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2. 13:23

선지자의 불평 (예레미야 15:10-14)

선지자의 불평

2010년 3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5:10-14

(렘 15:10, 개정)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어머니여 어머니께서 나를 온 세계에 다투는 자와 싸우는 자를 만날 자로 낳으셨도다 내가 꾸어 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꾸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렘 15:11,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원수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렘 15:12, 개정)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렘 15:13, 개정) 『그러나 네 모든 죄로 말미암아 네 국경 안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 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렘 15:14, 개정) 『네 원수와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라』


이 말씀이 예레미야 개인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유다 나라 전체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이지 모호합니다. 초반에는 예레미야 개인이 하나님에게 따지고 자기 어머니에게 따지면서 자신의 형편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저주성의 결말은 예레미야가 아니라 예레미야를 힘들게 한 유다 나라 전체에게로 퍼집니다.

왜 이런 식으로 선지자와 유다나라가 얽혀야 하는 겁니까? 그것은 사람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심사가 참으로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과 축복 같은 것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경로로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느냐가 인간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나님 믿고 얼마만큼 욕보지 않고 많이 얻었느냐에 관심을 두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예레미야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출생과 자신이 남들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이 하나님이 구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가 자기 어머니에게 원망투로 말한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 하나님에게 원망하는 바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원망은 실은 예레미야가 대변하고 있는 이스라엘 전체가 평소에 하나님에게 자신의 형편에 대해서 불평하고 있는 바를 나타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위상을 제대로 모릅니다. 자신만큼은 불행한 경우가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고 단정짓습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까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잘못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요? 한 예를 들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이단이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번에 다음과 같이 반발합니다. “그러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네?”라고 말입니다. 이런 대꾸가 나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자기 구원과 자기 축복에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이 분명 드러납니다.

로마서 11:32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라는 말까지를 봅시다. 이렇게 나오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극렬히 반발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구원받지 못하겠네?”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 뒤의 말씀을 보면, ‘긍휼’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사람 차별없이 긍휼을 줄 자, 모두에게 긍휼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곧 아무도 자신이 구원받아야 될 자라고 외칠 자격자가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는 어떻게 구원됩니까?”라는 식으로 자기 구원에 관심 두어서는 전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참으로 우리 피조물이 관심 두어야 될 사항은, 자기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일하시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자신의 처지를 불평하는 것은 바로 타인의 등장입니다. 남이 예레미야를 저주하니 예레미야의 성질이 발칵 올라온 것입니다. 사람이란 홀로 있을 때는, 자신이 천하의 제일도 하나님 믿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전부를 몽땅 하나님에게 다 바쳐서 자기 것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는 천사같은 존재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타인이 내 앞에 등장하게 되면 그 타인으로 인하여 사라졌다고 여긴 자아가 같이 출몰하게 됩니다. 어느 교회에서 자칭 신앙이 제일 좋다고 말하는 장로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재산을 팔아라 고 하셔서 자신은 그냥 순종할 따름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이 교회를 세워주셨다고 고백해왔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다른 장로가 그 교회에 와서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자, 공적 예배 시간에 그 기존 장로가 벌떡 일어나 교인들에게 외쳤다. “다 나가라. 이 교회 내가 세웠다!”고 했습니다. 즉 인간이란 홀로 있을 때는 참으로 십자가 안에서 자신을 죽은 자라고 간주하고 싶어하지만 막상 타인이 자기를 무시하고 괄시하고 핍박하고 저주하면 십자가 밖으로 튀어나가는 식으로 나오게 됩니다.

즉 “누가 센 지 한번 붙어봐?”라고 말입니다. 욥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난데없는 고통에 시달리자 처음으로 죽여달라고 하다가 친구들이 옆에서 하도 구박을 하고 약을 올리니 급기야는 누가 바른지 하나님 앞에서 따져보자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 때, 네 번째 친구인 엘리후가 나서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욥과 너희들 친구들은 하나님의 대속물을 잊었구나”라고 말입니다.(욥 36:18)

이처럼 우리들은 타인의 약올림에 대해서 참지 못하면 십자가로부터 점차 멀어지면서 독자적인 가치를 가지고 하나님에게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세요. 하나님과 사귀는 사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시를 받고 하나님과 대화가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인도받는 복을 온 우주를 다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축복입니다.

