거예요.

지옥을 염두에 두고서 만약 자신이 지옥에 간다고 한다면 자신에게 손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 예민한 문제가 애들 교육하는데 방해가 될까 싶어서 부모가 그만 입을 다물고 궁금한 것이 있거든 목사에게 물으라는 식으로 슬쩍 자기 자식의 일을 목사에게 미루어버립니다. 내 자식이 아니니 제가 책임질 일은 아닙니다만 적어도 기독교가정의 부모가 가정의 목사노릇을 해주셔야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항상 부모가 이 세상이 항상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가정의 선지자로서 몸소 주님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보여야 됩니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만들어놓기만 한 것이 아니에요. 세상이 자꾸 움직이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디로 움직이는가?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세상움직임의 목표가 있습니다.

예레미야에게 결혼하지 말라고 이야기했고 유대 땅에서 바벨론 땅으로 움직이는데 그렇게 움직일 때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는 걱정도 안합니다. 왜 걱정도 안하냐 하면 약속의 땅에서 유다백성이 포로 잡혀 가는 그것이 하나님의 예언에 의해서 이미 던져진 것이거든요.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하, 세상만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착착 진행되는구나.’를 자기민족이 멸망당하는 것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겁니다.

‘아, 말씀대로 되는구나. 이 말씀이 거짓말이 아니구나.’ 물론 이 경우에 예레미야 말고는 다른 사람은 몰라요.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는 해 줬지요. 그러나 도무지 믿을 생각을 안 하니까.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약속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멸망시킬 일은 없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복 받은 민족인데 어떻게 여호와를 모르는 저쪽 이방민족에게 지배당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하는 것이기에 그럴 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예레미야가 이야기합니다. 이사야도 이야기했어요. ‘그 이방나라가 하나님이 쓰시는 몽둥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나라로부터 월급 받는 선지자들, 목사들이 예레미야의 귀싸대기를 때리고 멸시하고 모독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빼놓고 너에게만 독점적으로 계시를 줄 리가 없다. 너는 계룡산에서 혼자 계시 받았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하여튼 사람이라 하는 것은 돈 앞에서 다 사기꾼 됩니다. 돈 앞에서는 다 사기꾼이 돼요. 점잖던 사람들도. 연속에서 사기를 쳐야 돈이 들어온다는 것을 이미 감으로 느끼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돈이 우선이 되고 진리라는 것은 언제든지 돈을 위해서 팔아먹어 버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참된 진리를 주신 사람들은 성령을 통해서 꼭 돈이 안 되는 진리를 주십니다. 돈이 안 되는 진리, 돈으로 안 바뀌는 진리를 줍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원하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 그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꼭 돈이 되는 믿음 소망 사랑을 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원대로 믿음 소망 사랑을 갖출 테니까 우리 사업 좀 잘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뒤에 나오는 것이 뭐냐 하면 돈이 나오잖아요. 그러니 그것이 일종의 사기꾼이잖아요.

신학을 했다, 목사가 되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돈 안 되는 복음을 줬는데 참 사람들이 재주도 좋지요, 이걸 다 돈 되는 복음으로 바꾸어놓았으니 이것이 어떻게 목사들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만큼 고객들의 요구사항이 강렬했던 겁니다. ‘돈 되는 이야기 해줘. 하라는 대로 다 해줄게.’

예레미야같은 선지자가 오늘날에도 교회에 있으면 분명히 이야기할 겁니다. ‘지금 움직인다. 말씀대로 움직인다. 무슨 말씀, 하나님께서 이 교회도 멸망시킨다는 말씀.’ 아마 목사들이 반항할거예요. ‘아니 어떻게 하나님이 세운 교회를 멸망시켜’라고 하면서 자기들이 평소 알고 있던 신학을 주절주절 늘어놓을 겁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 자체가 어디로 움직이느냐, 심판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4절에 나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 심판이거든요.

만약에 우리가 예레미야 앞에 서 있는 유다백성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여기서 설교한다고 해 봅시다. “여러분, 여러분이 죽어도 울 사람조차 없을 겁니다. 죽어도 아주 처참하게 죽습니다. 죽는다는 것이 참 시시하다 하는 것을 혹독하게 체험하게 될 겁니다. 여러분의 죽음을 슬퍼해줄 주변사람조차 다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라고 했을 때 제가 선 이 자리에 예레미야가 서 있고 제가 여러분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제가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거예요. “예레미야 당신은? 당신은 우리보고 심판을 받는다고 하시는데 당신은 우리가 받는 심판에 합세하느냐, 아니면 그 심판에서 빠지는가.” 하는 그것이 궁금할 것이 아닙니까?

