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8. 22. 12:15

많은 사랑 (누가복음 7장 36-39절)


본문 : 누가복음 7장36-39절
제목 : 많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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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강-눅7장36-39(많은사랑)-luk100822

많은 사랑

2010년 8월 22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7:36-39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예수님과 바리새인만 있는 자리에 초대받지 않는 제 3자가 등장합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의 초대한 것은 자신과 예수님이 같은 레벨인 것과 과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등장한 제 3자는 그 동네에서 행실이 나쁘다고 소문난 여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이 이미 예수님과 같은 노선이 있다고 여기고 가차없이 그 여인의 존재를 자신의 노선 밖으로 밀어냅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자신과 같은 태도를 취해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만 예수님과 소통이 가능한 같은 노선에 있다고 여겨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태도는 의외입니다. 그 질나쁜 여인을 받아들이므로서 소위 ‘내 노선 안에 예수님과 함께’를 시도한 그 바리새인의 시도를 무산시키고 맙니다.

즉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같은 편이 아니라는 것을 그 질 낮은 여인과 같은 편이 됨으로서 대외적으로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이런 상황은 우리 인간들이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도 자신의, 가치가 스스로 소멸시키는 식으로 몰아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신분을 숨긴채 거지꼴로 나타난 이몽룡을 사랑으로 받아준 자는 춘향이 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춘향이의 태도가 참으로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에 춘향전은 그 허구성을 기대하는 독자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킵니다. 그러나 춘향전은 어디까지나 소설에 불과하지만 예수님과 질나쁜 여인의 만남은 결코 소설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은근히 기대하는 바도 아닙니다. 누가 그 현장에 있더라도 예수님의 노선 변경 조치는 이해가 되지를 않습니다. 왜 잘해보자는 사람을 구박하고 도리어 나쁜 짓으로 소문이 난 여인의 받아주는 겁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행위가 오직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만 아시는 구원의 법칙을 간직한 채 이 지상에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즉 이 행실 나쁜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이기 위해 예수님의 노선에 들어오게 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이 예수님 노선에 합류하면서 발생되는 현상은 ‘조롱’입니다. 이 ‘조롱’은 곧 예수님께서 구원을 이루어 나가시는 모든 행로에서 다 발생되는 겁니다. 흔히들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한다고 하지만 그 발견은 곧 ‘조롱’의 의미를 드러내는 작업에 참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다에서 소라를 얻고서는 그 내용물을 까먹고 나머지는 그냥 버리지만 하늘의 사랑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늘이 사랑에 들어가는 순간 ‘조롱받음’에 둘러싸이는 환경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까지만 조롱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믿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조롱다운 조롱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이 받는 조롱은 소위 자신을 가치있고 의로운 존재로 유지하고 지탱하고 싶어 노선에서부터 날아오는 노선입니다. 그러니까 숨어있는 하늘의 구원의 법칙에 붙잡힌 자가 아니라 자신의 구원을 위해 예수도 불어들이고 하나님도 불러들여서 같은 노선에 속한 것처럼 행세하고 싶은 자들로부터 날아오는 조롱입니다.

하늘의 사랑이 지상에 내려기 위해 심어놓은 뿌리는 이처럼 흔히 이해하는 사랑이 아니라 조롱입니다. 그 조롱 안에서 비로소 사랑의 꽃은 피어납니다. 성도의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마치 우주의 블랙홀을 찾아서 그 불랙홀 속에 들어가버리면 “여기가 블랙홀이다!”라고 소리칠 당사자마저 사라지지만 그 블랙홀 언저리에 배치되어 있는 경우에는, 블랙홀의 소재를 알려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블랙홀 주변에는 조롱받는 성도들이 배치되어 있어, “나는 비록 이런 조롱을 받는다 할지라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나의 가치보다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너무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는 고백을 통해서 사랑의 소재를 알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상적인 가짜 하나님과 참된 하나님의 흔적과의 차이점입니다. 욥기 19: 9-15의 말씀을 보면,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 사면으로 나를 헐으시니 나는 죽었구나 내 소망을 나무 뽑듯 뽑으시고 나를 향하여 진노하시고 원수 같이 보시는구나

그 군대가 일제히 나아와서 길을 수축하고 나를 치며 내 장막을 둘러 진 쳤구나 나의 형제들로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고 되어 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자신들이 경험상, 그리고 그동안 논리상 알고 있는 하나님을 거론하면서 욥의 처지를 자기 보다 못한 지식을 가진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욥은 분명히 밝힙니다. “내가 지금 직접 하나님에 의해서 시련을 받는 이 일 외에 무슨 달리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있단 말인가!”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참된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의 조롱받음을 통해서만 자신의 뜻을 나타내십니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됨을 나타내시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조롱받는다 하더라도 나는 상관없이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용서를 받고 있다고 고백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 노선에 합류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비행기 기내식은 이미 탑승료에 그 요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늘에 감추어져 있으면서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이 아시는 그 구원의 법칙은 구원될 사람으로 하여금 오직 ‘용서의 값’으로만 드러납니다. 이것은 인간이 죄를 더 지어야 구원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신이 저질은 죄값으로 구원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님의 용서값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아들의 노선에 합류시키므로서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않는 고백을 쏟아내게 만듭니다. 그것은 바로 “나 너무 많은 용서 받았어요”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 많은 용서하심이 선행되지 아니하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조롱거리 속으로 인생을 가게 됩니다.