지옥 갈 자들은 아무리 하나님에게 부르짖어봤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줄 곧 자기가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고 사태를 파악해야 하고 스스로 선택하면서 초라한 자기 인생을 건설하다가 지옥불 속으로 던져져야 하는 입장입니다. 이런 사람에 비해서 예레미야는 얼마나 다행한 처지입니까!

로마서 8:34에 보면,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했습니다. 아무리 우리 주변에 있는 자들이 조롱하고 놀리더라도 이미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친 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기적입니까!

어떤 분이 오늘 저에게 전화하기를, “곧 죽어가는데 어떤 성경 본문을 보고 기도를 하면 됩니까?”라고 했습니다. 저는 고린도후서 5:1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씀해드렸습니다. 죽음과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십자가의 귀중함이 크고 넓게 다가오기에 행복하다고 말입니다. 참으로 저주스러운 사람은, 자신이 죽는 줄도 모르고 자꾸만 살기만을 원한다면 결국 십자가로부터 점점 멀어질 뿐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유다 나라를 분리해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힘들게 한 유다나라에 저주의 불을 내리십니다. 그리고 예레미야에게는 복을 내리십니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도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이 십자가 복음으로 인해 타인으로부터 비난 받는 힘든 상황이지만 그런 상황 속이라서 더욱더 대속물의 가치가 크게 다가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만민이 무시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아들을 내어주신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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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강-예레미야 15장 10-14(선지자의 불평)-jer100303

2010-03-05 14:50:54 녹취 : 오용익


052강-예레미야 15장 10-14(선지자의 불평)-이 근호목사

(기도)

“대저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위에 광대하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나이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으시기를 원하나이다.”(시 108:4,5)

하나님아버지, 진실과 은혜가 온 우주에 이렇게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희들은 그것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온몸으로 느껴지지도 않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몸뚱이밖에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늘 지내고 있습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하나님이 엄연히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 시간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이 지금 집중하시는, 매진하시는, 신경 쓰시면서 하시는 그 일이 무엇인가가 우리 성도의 초점이 되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따로 있는데 우리 일이 나름대로 따로 있어 버리면 하나님의 뜻과 우리 뜻이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받은 자라면 자신의 일에 매진했다고 그것이 최선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늘 알아채서 거기에 합류하고 쓰임 받는 것이 성도의 일입니다. 주께서 어떤 일에 지금 매진하고 있는가, 열중하고 있는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나름대로의 관심사가 혹시 따로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신경 쓰는 일이 나름대로 따로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 일로 인하여 하나님과 무관한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으로 나름대로의 인생을 꾸려나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다시 한 번 저희들의 시선을 하나님이 열중하는 일에 관심을 두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의 일이 우리 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5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5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5:10-14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내게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그러나 네 모든 죄로 인하여 네 사경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너로 네 대적과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니라.”


성경에 우리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만 그 중에 하나가 단체에 일어날 일을 하나의 개인에게 먼저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사적인 일이다.’ 하고 그 개인에게 집중하다 보면 그 개인에게 일어난 일이 나중에 집단으로 번지게 되는 겁니다. 개인의 일이냐, 집단의 일이냐, 그것을 어떻게 연결시킬 것이냐, 그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예레미야에게 일어날 일이 결국은 이스라엘 전체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면 ‘예레미야가 곧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이 곧 예레미야네.’라고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거든요. 그럴 수 있지만 또 그것만도 아니에요. 예레미야에게 해당되는 일 따로 있고 이스라엘에게 해당되는 이리 또 따로 있고 그런 것이 상당히 어려워요.

