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4. 22:30

네 가지 벌 (예레미야 15: 1- 4)

네 가지 벌

2010년 2월 2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4

(렘 15:1,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세와 사무엘이 내 앞에 섰다 할지라도 내 마음은 이 백성을 향할 수 없나니 그들을 내 앞에서 쫓아내치라』
(렘 15:2, 개역) 『그들이 만일 네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디로 나아가리요 하거든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망할 자는 사망으로 나아가고 칼을 받을 자는 칼로 나아가고 기근을 당할 자는 기근으로 나아가고 포로 될 자는 포로 됨으로 나아갈지니라 하셨다 하라』
(렘 15:3, 개역)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그들을 네 가지로 벌하리니 곧 죽이는 칼과 찢는 개와 삼켜 멸하는 공중의 새와 땅의 짐승으로 할 것이며』
(렘 15:4, 개역)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싫어합니다. 마치 옛날 사람들이 성황당이나 마을 느티나무에다 빌듯이 얼른 빌고서는 곧장 자기 자리로 되돌아와 버립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것을 더 사랑하는 겁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말씀에 의하면, 성도란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참된 양은 목자가 있는 곳을 자기 자리보다 더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 22편에 보면, “여호와는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도란 한시도 목자의 자리에서 이탈되고 싶어하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 ‘자리’ 문제가 거론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리와 인간들의 자리를 구분하십니다. 사람들이 잠시 하나님을 찾는 것은 실은 자기의 것을 확고히하기 위한 용도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자리와 그들의 자리를 구분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자리에게 주어질 것은 저주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계신 곳을 사랑하거나 사모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고수한다면 그곳은 바로 사망이요 칼이 기다리고 있는 자리요 기근이요 포로 잡힐 자리라는 겁니다. 곧 목자이신 하나님 계신 곳만이 축복이요 그 자리를 사모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면 저주만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이 원칙은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누가복음 22:31-34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축복이란 예수님 자리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해주시기 때문에 베드로가 악마의 세력에 이끌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하나님에게나 예수님에게 하는 것을 믿을 것이 아니라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시고 목자로서 돌보아 주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제 자식 이삭을 바치는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준비하심 바’를 믿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보다 자기의 것을 사랑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6:22에 보면,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또는 우리 주께서 임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네 가지 벌이란 유다 백성들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면서 받는 능욕을 두고 말합니다. 이러한 벌을 받는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 4절에 나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들 므낫세가 예루살렘에 행한 바를 인하여 내가 그들을 세계 열방 중에 흩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므낫세라는 왕이 무슨 잘못을 저질는가에 대해서는 열왕기하 21:3-6에 나옵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가 헐어 버린 산당들을 다시 세우며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행위를 따라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아세라 목상을 만들며 하늘의 일월 성신을 경배하여 섬기며 여호와께서 전에 이르시기를 내가 내 이름을 예루살렘에 두리라 하신 여호와의 성전에 제단들을 쌓고

또 여호와의 성전 두 마당에 하늘의 일월 성신을 위하여 제단들을 쌓고 또 자기의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며 점치며 사술을 행하며 신접한 자와 박수를 신임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많이 행하여 그 진노를 일으켰으며”

우리는 여기서 므낫세 왕이 나름대로 열심히 빌고 정성을 바치고 자기가 믿는 신에 대해서 성의를 다하고 있음을 압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까지 제물로 바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대 인간으로 본다면, 우리 자신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 신에 대해서 열심히 섬기는 것이나 대동소이하다고 간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그렇게 열심히 섬긴 므낫세 왕 때문에 유다 백성들이 벌을 받고 모진 고생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시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참된 하나님을 섬기는 방식은 무엇이란 말입니까? 오늘 벤쿠버 동계 올림픽 여자 피겨 대회에서 캐나다 선수가 나와 경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선수의 어머니가 딸의 경기를 보고 싶어하며 경기장으로 오는 도중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이 여자 선수는 경기 시작할 때도 울고 끝나고서는 울었습니다. 우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경기를 봐야 할 어머니 자기 곁에 없다는 것이 슬퍼서 울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이 없다”는 때문에 울고, “누가 없다”는 때문에 웁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 왜 제가 있어야 합니까?”라고 말입니다. 즉 “어제 죽어도 상관없는 내가 왜 오늘 여기에 있어야 합니까?”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이 없다’고 한다면 현재 있는 것은 곧 나의 것인양 여기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남들에게 다 있는 어머니가 왜 나의 것이 나의 어머니는 내 곁에 없습니까?”고 따지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왜 내가 꼭 있어야 합니까?”라는 질문은, “없어도 되는 주님의 것으로서의 내가 왜 오늘도 여기 있는 겁니까?”라고 묻는 바가 됩니다. 므낫세 왕의 잘못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 우선이 아니라 ‘나의 것을 없이하지 않고 있도록 내가 지킨다’는 의식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보다 자기 사랑이 우선이고 이로 인하여 목자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리를 사랑하는 것이고, 그래서 저주를 받는 겁니다.

출애굽기 28:42-43에 보면,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사장이 왜 있어야 하느냐 하면, 바로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도 이스라엘이 생존하기 위함입니다. 거룩한 제사장이 무너지만 백성들은 저주받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의 거룩은 유지되어야 하고 백성들은 그 중보자의 거룩 기능을 인정해야 그들도 죽지 않고 복을 받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거룩의 기능이 우리에게 작용한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즉 예수님 덕분에 죄인도 살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님을 명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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