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8.15 21:08

죄인의 친구 (누가복음 7장 29-35절)

본문 : 누가복음 7장29-35절
제목 : 죄인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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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의 친구

2010년 8월 15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7;29-35

(눅 7:29, 개역)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눅 7:30, 개역)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눅 7:31, 개역)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눅 7:32, 개역)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눅 7:33, 개역)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7:35, 개역)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낯선 인물의 등장은 반드시, “저 사람이 옳은 사람일까 아니면 그른 사람일까요?” 따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따지는 기준은 필히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볼 때에 세례 요한은 너무나도 낯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서 옳은 존재가 아니라 그른 존재인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사들의 허가를 받지 않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란 필히 그것을 주장하는 본인들은 무조건 옳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주장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천국에로의 구원문제까지 확장시키게 됩니다.

즉 자기가 보기에 자기가 옳기 때문에 자신이 구원되어야 마땅하고, 자기 보기에 저 사람은 나쁘기 때문에 지옥가도 마땅하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에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 이런 사고방식을 악하고 지적하면 그 때는 어쩌려고 하실 겁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와 내용들은 자신들이 옳다는 생각을 견지하면서 풀어내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떻게 풀리는 겁니까? 바리새인들과 율법사들은, 숨겨져 있는 신의 뜻이 지상에 나타날 때는 법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일반인들도 매우 반기는 눈치입니다. 왜냐하면 지키면 선하게 된다는 것의 법적 형식이 수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법이 마련되지 않는 채 의롭게 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문제로 여기질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을 가름하면서도 한데 결합해서 등장한 예가 창세기 25장에 나옵니다.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로 세상에 출몰하게 됩니다. 이들이 그야말로 인간 본색을 그대로 갖고 태어납니다. 이들이 서로 상대하면서 보여주는 것은 자기 위주의 복수심입니다.

즉 인간이란 육적 세계에서 영적 세계로 이어지는 그 중간매개물 위치에 놓여 있는데 인간이 갖고 있는 속성이 영적인 세계가 접촉되는 지점에 복수심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을 말합니다. 인간이 영적 세계에 속한 악한 악마와의 결탁이 인간 심성적인 차원에서 드러나는 것은 신과 인간에 대한 보복심리요 복수심입니다.

즉 “누구든지 나를 그르다고 하는 존재는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 정신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타고난 심성을 밑에서 깔고서 세상을 살게되면 소위 옳고 그르다는 자기 위주로, 자기 중심으로 파악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이 악한 세상과 저 선한 천국과의 매개체로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내세운 바는 이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다. 따라서 신에 대한 복수심을 원없이 나에게 퍼부어라. 내가 너희들 속에 맞아 죽을테니”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인간에게 숨겨져 있는 신에 대한 복수심을 바깥으로 드러나게 하므로서 더 이상 인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지혜가 천국에는 무용지물인 것을 말해주게 됩니다.  

오늘 비유도 역시 이 십자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항상 인간에게 있어 너무나 어리석어서 논의할 대상으로 취급조차 하고 싶지를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이처럼 인간들로부터 천대받는다는 것은 벌써 인간들이 다른 것을 가지고 지혜라고 꼭 쥐고 있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인간들의 지혜란 자신이 주최하는 일이 무조건 옳다는 것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에 동조하지 아니하면 무조건 나쁘다고 정죄하는 속성을 보여줍니다. 장터에서 애들이 장례식과 결혼식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패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한쪽이 즐거운 피리를 불면 다른 한쪽에서 춤춰주는 조건으로 다른 한쪽은 애곡할 때 같이 합세해서 울어주는 것으로 서로가 즐거운 놀이를 진행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를 하면서 같이 놀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서로가 사전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놀이가 엉망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혼식 놀이도 아니되고 장례식 놀이도 시원찮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왜 일이 꼬이게 되었느냐는 겁니다. 그것은 각자 자신이 주최하는 놀이 이상의 시선과 안목을 인간들이 갖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 높은 차원에서 인간의 실성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고 지혜가 없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등장과 예수님의 등장은 인간들의 기존의 지혜나 안목의 차원에서는 그 의미가 포착될 수 없는 지혜로서 작용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나타내시는 지혜는 인간으로서 자신의 주체할 놀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과 세례 요한을 각각 이 땅에서 와서 자기 패거리 만들어서 이벤트 벌이는 잡류라고 단정 짓고 싶은 겁니다. 즉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주장을 얕잡아 보고 싶은 겁니다. 자기 빼놓고 다들 그르고 틀리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일과 세례 요한이 한 일이 하나의 지점에서 통합되려면 그것은 이 세대의 지혜로서는 도저히 밝혀낼 수 없는 숨어있는 차원에만 발생될 일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인의 친구’라는 자리입니다.