제 논문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짐승공동체, 짐승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동체, 괄호 열고 ‘교회’ 그리고 괄호 닫고, - “짐승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동체(교회)” - 이렇게 써놓은 부분이 있어요. 그걸 보고 어떤 사람은 ‘교회가 왜 짐승의 단체입니까? 교회가 왜 악마의 집단입니까?’라고 저한테 항의를 합니다. 그 사람 생각에 ‘교회가 짐승의 단체라면 모든 교회가 다 지옥 가느냐?’ 논리가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 근호 목사는 한국교회가 이단이라고 했다. 따라서 한국교회는 한 명도 구원 못 받는단다.’ 자기 맘대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게 구약을 몰라서 그래요. 구약에 보면 하나의 이야기가 집단으로 이야기가 되고 집단 이야기가 하나로 전달되면서 그 가운데 구원 받을 자 하나와 구원받지 못할 자의 단체가 또 갈라지는 겁니다.

이걸 세 자로 말해서 ‘남은 자’라고 합니다. 남은 자, 영어로 Remnant, 남아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남은자로 하니까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마치 워치만 니의 지방교회처럼 ‘우리는 전부다 거듭났기 때문에 우리는 남은자다.’ 하는 식으로 옹기종기 따로 모여 있다고 해서 그걸 남은자라고 여기는 겁니다.

“모든 교회가 이단이다.”라고 하니까 “그럼 이단 아닌 교회는 어디입니까?” “있으면 찾아가 보렵니까? 가 보세요. 마찬가지지요.” 구약성경을 이해하는 기초가 전혀 안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느 집의 인간들의 인간성이 다 더럽다. 그렇다면 그 집의 인간들은 다 더러운 것인가? 그렇지 않고 그중에서 딸 하나는 착하다.

그러면 그 딸 하나는 빼고 다 더럽다고 이야기해야 되지 않겠느냐. 성경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모든 것을 다 더럽다고 하고 시작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어요. 무작정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11장 30절에 보면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느니라.”

32절에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하나님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이 문장을 짧게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은 이단이다.’ 같은 말이에요.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다.’ 같은 말입니다. ‘모든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고 죄 아래 있다.’ 같은 말입니다. 이 말만 딱 하면 하는 말이 ‘그러면 아무도 구원 못 받았겠네요?’라고 또 성급하게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함이라.”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함이라.’ 여기서 ‘모든’ 과 ‘모든’이 양이 같은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같은 거지요. 지금 제가 말을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자체가 어려워요.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었다.’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대번에 하는 소리가 ‘그러면 천국에는 예수님 혼자밖에 없고 아무도 천국 못가겠네요.’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 ‘긍휼을 입은 자만 구원받는다.’라고 성경이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이 ‘그러면 애초부터 모든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했다, 그 말을 하지 말아야지.’

‘모든 사람들 중에서 지옥 갈 사람만 순종치 아니했고 천국 갈 사람만 순종했다고 이야기해야지. 하나님, 그게 맞잖아요. 똑바로 하세요, 하나님.’ 이렇게 나오더란 말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그 말이 맞아요. 모든 사람이 순종치 아니했어요. 이것이 우리가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순종치 아니했습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한국의 모든 교회는 이단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럼 예수님 혼자 구원받나? 그렇게 이야기하면 너만 구원받나?’라고 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사람 같으면 어느 교회에서도 구원 받는다.’라고 제가 이야기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렇다면 처음부터 모든 교회는 구원 못 받는다.’고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왜 그러냐 하면 관심사가 자기 구원받는데 관심이 있다 보니까 저주 받을 자에게 행위 하시는, 행동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고,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고, 그 하나님이 행위 하시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나 구원받았나, 안 받았나?’ 맨 날 결과적으로 자기 구원받았는지 안 받았는지 그것에만 급급하고 그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구원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조치를 했느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하나님, 날 구원할거요, 말거요? 구원하려면 하고 싫으면 말고.’ 자꾸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 생각을 하지 않고 ‘내가 왜 주님의 긍휼과 주님의 용서가 아니면 구원받을 수가 없다는데 왜 그런가? 어째서 그런가? 어째서 나는 주님이라는 외부인이 나를 건져가지 않으면 나는 왜 안 되는가?’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구원해 줄 거요, 말거요?’ 맨 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거예요.

