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02 06:55

예수님과 세례요한 (누가복음 7장 18-23절)

본문 : 누가복음 7장18-23절
제목 : 예수님과 세례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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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강-눅7장18-23(예수님과세례요한)-luk100801

예수님과 세례 요한

2010년 8월 1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7:18-23

(눅 7:18, 개역)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눅 7:19, 개역)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눅 7:20, 개역)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눅 7:21, 개역)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눅 7:22,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눅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게 관심 갖는 것은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말은 곧 이 세상이 인생의 전부일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짐작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메시아 기다림은 실은 문제거리입니다. 왜냐하면 메시야를 기다리는 자신은 자칭 ‘잘나고 훌륭한 존재임에 틀림없어’라는 생각을 지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자신의 마음이 맞는 구세주를 고대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어떤 구세주를 고대함을 미리 아시고 그들이 전혀 알지 못할 뿐만아니라 도리어 “당신은 진짜 메시아가 아니야!”라고 단호히 배척할 수 밖에 없는 모습으로 자신의 아드님을 지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끝에 보면,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는 단서를 붙이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보다 먼저 세례 요한 앞서 보내십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세례 요한 노선을 따로 오시는 메시아를 과연 수용하느냐 마느냐라는 기로에 놓이게 됩니다.

즉 세례 요한을 진정 메시아께서 앞서 보내신 선지자임을 수용하려고 하니, 그 세례 요한이 하는 말과 그 결말이 너무 처참합니다.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에는 미약한 인생을 살다가 사람입니다. 누가 이 세례 요한 인생을 합류하려고 하겠습니까? 이로서 이 세상은 갑자기 등장한 두 명의 특이한 분들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관점 뿐만 아니라 예수님 보시기에도 두 분류의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보통 인간이요 다른 한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두 부류의 사람이 보입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요 다른 부류는 일반인들입니다.

각자가 동일한 사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평적인 편 가름으로 구분지어 결정 날 문제가 아니라 층위로 결정 날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27에 보면,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한 일반인들의 안목에 결함이 있음을 제기하고 나섭니다. 그것도  ‘하늘’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말입니다. 땅의 일에 하늘의 일을 집어넣으면 이 땅에 땅의 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의 일도 섞이게 되는데 바로 이런 상황을 땅의 사람들은 도저히 알아먹지 못한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3;12에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고 말입니다. 즉 땅의 일을 땅의 사람들이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늘과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해서 “못 믿으면서 나름대로 자칭 하늘의 사람이라고 우길 수 없게 하겠다”는 겁니다.

구원이란 로마서 10:9-11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면 구원얻는다”고 분명히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의를 알 수 있는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은밀한 생각을 눈치 챌 위인이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빛은 분명히 이 세상에 왔고 세상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어졌지만 세상은 그를 알지를 못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1:10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이러합니다. “우리가 모른다면 차라리 모르고 지내는 것이 편하지 않는가. 구태여 모르는 일까지 알고 싶지 않다. 어쩔래”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의 일’이라는 것이 우리가 천국 이야기만 덤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지옥 이야기도 하늘의 일에 속한다는 점입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땅의 일이란, 천국이던 지옥이던 일단 무시하고 자신이 구상한 인생만이 붙잡고 열심히 살아갈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의 일은 이런 인간들을 그냥 보고있지만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진짜 얼굴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입니다. 마태복음 6:20-21에 보면,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조차도 모르면서 천국행만 고집합니다. 만약에 자신만 덜렁 천국오고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옥에 들어가도 천국에서의 마음이 편하겠습니까? 불편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보물은 최종적으로 천국도 아니요 예수님도 아니요 자신의 육신의 열매인 자식이나 가족에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몸을 건드리십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을 자진해서 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픈 것은 일종의 쾌락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고차원 취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동의하지도 않고 자유 의사를 반영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자신의 신체에 고통이 주어진다면 기분 더러울 것입니다.

지옥이란 바로 이런 곳입니다. 일체 우리의 의사는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원치 않는 취급을 받으면서 고통은 고통대로 영원히 당해야 하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런 차원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세례 요한마저, 단지 너희들이 좋아하고 있고 믿을 수 있는 분이라는 점에서 너희의 그 자존심과 더불어 그 세례 요한을 옥에 갇히게 하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께서 친히 벌리시는 그 기적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 여전히 누구인지를 우리가 모르고 있음을 고발하는 차원에서 주어진 기적입니다. 즉 우리는 신체적으로 앉은 뱅이도 아니요 귀머거리도 아니요 소경도 아니요 죽은 자도 아니라고 우깁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마음 자세가 예수님의 말귀를 못알아 먹는 자들이라는 겁니다.

사람이 죽을 때부터 시작해서 비로소 자신이 완전히 무가치한 존재라는 것을 압니다. 자신이 믿을 것은 자신도 아니요 주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뿐임이 확실히 현실이 되어 나타납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기적 속에서 십자가의 그저 주신 사랑의 능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의 보물은 자신의 혈육이 아니라 예수님이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가 죽어 소멸해도 상관없는 존재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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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8강-눅7장18-23(예수님과 세례요한)-luk100801

2010-08-04 18:23:52 조회 : 3     이름 : 오용익
 
 
038강-눅7장18-23(예수님과 세례요한)-luk1008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7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7:18-23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렸어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란 우리를 살려주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서도 살게 하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겁니다. 죽을 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지옥에서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잠깐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살날이 창창 남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연세 많은 분들은 조마조마 해요. 이미 산 것은 날아가 버렸고 앞으로 살날은 며칠 안 남았는데 이렇게 살다가 죽고 난 뒤에 뭔가가 잘못되어서, 하늘나라 행정처리가 잘못되어서 혹시 영원한 지옥에 가면 어떻게하나 하는 걱정이 늘어지지요.

살아 있을 동안에는 방향을 바꿀 수가 있어요. 절에 가다 교회나아고 교회 나가다 절에 나가는 식으로 방향을 바꿀 수가 있는데 일단 죽어버리면 요지부동입니다. 바꾸지를 못해요. 부자가 막상 죽어 보니까 그동안 자기가 세상에서 부자라는 것이 말짱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리라 거지로 살 걸. 아직 게임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축구는 전반전만 뛰고 게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 인생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게임 안 끝났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거예요. 본게임 남아 있습니다. 죽어서 지옥 간 부자가 오죽 답답했겠어요. 아직도 안 죽었기에 사람들이 철이 없는 거예요.

안 죽었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천국, 지옥이 진짜 인생승부를 다 결정하는 것도 모르고 그저 바보처럼 눈에 보이는 그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안타깝고 답답해서 ‘아브라함님, 나는 이왕 버린 몸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동생들이 걱정되는데 좀 거지 나사로 보내서 전도를 하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네 코 앞에 성경책이 있는데 성경책 안 믿으면 죽었다 살아나도 또 죽여 버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가 판단하지 말고 성경말씀이라는 이 건조하고 답답해 보이고 딱딱해 보이고 이 성경 안 봐도 법에 걸리거나 누가 안 잡아가는, 성경 안 봤다고 해서 누가 돈 안 뺏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든 구원의 길은 성경 속에 있는 줄을 알아서, 이 성경말씀이 나를 살리는 줄 알아서 이 성경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 그 사람만이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성경책을 편 겁니다. 왜? 살아보려고, 인생 실수 안하려고, 우리가 사는 것이 다 실수잖아요. 사는 것이 다 실수지만 죽고 나서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그 문제만큼은 이것은 두 번 다시 실수해서는 안 되는 큰 문제입니다. 애 사법시험 떨어지고 대학에 떨어지는 그 문제는 재수하면 돼요. 사법고시 안 되면 공무원시험 치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장사하면 되고, 그것은 별 문제 안 됩니다.

진짜 문제는, 진짜 시험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이것은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 나왔다고 해서 거저 넣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네가 예수님을 네가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전체의 내용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데, 내가 전한 복음이 진짜 복음인데 그 진짜 복음이 뭐냐,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네가 입으로 시인하고 받아들이면 너는 구원을 얻으리라, 천국가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를 기다린 겁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분을 분명히 보내주실 거야.’ ‘누가?’ ‘하나님이.’ ‘왜?’ ‘구원의 두레박으로, 구원의 광주리로, (옛날 노아 식으로 하면) 노아가 만든 방주를 보내주실 거야.’라고 기다렸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누굴 기다려야 됩니까? 메시아가 오면 어떻게 알아보면 됩니까? 누굽니까? 세례요한입니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예수님입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증거가 뭡니까?’라고 사람들의 관심사가 구원자를 만나고 싶은 관심사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하고 너무나 다르지요.