소위 각자의 자신의 가치를 포기 안하고 도리어 그것을 높이려고 시도하는 이 악한 세상 속을 용서의 값으로 관통하게 만듭니다. 보란듯이!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곳이, 특히 교회라는 곳이 얼마나 위험한 곳임을 일깨어줍니다. 교회는 인간들이 하늘을 향해 나아가고자 하면서 마지막 찾는 장소입니다. 하지만 악마의 그물망 속입니다. 그 그물망을 뚫고 예수님의 조롱받는 노선에 합류하는 자는 그 와중에서 끊임없이 조롱을 받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늘의 뿌리가 되게하옵소서. 큰 용서의 뿌리가 되고 열매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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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강-눅7장36-39(많은 사랑)-luk100822

2010-08-23 13:53:43 조회 : 2    이름 : 오용익
 

041강-눅7장36-39(많은 사랑)-luk100822-(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7장 36절에서 3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2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7:36-39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 알았으리라 하거늘.”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같은 류 라고 알고 있지요. 예수님은 스승이라고 알고 있고 자기도 스승이니까 대화가 가능한 사람이라 생각해서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예수님과 자기가 같은 레벨이라 그렇게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여자 하나 끼어듭니다. 행실이 좋지 않고 그 동네에서 소문이 좋지 않은 여인하나가 예수님에게 와서 예수님의 발을 만지고 향유옥합을 깨뜨려서 예수님의 발을 씻기면서 예수님의 신체에 손을 댔습니다.

그것을 본 바리새인이 ‘이 예수가 진짜 선지자라면 이 행실 나쁘고 소문이 더러운 이 여자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 상종 못할 여인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인데 왜 그것을 그냥 방치하지?’라고 의심을 하면서 예수님의 정체가 뭔지를 궁금해 하는 겁니다. 소위 말해서 ‘당신의 실력, 영발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보자.’ 하는 그 대목이지요.

여기서 바리새인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 우리는 이것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도저히 이해 못할 상황으로 몰아갑니다. 이 죄 많은 여자가 예수님에게 하는 그 행동, 그 행동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안 되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여인이 자기 발을 만지면서 옥합을 깨고 눈물로 발을 적시고 향유를 붓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좋게 보시고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제가 길어서 읽지는 않았습니다만 도리어 누구를 책망하느냐하면 예수님한테 가까이 온 여인을 비난하는 사람들, 바리새인들을 비난합니다. 그리되면 이 소문 나쁜 그리고 실제로 행실이 나쁜 이 여자하나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 중심으로 노선이 두 개의 노선으로 새롭게 생겨났습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의 노선이고 또 하나는 이 행실 나쁜 여인의 노선, 이 두 개의 노선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노선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에게 심방을 요청해서 심방을 갔는데 집 근처에서 좀 논다 하는 사람, 머리는 깍두기 머리처럼 한 그 사람이 ‘아이고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할 때 그 심방을 요청했던 아주 고상한 장로님은 ‘야, 이 목사님의 노는 가락이 저쪽부류인가보다.’ 할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목사는 저 인간이 얼마나 질 나쁜 인간인지 멋도 모르고 자기 좋다 하니까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목사님을 초청한 그 장로님이 머릿속으로만 그것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목사님이 그 생각을 익히 아시고 그 장로님에게 ‘당신이 이 여인의 노선에 가담할 수 있는 인간인줄 아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당신 같은 인간이 이 여자와 나만의 영적인 새로운 노선에 개입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 겁니다. 다그치는 거예요. 여기서 이 두 노선의 특징이 뭐냐 하면 바리새인은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겠다는 거예요.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고 사람과 사람을 비교하는 그 선에서 그 다음에 추가적으로 예수님이 등장했으니까 예수님도 그렇게 비교하겠다는 겁니다.

‘나 바리새인은 저 행실 더러운 저 여자……’ 보통 사람들은 대개 그 여자가 창녀였을 거라고 봅니다, 돈 받고 몸 파는 여자, 막달라 마리아, 그렇게 보는데 어쨌든 바리새인과 저 여자를 비교해 볼 때 ‘내 노선은 거룩한 노선이고 저 창녀노선은 지옥 갈 더러운 노선이다. 따라서 두 가지 노선이 있고 여기에 예수님이 개입했다면 당연히 의로운 예수님을 내가 의롭다고 여기고 내 노선에 초빙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노선을 인정한다면 어떤 노선을 배척해줘야 하느냐하면 내가 싫어하고 내가 더럽다고 여기는 저 창녀 같은 여자노선을 배척하고 거기에 합세를 안해야지.’라는 거지요.