매사가 다 그래요. 그러니 우리교회 9년째 10년째 설교해 봐야 어떻게 보면 의미가 없어요. 설교 전체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죄인인 우리를 구원한다.’ 여기에 설교의 거의 전부를 투자하면서 시간을 소비하면서 10년 가까이 계속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사가 ‘그래서 내가 지금 구원받았다는 말입니까, 안 받았다는 말입니까?’ 그걸 이야기해 달라는 거예요.

특정 목사님, 특정 집사님, 특정 장로님이 성경에 안 나오거든요. 물론 제 이름도 여기 안 나오잖아요. 우리의 사적인 이름이 안 나온다고요. 우리 사적인 이름 다 떼어버리고 김씨, 최 씨 다 떼버리고 한꺼번에 조지자, 이 말입니다. ‘한꺼번에 우리는 저주 받아야 마땅합니다.’ 하고 한꺼번에 들어오자는 말이지요. ‘우리는 저주받아야 마땅합니다.’ 하고 한꺼번에 와 버리면 무엇이 저주에 해당되느냐 하면 ‘하나님, 저는 구원받아요, 안 받아요?’라는 생각도 저주받을만한 생각이 되는 겁니다.

교수들 앞에서 강의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긍휼을 베풀고 십자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밖에 안했어요. 그런데 장로님 말씀 들어보면 초반부터 화가 나 있더라는 겁니다. 초반부터 화가 나 있더라는 것인데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왜 우리 조직의 권위를 안 알아주느냐.’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목사가 해야 될 일이 ‘우리는 어떤 조직이든, 어떤 훌륭한 단체든 그것은 깡그리 저주받을 조직입니다. 깡그리 그렇고 살아가봐야 다 죄에요.’ 라고 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는 단체는 보통 조직이 아니고 우리 단체는 훌륭한 단체고……’ 그런 소리 할 것 같으면 마귀를 부르면 되고 마귀 부르면 잘 합니다. 그런 소리는 복음전하는 사람을 부르면 안 됩니다.

복음 전하는 사람은, 우리는 깡그리 죄인이고 오직 주님의 긍휼로 밖에는 구원이 안 되는데 말씀가지고 어떻게 우리에게, 이런 말씀, 이런 말씀, 이런 말씀을 통해서 전달, 전달, 전달되었는가, 그 과정을 쳐다보는 순간에 우리 마음은 ‘네가 잘났어, 내가 잘났어.’ 그 모든 것이 날아가 버리고 ‘야, 주님 감사합니다. 진짜 우리는 주님 아니면 좀비입니다. 시체입니다.’ 같이 영광을 돌리고 감사하는 거예요.

그 말씀의 경로가 하나님의 긍휼의 경로요, 사랑의 경로요, 사랑이 듬뿍듬뿍 담긴 말씀이 되는 겁니다. 예레미야 본문을 봅시다. 상당히 어렵습니다. 진짜 이런 본문이 어려운데 10절에 보면 “내게 재앙이로다 ……” 다시 말씀드리면 예레미야가 자기가 당하는 이것이 그대로 이스라엘에게 전달되고 이스라엘에게 전달되면서 이스라엘이 당한 저주는 예레미야는 빠져버립니다.

그러니까 이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지요. “내게 재앙이로다 나의 모친이여 모친이 나를 온 세계에게 다툼과 침을 당할 자로 낳으셨도다.” 예레미야가 자기 엄마보고 왜 닦달 냅니까?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이까.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재앙입니다. 어머니, 왜 저를 전 세계로부터 재앙을 받는 존재로 출산케 했습니까?’ 이게 엄마보고 할 소리입니까?

그러니까 이런 대목이 예레미야의 사적인 경우에 해당되면서도 예레미야의 사적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예레미야 뒤에 있는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과 직결되어 있다 이 말이지요. 그걸 제가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예레미야가 대표해서 하나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 빼놓고 예레미야 같은 경우에 그가 불평을 하든지 짜증을 내든지 간에 하나님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겁니다.