그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진짜다.’ 세례요한이 단서를 딱 붙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라는 폭탄선언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예수님이 딱 나타나면 우리 능력으로 능히 가뿐하게 좀 배운 가락으로 또 교회 다닌 경력으로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데 세례요한이 단정하기를 ‘하늘에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분을 못 알아보는 메시아가 진짜 메시아’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 받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가짜메시아를 추종하고 진짜 메시아를 배격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23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다 같은 말씀인데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사람이 땡잡은 사람이다.’ 그 말입니다.

막상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 메시아, 구원자, 구원자, 천국 보내주시는 분’ 하고 막상 기다렸는데 막상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에이, 당신은 아니야.’라고 나온 겁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그리워하고 있던 가짜 메시아상이 있었는데 주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들이 고대하는 가짜 메시아 상 말고 진짜 메시아를 보내주는데 그들의 자기가 기대하고 있던 가짜 메시아 상 때문에 진짜 메시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배척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제가 설교 처음 할 때 이야기 하고 얼른 지나간 그 이야기 다시 할게요.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싶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지요. 우리는 그 말만 들으면 쉽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런데 문제는 진짜 메시아가 우리 앞에 등장하면 예수님을 죽였던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발휘되어서 ‘에이, 당신은 아니야.’하고 그 사람을 밀치고 배척하고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믿는 것이 아니고 ‘나, 당신 싫어. 나 당신 밉단 말이야.’라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식으로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메시아를 만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가 교회 다니고 봉사한 그 자기 힘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신바가 있는 사람, 하늘에서 주신 영을 받은 사람에 국한해서 눈떠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알아 모시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절차는 왜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습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만들어놓고 누가 들어올 것인가 말 것인가의 권한이 천국 가고 싶은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중에 천국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면 다 들지요. 손든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한에 의해서 ‘너는 아니야, 너는 빠져. 너는 맞아, 너는 와.’라고 구분하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그 구분 작업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진짜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분한다는 그 구분작업,선택작업에 대해서 동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고유권한이기에 우리 인간이 탈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빠지고 어떤 사람이 들어가더라도 참 잘하셨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입을 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왜 우리 엄마는 탈락시키고 내가 싫어하는 저 집 엄마는 왜 넣어줍니까?’라고 시비 걸지 마세요. 천국은 내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 주님의 나라입니다. 괜히 내 나라도 아닌데 자기나라 행세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양자로 입양되어서 그저 부름 받아서 들어가는 거예요. 용쓴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용쓰지 마세요. 용쓴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는 증거밖에 안돼요.

용쓰지 않더라도 들어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용을 씁니까? 아주 수상합니다. 뭔가 하늘에서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용을 쓰는 거예요. 목사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겁니다. 목사가 천당이니 지옥을 보내주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목사는 십자가 진적이 없어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도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십자가 진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진 것은 맞지만 내 십자가 진 것이 여러분을 구원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혹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공로는 오직 홀로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그 피지 그 외 다른 사람의 피와 노력과 중보기도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목사도 용쓸 필요 없어요. 교회 부흥시키겠다고 용쓸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아주 수상합니다.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세상을 둘로 분류하는데 그 분류작업은 우리 권한이 아니라 주님의 권한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일방적으로 분류작업 하는 메시아가 아니고 천국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다 자비를 베풀어서 넣어주었으면 좋겠다, 해서 우리가 조작하고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메시아상이 우리 안에 꽉 차 있어요.

만약에 우리보고 천국 갈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돈 빌려줘 놓고도 갚으라는 소리를 안 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드라마에서 착한 역할 하는 탤런트는 넣어주고 밉상 역할 하는 사람은 빼버리고 가수도 자기가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은 넣어주고 싫어하는 가수는 안 넣어주고.

우리 보고 천국 가고 말고를 결정하라고 한다면 내 중심으로 결정할 거예요. 이것은 나 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리되면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고 바로 내 나라가 돼요. 내 나라가 되면 이것을 가지고 환상이라고 합니다. ‘꿈속의 꿈’입니다. 본문에서 그 시대의 특이한 분이 두 분이 등장해요.

한 분은 세례요한이고 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두 분 다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예수님보고 ‘~내기’ 라는 식으로 하면 곤란하지만 그 당시사람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두 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세례요한 쪽이냐 예수님 쪽이냐, 사람들 쪽에서 어느 쪽이냐를 구분 짓게 되고 예수님 쪽에서는 또 세례요한과 일반인들을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세례요한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일반인을 또 구분하고, 이렇게 등장한 세 부류의 인물들이 각자 각자의 눈에 이쪽이냐 저쪽이냐, 저쪽이냐 이쪽이냐, 이렇게 분류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특이한 점이 있지요. 일반인들의 특징은 이왕 사는 인생 잘 살아보자, 살아보자는 데 특징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특징은 인간의 죽음을 앞장세워서 언급을 하고 이야기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 10년 20년 다니고 직분 받고 교회에 충성 봉사했다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진짜 믿음이 있는지에 대해서 몇 마디를 던져보면 단박에 그 사람의 방향을 알 수 있어요. 자기 죽음의 날을 고대하는 사람은 신자인 반면에 예수님 덕분에 이 땅에서 호의호식 하면서 하나님 능력 받아서 잘 먹고 잘살고 교회에서 기 안 죽고 살고 싶은 사람은 아주 수상합니다. 그분은 진짜 성령 안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받은 것 같기도 한 것이 아니라 안 받았지요.

가짜 예수 가짜 세례요한 붙들고 사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세례요한,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항상 무엇에 기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가 하면 ‘너는 이미 죽은 자야.’ 라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가 마땅하고 저주받는 것이 마땅하고 확실하다는 입장에서 모든 말씀을 토해놓는데 우리는 ‘주님 저 어때요? 주님 제 인간성 괜찮지요? 거기에 예수까지 믿으니 인간성이 얼마나 착합니까?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교회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복 주세요. 복 달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금요철야기도회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는데 저는 커피 마셔가면서 금요철야집회에 나와서 새벽까지 기도하고 새벽기도도 안 빠지고 나오는데 그 만큼의 복을 달란 말이에요.’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주께서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어봐야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줄 알아요. 살아 있으니까 자기가 입을 놀리면서 자기가 입을 놀릴만한 위치에 있는 줄 알고 나불거립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여보’ 하고 또 자식들은 ‘아버지,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하지요. 나중에 모든 유산을 제대로 안주면 ‘진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여러분이 돌아가실 때 갑자기 돌아가지 마시고요, 약간 실눈을 뜨세요. 죽는 척을 하면서 그 10초정도의 짧은 시간에 가족들 간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관 뚜껑을 열고 살짝 보세요. 이틀도 못가서 부조가지고 싸움합니다. 사람은 믿을 놈 없습니다. 믿을 분은 있어요. ‘죽으시고 부활한 그 분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 해서 믿을 분은 있어요. 이 세상에 믿을 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그 경로를 가신, 그 일을 해내신 그분만을 믿을 뿐이지 나머지는 다 ‘놈’입니다. 믿지 못할 놈이에요.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상대방을 보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 말이지요. 죽을 때는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다가도 돌아가고 난 뒤에는 ‘아, 시원하다. 빨리 끝내고 산에서 내려가자.’ 하면서 산에서 맛있는 것 먹고 또 웃기도 하고. 나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지 가족하고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같은 인간들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특히 교인들은 목사의 피조물이 아니에요. 목사 말을 왜 듣습니까? 제가 오늘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어떤 할머니 두 분이 산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번 달에 제사가 두 번인데.’ 그래서 가만 생각했지요. ‘이번 달에 제사가 두 번 이라는 거예요.’