그래야 예수님을 초청한 자신의 의로움이 확증이 되는 거예요. 정당화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분명히 초청은 내가 했는데 예수님께서 창기의 행동, 여기서 행동이란 마음가짐이거든요, 마음가짐에서 모든 행동이 튀어나오니까, 그 사고방식 그 자체, 그쪽 노선에 가담을 하고 말았어요. 그러면 뻘쭘해지지요.

내가 저쪽 노선을 쳐버려야 내 노선이 그만큼 옳다는 것이 증명이 되는데 내가 쳐버린 저 노선에서 예수님이 놀아버리면 여기는 뭐가 됩니까? 여기는 자동적으로 예수님과 무관한 노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초청할 때 ‘나는 예수님을 좋게 봅니다.’라는 인식, 그것이 바리새인인식이고 그것이 교회 온 우리들의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한테 문제 큽니다. 우리는 지금 오해하고 있어요. 예수님에 대해서 뭔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 교회 누구한테 인수인계해야 되느냐 하면 창녀들하고 깡패들한테 인수인계해야 돼요. 여기에 창녀들과 깡패들과 양아치들만 앉아 있어야 돼요. 예수님이 그 교회 가 있습니다.

저쪽에는 찬양하고 감사하고 회개하고 난리가 났어요. 영광을 돌리느니 착하게 살자, 성화를 하자, 바른 아버지, 바른 남편 만들기 이런 것을 하고 있는데 그쪽 동네에 주님이 안가시고 이쪽 깡패동네에 와 있다는 겁니다.

서양 미술사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인상주의학파라는 것이 있는데 그 학파가 등장했던 계기가 있습니다. 파리의 미술대전에서 낙선한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 계기가 되어서 새로운 학파를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쪽 노선에서 봤을 때 저쪽 노선은 너무나 퇴폐적이라고 보고 주류에서 퇴출했던 겁니다. ‘너희는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소용없다. 이것은 사회에 기여를 못하는 거야.’ 하고 낙선을 시키니까 낙선된 사람들끼리 모여서 새로운 학파를 만드는데 나중에 이들이 주류가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평소에 나의 착함, 나의 의로움을 어떤 식으로 확인하느냐 하면 칼 가지고 난도질을 해서 추려내고 또 추려내고 잘라내고 또 잘라내어서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아서 그것을 교회라고 하고 그 교회에 예수님을 초청하고 초빙함으로 말미암아 이쪽 교회가 몽땅 천국에 갈 수 있는 방안을 만드는데 굉장히 애를 써요.

칼빈이라는 사람도 그렇게 했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성만찬에 참여 못한다. 떡과 포도주를 먹지 말라.’고 했어요. 저 같으면 안 먹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스위스에서 그 떡을 안 먹으면 스위스 법에서 불신자로 간주되어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떡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판정을 누가 내리는가, 목사 자기가 판정을 내려요.

그러면 목사 자기가 잘못한 것은 누가 판정을 내립니까? 천하에 판정 내릴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교회에 어떤 분위기가 있느냐하면, ‘일반교인들은 목사가 치리할 수 있어도 목사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사자, 어흥! 하나님의 사자이기에 하나님이 직접 치시지 사람이 쳐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런데 본문에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겁니다. 충분히 그러라고 해 주세요. 그래서 거기서 추방당하세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하도 본문이 어렵기 때문에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여인이 행실 나쁘고 소문 나쁜데 여자가 행실 나쁘다는 것이 바람피운 것 밖에 더 있겠습니까? 주먹이 세서 깡패 질을 한 것은 아닐 것 같고 간통을 했든 간음을 했든 그렇게 했다고 봅시다.

그렇다면 그 여자로 하여금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자리에 끼어들게 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을 구성하는데 있어서 어떤 요소들이 배치되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기존의 세상 사람들로부터 조롱받아야 한다는 요건을 갖춘 사람이 주위에 배치되어 있을 때 그 조롱받는 사람과 예수님자신을 일치시키고, 그래서 다 같이 기존의 세계로부터 조롱을 받는 가운데서 하나의 꽃처럼 피어나는 것이 주님의 사랑이 된다는 겁니다.

주님의 사랑이라는 것이 주변에 뭐가 깔려 있느냐 하면 조롱받는다는 것이 배치가 되어 있어야 돼요. ‘사랑을 아십니까? 사랑을 알게 되면 그 다음부터 여러분은 어디에 끌려 들어가느냐 하면 이미 조롱받는 여인과 조롱받는 예수님과 동일하게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을 수밖에 없고 놀림을 받을 수밖에 없고 무시와 멸시를 당할 수밖에 없는 코스, 노선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그 말입니다.