이것은 온 천하, 지구의 반을 줘도 이런 복하고 바꾸면 안 됩니다. 온 천하를 다 준다 해도 이런 복과 바꾸면 안돼요. 지금 자기가 어렵든지 좌절하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관계없이 지금 하나님과 대화가 된다는 사실, 자식죽고 집안 거덜 나고 다 깨어져도 괜찮아요. 교도소 가서 종신형을 받아도 괜찮습니다. 교도소 감방 안에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자기가 대화, 소통이 된다는 것, 이것은 정말 큰 축복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도가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축복은 하나님과 사귀는 거예요. 만약에 하나님과 안 사귀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지시를 못 받게 되고 하나님의 지시를 못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아무리 애써서 하나님 부르짖고 예수를 부르짖어도 소통이 안 되니까 그것은 그냥 자기 상상력에 자기가 종교 만들고 자기가 교주되고 하나님과 대화, 말 그대로 말 한번 섞어보지 못하고 지옥 가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마는 겁니다.

세상에 이런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과 대화 한 번 못해보고, 동방신기 좋아하면서도 동방신기와 말 한번 못 섞어보고, 배 용준 좋아하면서 배 용준 사인하나 못 받고 그런 불행한 경우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 누구 믿습니까? 하나님 믿잖아요. 하나님 믿으면서 하나님한테 지시한번 못 받고 하나님한테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매사를 자기가 결정해서 자기가 알아서 선택해서 인생을 가야 될, 그것처럼 가련하고 불쌍한 인간이 어디 있어요.

이 본문이 어렵다는 것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10절에 보면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다 나를 저주하는도다.” 사람이 타인을 의식할 때 돌발적으로 자기에게도 돌아와요. 어려운 이야기 다 치우고 쉬운 이야기 합시다. 전에 있던 어느 교회에서 그 장로님이 교회 조용할 때는 이렇게 말해요.

‘이 교회 수 십 년 동안 내가 헌금 다 했고 땅 바치고 목돈 내서 세운 이교회는 하나님께 바쳤기에 이 교회는 하나님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헌금하고 땅 바쳐서 이 교회를 세웠어도 내 것은 없고 전부다 하나님 것이다.’라고 해서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왔었지요. 제가 오기 전까지 그 장로님이 혼자 존경을 받아 왔었어요.

‘야, 믿음 좋다. 재산 바쳐놓고 교회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다 하나님 것이라고 하니 얼마나 존경스러운가.’ 했어요. 그런데 제가 오고 난 다음에 ‘이 교회는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주머니를 털어서 만든 교회입니다.’라고 하니까 예배시간인데도 발끈 하면서 장로님이 일어나서 하는 말이 ‘다 나가라. 이 교회 내가 세웠다.’ 하는 거예요.

여러분, 충분히 이해하지요. 제 이야기 잘 못 들었습니까? 서울에서의 그분들처럼 잘 이해 안 되십니까? 자신을 존경해 줄때는 한껏 겸손의 티를 내면서 ‘이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 주셔서 한 겁니다.’라고 하다가 라이벌이 등장하게 되면 그동안 그 사람이 받았던 명예 같은 것, 권력의 축, 그것도 또 권력이라고, 조직 내부에서의 힘이 저쪽으로 기울어지니까 그 연세도 많고 지금은 돌아가신 그 장로님이 벌떡 일어나서 하는 말이 ‘다 나가라, 다 나가. 이 교회 내가 세웠다. 내가 땅 바쳐서 세웠으니 다 나가라.’ 하는 거예요.

무슨 의미입니까? 사람이 타인이 등장하면 그동안 잊었던 내가 생각이 나요. 그게 하나님 믿는 겁니까? 그게 진짜 하나님의 지시대로 헌금한 거예요? 안 그러면 자기가 자기 명예에다가 투자한 거예요? 교회, 복음, 성경 다 필요 없어요. 하나의 사건만 일어나면 하나의 사태만 일어나면 확 뒤집어져서 깨끗하게 본색이 다 드러납니다.