그거 왜 합니까? 그걸 왜 하는데요? 그 할머니가 유교에 대해서 뭘 알고 공자 맹자에 대해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제사를 왜 드리는 것입니까? 주위에서 드리라고 하니까, 제사를 드리라고들 하니까, 그래야 좋은 며느리고 그래야 집안의 기강이 서니까 집안의 질서가 되니까 그래서 힘주니까, 제사 드려야 저주 안 받는다고 하니까, 제사 드려야 조상 덕을 본다고 하니까, 그런 소리들을 주변에서 다들 하니까 그런 거예요.

본인이 무슨 연구한적 없습니다. 제가 속으로 울화가 터져요. 믿지도 못할 인간 말을 왜 믿습니까? 변화 산에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만 들으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 말은 듣지 말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목사 말도 듣지 말고 아무 사람의 말도 듣지 말라는 겁니다. 직접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성령의 기름을 부은 자이기에 여러분 본인이 생각하고 본인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그게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목사의 설교는 뭐냐, 그냥 참고로 하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사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참고로 하는 거예요. 참고로 하는 것이지 왜 자꾸 눈에 띄는 사람들의 지시를 받습니까? 그만큼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를 잘 따라가면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주위에서 천당 간다고 해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성령으로 태어난 정도가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예고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어떤 의미에서 신자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대변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은 알지요.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는 화려했지만 끝날 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참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한 것이 아니에요.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처참했다.’ 그 세례요한은 지옥 갔습니까? 세례요한은 얼마나 특이한지 세상 어두움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오늘날 성도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지독하게 하나님을 욕하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죽을 때는 아주 철없는 소녀, 소녀시대 멤버중의 하나같은 그런 소녀가 농담 삼아 한 그 이야기, ‘나는 저 아저씨의 목이 필요해요.’ 했는데 그것도 자기 말도 아니고 제 어미가 시킨 이야기에 그만 목이 잘리게 돼지요.

참 그 엄마는 못 됐어요. 꼭 탁구 계모 같아요. 얼마나 못됐는지, 세상에 사람을 죽여도 목을 잘라서 쟁반에 올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지금껏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너는 기필코 쟁반에 목이 날아가야 돼.’라는 쪽으로 계속 밀어 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 그 시대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그 세례요한, 성도라면 이렇게 믿어야 성도답다는 그 세례요한이 이 땅을 비참하게 살았다 그 말이죠.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너희들이 평소에 너 중심으로 생각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아는 삼위일체, 예수, 성령은 다 가짜’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을 밟아서 예수님을 보라는 거예요. 왜? 세례요한이 먼저 왔고 그 뒤에 예수님이 왔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여러분, 제 뒤에 메시아가 옵니다.’라고 해놓고는 휙 돌아서서 ‘예수님 맞지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바로 가지 말고 세례요한의 자리에서, 세례요한을 경과해서 주님을 바라보면 비록 목이 잘리는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고 내 사명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아주 즐거이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세례요한을 경과해서 주님께로 가는 길, 그런 천국이 있는 반면에 ‘세례요한은 너무 심하다. 이것은 내가 흉내 못내. 아저씨는 비키세요.’ 하고 세례요한을 제켜버리고 가게 되면 거기에 마귀가 우리가 원하는 가짜 그리스도를 만들어 놓았어요.

고난 없는, 십자가 길이 아닌 가짜 그리스도, 한국교회가 제시하는 가짜 그리스도, 교회 부흥되고 선교사 많이 보내고 돈 내면 복 받는 이 가짜, 땅값 오르고 애 공부 잘하고 시집 못가는 사람 시집가게 해주고 장가 못가는 사람 시집가게 해주는 이 가짜 그리스도, 우리 딸내미도 시집 안가서 큰 일이예요.

세례요한을 왜 등장시켜 놓았겠습니까? ‘나는 쇠해야 되고 내가 쇠하고 주저앉는 그 장면 따라서 뒤에 서서히 등장하는 그리스도가 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지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그 비참한 인생길에서 세례요한을 수그리, 해서 약간 세례요한이 수그리면 그 뒤에 계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그렇게 보여준 겁니다.

이게 신앙이라고, 이것이 하늘에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고 외쳤던 그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결부상태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왜 주님께서 세례요한의 목을 베임 받게 하는 겁니까? 사람들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지식을 쌓으려고 공부하는 이런 것은 힘이 안 들어요.

자기가 자기를 때리는 것도 힘이 안 들어요. 그런데 남이 내 신체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건드릴 때 기분 나빠요. 이것은 기분 더럽습니다. 특히 여름철에 지하철에서 평소에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자유다.’라고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지를 감히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하철에 앉아버리면 그 옆 사람들은 튕겨 나가버립니다.

여름철에 그 뜨거운 체온 36.5도에 데이면 차라리 서서 가는 것이 낫지 앉아가는 것이 괴롭습니다. 여자라면 몰라도 울퉁불퉁한 남자가 곁에 오게 되면 더 그렇고 여름에는 여자라도 귀찮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내 육체에 손대고 내 육체를 아프게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라도 용서가 안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네 마음 있는 곳에 보물 있다.’고 했거든요. ‘네 마음 있는 곳에 보물 있다.’고 하니까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두면 되지.’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미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 하늘의 일이 섞여버린 거예요. 섞어 놓고 ‘못 알아보지롱.’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마음 있는 곳에 보물 있다.’고 하신 것은 이렇게 됩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 있다. 그러니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는데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천국에 갔다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랑하는 딸이 천국에 못 오고 지옥에 갔다 합시다. 그러면 천국 간 여러분의 맘이 편하겠습니까?

안 편하지요? 그러면 그 안 편한 사람의 보물이 어디입니까? 천국이 아니고 자기 딸입니다. ‘누구야! 내 딸을 지옥 보낸 자가 누구야? 하나님이야? 그러면 나는 천국이 싫어. 나를 내 딸과 함께 지옥에 합류시켜줘. 나는 딸과 함께 지옥 가는 것이 내 양심에 합당하다.’ 이렇게 나올 겁니다.

‘우리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니까 자기 딴에는 ‘나는 천국만 좋아해요.’ 하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너무너무 몰라요. 바로 내 육신이 보물이고 남의 자식은 싫고 내 육체에서 태어난 내 육신과 모든 돈을 투자하는 그 투자의 대상이 되는 내 자식이 예수님보다 더 귀한 보물로서 작용하는 이상 그 분은 천국에 가도 천국에 온 것이 아니고 지옥에 온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천국이란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천국이죠.

그것을 좀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옴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일이 이 땅에 같이 섞였어요. 섞였다 하니까 어떤 분들은 제 말을 듣고 ‘아, 예수님이 천국 이야기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하늘의 일이 땅에 섞이면 천국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도 이야기하고 지옥도 이야기합니다.

천국도 이야기하고 지옥도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여기 지옥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5절에 보면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미 하늘의 분이, 하늘에 계시던 분이 이 땅에 이미 섞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땅의 일도 모르면서 하늘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니고데모를 나무랐거든요. ‘하늘 쳐다보지 말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어떤 소리를 하고 어떤 말씀을 하는지 네가 납득이 되느냐.’ 그 말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지옥이 뭐냐, “만일 네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렇게 되면 우리가 땅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다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 거지요. 하늘에서 보는 땅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데 땅에 살고 있는 내가 보는 땅은 시선이 몇 킬로 안가요. 날씨 좋은 날은 한 20킬로미터를 본다면 날씨 나쁜 날은 산 위에 가도 한 10킬로미터 밖에 안돼요. 10킬로를 보는 것 가지고 무슨 땅을 압니까? 세상을 뭘 압니까?

여행해 봤자 자기가 여행한 그 코스만 알지 우간다와 멕시코는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우리는 세상을 모른다고요. 위에서 봐야 돼요.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세상을 봤기 때문에 이 땅이 사실은 지옥의 대기소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대해서 알려줘서 아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 지옥에서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사람들이 ‘지옥? 까짓 거 지옥 나중에 가주지 뭐.’ 하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자기를 치는 것은 괜찮아요.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남이 나를 치는 것은 기분 더럽다니까요. 왜 내 몸을 남이 칩니까? 남이 내 몸을 왜 건드려요. 기분 굉장히 나쁘잖아요. 옆 사람 건드려보세요. 기분 나쁘지요. 심지어 교회에서 부흥회 할 때 ‘우리는 형제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껴안아 주시고 할렐루야, 해주세요.’ 하는데 그것도 싫어요.