그냥 사랑만 달랑 빼먹지 마세요. 고동 까먹을 때 알맹이 까먹고 껍데기는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 까먹는 그 순간 우리는 조롱받는 노선에 걸려든 겁니다. 그러니까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초청할 때 조롱 받고 싶어서 초청한 것이 아닙니다. 존경받는 랍비, 유명한 스승이라고 여겼던 예수님을 초청함으로서 ‘너희들이 그렇게 존경하는 그 예수 레벨과 나의 레벨이 사실은 같이 놀 수 있는 레벨이다.’라는 것을 남에게 보여줘서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증거물, 나의 의로움을 확정짓기 위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하필이면 갑자기, 예를 들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성자로 추앙받는 종교계의 어른신이 끼어들면 분위기가 ‘이쪽 동네가 도사들이 노는 분위기구나.’ 라는 식으로 좀 사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저 여인처럼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긴다.’ 할 정도의 아주 꼴 보기 싫은 여인이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노림수가 들통이 나고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변 사또의 생일잔치에 노숙자가 왜 끼어듭니까? 그것도 사법시험에 낙방해서 거지꼴로 낙향한 그 이몽룡이라는 인간이 왜 왔어요? 이 몽룡이 거지꼴로 왔을 때 나중에 장모가 되는 이몽룡의 엄마가 그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가 능히 납득이 되는 상황입니다. 변 사또가 이몽룡을 무시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됩니다.

공부한다고 자기를 버리고 간 그 이 몽룡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다는 그 춘향이의 마음씨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게 소설이니까 그렇지 실제는 그럴 수가 없어요. 대학졸업하고 신림동 고시원에 고시준비 한다고 갔는데 벌써 5년의 세월이 지나니 사귀던 여자 친구는 자기 남자가 고시 패스하기만 기다리면서 뒷바라지 한다고 피아노레슨 하다 보니 나이가 벌써 서른이 넘어버렸죠.

그런데 5년 만에 나타나서 하는 소리가 ‘자기, 벌써 일곱 번 떨어졌어.’ 하면 그 여자가 하는 소리가 ‘자기 나 또 속이려 하지? 장난이지? 사실 합격해 놓고 재미있게 하려고 그러지? 춘향전 봤구나.’ 다 이렇게 생각하고 한번쯤 쑤셔 봅니다. ‘진짜 떨어졌거든.’ ‘장난 좀 그만 쳐라.’ ‘진짜 떨어졌거든.’ ‘장난치지 말래니까!’ ‘진짜라니까! 춘향이 마지막 대목에서 역전되어서 암행어사 출도 하는 그것은 없고 진짜로 떨어졌다니까. 이젠 진짜 끝났어. 나이가 걸려서 그 시험 치지도 못해. 아예 끝난 거야.’ ‘진짜?’ ‘진짜!’

이래도 받아줄 여인은 아마 없을 겁니다. 소설 속에서야 그렇게 되었지만 이게 소설이 아니고 현실이라면 우리는 아무도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뭐 하나 얻고자 해서 믿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이 몽룡처럼 시험에 떨어져서 짐 되는 인간을 뭐하려고 사귑니까? 귀신 붙은 것인데 떼어내야지요.

처음부터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 보통 오해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구원은 뭐냐? 구원은 왜 납득이 안 되게 하시는가? 오늘 이것을 아시면 성경 다 아는 거예요. 구원은 이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의논해서 만든 법칙이 구원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그런 소문 들은 적도 없고 그 내막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바도 없고 낯설기 짝이 없는 거예요.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서 두 분만 은밀하게 아는 그런 법칙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주님만 알기에 어떤 인간도 몰라요. 어떤 인간도 모른다는 말은 주님께서 내려올 때 그 법칙도 같이 내려온 거예요. 그 내려온 법칙에 붙잡히면 그때부터 그 법칙에 질질 끌려가는 거예요. 그 끌고 가는 법칙이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 주변에 조롱이라고 하면서 배치를 하는 거예요.

이것을 다른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물리학에서 블랙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블랙홀을 물리학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블랙홀의 언저리까지 가면 블랙홀이 이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블랙홀 속에 쑥 빠져버리면 이것이 블랙홀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음성도 없고 주체도 날아가 버리고 자아도 공중분해 되어 버리고 아예 없어요.

그래서 블랙홀, 이것은 모든 것들, 별들도 빨아들이고 빛도 빨아들이고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다 빨아 당겨서 삼켜버리는 우물 같은 깊은 공간이 우주의 암흑물질로 있는 거예요. 블랙홀을 설명할 때는 블랙홀에서 새로 뭔가 나온 것이 없고 다만 그 속에서는 그대로 빠져서 나올 수가 없기 때문에 그냥 블랙홀의 언저리까지만 가요.

‘넘어가면 안 돼.’ 그런데 그대로 넘어가버리면 ‘여기가 블랙홀이다.’라는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언저리까지만 가는데 그 언저리에 배치되어 있는 것이 뭐냐, 절벽인데 여기까지 빛, 빛, 빛 하다가 그대로 빠져버린다는 말이죠. 빛이 사라지면 어디가 어딘지 몰라요. 빛이 사라지기전의 언저리까지만 우리 눈에 띄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성전을 만들지요. 그 성전이 블랙홀이에요. 중간에 비어있습니다. 비어있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있는 것을 있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유, 있음인데 그 있음을 있게 하는 있음이 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없음에서 나온 거예요. 무의 세계에서 나온 겁니다. 물리학자들이 이제 눈을 뜨는 거예요.