주님 앞에 죄인이라고요? 누가 그 사람을 욕해보세요. 발끈하지요. ‘내가 어떤데? 왜 나를 욕해?’ 방금 죄인이라면서요. 주님 없이는 못산다면서요. 왜 갑자기 남이 욕을 하니까 욕하는 타인이 등장하는 순간 타인과 더불어 그동안 잠재되어 있는 나도 더불어 같이 돌출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 좋다, 믿음 좋다.’ 하나님은 안 믿습니다.

언젠가 제가 극동방송에서 그런 이야기 했지요. “성도가 구원받는 믿음은 자기가 만들어낸 본인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지고는 절대로 구원 못 받고 예수님께서 심어주는 그 믿음과 예수님께서 심어주는 그 소망과 예수님께서 심어주는 사랑으로만 구원받는다.”고 했어요. 그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때는 뭘 몰랐느냐 하면 그 논리구조를 몰랐어요.

어째서 내 믿음, 내 소망, 내 사랑가지고는 구원이 안 되는지, 해답은 알지만 어째서 그런지 논리적으로는 잘 설명이 안 되었었어요. 옛날이니까요. 지금은 알아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우리의 뜻과 어긋나는 사람들을 주위에 배치해서 그동안 나는 처리했다고 여겼던 나의 죄, ‘나는 이제 더 이상 내 욕심 안 부립니다. 나는 이제 명예 같은 것 다 버렸습니다.’라고 내 안에 없다고 여기던 그 순간에도 갑자기 타인이 와서 화를 돋우니까 갑자기 숨어 있던 내가 발칵 뒤집어지면서 내가 튀어나와 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했는데 죽은 인간이 갑자기 일으켜졌어요. 하나님께서 일으켜 버렸어요. 타인을 통해서. 그게 바로 10절 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뀌어주지도 아니하였고 사람이 내게 뀌이지도 아니하였건마는 왜 나를 저주하는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뭐, 어쩌라고.’ 신약은 달라요.

신약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물론 구약에도 나오고 신약에도 나오지만 ‘천만인이 너를 둘러칠지라도, 누가 너를 아무리 이단이라고 욕을 한다 할지라도 누가 너를 정죄하리오. 너를 위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네가 인정한다면, 네가 경험한다면 그 그리스도가 너를 정죄하고 단죄하는 모든 것에 상관없이 너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욥기가 바로 그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사탄에서 이야기해서 욥의 친구들로 하여금 욥을 씹도록 아주 자근자근 씹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욥이 처음에는 좋게 나가다가 도저히 못 참아서 누구는 성질 없나, 해서 자기 성질을 그냥 드러낸 거예요. 그러니까 네 번째 친구가 등장해서 그 세친구하고 욥하고 네 명 다 싸그리 비난하잖아요.

엘리후가 하는 말이 ‘대체 너희들 넷은 앞에 대속물이 안 보이느냐?’ 했어요. 여기에 대속물이 등장합니다. 우리의 대속물은 누구지요? 십자가지요. 우리는 십자가, 십자가 하루에 열 번도 더 합니다. 하지만 어떤 타인이 등장해서 나를 욕할 때 갑자기 우리에게서 뭐가 사라져 버리느냐 하면 십자가 안에 들어 있어야 될 내가 십자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버렸어요.

십자가바깥으로 튀어나와서 걷어 부칩니다. ‘오냐,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보자.’ 주님께서는 박수칩니다. 성공한 거예요. 주님께서는 아주 성공하신 거예요. 오늘 어떤 분이 저에게 전화를 했어요. 거의 죽음 직전에 있는 분인데 전화를 했어요. “목사님, 몸이 아픈데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그냥 아픈 것이 아니고 암 말기니까 죽음을 앞두고 아픈 것이니까.

“성경의 어느 구절을 보고 어떻게 기도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죽음과 가까우십니까? 죽음과 가까우면 진짜 사는 날도 가깝습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은 죽음과 가까운 것이 아니고 밥 먹고 살려고 헤매고 있는데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본받으면 안 됩니다.” 했어요.