왜 서로 남남인데 총각 처녀가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껴안고 난리입니까? 평소에 원수지간인데 ‘김 집사님’ 하고 폼 내 봤자 입니다. 제가 말 했지요. 목사 말 듣지 말라고요. 그런 말 들으면 안돼요. 내가 사랑하고 싶으면 악수 먹는 것이지 목사가 전체 회중에게 같은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목사의 자기 욕심입니다.

분위기 좋은 교회 만들어서 자기가 으스대고 싶은 거예요. 하여튼 목사 말 듣지 마세요. 성경 말씀을 들으세요. 성경 말씀에 보면 지옥이라 하는 곳은 내 편한대로 내가 장악하는 데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중들이 잘해요. 무소유 같은 것, 40일 금식하는 것, 그런 것은 자기가 스스로 하니까 즐겁고 그것은 일종의 쾌락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데서 오는 쾌락, 자기가 이렇게 겸손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 너는 욕심 부리면서 살지만 나는 욕심을 버리고 산다는 우월감, 자긍심, 자아도취, 그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도사되었다는 자아실현, 여러분, 자기가 스스로 하는 순교는 순교도 아닙니다. 하나의 취미생활이에요.

기도원에 가서 40일 금식하는 것, 그것은 자기가 판단했고 자기가 결정내리고 자기 의지로 하는 것, 그것도 자꾸 해보면 재미있어요. 지옥은 그런 것이 아니고 원치 않는 고통을 준다니까요. 나가고 싶어도 못나가요. 삼청교육대 같아요. 강제로 잡아와서 강제로 훈련시키는 거예요. 이 강제가 문제에요. 지옥의 문제는 강제로 한다는 거예요.

결국 모든 인간은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육신을 사랑하고 맘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이것은 당연히 원치 않는 고통속의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을 일러주러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으로 설교 끝입니다.’ 하면 굉장히 섭섭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못갑니다.

주님께서 못 간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어요. 네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전부 다 조작해낸 거예요. 가짜입니다. ‘하나님, 저 지옥 보내주세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천국가야 되는데 ‘나 지옥 보내주세요.’라고 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저 사람들 다 떨어져도 나 혼자 천국가게 해 달라.’고 하지요.

그 따위 사고방식을 갖고 그 따위 사고방식에 맞는 그리스도 예수를 찾으니까 그게 가짜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은 지옥가야 한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떠밀었고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받는다.’ 문제는 그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어요.

세례요한도 못 믿으면서, 세례요한도 싫어하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나보고 지옥 가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원치 않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그분을 사랑 합니까? 나를 천당 넣어준다는 그 소리를 좋아하지요. 그 다음에 본문 봅시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세례요한은 이 땅에서 처참하게 망가지는 것으로 인생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하면 누가복음 7장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소경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뜻도 아무것도 모르는 소경이고 우리가 귀머거리고 우리가 앉은뱅이고 우리가 죽어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저주이야기를 듣게 되면 ‘주님이여, 눈은 괜찮은데 약간 귀가 안 들려요.’ 이런 식이에요.

‘우리는 아직도 쓸 만하고 아직도 건전하고 아직도 안 죽었으며 주께서 우리에게 서로 서로 거래하고 흥정해주시면 지금 이런 상태로도 언제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내가 건전하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그래서 예수님을 내 능력으로 믿어서 그래서 천국 가겠다는 시도를 하는데 주님은 세례요한을 앞장세워서 전부 다 불도우자처럼 밀어버립니다.

다 밀어서 ‘네가 바로 앉은뱅이고 소경이고 죽은 자다. 그런데 내가 온 것은 죄인을 죄인의 요구사항으로서가 아니라 죄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귀머거리를 들리도록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고, 예수님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가 서게 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하고, 찬양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에 찬양하고, 구원받은 자이기에 들려지고, 구원받았기에 보이고, 구원받았기에 네가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산자가 되고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영원히 산자가 된다.’는 이것이 곧이곧대로 믿어지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이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그리되면 내 보물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 자식이 보물이 아니고 내 남편이 보물이 아니고 이 교회가 보물이 아니라 비로 예수님이 보물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보물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런 자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그런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과 흥정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했습니다. 세상이 깨닫지 못해요. 깨닫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것은 주님의 권세가, 주님의 능력이 임한자만이 깨닫는데 그런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것은 육이나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1:12,13)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빛이 왔으되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제가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할지 압니까? ‘모른다고? 그러면 그냥 편하게 살래.’ 이렇게 나온다고요. ‘예수? 그걸 꼭 알아야 되느냐. 십자가 복음을 꼭 알아야 되느냐? 나는 이대로 살 테니 건드리지 마. 난 그냥 편하게 살래.’ 여러분,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 아직도 자기가 자기 몸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편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지옥가기 전의 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사고로 산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죽고 난 뒤에 보니까 원치 않는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 세계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게 사실은 우리가 갔어야 될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우리가 갔어야 될 세계에요.

제가 금요일에 강릉 갈 일이 있어서 갔습니다. 장례식 참석할 일이 있어서 갔어요. 경북 봉화를 지나고 춘양 지나고 승리 지나 도계를 지나가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경치가 좋아서 목을 죽 빼서 볼라 치면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또 경치가 좋다 싶어서 좀 볼라 치면 들어가 버리고, 꼭 우리 인생 같아요.

야, 인생 좋다, 싶으면 지옥으로 들어가 버리고, 좀 살만하다 싶으면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네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고.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즉지 않고 살아 있기에 우리가 이 말씀을 듣지만 죽지 않은 상태에서 세례요한처럼 죽음으로 가서 살게 하는 방법, 죽음이라는 것을 미리 챙겨놓고 그 죽음 앞에서 ‘너는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좋고 하나님의 사랑 그 십자가 피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으라.’는 식으로 주님은 우리 기차를 강릉으로 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장례식장에 죽음을 만나보기 위해서 갔지요. 그런데 도중에 정동진, 망상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다 내려버려요. 진짜 인간을 보려고 한다면 장례식장에 가라는 것이 전도서에 있습니다. 장례식에서 ‘아, 이 피서 철에 이 무더운 날에도 돌아가는 분이 계시는 구나. 좀 다른 날 잡아서 돌아가지 이 피서 철에 그것도 피서지로 유명한 강릉에서 돌아가면 교통체증이 얼마나 심한데.’ 하지만 그것이 주님 맘 대로예요.

인간은 죽을 때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가더라 그 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원치 않는 인생길이었어요. 그런데 인간은 악마의 술수에 넘어가서 자기가 원해서 그 인생길을 갔다는 겁니다.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 내 맘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죽는 시점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있을 때 잘해! 있을 때!’

꼿꼿하게 산다고 잘산 것도 아니고 인생 굽었다고 실패도 아닙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하데요.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쓸모 있는 나무는 다 베어서 목재로 사용하지만 쓸모 없는 굽은 나무는 대대로 조상 무덤을 지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굽은 나무 같은 인생이지만 죽음을 미리 알고 지옥을 미리 아는 우리를 하나님이 세례요한처럼 쓰시기 위해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늘에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지금도 여러분들을 주관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되라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나의 주제를 파악하라고 계시는 메시아인줄 압니다. 세례요한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죽었다 할지라도 세례요한은 끝까지 예수님 증거 한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인생 실패했다고 남들이 이야기해도 저희들은 이미 성공한 사람으로서 주님 만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의 유일한 보물로 간직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맘을 그 나라와 의에 두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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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08.04 19: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038강-눅7장18-23(예수님과 세례요한)-luk100801

    2010-08-04 18:23:52 조회 : 3 이름 : 오용익


    038강-눅7장18-23(예수님과 세례요한)-luk100801-(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7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7:18-23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이 누구를 기다렸어요.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메시아란 우리를 살려주시는 분입니다. 이 땅에서 계속 사는 것이 아니고 천국에서도 살게 하시는 분이 메시아입니다. 이 말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겁니다. 죽을 뿐만이 아니라 영원히 지옥에서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 계시에 의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잠깐 사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살날이 창창 남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연세 많은 분들은 조마조마 해요. 이미 산 것은 날아가 버렸고 앞으로 살날은 며칠 안 남았는데 이렇게 살다가 죽고 난 뒤에 뭔가가 잘못되어서, 하늘나라 행정처리가 잘못되어서 혹시 영원한 지옥에 가면 어떻게하나 하는 걱정이 늘어지지요.

