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0. 10:12

사람들의 조롱 (마가복음 15장 21-32절)

사람들의 조롱

2009년 9월 20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5: 21-32          
                          
(막 15:21, 개정)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부터 와서 지나가는데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
(막 15:22, 개정)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막 15:23, 개정)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막 15:24, 개정)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막 15:25, 개정)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막 15:26, 개정)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막 15:27, 개정)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막 15:28, 개정) 『(없음)』
(막 15:29, 개정)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막 15:30, 개정)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막 15:31, 개정)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막 15:32, 개정)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구원 문제에 있어 사람들은 자신의 구원을 항상 예상합니다. 이러다 보니 자기만의 구원을 구원의 진수로 여기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은 개인 소유용이 됩니다. 이런 구원은 성경에서 말씀하지 않는 구원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이런 개인용도의 구원을 제켜놓는 구원입니다. 배제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모두 이런 오해로부터 출발합니다. 모두들 다 한 소리합니다. “날 구원하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해야 그 사람을 구원하는 겁니까? 일단 그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구원방식이 제시되어야 그 사람이 넙죽 받아들여서 구원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만 들어가는 그 사람만의 천국이 될 것입니다, 개를 실어나르는 개장 트럭을 보신 적이 있지요. 칸막이 마다 개 한 마리씩 들어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과연 천국에 칸막이가 쳐져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란 모든 인간들이 모두 감격하는 나라일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려면 나만이 이해되는 천국관은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각자 갖고 있는 천국을 버려라 하면 아예 “과연 내가 알고 천국말고 따로 또 천국이 있을까?”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냅니다.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들의 어려운 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문을 사람들이 열고 들어올 때는 나름대로 천국이 있음을 인정하고 오십니다.

뿐만아니라 그 천국에 들어갈 만한 나름대로 복안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 갖고 있는 구원의 방식을 박탈하게 만드는 천국관을 소개하게 되면 필히 반발하고 반항할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제시한 천국 방식을 코앞에 두고 보면서 사람들은 자기 방식과 전혀 맞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강도 사이에다 예수님을 배치하셔서 마치 예수님이 강도같은 질낮은 대우를 사람들로 받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두십니다. 아무튼 집에 두꺼비집을 내리면 단전되듯이 하나님께서는 그 누구도 자력으로 깨달아서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차단시키십니다.

고린도전서 1:22-23에 보면,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나 우리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못박힌 것을 증거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은 미련하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신기한 기적을 천국의 모습이라고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 때부터 숱한 기적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냄을 유대인들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눈에 신기해보이는 일들을 주워모아놓고, “나는 구원받은 자 맞다”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헬라인들은 어리석은 것들은 다 배제시키고 결코 어리석지 않는 방식으로 구원이 성사되어진다고 여깁니다. 소위 깨달음이지요 많이 공부하고 많이 연구하고 자기를 비우고 신의 경지에 이를 정도의 선행과 자기 절제의 방식을 동원시켜 구원에 이르고 싶어합니다. 즉 자기로 인하여 자신이 구원될 것을 고대합니다.

문제는 모든 인간이 다 이 두 가지 방식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십자가 앞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이런 협조가 있을 때만 십자가 사건은 만들어집니다. 사람들은 평소에 기적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갑자기 여러분들이 횡재할 일이 생긴다면 어찌 하나님의 일과 결부시키지 않겠습니까?  평소에 사람들은 평균적인 균형잡힌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 범위 내에서 크게 벗어나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에서 크게 벗어나면 인간의 아예 무시해버리고 거부해버립니다. 벗어나도 어느 정도이지 자신이 납득이 안되는 것이라면 강력하고 반발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예상한 방식보다 전혀 딴판으로 구원을 제시하기에 사람들이 이 방식을 어리석고 미련하게 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로는 이 어리석음이 구원이 되는 능력입니다. 어느 식당에 보니 전체를 ‘흡연구역’이라고 지정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여기에 금연구역이 어디있느냐고?” 그랬더니만 주인이 하는 말이 “화장실이 금연구역”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담배 안 피우시려거든 화장실에 가서 피신하고 있어라는 말이 됩니다.

원래 식당에 흡연구역과 금연구역 표시는 흡연자와 비흡연자를 격리하기 위한 조치입니다. 즉 비흡연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표시하라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지옥갈 사람으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한 사건입니다. 즉 우리 자신이 복음 믿는다고 훌륭한 자라고 스스로 인정하라는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뿐만아니라 우리 성도 내부에서도 십자가가 가운데서 개입해서 옛사람과 새사람을 격리시키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옛 사람은 항상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자기 의로움으로 수집하는 경향이 있고 그 수집된 자기 의를 통해서 자아임을 천명하고자 합니다. 이런 옛사람에 대해서 십자가가 성령을 통해서 작렬하면, 우리는 이미 그런 과거로부터 이탈된 신분인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십자가를 깨달 공로가 아니라 나 밖에 계신 예수님의 공로로 구원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되기 위해 인간들은 한껏 자신들의 천국가는 방식을 언급하면서 예수님을 절망적인 자리까지 몰아세우었는데 바로 그 지점이 십자가에서 피흘린 지점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자신이 똑똑하다고 간주하고 모든 판단을 시작합니다. 이 똑똑이가 인간의 능력을 발휘할 때마다 하나님은 점점 더 어리석음으로 대처하십니다. 이로서 천국문과그 사람은 점점 격리가 심해집니다. 모든 인간이 이 어리석음에 빠져있다면 누가 구원되겠습니까? 천국은 텅텅비게 됩니까?

고린도전서 1:26에 보면, “부르심을 보라”고 했습니다. 즉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깨달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만 고백합니다. 특 치면 예수님의 공로가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혼인잔치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상스럽게 모두 이 혼인잔치를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독자적인 자기 세계가 따로 있어 그것으로 문제없다는 겁니다. 임금님의 혼인잔치는 평소에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벌린 잔치가 아니었고· 일방적인 잔치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임금님이란 타인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호응을 모아서 벌리는 단합대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혼인잔치의 날짜도 참석할 사람들의 형편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도리어 잔치의 자리를 채우는 자들은 본인들의 일거리가 없이 길거리를 헤매고 다니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청함은 받았지만 택함을 입은 자들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데 청함과 택함의 차이를 예복을 입었느냐 입지 않았느냐 여부로 결정됩니다. 예복을 입을 생각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뭔가 졸지에 이용당하고 멍청한 존재가 되었다고 분개합니다.

결국 이 혼인잔치의 취지는 예복의 가치를 빛내는 잔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예복착용의 취지는 인간들의 아이디어 속에서 애초에 포함되어 있지도 않는 겁니다. 이것조차 임금님의 일방적인 조치라는 것을 고려해보면 결국 천국이란 ‘맞춤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신데렐라 같습니다. 아무리 다른 사람들이 신발에 발을 맞추려고 해도 맞지를 않습니다. 이처럼 천국 백성이란 사람의 조건을 요구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확정된 원칙에 맞춰들어가는 사람을 부르셔서 모집하게 됩니다. 바로 그 원칙이 십자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 공로와 죽으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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