‘하나님, 어떻게 하면 내가 밥 먹고 삽니까?’라는 기도를 하지 말고 ‘주여, 언제 이 옷 활짝 벗어버리고, 고린도후서 5장 1절을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집이 마련되어 있는데, 우리의 장막집이 부서지면 그 다음에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나님의 지으신 집을 우리가 입는다.’ 했습니다. 죽음과 가까이 있는 것이 제일 성공한 사례가 되는 거지요.

죽음과 가까이 있다 보니까 자기가 죽는다는 것,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강제적으로도 사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잖아요. 그러니까 앞에 천국이 더 크게 보이는 겁니다. 그런데 이 철딱서니 없는 이 땅의 사람들은, 죽음과 가까이 가면 되는데 자꾸 죽음이 없는 곳으로 살아보려고 철야 해가면서 그러니까 무엇과 멀어지느냐 하면 주님의 대속물과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들은 단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가 밥 먹여 주나?’ 오늘 낮에 시내 나가면서 차를 탔는데 버스 간에 장사하는 사람인데 참 운도 없어요. 인삼파스 파는 사람이 올라왔는데 그 사람이 많이 팔고 내렸는데 두 코스 가서 인삼파스 파는 사람이 또 올라왔습니다. 하나도 못 팔았어요. 그런데 그걸 딱 보고 느낀 점이 뭐냐 하면 인삼파스를 사람들이 사가더라 이 말이지요.

왜 사 가느냐 하면 사는데 도움이 되니까 사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사가는 거예요. 자기가 먹고 살아가는데 이 땅에서 도움이 되는 거예요. 만약에 내가 장사꾼인데 내가 뭘 파느냐? 성경, 성경 내용을 판다고 해봅시다. 이거 사겠습니까? 아무도 안사가지요. 아무도 안삽니다. ‘여러분, 주와 함께 죽읍시다.’ 이거 누가 삽니까? 아무도 안사요.

팔리지 않는 상품을 파는 자가 복음 전하는 목사에요. 팔리지 않는 상품을. 사포닌 성분이 들어 있어서 몸에 좋다는 인삼파스야 자기한테 필요하지만 사람들에게 아무 필요 짝도 없는 상품, 그것을 사람들에게 판다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개입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살 사람이 없는 거지요.

‘여러분, 우리 모두 저주받습니다.’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밑에 폭탄 깔렸습니다. 터집니다. 예수 믿어야 삽니다. 지금 밑에 폭탄이 깔려 있습니다. 여러분이 인생을 천년만년 살고 미국가도 폭탄 있고 호주가도 폭탄 있고 죄라는 폭탄, 저주라는 폭탄이 있습니다. 예수 십자가 바라보시면 삽니다.’ 할 때 자기 발밑에 폭탄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요.

아무도 몰라요. 그걸 어떻게 돈 받고 팝니까? 그것도 상품이라고. 그래서 우리교회 왔다가 사람들이 안 나오는 겁니다. 자기가 밥 먹고 사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니까. 그래서 그걸 생각해 볼 때 참 나도 큰 일 났다. 팔려야 되는데 안 팔리니까. 제가 십자가마을에 글을 올려놨는데 박 목사님이 짧은 글로 ‘요나의 심정!!’ 하고 느낌표 두 개 쳤어요.

제가 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지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요나가 선지자로서 밥 먹고 살려고 고국에서 계시를 받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줘도 살까 말까 하는데 하나님이 일을 자기가 예상한 바깥으로 해버리니까 요나가 얼마나 심정이 상했으면 ‘하나님, 저를 죽여주옵소서.’라고 했어요. 그 때 박 목사님이 요나의 심정, 하고 느낌표 두 개, 이것은 복음 아는 목사만 압니다. 그 심정은.

쉽게 말해서 ‘나는 속았다.’ 하나님께서 나보고 목사 시킬 때 복음 전하라고 했는데 상품을 팔아보니까 아무도 안사네. 그러니까 교인이 별로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느낌이 뭡니까? 속은 거지요. 그러니까 요나처럼 ‘차라리 저를 죽이세요.’ 왜냐? 살면 살수록 점점 더 자기 체면이 구겨지니까. 목사가 교인이 있어야 목사지 교인이 없는데 무슨 목사가 됩니까?