    살아 있을 동안에는 방향을 바꿀 수가 있어요. 절에 가다 교회나아고 교회 나가다 절에 나가는 식으로 방향을 바꿀 수가 있는데 일단 죽어버리면 요지부동입니다. 바꾸지를 못해요. 부자가 막상 죽어 보니까 그동안 자기가 세상에서 부자라는 것이 말짱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차리라 거지로 살 걸. 아직 게임은 끝나지도 않았는데, 축구는 전반전만 뛰고 게임이 끝나는 것이 아니거든요.

    우리 인생 눈에 보이는 것으로 게임 안 끝났습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한 거예요. 본게임 남아 있습니다. 죽어서 지옥 간 부자가 오죽 답답했겠어요. 아직도 안 죽었기에 사람들이 철이 없는 거예요.

    안 죽었기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천국, 지옥이 진짜 인생승부를 다 결정하는 것도 모르고 그저 바보처럼 눈에 보이는 그 세상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안타깝고 답답해서 ‘아브라함님, 나는 이왕 버린 몸이지만 아직 살아 있는 동생들이 걱정되는데 좀 거지 나사로 보내서 전도를 하게 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니까 아브라함이 하는 말이 ‘네 코 앞에 성경책이 있는데 성경책 안 믿으면 죽었다 살아나도 또 죽여 버린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가 판단하지 말고 성경말씀이라는 이 건조하고 답답해 보이고 딱딱해 보이고 이 성경 안 봐도 법에 걸리거나 누가 안 잡아가는, 성경 안 봤다고 해서 누가 돈 안 뺏어 가는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든 구원의 길은 성경 속에 있는 줄을 알아서, 이 성경말씀이 나를 살리는 줄 알아서 이 성경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 그 사람만이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성경책을 편 겁니다. 왜? 살아보려고, 인생 실수 안하려고, 우리가 사는 것이 다 실수잖아요. 사는 것이 다 실수지만 죽고 나서 천당 가고 지옥 가는 그 문제만큼은 이것은 두 번 다시 실수해서는 안 되는 큰 문제입니다. 애 사법시험 떨어지고 대학에 떨어지는 그 문제는 재수하면 돼요. 사법고시 안 되면 공무원시험 치면 되고 그것도 안 되면 장사하면 되고, 그것은 별 문제 안 됩니다.

    진짜 문제는, 진짜 시험은 ‘천국이냐, 지옥이냐, 지옥이냐 천국이냐.’ 이것은 초등학교만 나왔다고 해서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대학 나왔다고 해서 거저 넣어주는 것도 아닙니다. 로마서 10장 10절에 ‘네가 예수님을 네가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성경전체의 내용이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사도바울이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받는데, 내가 전한 복음이 진짜 복음인데 그 진짜 복음이 뭐냐,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네가 입으로 시인하고 받아들이면 너는 구원을 얻으리라, 천국가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자를 기다린 겁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분을 분명히 보내주실 거야.’ ‘누가?’ ‘하나님이.’ ‘왜?’ ‘구원의 두레박으로, 구원의 광주리로, (옛날 노아 식으로 하면) 노아가 만든 방주를 보내주실 거야.’라고 기다렸던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누굴 기다려야 됩니까? 메시아가 오면 어떻게 알아보면 됩니까? 누굽니까? 세례요한입니까? 아니라고요? 그렇다면 예수님입니까? 그렇다면 그분이 메시아라는 증거가 뭡니까?’라고 사람들의 관심사가 구원자를 만나고 싶은 관심사였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하고 너무나 다르지요.

    그 세례요한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진짜다.’ 세례요한이 단서를 딱 붙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라는 폭탄선언을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같으면 예수님이 딱 나타나면 우리 능력으로 능히 가뿐하게 좀 배운 가락으로 또 교회 다닌 경력으로 믿을 수 있다고 여기는데 세례요한이 단정하기를 ‘하늘에서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아무도 그분을 못 알아보는 메시아가 진짜 메시아’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령 받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가짜메시아를 추종하고 진짜 메시아를 배격하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예수님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23절에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다 같은 말씀인데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지 아니하는 사람이 땡잡은 사람이다.’ 그 말입니다.

    막상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그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 메시아, 구원자, 구원자, 천국 보내주시는 분’ 하고 막상 기다렸는데 막상 예수님이 등장하니까 ‘에이, 당신은 아니야.’라고 나온 겁니다. 그들은 이미 그들이 그리워하고 있던 가짜 메시아상이 있었는데 주께서 그것을 아시고 ‘그들이 고대하는 가짜 메시아 상 말고 진짜 메시아를 보내주는데 그들의 자기가 기대하고 있던 가짜 메시아 상 때문에 진짜 메시아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는 거예요.

    배척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뭐냐, 십자가 사건이라는 겁니다. 제가 설교 처음 할 때 이야기 하고 얼른 지나간 그 이야기 다시 할게요. ‘누구든지 구원을 받고 싶으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했지요. 우리는 그 말만 들으면 쉽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을 수 있을 것 같지요.

    그런데 문제는 진짜 메시아가 우리 앞에 등장하면 예수님을 죽였던 사람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이 발휘되어서 ‘에이, 당신은 아니야.’하고 그 사람을 밀치고 배척하고 죽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믿는 것이 아니고 ‘나, 당신 싫어. 나 당신 밉단 말이야.’라는 식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식으로 우리에게 오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메시아를 만난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자기가 교회 다니고 봉사한 그 자기 힘이 아니라 하늘에서 주신바가 있는 사람, 하늘에서 주신 영을 받은 사람에 국한해서 눈떠서 예수님을 알아보고 알아 모시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절차는 왜 필요한가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습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에게 다 개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천국을 만들어놓고 누가 들어올 것인가 말 것인가의 권한이 천국 가고 싶은 우리한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이 중에 천국가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면 다 들지요. 손든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권한에 의해서 ‘너는 아니야, 너는 빠져. 너는 맞아, 너는 와.’라고 구분하는 그 작업을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셔서 그 구분 작업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이 진짜 성령을 받았다면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구분한다는 그 구분작업,선택작업에 대해서 동의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고유권한이기에 우리 인간이 탈취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빠지고 어떤 사람이 들어가더라도 참 잘하셨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입을 뗄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돼야 돼요.

    ‘왜 우리 엄마는 탈락시키고 내가 싫어하는 저 집 엄마는 왜 넣어줍니까?’라고 시비 걸지 마세요. 천국은 내 나라가 아니고 아들의 나라, 주님의 나라입니다. 괜히 내 나라도 아닌데 자기나라 행세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양자로 입양되어서 그저 부름 받아서 들어가는 거예요. 용쓴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용쓰지 마세요. 용쓴다는 것은 그만큼 믿음이 없다는 증거밖에 안돼요.

    용쓰지 않더라도 들어갈 수 있는데 왜 그렇게 용을 씁니까? 아주 수상합니다. 뭔가 하늘에서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용을 쓰는 거예요. 목사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겁니다. 목사가 천당이니 지옥을 보내주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목사는 십자가 진적이 없어요. 그게 어디 나오는가, 고린도전서 1장에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해도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나는 당신들을 위해서 십자가 진적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진 것은 맞지만 내 십자가 진 것이 여러분을 구원하는 공로가 될 수 없다.’는 겁니다. 여러분이 혹시 구원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공로는 오직 홀로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그 피지 그 외 다른 사람의 피와 노력과 중보기도로 인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목사도 용쓸 필요 없어요. 교회 부흥시키겠다고 용쓸 필요가 없어요. 이것은 아주 수상합니다. 헛짓하고 있는 거예요.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이 세상을 둘로 분류하는데 그 분류작업은 우리 권한이 아니라 주님의 권한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일방적으로 분류작업 하는 메시아가 아니고 천국 들어가고자 하는 마음만 있으면 다 자비를 베풀어서 넣어주었으면 좋겠다, 해서 우리가 조작하고 우리가 만들어낸 가짜 메시아상이 우리 안에 꽉 차 있어요.