과학자들이 종교를 그렇게 무시하더니만 이제 눈을 뜨는 거예요. 있음을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는데 저쪽 있음은 어떤 있음이라고 하고 그 있음 가지고 있음을 설명하는데 아무리 해도 설명이 안돼요. 그래서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넓고 큽니다. 없는 것이 있는 것보다 더 크고 더 깊고 안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양이 많아요.

‘보이는 세계는 짧고 보이지 않는 세계는 영원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더 길어요. 엄청납니다. 그런데 그 언저리, 육의 세계에서 영적세계로 막 넘어가는 그 언저리에 어떤 사람을 배치하느냐 하면 세리와 창기를 배치한다고요.

‘남들 보기에 천하의 죄인이고 저런 인간은 나라도 지옥 보낸다.’ 하는 그런 나쁜 놈들만 뺑 돌려서 배치해 놓았어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러겠지요. ‘목사님, 그러면 예수도 믿지 말고 나쁜 놈이 되면 구원받습니까?’ 모든 사람이 아니고 주께서 배치해서 그 언저리에 놓이는 사람은 누구냐 하면 그냥 ‘나 죄인이다.’ 이걸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고 ‘나 사랑 많이 받았어요.’라는 말을 하는 그 건방떠는 입, 죄를 실컷 지어놓고는 하는 말이 ‘나는 누구보다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하는 사람들이 동서남북 돌아가면서 뺑 돌려서 배치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이 ‘당신의 예수는 어떤 분이요.’ 하면 그들은 블랙홀에 들어가면 설명을 아예 못하니까 ‘하여튼 나 같은 인간의 죄를 많이 용서하고 많이 사랑하신 분이요.’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니 그런 이야기 말고 예수님의 키가 몇 센티고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이고 학교는 어디 나왔고 아버지는 누군지 그걸 설명해 달라니까.’

그것은 설명 못해요. 없는데서 있는 것의 연결은 ‘많이 사랑’ 그 외에는 다른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교회가 ‘많이 사랑’을 이야기해야 될 것을, 다시 말해서 검은 블랙홀에서 품어져 나온 그 언저리의 사람을 구원한다, 즉 검은데, 어두운데, 빈곳을 이야기해야 될 것인데 한국교회는 있는데서 출발해요.

헌금을 많이 했더니만, 심방을 많이 했더니만, 기도를 많이 했더니만, 전도를 많이 했더니만, 봉사를 많이 했더니만, 이렇게 항상 있는데서 저쪽을 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니고 자기 행함에 대한 보상을 얻는, 어떤 노동의 대가를 얻는 식으로 구원받는다고 되지요.

그렇게 되면 이 노선은 하나님 앞에 자기가 한 것이 의롭다는 노선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바리새인 노선이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 노선은 자기가 의롭다고 여기는 노선인 반면에 이 여인의 노선은 ‘나는 사랑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다.’는 이 노선입니다.

47절에 보면 “이러므로 내가 네가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행실 나쁜 여자가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주님께서 그 여인이 필요했던 것은 아버지하고 예수님만 아는 그 구조, 구원받는 법체계를 만들어낸 그 구조에 죄가 많은 여인이 아주 딱 맞습니다. 이 여자가 아주 멋지게 들어맞습니다.

그 여자는 이 땅에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는데, 그 언저리를 차지해서 그 사랑을 보여주기 위한 배치가 되느냐? 그 바리새인이 현장에서 조롱하고 놀려도 거기에 전혀 신경을 안 써요. 왜? 사랑받은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그 사랑을 감당을 못해요. 다른 교회는 전도한 사람에게 냉장고 같은 것을 주는 모양인데 만약에 우리 교회에서 전도한 사람에게 뭘 준다고 한다면 로또를 나눠주는 거예요.

로또복권을 나눠주고 주일날 예배 후에 다 긁어보기로 하는 거예요. 다 꽝이 나오니까 ‘에이 틀렸네, 에이 소용없네.’ 하고 있는데 저쪽에서 하나가 터졌어요. 20억짜리 대박이 났어요. 그러면 저 뒤에서 덩실덩실 춤을 출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이쪽에서 다른 집사님들이 ‘점잖지 못하게 저게 뭐야.’ 하면 조롱을 한다니까요.

‘저것은 평소 저 사람의 행동이 아닌데 왜 저렇게 나대지?’ 이렇게 놀리고 또 다른 쪽에서 ‘체신머리가 있어야지. 나이가 그만큼 들었으면 점잖게 행동해야지.’ 그런데 진짜 20억짜리가 당첨된 사람은 춤을 추는 거예요. 평소에는 그렇게 하지도 못하면서 폼도 안 나는 춤을 막 추는 거예요. 뭔가 터졌어요. 20억이 터졌어요.

주위에서 아무리 조롱해도 자기는 문제꺼리가 안 되는 겁니다. 로또 1등이 터졌다 그 말이죠. 예수님의 사랑이 터져버렸어요. 예수님의 ‘많은 용서’가 터져버리면 교회에서 누가 놀리고 험담해도 그것은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주 춤을 춰요. 옛날에는 세례 받으면 소를 잡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요즘은 세례를 줘도 감사하는 사람도 없어요. 세례 받을 때 소를 잡았대요. 자기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으니까 소를 잡을 만하잖아요.