거기에 대해서 16장 1절에 “하나님께서 나보고 결혼하지 말랬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렵지요. ‘우리는 심판받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하고 물을 때 하나님이 ‘예레미아야 너는 심판 안 받는다.’ 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니고 ‘예레미아야, 결혼하지 말라.’ 이렇게 나왔다 이 말이지요. 이게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2절에 보면 해답이 보입니다. “너는 이 땅에서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찌니라.”고 되어 있지요.

1절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보고 하는 말이 ‘예레미아야, 너는 결혼하지 마라.’라고 했던 말은 달리 표현하면 ‘너는 자식이 필요 없어. 너는 자식이 있으면 안 돼.’라고 한 겁니다. ‘너는 자식이 있으면 안 돼.’라는 열한글자를 두자로 줄이면 ‘구원’이 되는 겁니다. ‘너는 심판에서 면제된 거야. 너는 구원이야.’라는 겁니다. ‘너는 생명을 얻었어.’라는 말입니다. ‘너는 생명을 얻었어.’라는 말을 달리 풀이하면 ‘심판 날에 제발 자식 좀 낳지 말라.’ 그것을 다시 이야기 하면 ‘너, 결혼하지 말라.’ 그 이야기죠.

‘심판받는다.’는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심판하시는가, 그걸 묻는 것이 아니고, 어떤 차원에서 심판을 해야 되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고 ‘아이고, 내 새끼들’ 하면서 자기 육적인 단속하기에 바쁜 거예요. 하나님이 난데없이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심판하느냐, 그 깊은 의도와 심오한 뜻은 무엇인가에 관해서는 생각하지 아니하고 ‘아이고, 내 가족은 심판 안 받고 어떻게 빠질 방법 없을까.’ 이것부터 생각하는데 바로 그것이 육적인 생각이거든요.

바로 그렇게 자기 가족에 연연해하는 그들 앞에서 낯선 선지자는 아예 부인도 자기새끼도 가족이 아예 없이 ‘예레미아야, 너는 결혼하지 말고 총각으로 늙어죽으라.’는 식으로 나서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오신 예수님이 총각으로 사셨을까요? 그것은 위험한 연결입니다만, 자 여기서 예레미야가 결혼하지 않음이 구원이 되는 이유를 좀 더 생각해 봐야 됩니다.

일단 가족이 만들어지면 거기서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생존에 필요한 모든 힘을 부여받는 곳이 가족, 가정이 돼요. 사람이 결혼 안하게 되면 항상 혼자 살면서 항상 주님을 바라보지만, 이것은 제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니까 저보고 욕하지 마세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살면 주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꼬, 그것을 항상 생각하게 되는데 목사님에게 주례를 받고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육에 얽매이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제가 한 이야기 아니니까 저보고 욕하지 마세요.

결혼하고 나서부터는 더욱더 육에 얽매이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육에 내재되어 있던 육의 본성이 또다시 폭발하는 것이 뭐냐 하면 자식 낳기입니다. 자식 낳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둘 낳기입니다. 둘 낳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셋 낳기, 넷 낳기 다산의 여왕 다섯, 그 쯤 되면 하나님4은 완전히 잃어버린 거예요. 그 쯤 되면 하나님을 잃어버린 정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하나님께 책임을 더욱 더 부과합니다. ‘우리 가족 두 명 살려 줘야 됩니다.’하고 나오다가 애 하나 생기고 난 뒤에 ‘우리 세 명입니다.’ 하다가 다섯 명 생기면 ‘우리 애 다섯 명 다 먹여 살려야 됩니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 끝에 보면 “아내를 취하지 말며 자녀를 두지 말찌니라.” 하고 3절에 보면 “이곳에서 생산한 자녀와 이 땅에서 그들을 해산한 어미와 그들을 낳은 아비에 대해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4절 “그들은 독한 병으로 죽고 슬퍼함을 입지 못하며 매장함을 얻지 못하여 지면의 분토와 같을 것이며 칼과 기근에 망하고 그 시체는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밥이 되리라.”

누가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까? 평소에 우리가 생존의 힘이라고 여겼던, 그저 부둥켜안고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겠다고 했던 그 가족, 그 육적인 가족이 본인의 의사와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이 움직이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에 의해서 공중의 새의 밥이 되는 시나리오가 그들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레미야는 빠지는데요, 빠지면서 홀가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결혼도 안하고 밤송이 같은 자식새끼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레미야에서 이렇게 심판과 생명이 대비된다는 것은, 이 본문을 그대로 오려서 신약성경의 사도바울 편지에 가져다가 붙여 봅시다. 예를 들어서 갈라디아서 6장 뒤에다가 붙여봅시다.

