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30. 10:46

베드로의 배신 (마가복음 14장 66-72절)


베드로의 배신

2009년 8월 30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4:66-72

(막 14:66, 개정) 『베드로는 아랫뜰에 있더니 대제사장의 여종 하나가 와서』
(막 14:67, 개정)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막 14:68, 개정)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하며 앞뜰로 나갈새』
(막 14:69, 개정) 『여종이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도당이라 하되』
(막 14:70, 개정) 『또 부인하더라 조금 후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
(막 14:71, 개정) 『그러나 베드로가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막 14:72, 개정) 『닭이 곧 두 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 곧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기억되어 그 일을 생각하고 울었더라』


환경 바뀌면 사람은 본색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고 해도 그 환경이 어떠한 환경에서 내놓는 고백인가가 중요합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환경에서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느냐 하는 겁니다. 만약에 환경따라 딴 소리 한다면 비록 전에 예수님과 함께 했을 때 나온 바른 고백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예수 이용해서 내가 살아야겠다’는 일념에서 나온 엉터리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사 참된 천국에 들여보내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천국은 원칙은 이미 확정지어져 있습니다. 즉 “나는 의인이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죄인됨은 관심이 없고 뒤에 나오는 약속, ‘구원시켜준다’는 말에 솔깃합니다.

그러다보니 앞의 것, 즉 ‘죄인됨’의 절차도 거치지 않는 채, 뒤엣 것, ‘구원시켜줌’에 눈독을 들이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베드로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혹독한 배신이 있음으로 해서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므로서 누구나 베드로의 절차 밟지 않고서는 천국에 이를 수 없음을 말해주게 됩니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게 되면 곧장 그 말씀을 나름대로 지켜내어서 자신을 지금보다더 더욱 더 나은 의인이 되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자신이 벌리는 모든 일, 즉 세상에서 바르게 사는 것과 바른 교회를 찾아나서는 것과, 성실하게 자기 관리하는 것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행위,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지금보다 더 나은 자아상을 확립하기 위해 삽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가 결국 베드로가 빠진 결과로 집약될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죄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죄를 뱉아내게 되어있습니다. 즉 사람은 자기 위해 덮여진 있는 삼겹살 같은 비계 덩어리를 벗겨낼 방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스스로 할 수 없는 이 작업을 위해 예수님을 싫어하는 환경 속으로 밀어넣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교회라는 환경은 철거되었습니다. 도리어 예수님을 공격하는 주변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치 결혼 전에, 교회 안에서 같은 청년회원들끼리 잘도 놀았던 아가씨가 불신자와 결혼하고 난 뒤, 가정 환경은 온통 불신앙의 세계로 둘러싸인 경우와 같습니다. 집에서 억지로라도 교회 가라고 해서 다녔던 처녀 시절이 끝나고, 이제는 도리어 반대가 되어 교회 다닌 것이 큰 죄가 되는 삶의 환경을 갖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신상의 위험을 느꼈습니다. 졸지에 낯선 환경에 들어 왔고, 예수님을 집단적으로 미워하는 환경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끼리만 있는 분위기 속에서 결코 베드로는 예수님을 거부할 위인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원하는 환경이 아닌 것에 당황스러워 합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신의 내부 본성은 유감없이 발각됩니다.

누가복음 22:31-34에 보면,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멀찍이 떨어져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둘러싼 환경은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께로 갈 수 있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그냥 바깥 환경과 동조할 뿐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절망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붙여준 이름, 즉 ‘교회의 반석’이라는 이름은 성취될 수 없을까요? 아닙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베드로 자신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도저히 반석될 수 없는 존재를 반석되게 하시는 분으로 예수님이 함께 계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예수님은 어느 한 순간에서도 베드로를 떠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이 바로 그 ‘닭’입니다. 예언 속의 닭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의 닭이며 베드로를 벗어나 예수님의 노선에 속한 닭입니다. 그 닭 울음 소리가 베드로를 떠나지 않았기에 베드로는 자신의 역사 속에 예언의 노선이 박혀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닭은 장단 맞추다시피하면서 울어댑니다. 베드로나 ‘나의 것’을 토해놓을 때마다 닭이 울므로서 베드로의 그 ‘나의 것’에서 나오는 배신을 예수님의 말씀의 예언 속으로 포함시켜버립니다. 즉 “나는 ∼하다”고 외치면 닭은 “그것도 예언이 포함되었거든‘이라고 맞장구칩니다. 이로서 베드로는 바로 죄인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예언에 의해서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 일이 성취가 됩니다.

예수님과 성도와의 결속은 이처럼 예언된 말씀이 등장하므로서 성사됩니다. 말씀이란 마치 이불 속을 헤집고 기어다니는 꼬마를 외부에서 바라보는 것과 같습니다. 꼬마가 이불 속을 다니면 그 두툼한 외형적 모양새가 꼬마의 움직임에 따라 같이 부풀려서 형태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성도에게는 예수님의 정보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들 자신을 포함하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꼬 자신을 포함시키는 나라라는 인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백이며 백 사람의 하나님 나라가 다 다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신의 경로’를 보편화시켜서 그 어느 누구도 자신을 포함한 하나님 나라는 진정한 천국이 아니라 인간의 나라임에 해당됨을 보여주셨습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이 들어가고자 하는 나라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예언되 말씀에 의해서 넣어주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곧 ‘예수님의 정보’가 되는데 이 ‘예수님의 정보’를 위해서 베드로 및 인간들은 철저하게 ‘용서받지 못할 자’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님 사랑하기 보다는 자신을 포함시킨 사항을 더 사랑하는 그런 철저한 죄인이 되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껍데를 평생을 덮고 다니는 인간 속에서 그것을 죄라고 들추어주면서 일방적인 선택성으로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공로가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정보’가 지배하는 사람이라서 천국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은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모든 영역에서 사방에 말씀에 둘러싸인채 사는 사람입니다. 즉 어디서나 닭 울음 소리가 들어오는 사람이요 그 울음 속에서 예수님의 울음이 담겨 있음을 아는 사람이요 그 울음 소리에 같이 우는 회개하는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짧은 인생이 예수님의 예언을 증거하는 도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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