문제는 로또 되었다고, 하늘나라 간다고 춤추는 것은 좋은데 그 때부터 그 사람은 주위의 그러한 용서를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위 의롭다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계속해서 받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줘야 자기가 처음 받았던 첫사랑이 계속해서 울컥울컥 솟아 나와요.

너무나 큰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그 받은 사랑을 자기가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개혁주의 문제에요. 사랑받은 적도 없이 논리로 따져서 사랑을 받았다고 해놓고는 그것을 자기가 관리해서 안 잊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 여인을 여자총회장 만들고 여자당회장 만든 것이 아닙니다. 여자목사들은 아무리 봐도 수상해요. 왜 그걸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여자는 주님 앞에 울고 회개해도 그때도 행실 더러운 여자고 그 다음날도 더러운 여자고 그 다음날도 더러운 여자고 죽을 때까지 그 동네에서 더러운 여자고 이민가도 더러운 여자에요. 그런데 바리새인은 반대가 되었어요. 바리새인들은 구원받을 때는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회개하고 받습니다. 그래놓고는 회개해서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자기 체면관리 자존심관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이 누적되고 중첩되어서 쌓여요. ‘나도 십 수 년 전에 은혜 받았다.’고 하는 그것이 자기의 가치를 높이는 하나의 밑천이 되는 거예요. 자기의 가치와 자기의 잘남을 높여서 ‘더 이상 나를 조롱하지 마라. 누구야, 날 조롱하는 인간이.’ 조롱 안 받고 자기만의 가치를 유지하려는 근거로서 하나님이 총동원됩니다.

그래서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저 죄인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합니다.’ 이렇게 하지요. 평소에 더러운 버릇이 들어서 그래요. 예수님을 초청하는 것 자체가 그만큼 우리는 열린 마음이라는 겁니다. 한국교회 하도 열렸다는 말을 해 놓아서 열렸다는 말만 들으면 소름이 돋아요. 자기 마음문은 닫아놓고 자꾸 열렸다고 우기고 있어요.

우리가 열리고 닫히고가 문제가 아니고 구원은 예수님하고 하나님하고만 아시는 그 법칙에 의해서 구원받는 겁니다. 우리 이 지상에서 닫혔느니 열렸느니 그런 것은 다 소용 없는 겁니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그 하늘의 법칙이 이 땅에 접촉을 할 때는 ‘조롱받음’, 그것도 ‘죄인이라는 이름으로 조롱받음’ 심지어 ‘개한테서도 누구에게서도 조롱받음, 멸시 당함’ 그것이 하나의 뿌리로 있다는 겁니다.

실제로 본문에 보면 이 여인은 예수님의 뿌리가 되는 그 발에다 향유를 붓고 울어요. 그러니까 이지상과 하늘의 유일한 맞닿은 자리는 놀랍게도 아무도 믿고 싶어도 못 믿게 하는 거예요. ‘조롱받고 싶어요? 그러면 믿으세요.’ 그것과 똑같은 거예요. 조롱받기 싫은 사람, 아직까지 자기 가치를 놓치기 싫은 사람, 그 사람은 하늘의 뿌리와 전혀 상관없는 악마의 뿌리에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성경전체가 그렇습니다. 욥기 19장 13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욥이 친구들을 보고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형제들도 나를 멀리 떠나게 하시니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내게 외인이 되었구나 내 친척은 나를 버리며 가까운 친구는 나를 잊었구나 내 집에 우거한 자와 내 계집종들은 나를 외인으로 여기니 내가 그들 앞에서 타국 사람이 되었구나 내가 내 종을 불러도 대답지 아니하니 내 입으로 그에게 청하여야 하겠구나 내 숨을 내 아내가 싫어하며 내 동포들도 혐오하는구나 어린 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대적이 되었구나.”(욥기 19:13-19)

그런데 그 전에 친구들이 욥에게 뭐라고 하는지 압니까? ‘하나님은 의로우시니 어떤 사람도 그 앞에 의롭다 할 사람이 없기에 욥아, 회개해라. 회개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실 것이다. 네 재산 날아간 것 걱정하지 마라. 회개만 하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할 것이다. 재산 날린 것 아쉬워할 것 없다. 그것은 회개하라고 주신 고난이니까 회개만 하면 나중에 재산도 자식도 다 돌려주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세 명의 친구들이 돌아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하나님은 이런 분이고 이런 분이고 이런 분이다.’ 그들은 그야말로 신학자수준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욥이 거기에 대고 뭐라고 되받아쳤느냐하면 ‘지금 하나님이 어디 있는데? 하나님이 지금 나한테 고난을 줘서 지금 고난 받는 이 현장이 바로 하나님이 손대고 있는 현장이다. 대체 너희는 하나님을 어디서 찾고 있느냐?’ 자꾸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을 끄집어내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직접 손대고 있어서 너희한테 조롱받고 있는 그 현장이 하나님과 접촉하는 그 뿌리이고 멸시당하고 조롱받는 그 현장 그 자체인데 대체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 그 놈의 삼위일체 하나님, 그거 해서 구원받습니까?