그러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이런 해석이 나오겠지요.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여기서 ‘육을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두고 영을 위해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육과 영이 가족과 어떤 관계가 되느냐, 그것은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나옵니다. 길기 때문에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가족이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에게 왔습니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자기 가족이 왔다는 것을 통보해주지요. “예수님, 저 뒤에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왔습니다.” 할 때에 주님께서 그냥 못 들은 척 하고 넘어가면 될 텐데 기어이 그것을 예화로 들어서 설교를 해 대시네요.

듣는 마리아 섭섭하게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계속해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자매요 내 모친이다.”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가족’이다 했습니다. 여기 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자매요 형제요 모친이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육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영적 가족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말이에요. 예수님은 분명히 결혼을 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어머니가 있었고 동생들이 있었지요. 하나님께서는 어머니 마리아와 그 어머니 마리에게서 나온 예수님의 동생들을 왜 두게 하신 겁니까? 그것은 오늘 본문 예레미야 16장의 말씀처럼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마리아와 마리아가 나은 자식들이 너희들이 보기에는 내 자식처럼 보이겠지. 하지만 아니거든.’ 이 뜻이에요.

그런 가족은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영적 가족이 아니면 가족이 아니에요. ‘내가 온 것은 동생들 밥 먹여 주려고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내가 온 것은 우리 엄마 마리아 먹여 살리려고 온 것이 아니다.’ 그 말이지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을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겁니다. 육으로 가는 것은 멸망이고 영으로 가는 것은 영생입니다. 가는 길이 달라요. 저는 지난달 말 서울에 다녀오고부터 죽 한국교회를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말해서 가는 길이 달라요. 한국교회가 아무리 수천수만 명 모여도 그 추구하는 그것이 길이 아닙니다.

얼마 전에 김천 가는 중에 길을 잃었어요. 시간은 급한데 길을 잃고 말았어요. 생전 처음 가는 길로 차가 들어서고 말았어요. ‘길이 아닌데, 길이 아닌데…….’ 멀리서 바라보니까 구미아파트가 보여요. 천국이 보이더라는 말이지요. 길이고 뭐고 간에 무작정 그 바라보이는 방향으로 달렸지요. 달리니까 구미 나오고 김천 가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막 처음 보는 산이 나오고 참 난감했어요. 이것은 길이 아닌데.

여러분이 가족 신경 쓰다가 앞에 주님이 보이지 않고 천국이 보이지 않고 주님의 재림이 보이지 않고 말씀이 보이지 않고 십자가지신 어린양의 보좌가 보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금 길 잘못 들어서신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작년에 그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교회가 바라보인다면 이미 그것은 길 잘못 들어선 겁니다. 목사 눈에 교회 보이면, ‘우리 교회를 어떻게 하면 부흥시키고 어떻게 하면 …….’ 하고 목사 눈에 교회가 보이면 이미 그것은 거짓선지고 이단입니다. 목사 눈에는 십자가지신 주님이 보여야지 교회가 눈에 보이면 안돼요.

‘그렇게 이야기하는 당신은 지금 교회 안 왔나?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아닌가?’ 제가 보기에는 주님의 형제입니다. 제가 농담 삼아 일부러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요, 어려운 이야기인데 할 수 밖에 없네요. 요한일서 2장 27절에 보게 되면 ‘성령의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면 누구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 없다.’ 했습니다. 이 말은 ‘성령이 임하면 누구도 여러분을 가르칠 수 없고 성령이 직접 여러분을 가르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두 가지의 가르침이 있는데 의도하면서 가르치는 것은 우리 주님한테 용납이 안 됩니다. 의도하지 않은 가르침이 여러분 속에서 피어오르고 각자 그것이 바깥으로 발산되어야 합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것, 내가 의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나도 미처 몰랐는데 내 속에 나에게 기름 부은 성령께서 ‘이게 바로 천국이 바로 보이는 길이다.’ 라고 수시로 알려주는 의도하지 않은 것이 계속해서 팍팍 터져야 돼요.

그런데 교회를 운영하려면 목사가 자꾸 의도를 해야 돼요. ‘설교는 이렇게 해야 되고 저 사람은 이렇게 해야 다독거려서 다룰 수 있다.’는 식으로 자꾸 의도한다는 자체가 이미 그 목사는 교인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거예요. ‘다른 교회 가면 안 됩니다. 우리교회로 오세요.’ 자꾸 내가 있는 바로 여기, 내 중심의 모임이 되면 그것이 하나의 생존의 힘이 돼요. 생존의 힘은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곁에 있는 가족이 생존의 힘입니다. 교회가 목사에게 위험한 것 이상으로 성도에게 가족이란 상당히 위험한 존재입니다. 배고픈 내 새끼가 보이지 주님이 안보이거든요. 집에 가면 그냥 식구들,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만 보이고 주님이 안보여요. 구름타고 하늘나라 올라가신 어린양 보좌에 계신 어린양이 안보입니다.