    만약에 우리보고 천국 갈 사람을 고르라고 하면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돈 빌려줘 놓고도 갚으라는 소리를 안 하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 드라마에서 착한 역할 하는 탤런트는 넣어주고 밉상 역할 하는 사람은 빼버리고 가수도 자기가 맘에 들어 하는 사람은 넣어주고 싫어하는 가수는 안 넣어주고.

    우리 보고 천국 가고 말고를 결정하라고 한다면 내 중심으로 결정할 거예요. 이것은 나 뿐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겁니다. 그리되면 천국은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고 바로 내 나라가 돼요. 내 나라가 되면 이것을 가지고 환상이라고 합니다. ‘꿈속의 꿈’입니다. 본문에서 그 시대의 특이한 분이 두 분이 등장해요.

    한 분은 세례요한이고 한 분은 예수님입니다. 두 분 다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예수님보고 ‘~내기’ 라는 식으로 하면 곤란하지만 그 당시사람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두 분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세례요한 쪽이냐 예수님 쪽이냐, 사람들 쪽에서 어느 쪽이냐를 구분 짓게 되고 예수님 쪽에서는 또 세례요한과 일반인들을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세례요한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일반인을 또 구분하고, 이렇게 등장한 세 부류의 인물들이 각자 각자의 눈에 이쪽이냐 저쪽이냐, 저쪽이냐 이쪽이냐, 이렇게 분류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특이한 점이 있지요. 일반인들의 특징은 이왕 사는 인생 잘 살아보자, 살아보자는 데 특징이 있는 반면에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특징은 인간의 죽음을 앞장세워서 언급을 하고 이야기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 10년 20년 다니고 직분 받고 교회에 충성 봉사했다는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 진짜 믿음이 있는지에 대해서 몇 마디를 던져보면 단박에 그 사람의 방향을 알 수 있어요. 자기 죽음의 날을 고대하는 사람은 신자인 반면에 예수님 덕분에 이 땅에서 호의호식 하면서 하나님 능력 받아서 잘 먹고 잘살고 교회에서 기 안 죽고 살고 싶은 사람은 아주 수상합니다. 그분은 진짜 성령 안 받은 것 같기도 하고, 안 받은 것 같기도 한 것이 아니라 안 받았지요.

    가짜 예수 가짜 세례요한 붙들고 사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과 세례요한, 세례요한과 예수님은 항상 무엇에 기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가 하면 ‘너는 이미 죽은 자야.’ 라는 입장입니다.

    우리가 이미 죽은 자가 마땅하고 저주받는 것이 마땅하고 확실하다는 입장에서 모든 말씀을 토해놓는데 우리는 ‘주님 저 어때요? 주님 제 인간성 괜찮지요? 거기에 예수까지 믿으니 인간성이 얼마나 착합니까? 교회 안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교회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복 주세요. 복 달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금요철야기도회 같은 것은 나오지도 않는데 저는 커피 마셔가면서 금요철야집회에 나와서 새벽까지 기도하고 새벽기도도 안 빠지고 나오는데 그 만큼의 복을 달란 말이에요.’ 이렇게 나오더라는 말입니다.

    주께서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죽어봐야 내가 얼마나 무가치한 인간인줄 알아요. 살아 있으니까 자기가 입을 놀리면서 자기가 입을 놀릴만한 위치에 있는 줄 알고 나불거립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여보’ 하고 또 자식들은 ‘아버지, 이렇게 가시면 안 됩니다.’ 하지요. 나중에 모든 유산을 제대로 안주면 ‘진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여러분이 돌아가실 때 갑자기 돌아가지 마시고요, 약간 실눈을 뜨세요. 죽는 척을 하면서 그 10초정도의 짧은 시간에 가족들 간에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관 뚜껑을 열고 살짝 보세요. 이틀도 못가서 부조가지고 싸움합니다. 사람은 믿을 놈 없습니다. 믿을 분은 있어요. ‘죽으시고 부활한 그 분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 해서 믿을 분은 있어요. 이 세상에 믿을 분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한 그 경로를 가신, 그 일을 해내신 그분만을 믿을 뿐이지 나머지는 다 ‘놈’입니다. 믿지 못할 놈이에요.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고 내가 그렇게 상대방을 보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그 말이지요. 죽을 때는 ‘아버지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다가도 돌아가고 난 뒤에는 ‘아, 시원하다. 빨리 끝내고 산에서 내려가자.’ 하면서 산에서 맛있는 것 먹고 또 웃기도 하고. 나는 하나님과 관련되어 있지 가족하고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지 같은 인간들의 피조물이 아닙니다. 특히 교인들은 목사의 피조물이 아니에요. 목사 말을 왜 듣습니까? 제가 오늘 아침에 산책을 하는데 어떤 할머니 두 분이 산책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요. ‘이번 달에 제사가 두 번인데.’ 그래서 가만 생각했지요. ‘이번 달에 제사가 두 번 이라는 거예요.’

    그거 왜 합니까? 그걸 왜 하는데요? 그 할머니가 유교에 대해서 뭘 알고 공자 맹자에 대해서 연구를 한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그런데 제사를 왜 드리는 것입니까? 주위에서 드리라고 하니까, 제사를 드리라고들 하니까, 그래야 좋은 며느리고 그래야 집안의 기강이 서니까 집안의 질서가 되니까 그래서 힘주니까, 제사 드려야 저주 안 받는다고 하니까, 제사 드려야 조상 덕을 본다고 하니까, 그런 소리들을 주변에서 다들 하니까 그런 거예요.

    본인이 무슨 연구한적 없습니다. 제가 속으로 울화가 터져요. 믿지도 못할 인간 말을 왜 믿습니까? 변화 산에서 하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만 들으라.’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다른 사람 말은 듣지 말라는 말입니다. 심지어 목사 말도 듣지 말고 아무 사람의 말도 듣지 말라는 겁니다. 직접 하나님에게서 예수님의 영이 오게 되면 성령의 기름을 부은 자이기에 여러분 본인이 생각하고 본인이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다.

    그게 성령의 기름부음입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목사의 설교는 뭐냐, 그냥 참고로 하는 거예요. ‘저는 이렇게 사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참고로 하는 거예요. 참고로 하는 것이지 왜 자꾸 눈에 띄는 사람들의 지시를 받습니까? 그만큼 하나님께 받은 것이 없기 때문에 누구를 잘 따라가면 그 사람에게 사랑받고 칭찬받고 주위에서 천당 간다고 해주면 천당 가는 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보냈습니다. 세례요한은 성령으로 태어난 정도가 아닙니다. 태어나기 전부터 예고해서 태어난 사람이에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어떤 의미에서 신자란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대변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조금이라도 읽은 사람은 알지요.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는 화려했지만 끝날 때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비참했습니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한 것이 아니에요. ‘시작은 창대하나 나중은 처참했다.’ 그 세례요한은 지옥 갔습니까? 세례요한은 얼마나 특이한지 세상 어두움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성령 받은 사람이에요. 오늘날 성도와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하고 지독하게 하나님을 욕하는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죽을 때는 아주 철없는 소녀, 소녀시대 멤버중의 하나같은 그런 소녀가 농담 삼아 한 그 이야기, ‘나는 저 아저씨의 목이 필요해요.’ 했는데 그것도 자기 말도 아니고 제 어미가 시킨 이야기에 그만 목이 잘리게 돼지요.

    참 그 엄마는 못 됐어요. 꼭 탁구 계모 같아요. 얼마나 못됐는지, 세상에 사람을 죽여도 목을 잘라서 쟁반에 올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지금껏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하면 ‘너는 기필코 쟁반에 목이 날아가야 돼.’라는 쪽으로 계속 밀어 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 보기에 그 시대에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그 세례요한, 성도라면 이렇게 믿어야 성도답다는 그 세례요한이 이 땅을 비참하게 살았다 그 말이죠.

