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7. 09:47

버림받으신 예수님 (마가복음 15장 33-37절)


버림받으신 예수님

2009년 9월 27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5:33-37

(막 15:33, 개정)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막 15:34, 개정)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5, 개정) 『곁에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보라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막 15:36, 개정)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에 신 포도주를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고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 주나 보자 하더라』
(막 15:37, 개정)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성경은 사람이 죽었다고 다시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어느 골짜기로 데려가는데 거기에 바짝 마른 뼈들이 수북이 쌓여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 묻습니다. “저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말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인간들이 압니다. 하지만 죽은 인간이 다시 산다는 것은 인간들은 생각을 안 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힘으로 해낼 수 없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불가능한 일을 꼬투리잡는 식으로 말씀을 전개하십니다. 즉 인간들이 “못한다”는 것은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 거꾸로 보고 있었는가 하며는, 인간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자신의 일상의 끝부분에 잠시 달린 사건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평소에 늘 살아있는데 죽을 때만 죽음이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인간이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인간을 끌어당긴다’고 하십니다. 왜 그런고 하니 인간에게 죽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인간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은 죽음이 낳은 것이고 이 땅에 그 존재를 던진 것입니다. 죽음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즉 인간은 ‘죽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해도 인간은 죽지 아니하면 총으로 자기를 쏴죽이고 칼로 자신을 난도질해도 인간은 죽지 아니합니다. 요한복음 5:28-29에 보면, “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각을 반대로 가져가야 합니다. 죽음이 인간을 죽지 않게 만들어서 죽음이 무엇인가를 새겨주고 알려줍니다. 인간을 죽음을 말하기 위해 죽음의 바다 속에서 뽈록뽈록 튀어나오는 엠보싱과 같은 자아와 주체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오늘 본문이 불신자들의 이야기처럼, 엘리야라는 구원자가 와서 예수님의 몸체를 당장 십자가 형틀 위에서 내려놓는 기적이 필요만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몸으로 보여주시는 죽음은 오늘 본문의 말씀처럼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인간은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제대로 죽음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잘못된 죽음이란. 현재 자기 몸이 살아있다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정리되는 죽음의 의미입니다.

하지만 그 신체는 위선으로 똘똘 말아져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했습니다.(마태복음 18장) 어린아이들은 아무 것도 입지 않더라도 부끄러울 줄을 모릅니다. 창세기 2:25에 보면,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집 밖으로 나가면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사회가 요구하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는 옷을 입고 위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자신이 걸치고 있는 옷을 훌더렁 벗어버립니다.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위적인 것이 다 “더럽다”고 하십니다.

흔히 천국이란 죽으면 그냥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고 보시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의 나라’입니다. 의롭지 아니하면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로마서 4:25에 보면, “예수는 우리가 범죄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천국이란 단순히 이 몸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을 ‘범죄한 몸’으로 만들어서 데려가십니다. 이 ‘범죄한 몸’이 ‘의로운 몸’으로 변하지 아니하면 못들어가는 나라입니다. 범죄한 몸이 의로운 몸이 되는 것에는 인간이 관여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약속의 위력이 임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가지고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일생 안에서 ‘믿음은 이런 것이다’를 보여줄 수 있는 일이 발생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어떻게 생각하고 주목하고 있는가를 보십니다.

이삭은 죽었다고 도로 살아납니다. 이 일로 인하여 아브라함에게는,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삭이 중요함을 압니다. 이삭에게 일어날 일을 기대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이라는 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서 자신의 범죄함과 의로움이 관여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입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그분의 사흘만에 살아나심은 우리 믿는자의 범죄함과 의롭다함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약속된 성과임을 우리는 동의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이 ‘범죄함’을 위하여 우리 인간이 이 땅에 출현되어야 함을 압니다. 즉 우리 인간은 단순히 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알려주는 그 ‘죽음과 생명의 비밀’을 담아내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우리를 호출한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께서 자기 앞으로 호출하셨습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너 주위의 사람들,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갔느냐?” 인간은 누구나 자기 보다 먼저 존재한 타인으로 인하여 자아라는 것이 형성됩니다.

주위 인물들이 ‘너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되는 것이 옳아’라는 식으로 양육해왔고 훈육받아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안에 자신의 욕망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으로 가득채워져 있습니다. “나 어때요? 이렇게 되면 사람 대우해 주실 거지요?”라고 물어가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어느 정도 자아가 정립되었다고 여기면 그 때부터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해 줄 사람을 골라가면서, 선택해가면서 자기편으로 끌어당겨서 ‘자기만의 역사’를 짜나기가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묻기를,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다 어디를 갔느냐?”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인생을 이제 걷어치워라는 말입니다. 진정 네가 죄인인지 아니면 의인이 될 것인지는 타인의 시선들 속에서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너를 호출하신 예수님에게서 결정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의 심판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보고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이제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리라” 우리 인간들의 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죄하는 식으로, 혹은 자신만이 위하여 선택될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이런 몸, 저런 몸 다 제쳐두시고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몸을 제시합니다. 그 분은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 죄로 인하여 죽어시고 우리 의를 위하여 부활하신 예수님 몸이십니다.

잠이란 자연스럽게 오게 마련입니다. 인위적인 것은 다 더럽습니다. 인위적으로 종교 일을 하지마시고 잠들듯이 이 십자가 말씀으로 여러분 속에 찾아 스며들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의를 위해 사는 자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을 갈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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