지금 한국교회 문제가 하나님을 믿어요. 하나님을 믿지 마세요. 예수를 믿어야 될 교회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욥을 이해 못하고 신학교 나왔다는 것이 기껏해야 욥의 친구들이 이해하고 있던 그 하나님이에요. ‘아하, 신학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 있구나.’ 그러면 하나님이 뭐라고 합니까? ‘네가 신학을 해서 남에게 조롱 적게 받으려고 하는 거 맞지? 네가 신학을 한 그것을 네 가치를 유지하려고 하지?’

지금 직접 하나님이 손대고 있는데 주님이 손대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자기가 배우고 남에게 들었던 모든 사고체계를 집어넣는다고 하면 결국은 가짜 하나님을 평생 동안 믿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진짜 예수님과 함께 있는 노선, 조롱받고 멸시당하는, 그리고 그저 입만 벌리면 ‘나 용서 많이 받았습니다, 나, 사랑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그것만 외치는, 그 사람과 함께 있는 예수님을 우리는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저쪽 노선에 가면 내 가치를 챙길 수가 없기에 그쪽 노선을 기피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최근까지 계속 생각하고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교회가 결국 막다른 골목이다.’ 하는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 달려가고 또 달려가고 계속 또 달려갔는데 그 달려간 사람들의 집결 장소가 교회였으며 교회가 마귀가 쳐놓은 마지막 그물이에요.

지옥 가기 위한 마지막 그물이 교회에요. ‘교회 오셨군요.’ 그러면 그대로 들쳐 메고 지옥으로 가져가면 돼요. 얼마나 교회가 위험한지. 제가 금요일에 어떤 안 믿는 사람과 한 시간 이상을 이야기했어요. 다른 사람은 아무 이야기도 안하고 가만있으니까 내가 이야기를 다 했는데 ‘교회가 참 위험한데 얼마나 위험한데인지 구경이나 한 번 해 보세요. 교회 오셔서 교회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를 알아보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어요.

‘교회 왔으니 그 때부터 내 가치는 높아 됩니다.’ 그래서 위험한 겁니다. 교회 와서 망하면 그것은 제가 축하드립니다. ‘목사님, 교회 왔는데 제가 멸시 당했어요.’ 그 때는 악수 먹고 싶어요. 축하해주고 싶어요. ‘아, 마귀의 그물에 구멍이 뚫린 모양이다.’ 하면서 ‘축하합니다. 다행스럽습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나는 남들을 조롱할 권리가 있어도 남들로부터 내가 조롱받을 이유가 없다.’라는 품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에게 예수님이 어떻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겠습니까? 안되지요.

안되니까 주님께서 하늘과 땅이 맞닿는 뿌리가 되는 지점들을 툭툭, 이 욥처럼 또는 본문의 간음한 행실 나쁜 여인처럼 도저히 우리로서는 납득이 안 되는, 자기 죄지은 것은 모르고 울면서 시집가기 위해서 모아놓은 값비싼 향수 다 깨서 부우면서 ‘나 사랑 많이 받았어요.’ 하는 여인처럼, 물 길러 갔다가 물동이도 버려두는 여인처럼 툭툭 그 흔적들을 배치합니다.

그 흔적들이 뭔지 다 모아보니까 블랙홀을 보여주는, 그 블랙홀의 언저리를 보여주는 배치되어 주님과 함께 조롱받는 주님과 같은 노선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게 남의 이야기가 되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제가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아주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떤 부부가 태국 가는 비행기를 탔는데 이 새댁이 얼마나 무식한지 남편의 속을 뒤집어 놓는 거예요. 물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물을 너무 많이 가져왔는데 비행기에서 뭐라고 하니까 그 큰 병에 든 물을 그냥 버리기 아깝다고 혼자서 다 마시는 거예요. 그걸 보고 남편이 속이 너무 상하고 화가 많이 나는 거예요.

부부는 어디에 여행을 가면 갈 때 싸우고 올 때 싸우고 집에 와서 안 싸우잖아요. 아내가 계속해서 무식하니까 남편은 계속해서 화가 나지요. 기내식을 먹는데 곱빼기를 시켰어요. 아내는 마음이 조마조마 하지요. ‘저게 얼마나 비싼 건데 곱빼기를 시켜 먹나.’ 하는데 남편은 곱빼기 시킨 것도 모자라서 포도주까지 시켜먹네요. 다른 사람들도 다 먹고 식사시간이 지났어요.

아내 혼자 돈 아까워서 시켜 먹지도 못하고 있다가 식사시간 다 지난 뒤에 남편보고 하는 말이 ‘당신 혼자 비싼 것 곱빼기 시켜먹고 기분 참 좋겠다.’ 하니까 남편 하는 말이 ‘그 기내식은 이미 탑승요금에 다 포함된 거야.’