    그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너희들이 평소에 너 중심으로 생각한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것은 가짜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아는 삼위일체, 예수, 성령은 다 가짜’라는 거예요. 세례요한을 밟아서 예수님을 보라는 거예요. 왜? 세례요한이 먼저 왔고 그 뒤에 예수님이 왔기 때문에 세례요한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여러분, 제 뒤에 메시아가 옵니다.’라고 해놓고는 휙 돌아서서 ‘예수님 맞지요?’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바로 가지 말고 세례요한의 자리에서, 세례요한을 경과해서 주님을 바라보면 비록 목이 잘리는 비참한 죽음을 당한다 해도 그것은 전혀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고 내 사명이 바로 그런 것임을 아주 즐거이 수용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세례요한을 경과해서 주님께로 가는 길, 그런 천국이 있는 반면에 ‘세례요한은 너무 심하다. 이것은 내가 흉내 못내. 아저씨는 비키세요.’ 하고 세례요한을 제켜버리고 가게 되면 거기에 마귀가 우리가 원하는 가짜 그리스도를 만들어 놓았어요.

    고난 없는, 십자가 길이 아닌 가짜 그리스도, 한국교회가 제시하는 가짜 그리스도, 교회 부흥되고 선교사 많이 보내고 돈 내면 복 받는 이 가짜, 땅값 오르고 애 공부 잘하고 시집 못가는 사람 시집가게 해주고 장가 못가는 사람 시집가게 해주는 이 가짜 그리스도, 우리 딸내미도 시집 안가서 큰 일이예요.

    세례요한을 왜 등장시켜 놓았겠습니까? ‘나는 쇠해야 되고 내가 쇠하고 주저앉는 그 장면 따라서 뒤에 서서히 등장하는 그리스도가 흥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로막고 있지요. 그러면 세례요한의 그 비참한 인생길에서 세례요한을 수그리, 해서 약간 세례요한이 수그리면 그 뒤에 계신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그렇게 보여준 겁니다.

    이게 신앙이라고, 이것이 하늘에서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다고 외쳤던 그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결부상태가 그렇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하나님께서, 왜 주님께서 세례요한의 목을 베임 받게 하는 겁니까? 사람들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지식을 쌓으려고 공부하는 이런 것은 힘이 안 들어요.

    자기가 자기를 때리는 것도 힘이 안 들어요. 그런데 남이 내 신체를 내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건드릴 때 기분 나빠요. 이것은 기분 더럽습니다. 특히 여름철에 지하철에서 평소에 ‘다이어트를 하지 않는 것은 나의 자유다.’라고 하면서 그것이 얼마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인지를 감히 생각도 못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지하철에 앉아버리면 그 옆 사람들은 튕겨 나가버립니다.

    여름철에 그 뜨거운 체온 36.5도에 데이면 차라리 서서 가는 것이 낫지 앉아가는 것이 괴롭습니다. 여자라면 몰라도 울퉁불퉁한 남자가 곁에 오게 되면 더 그렇고 여름에는 여자라도 귀찮습니다. 사람들이 그만큼 다른 것은 다 용서해도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내 육체에 손대고 내 육체를 아프게 하면 그것은 하나님이라도 용서가 안돼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주님께서 ‘네 마음 있는 곳에 보물 있다.’고 했거든요. ‘네 마음 있는 곳에 보물 있다.’고 하니까 ‘우리의 마음을 하늘에 두면 되지.’라고 생각하잖아요. 그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이미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이 지상에 하늘의 일이 섞여버린 거예요. 섞어 놓고 ‘못 알아보지롱.’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마음 있는 곳에 보물 있다.’고 하신 것은 이렇게 됩니다. ‘네 보물 있는 곳에 네 마음 있다. 그러니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고 했는데 제가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천국에 갔다 합시다. 그런데 여러분이 사랑하는 딸이 천국에 못 오고 지옥에 갔다 합시다. 그러면 천국 간 여러분의 맘이 편하겠습니까?

    안 편하지요? 그러면 그 안 편한 사람의 보물이 어디입니까? 천국이 아니고 자기 딸입니다. ‘누구야! 내 딸을 지옥 보낸 자가 누구야? 하나님이야? 그러면 나는 천국이 싫어. 나를 내 딸과 함께 지옥에 합류시켜줘. 나는 딸과 함께 지옥 가는 것이 내 양심에 합당하다.’ 이렇게 나올 겁니다.

    ‘우리 보물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니까 자기 딴에는 ‘나는 천국만 좋아해요.’ 하지만 우리 자신이 우리 자신을 너무너무 몰라요. 바로 내 육신이 보물이고 남의 자식은 싫고 내 육체에서 태어난 내 육신과 모든 돈을 투자하는 그 투자의 대상이 되는 내 자식이 예수님보다 더 귀한 보물로서 작용하는 이상 그 분은 천국에 가도 천국에 온 것이 아니고 지옥에 온 겁니다. 이렇게 볼 때 천국이란 우리가 예상치도 못한 천국이죠.

    그것을 좀 설명해야 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옴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일이 이 땅에 같이 섞였어요. 섞였다 하니까 어떤 분들은 제 말을 듣고 ‘아, 예수님이 천국 이야기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하늘의 일이 땅에 섞이면 천국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천국도 이야기하고 지옥도 이야기합니다.

    천국도 이야기하고 지옥도 이야기하는데 그렇다면 여기 지옥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5절에 보면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미 하늘의 분이, 하늘에 계시던 분이 이 땅에 이미 섞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땅의 일도 모르면서 하늘의 일을 어떻게 알겠느냐.’고 니고데모를 나무랐거든요. ‘하늘 쳐다보지 말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어떤 소리를 하고 어떤 말씀을 하는지 네가 납득이 되느냐.’ 그 말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천국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를 하는데 그 지옥이 뭐냐, “만일 네 눈이 범죄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사람마다 불로서 소금치듯 함을 받으리라.”

    이렇게 되면 우리가 땅이라고 생각한 것들은 다 우리의 오해에서 비롯된 거지요. 하늘에서 보는 땅을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데 땅에 살고 있는 내가 보는 땅은 시선이 몇 킬로 안가요. 날씨 좋은 날은 한 20킬로미터를 본다면 날씨 나쁜 날은 산 위에 가도 한 10킬로미터 밖에 안돼요. 10킬로를 보는 것 가지고 무슨 땅을 압니까? 세상을 뭘 압니까?

    여행해 봤자 자기가 여행한 그 코스만 알지 우간다와 멕시코는 어떻게 되는지 몰라요. 우리는 세상을 모른다고요. 위에서 봐야 돼요. 주님께서는 하늘에서 세상을 봤기 때문에 이 땅이 사실은 지옥의 대기소라는 것은 주님께서 이 땅에 대해서 알려줘서 아는 겁니다. 여기에서, 이 지옥에서 제가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겁니다. 사람들이 ‘지옥? 까짓 거 지옥 나중에 가주지 뭐.’ 하는데 다시 이야기할게요.

    사람이 자기를 치는 것은 괜찮아요. 자기가 원하지도 않는데 남이 나를 치는 것은 기분 더럽다니까요. 왜 내 몸을 남이 칩니까? 남이 내 몸을 왜 건드려요. 기분 굉장히 나쁘잖아요. 옆 사람 건드려보세요. 기분 나쁘지요. 심지어 교회에서 부흥회 할 때 ‘우리는 형제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표시로서 껴안아 주시고 할렐루야, 해주세요.’ 하는데 그것도 싫어요.

    왜 서로 남남인데 총각 처녀가 결혼할 것도 아니면서 껴안고 난리입니까? 평소에 원수지간인데 ‘김 집사님’ 하고 폼 내 봤자 입니다. 제가 말 했지요. 목사 말 듣지 말라고요. 그런 말 들으면 안돼요. 내가 사랑하고 싶으면 악수 먹는 것이지 목사가 전체 회중에게 같은 행동을 강요하는 것은 목사의 자기 욕심입니다.

    분위기 좋은 교회 만들어서 자기가 으스대고 싶은 거예요. 하여튼 목사 말 듣지 마세요. 성경 말씀을 들으세요. 성경 말씀에 보면 지옥이라 하는 곳은 내 편한대로 내가 장악하는 데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중들이 잘해요. 무소유 같은 것, 40일 금식하는 것, 그런 것은 자기가 스스로 하니까 즐겁고 그것은 일종의 쾌락입니다.