얼마나 수치스럽습니까? ‘실례지만 교인 몇 명입니까?’ ‘없습니다.’ 얼마나 체면 꾸기고 수치스럽습니까? 그러니까 ‘차라리 나를 죽여 달라는 거예요.’ 요나의 심정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레미야가 잘못된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여기서 예레미야가 잘못된 사고방식인지 예레미야뿐만이 아니라 이스라엘전체의 잘못된 사고방식인지 그것이 매우 모호합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예레미야가 하나님과 소통한다는 그 자체만 해도 남들이 저주를 퍼붓든 남들이 욕을 하든지 그것 신경 쓰면 안돼요. 하나님의 지시받고 있다는 것이 어딘데요.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데요. 그것 돈 천억 들이면 됩니까? 김 연아처럼 금메달 따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십니까?

김연아도 빙판 밑에 지뢰, 폭탄 있는데 그 폭탄 터져버리면 지옥인데요. 사람들은 자기 밑에 저주의 폭탄이 있는 줄 모르잖아요. 그래서 예레미야가 정말 믿음이 떨어져서 다른 사람들 저주한다고 그것 때문에 불평해서 자기어머니까지 들먹여가면서 ‘어머니 왜 저를 낳았습니까.’하는 것인지, 아니면 예레미야가 그 뒤에 있는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하는 것인지 그 뒤에 봅시다.

12절부터 보면 “누가 능히 철 곧 북방의 철과 놋을 꺾으리요 그러나 네 모든 죄로 인하여 네 사경의 모든 재산과 보물로 값없이 탈취를 당하게 할 것이며 너로 네 대적과 함께 네가 알지 못하는 땅에 이르게 하리니 이는 나의 진노의 맹렬한 불이 너희를 사르려 함이니라.”

여기 ‘너희’란 말이 나오지요. 아하, ‘나’로부터 시작해서 ‘너희’로 빠지는 겁니다. ‘나’라는 것은 예레미야인데 11절에서는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로 복을 얻게 할 것이며 내가 진실로 네 대적으로 재앙과 환난의 때에 네게 간구하게 하리라.’ 여기서 해답이 풀렸습니다.

‘너’라고 하는 예레미야와 ‘너희’라고 하는 이스라엘사이에 서로 대적상태를 만들었습니다. 이게 오늘의 해답입니다.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일이 이스라엘에게 일어나지만 그 중간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 편, 그리고 예레미야를 대적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예레미야가 ‘엄마, 왜 날 낳았어? 하나님, 왜 저렇게 남들이 저를 저주해요?’라고 할 때 ‘야, 예레미야가 이런 신앙인이 아닌데 하나님만으로 즐거워해야 될 사람이 왜 자꾸 저렇게 하지?’라고 생각할 때는 ‘아, 예레미야가 뭔가 해답을 몰랐구나.’ 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해답을 보니까 예레미야가 저주받는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이 축복으로 갚아주고, 그리고 그런 예레미야의 말을 안 듣고 예레미야와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모르는 다른 유다나라에게는 하나님이 무서운 저주의 불을 내리시는, 같은 단체에 있으면서도 각기 달리 관리하시고 달리 처분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발견했습니다.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정말 죽고 싶어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사람들이 필요치 않은 이야기를 하니까 교회가 될 리가 없고 복음이 팔릴 리가 없고 지금 있다고 해도 앞으로 다 떨어지고 없을 수도 있고 심지어 아내나 처자식까지 버릴 수도 있고, 그럴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인간적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죽이지 왜 살려둡니까?’가 되는데 바로 그런 말을 토해냄으로 말미암아 그런 말을 토하도록 만들었던 이 악한 세상에게 하나님께서 징벌을 내리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미끼로서 사용하신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말 아슬아슬합니다. 정말 위험한 발언을 우리들이 외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속물로 주셨건만 아무도 안 믿습니다. 눈도 돌리지 않습니다. 관심조차 없습니다. 살려고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숨겨져 있던 죄도 발각되고, 그런데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속물로 주신 은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시니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복음만 전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