우리가 구원받는 거요, 교회 충성, 봉사, 헌금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하늘나라 피안에 요금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다 포함되어 있는데 그걸 목사들이 속여먹는다니까요. ‘충성 안 해서 저주받았다, 뭘 안 해서 시집 못 간다.’ 맨 날 이런 사기만 치는데 얼마나 우리가 무식한지, 이미 요금 다 지불한 것도 몰라요.

무식한데서 멈추면 좋은데 무식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거기다가 자기 가치밖에 모르니까 이미 하늘나라에 우리를 넣어줄 때 그 예수님의 피 안에 다 포함이 되었습니다. 포함된 그 값이 뭐냐 하면 우리가 죄지은 값이 아니고 주님께서 죄지은 것을 용서하는 값입니다. 죄지은 것은 2십 6만 원쯤 죄지었으면 용서하는 값은 2억 5천만 원의 값입니다.

우리가 죄지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죄지은 것을 용서하는 그 값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이것도 중요한데 적는 분이 한 분밖에 없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지으면 안돼요. 죄지어봐야 2십 6만원어치 밖에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걸 보탠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기내식은 이미 탑승료에 다 포함이 되었다 그 말이죠.

예수님께서 이미 포함이 되었다고 알려주는 순간 그 행실 나쁜 여자는 그게 좋아서 자기가 따로 모았던 향수병을 다 깨버린 거예요.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이 이 용서했다는데 이 귀한 향수가 무슨 소용이 있나. 그 용서의 값이 더 센데.’ 한 거예요. 이 향수가 있다고 해서 내 가치가 높아집니까? 지금 내 가치를 따로 챙길 이유가 없는데. 내 가치를 따로 챙기는 짓은 저쪽 노선, 바리새인 노선에 있는 인간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말이지요.

4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 값을 이야기해요.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둘이 있다는 것은 두 노선 아닙니까, 두 노선,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데나리온은 요새 가치로 하면 한 10만원 하니까 오천만원쯤 되겠지요,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오백만원을 빚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그거야 당연히 5천만 원 탕감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하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예수님과 하나님만 아는 그 법칙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를 붙잡아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용서 값을 높이는 기능으로 역할을 하라고 우리에게 사명을 준 겁니다.

데카르트라는 사람이 그랬어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저는 말을 바꾸겠습니다. ‘사명이 있다. 고로 우리가 존재한다.’ 이미 용서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야 되는 겁니다. 악착같이 죄지으면서, 죄지으면서 악착같이 살아야 돼요. 그래야 우리의 죄 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고 용서 값이 올라가니까,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니까.

그렇게 해서 그걸 우리가 증거 한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질질, 질질 끌려가지요. 그것도 언저리에서, 죽게 되면 아예 빠지지만 죽기 전에는 블랙홀에 빠지지 않고 그 언저리만 도는 거예요. 서울 부산 대전 찍고 어딜 돌아다녀도 그 언저리를 돌아다닙니다. 어디가도 우리는 그 감추어진 주님의 사랑, 우리보기에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그 미련한 ‘피 값으로 너를 값 주고 샀다’고 했어요.

그 피 값이 용서 값입니다. 기내식은 그냥 공짜로 제공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것은 공짜로 사는 거예요. 공짜로 사는데 다만 우리 소유용으로 하지 말고 사명용으로 하는 겁니다. 사랑이 어느 정도로 대단하냐 하면 우리가 이 십자가복음을 아는 것 때문에 이 세상에서 어떻게 쫓겨나고 얼마나 비난받고 조롱받고 멸시당해도 조금도 그런 것에 신경 쓸 필요 없다는 식으로, ‘모르면 가만있어.’ 이런 식으로, ‘나를 값을 주고 샀다니까.’ 하는 그 기쁨.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사명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이걸 꼭 당부하고 싶어요. 주께서 우리를 그렇게 다루고 있다는 겁니다. 왜 그런가? 주님하고 하나님만 아는 그 구원의 법칙, 피의 법칙이 이 지상에서 우리를 이 땅에서 하나의 뿌리로서 접촉점으로서 활용하시는 거예요.

이런 인간, 자기 자존심과 자기가치밖에 모르는 인간도 용서받고 난 뒤에는 그렇게 조롱과 멸시를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셔서 주님 받은 그 조롱과 멸시가 우리의 참여하는 가운데서 우리 속에 뭔가 피어나요.

튤립 꽃송이처럼 피어나는데 그게 뭐냐, 사랑이 계속해서 피어나는 거예요. 우리 주님이 받는 그 조롱과 멸시에 비하면 우리가 받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주변에서는 조롱과 멸시고 속에서는 사랑이 피어나고, 하나의 꽃송이처럼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나가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우리가 끄집어낼 것은 공짜로 받은 사랑의 기쁨과 즐거움을 끄집어내도록 해 주시옵소서. 쓸데없는 자기 가치나 자존심이나 자기 신학지식 그런 것 나오지 않게 하여 주시고 자기신앙경력 나타나지 않게 해주시고 너무나 좋아서 감격하면서 주님의 피만 증거 될 수 있는, 입에서 고백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