    자기를 낮추는 데서 오는 쾌락, 자기가 이렇게 겸손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 너는 욕심 부리면서 살지만 나는 욕심을 버리고 산다는 우월감, 자긍심, 자아도취, 그것을 자아실현이라고 하는데 자기가 도사되었다는 자아실현, 여러분, 자기가 스스로 하는 순교는 순교도 아닙니다. 하나의 취미생활이에요.

    기도원에 가서 40일 금식하는 것, 그것은 자기가 판단했고 자기가 결정내리고 자기 의지로 하는 것, 그것도 자꾸 해보면 재미있어요. 지옥은 그런 것이 아니고 원치 않는 고통을 준다니까요. 나가고 싶어도 못나가요. 삼청교육대 같아요. 강제로 잡아와서 강제로 훈련시키는 거예요. 이 강제가 문제에요. 지옥의 문제는 강제로 한다는 거예요.

    결국 모든 인간은 예수님보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육신을 사랑하고 맘속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고, 이것은 당연히 원치 않는 고통속의 지옥에 가야 마땅합니다. 그것을 일러주러 주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으로 설교 끝입니다.’ 하면 굉장히 섭섭하겠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못갑니다.

    주님께서 못 간다는 것을 알려주러 왔어요. 네가 생각하는 예수님은 전부 다 조작해낸 거예요. 가짜입니다. ‘하나님, 저 지옥 보내주세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만이 천국가야 되는데 ‘나 지옥 보내주세요.’라고 하는 미친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저 사람들 다 떨어져도 나 혼자 천국가게 해 달라.’고 하지요.

    그 따위 사고방식을 갖고 그 따위 사고방식에 맞는 그리스도 예수를 찾으니까 그게 가짜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은 지옥가야 한다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예수님 떠밀었고 예수님은 결국 십자가에 죽었습니다.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입으로 시인하고 믿으면 구원받는다.’ 문제는 그 예수님을 믿을 수가 없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을 수가 없어요.

    세례요한도 못 믿으면서, 세례요한도 싫어하면서 어떻게 예수님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나보고 지옥 가는 사람이라고 분명히 이야기하는데, 그것도 원치 않는 고통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그분을 사랑 합니까? 나를 천당 넣어준다는 그 소리를 좋아하지요. 그 다음에 본문 봅시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세례요한은 이 땅에서 처참하게 망가지는 것으로 인생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느냐하면 누가복음 7장에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소경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주의 뜻도 아무것도 모르는 소경이고 우리가 귀머거리고 우리가 앉은뱅이고 우리가 죽어 있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저주이야기를 듣게 되면 ‘주님이여, 눈은 괜찮은데 약간 귀가 안 들려요.’ 이런 식이에요.

    ‘우리는 아직도 쓸 만하고 아직도 건전하고 아직도 안 죽었으며 주께서 우리에게 서로 서로 거래하고 흥정해주시면 지금 이런 상태로도 언제라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식으로 내가 건전하다는 것을 기초로 해서 그래서 예수님을 내 능력으로 믿어서 그래서 천국 가겠다는 시도를 하는데 주님은 세례요한을 앞장세워서 전부 다 불도우자처럼 밀어버립니다.

    다 밀어서 ‘네가 바로 앉은뱅이고 소경이고 죽은 자다. 그런데 내가 온 것은 죄인을 죄인의 요구사항으로서가 아니라 죄인이 원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죽은 자를 살리고 귀머거리를 들리도록 하고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고, 예수님을 보게 하고 앉은뱅이가 서게 하고 주님을 찬양하게 하고, 찬양해서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았기에 찬양하고, 구원받은 자이기에 들려지고, 구원받았기에 보이고, 구원받았기에 네가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산자가 되고 주를 믿는 자는 죽어도 영원히 산자가 된다.’는 이것이 곧이곧대로 믿어지는 거예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는 이것이 믿어지는 거예요. 그리되면 내 보물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 자식이 보물이 아니고 내 남편이 보물이 아니고 이 교회가 보물이 아니라 비로 예수님이 보물 되는 거예요. 십자가가 보물 되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십자가를 믿는다고 말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런 자가 예수님을 입으로 시인하고 그런 자에게 구원이 주어지는 겁니다.

    여러분, 주님과 흥정하지 마세요. 요한복음 1장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했습니다. 세상이 깨닫지 못해요. 깨닫는 사람이 있다고요? ‘그것은 주님의 권세가, 주님의 능력이 임한자만이 깨닫는데 그런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것은 육이나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요 1:12,13)라고 했습니다.

    세상은 빛이 왔으되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제가 거리에 나가서 사람들에게 이 말을 하면 그들이 뭐라고 할지 압니까? ‘모른다고? 그러면 그냥 편하게 살래.’ 이렇게 나온다고요. ‘예수? 그걸 꼭 알아야 되느냐. 십자가 복음을 꼭 알아야 되느냐? 나는 이대로 살 테니 건드리지 마. 난 그냥 편하게 살래.’ 여러분, 편하게 살겠다는 것이 아직도 자기가 자기 몸을 주관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편하게 사는 거예요.

    하지만 그것이 바로 지옥가기 전의 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사고로 산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막상 죽고 난 뒤에 보니까 원치 않는 고통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그 세계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게 사실은 우리가 갔어야 될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우리가 갔어야 될 세계에요.

    제가 금요일에 강릉 갈 일이 있어서 갔습니다. 장례식 참석할 일이 있어서 갔어요. 경북 봉화를 지나고 춘양 지나고 승리 지나 도계를 지나가는데 경치가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경치가 좋아서 목을 죽 빼서 볼라 치면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또 경치가 좋다 싶어서 좀 볼라 치면 들어가 버리고, 꼭 우리 인생 같아요.

    야, 인생 좋다, 싶으면 지옥으로 들어가 버리고, 좀 살만하다 싶으면 ‘오늘밤에 네 영혼을 데려가면 네 모든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고.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즉지 않고 살아 있기에 우리가 이 말씀을 듣지만 죽지 않은 상태에서 세례요한처럼 죽음으로 가서 살게 하는 방법, 죽음이라는 것을 미리 챙겨놓고 그 죽음 앞에서 ‘너는 하나님의 자비가 얼마나 좋고 하나님의 사랑 그 십자가 피가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깨달으라.’는 식으로 주님은 우리 기차를 강릉으로 가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장례식장에 죽음을 만나보기 위해서 갔지요. 그런데 도중에 정동진, 망상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다 내려버려요. 진짜 인간을 보려고 한다면 장례식장에 가라는 것이 전도서에 있습니다. 장례식에서 ‘아, 이 피서 철에 이 무더운 날에도 돌아가는 분이 계시는 구나. 좀 다른 날 잡아서 돌아가지 이 피서 철에 그것도 피서지로 유명한 강릉에서 돌아가면 교통체증이 얼마나 심한데.’ 하지만 그것이 주님 맘 대로예요.

    인간은 죽을 때 원치 않는 죽음으로 가더라 그 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원치 않는 인생길이었어요. 그런데 인간은 악마의 술수에 넘어가서 자기가 원해서 그 인생길을 갔다는 겁니다. 거짓말입니다. 이 세상 내 맘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태어나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죽는 시점도 내 맘대로 안 되고, ‘있을 때 잘해! 있을 때!’

    꼿꼿하게 산다고 잘산 것도 아니고 인생 굽었다고 실패도 아닙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하데요. 굽은 소나무가 선산 지킨다고. 쓸모 있는 나무는 다 베어서 목재로 사용하지만 쓸모 없는 굽은 나무는 대대로 조상 무덤을 지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굽은 나무 같은 인생이지만 죽음을 미리 알고 지옥을 미리 아는 우리를 하나님이 세례요한처럼 쓰시기 위해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늘에 주신 바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받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지금도 여러분들을 주관할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되라고 있는 메시아가 아니라 나의 주제를 파악하라고 계시는 메시아인줄 압니다. 세례요한이 처참하게 망가지고 죽었다 할지라도 세례요한은 끝까지 예수님 증거 한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인생 실패했다고 남들이 이야기해도 저희들은 이미 성공한 사람으로서 주님 만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의 유일한 보물로 간직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맘을 그 나라와 의에 두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