왜 그럴 수밖에 없느냐 하면 우리가 생존에 부여되는 힘이 가정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흔히 기독교 목사들 중에 장사하려고 이상적인 가정되기, 착한 아버지 되기 이런 것을 가르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정이 잘돼야 교회가 잘되고 나라도 잘된다, 그것을 항상 이야기합니다. 제가 보면 마치 노자 맹자 공자이야기를 기독교식으로 재탕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가정이 잘 되어서 인간 된 사례, 엄마가 기도 열심히 해서 자식이 돌아온 예를 들면서 뭐든지 중심은 가정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목사들 보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가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다 끄집어냅니다. 처음부터 아담과 하와도 가정이 잘 안되어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것부터 시작해서 그럴싸하게 이야기를 하지요.

교인들은 예수 이야기하면 다 자다가 ‘이렇게 하면 행복한 가정됩니다.’ 하고 행복한 가정 만들기, 행복한 아버지 행복한 어머니 만들기, 이런 것을 할 때 왜 그렇게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느냐 하면 바로 생존의 힘, 더 나아가서 사람 사는 보람 기쁨이 다 육적인 가정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육을 위해서 심는 자는 썩어진 것을 거둔다.’고 하는데요?

마태복음에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동생들이냐’라고 했는데요. ‘그러면 목사님, 당신이 말하는 결론이 뭐요?’라고 묻는다면 결론은 이겁니다. ‘아내 있는 자는 없는 자같이 하고 자식 있는 자는 없는 자 같이 하라.’ 그 말이죠. 결혼했어도 결혼 안 한 척 해라, 그 말입니다. 이 말이 또 위험합니다. 총각행세 하라는 말이 아니고 우리 남편 내 자식 내 아내를 키우는 힘은 움직이는 하나님의 예언된 말씀에서 나오는데 그것으로 먹여야지 아침에 밥 먹여주고 국 끓여서 먹여주고 돈만 주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물론 동태 국 끓여주면 힘이 나서 직장에서 더욱더 열심히 일해서 가정 꾸리는데 도움이 되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마지막 심판 때에 공중의 새의 밥이 된다 그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말합니다. “너, 가족이 몇 명인데?” “다섯” “다복하네.” “다복하지요.” “너는 몇 명인데?” “저는 세 명.” “행복하네.” “행복하지요.” “그럼 예레미야 당신은요” “난 결혼 안했거든.” “결혼 왜 안하십니까?” “글쎄, 말씀이 나보고 결혼하지 말래.” “왜요?” “너희들, 결혼한 사람들, 가족 있는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왜 그런데요?” “이 세상은 유황불에 태워질 것이기에.”

결혼하는 것이 실수가 아니고 결혼을 하든지 안하든지 주의 말씀에서 얼굴을 돌리는 것이, 다른데서 생존의 힘을 얻는 것이 실수입니다. 결혼해도 우리의 생존의 힘은 하나님의 영생의 말씀에서 나오고 좁은 문에서 나오고 그 귀한 복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됩니다.

끝으로 이 예를 들겠습니다. 우주에 나가면 우주복을 입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거죠. 주님의 나라가 그렇게 위험하다면 주님의 나라에서 입어야 되는 영적인 우주복, 모든 힘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그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어떤 애가 우주복이랍시고 우비 입고 어항 뒤집어쓰고 달나라에 갔다면 그것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깨져버리지요. 한국교회가 실상은 자기 가족위주로 살면서 우비 입고 어항 뒤집어쓰고 천국 간다고 버티고 있으니 참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자기남편이 최고고 자기새끼가 최고면서 마치 교회 와서는 주님이 최고인 것처럼 위장하는 것, 그것 주님은 안 속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내 가족의 주인을 나한테 두지 말고 내 생존의 힘에 두지 말고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가족을 떡으로가 아닌 말씀으로 키우고 말씀으로 살게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 사명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행복하다고 그것으로 모든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닌데 왜 자꾸 우리는 이 세상 게임에서 우리의 모든 가치를 결정지으려고 무모한 시도를 하는지. 우리는 예레미야와 이사야와 많은 선지자들과 주님을 본받아서 말씀으로 사는 자가 천국을 바라보는 자가 승자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