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7. 23:33

주의 이름과 창조성 (예레미야 14장 19-22절)

주의 이름과 창조성

2010년 2월 1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4:19-22

(렘 14:19, 개역) 『주께서 유다를 온전히 버리시나이까 주의 심령이 시온을 싫어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를 치시고 치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가 평강을 바라도 좋은 것이 없고 치료받기를 기다려도 놀람을 보나이다』
(렘 14:20, 개역) 『여호와여 우리가 우리의 악과 우리 조상의 죄악을 인정하나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렘 14:21, 개역) 『주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미워하지 마옵소서 주의 영광의 위를 욕되게 마옵소서 우리와 세우신 주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폐하지 마옵소서』
(렘 14:22, 개역) 『열방의 허무한 것 중에 능히 비를 내리게 할 자가 있나이까 하늘이 능히 소나기를 내릴 수 있으리이까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그리하는 자가 주가 아니시니이까 그러므로 우리가 주를 앙망하옵는 것은 주께서 이 모든 것을 만드셨음이니이다』


교인들에게 가장 치명적인 것은 재산도 아니요 건강도 아닙니다. 그것은 평생 믿어왔던 그 하나님이 과연 자신의 착각이나 환상의 산물이 아닌가 할 정도로 의심이 되는 일이 마구 터질 때문입니다. 즉 그동안 자신이 알고 있던 구원의 원칙이 여지없이 깨어질 정도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덮칠 때, 교인들의 믿음도 심하게 요동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경우들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의 원리, 원칙들이 수정되기를 원해서 주어진 상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확정짓기 위하여 동원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의 언약’입니다. 주의 언약이 예레미야와 그 당시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이해했는가는 오늘 본문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주께서 유다를 완전한 버리지 않음”입니다. 그리고 주께 범죄한 자라도 치료할 수 있는 근거가 언약에서 비롯된다는 겁니다. 뿐만아니라 주의 이름을 우리를 사랑하게 되고 미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미워하게 되면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가 욕을 받게 된다는 원칙도 있다는 겁니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만들었기에 하나님 외에 다른 신들은 세상을 만들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들이 인정하겠노라고 합니다.

결국 예레미야가 말해주는 ‘주의 이름’이란 이방나라의 신과는 차별되시는 분이라는 인간들이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혜택을 마땅히 베풀어주는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 다져왔던 조건들을 다 끄집어내어 놓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조건들은 예레미야가 스스로 자신을 규정하면서 담아놓은 요소들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은 이러한 조건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는데 하나님께서 그동안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 밖에서 활동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기 시작한 겁니다. 그렇다면 자기 민족 구원에 있어 새로운 조건이 어떠한가에 대해서 하나님에게 묻게 됩니다. 이러한 물음을 통해 유다나라는 새로운 조건에 눈에 뜨여져야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조건이란 바로 하나님은 구원받을 자와 언약 완성을 가지고 의논하거나 조율하거나  흥정하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구원받을 자 그 개인을 겨냥한 계시가 아니라 그 주변에 향한 계시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마치 모종 삽으로 모종을 떠옮길 때, 모종을 뜨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흙을 뜨게 되면 자연적으로 모종이 그 안에 담기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개인구원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구원이 우리들의 행동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상관없는 분과 하나님과의 약속에 의해서 우리가 구원된 것입니다. 전도서 9:1-2에 보면,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를 알기라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하나님의 지속적인 작용이 임해야 이 원칙이 습득됩니다. 즉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기 위해 나와 의논하시지 않고 나의 행위를 문제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던 구원이란 항상 ‘나 구원’ 위주로 생각해왔습니다. 즉 자기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언약의 완성’이란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아니라 메시아 자체가 언약의 완성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에 토대를 두고 언약의 완성을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해 완벽하게 오해한 양상입니다. 성도는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주변의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실제로 하나님과 관여해서 구원을 이루어내는 그 자리로 옮겨야 합니다. 이것은 ‘빠져나감’이라는 형식을 나타내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구원받았습니다. 롯의 구원은 롯과 의논해서 이루어진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관계의 결과로 생긴 현상이 곧 ‘롯 가족의 구원’이었습니다.

즉 구원받은 당사자가 자기 구원의 근거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늘 자신의 자리를 비우고 그 자리에서 떠나게 됩니다. 어디로 떠나는 겁니까? 바로 구원의 완성의 자리로 떠나는 겁니다. 그 구원의 완성의 자리에서 제공되는 조건은 이미 확정지어져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살과 피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이 세상을 빠져나가는데 있어 길을 찾게 되는데 과연 ‘언약의 완성’로 통하는 길을 무엇일까요? 바로 십자가가 보이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게 합니다. 한 예를 들면, 교회 예배 참석하고 온 사이에 집에 도둑이 들고, 가족 중에 누가 아프고, 교회에 문제가 생겨 교인들이 떠날 때, 사람들은 어떤 길을 염두에 두는가 하며는, 다시 재산이 보총되고, 가족이 병에서 고침받고, 교회가 부흥되는 길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길이란 같은 노선 위에서 두 열차가 정면 충돌하는 경우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매진하는 그 앞 쪽에서 예수님의 달려 들어와서 정면 충돌을 하게 되면 나도 찌그려져 죽고 예수님도 찌그려져 죽습니다. 이 죽음 안에서 비로소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나 예수가 죽었기에 너도 죽은 자요 나 예수가 살았기에 너도 산 것이 되었단다”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 6장에서는 ‘세례’라고 하는 겁니다. 연합이지요. 사도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과연 진짜 예수님을 만난는지 아니면 악마가 예수님을 모방해서 만났는지 어떻게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자신이 예수님을 죽이는 죄인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악마를 만났다면 자신의 계시를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뽐내었을 것입니다. 우월감을 누렸을 것입니다. 자신을 대단한 계시자로 자처할 것입니다. 참된 예수님과의 충돌은 바로 “나는 죽어지내는 것이 합당함”을 통감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것을 가지고 자신의 행동 덕분이라고 여긴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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