그 이야기를 예수님의 적들이 이야기합니다. 즉 적들의 입을 통해서 숨어있는 지혜가 이 세상에 나타날 때의 자태를 폭로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욕얻어 먹는 그 자리에서 ‘지혜의 자녀’라는 생산물이 새롭게 태어나게 되는 자리가 됩니다. 야곱과 에서 형제 중에서 하나는 구원되고 다른 하나는 버림받게 되는데 이러한 분리됨은 서로의 구원 열성의 보상으로 주어진 결과가 아니라 일방적인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니까 지혜란 다름 아닌 ‘분리시킴’입니다. 이 지혜가 옳다고 믿는 자는 참으로 ‘아무 것도 내세울 것이 없음’을 고백하는 자입니다. 일방적인 선택과 일방적인 사랑의 결과로서만 구원될 뿐임을 고백하는 자는, 비로소 자신의 죄를 압니다. 즉 인간이란 자신이 하는 일에 하나님이 같이 편들어주지 아니하면 하나님에 대한 복수심을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두게 된다는 속성을 말입니다.

따라서 이점을 아는 지혜의 자녀들은 자기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서 무조건 감사하고 고마워합니다. 자기로서 내세운 업적와 공로가 아무 것도 없기에 모든 일을 하나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기계가 된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우리 자신을 쪼개어서 예수님의 것으로 넘기시는 그 작업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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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십자가마을 2010.08.17 05: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040강-눅7장29-35(죄인의 친구)-luk100815

    2010-08-16 22:05:51 조회 : 18 이름 : 오용익


    040강-눅7장29-35(죄인의 친구)-luk100815-(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7장 29절에서 35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7:29-35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내용이 상당히 복잡합니다. 어떤 면에서 복잡한가, 사람과 사람사이에 보통 두 패로 편을 나누면 그 중 한패는 분명이 옳고 다른 한패는 잘못되었다, 이것이 우리네 상식입니다. 청군과 백군으로 편을 가른다면 청군이 이기든 백군이 이기든 둘 중의 하나는 반드시 승자가 되고 다른 하나는 패자가 되는 것이 이 세상의 원칙인데 본문에서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에 예수님이 개입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인간이 어느 편이든 간에 그것은 옳지 않다.’ 이렇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네 교회 나쁘고 우리교회 좋다 …… 하나님, 저 교회 나쁘지요? 우리 교회 좋지요?’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우리교회라면 그 이야기를 하나님이 듣고 예수님이 듣는다면 ‘너도 마찬가지야.’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기분이 별로 안 좋지요. ‘그러면 저쪽과 우리가 같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둘 다 같다.’ 이렇게 하지요. ‘그러면 바른 교회, 옳은 교회, 진짜 신자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찾는 겁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렇게 두리번거리면서 네가 백날 찾아봐도 헛짓이고 그렇게 찾는 자체가 네가 틀려먹었다는 말이야.’라는 뜻이에요.

    찾아도 소용없고 안 찾아도 소용없고.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이쪽저쪽을 나눈다는 그런 행세, 그러한 시도자체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지 못하지요. 그래서 이 성경자체가 예수님이 개입되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을 인간들이 오해를 잘 하기 마련이에요. 메시아가 떴다고 하면 그 메시아의 손목을 잡고 우리 편으로 우리 집으로 자꾸 잡아당기는 버릇이 있어요.

    ‘주님,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주님,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가 그동안 한 행세가 훌륭한 행세이며 좋은 믿음이라고 이야기 좀 해 주세요. 우리 주님과 내가 같이 남들 앞에 있을 것이니까요.’ 라고 주님을 자꾸 내 편으로 잡아당기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때부터 새로운 바리새인이 등장하는 거예요. 예수 믿는 바리새인, 예수 믿는 서기관, 지옥가는 서기관과 똑같은 거예요.

    예수님의 뜻에 대해서 전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났을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사람 되기 위해서 어떤 처신과 자세를 갖추어야 됩니까?’라는 식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고 하나님 앞에 나서기 마련인데 성경은 거기에 대해서 모든 것을 배척해버려요. 배척해 버리고 ‘하나님 보기에 바른 인간은 너야, 이런 종류의 사람이야.’라는데 치중을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사람을 새삼스럽게 출생시켜 놓고 ‘이쪽은 틀렸고 이쪽은 맞다.’가 아닙니다.

    말을 끝까지 잘 들어야 합니다. 안 그러면 헷갈립니다. 서로 대비되는 두 사람을 만들어놓고 이쪽은 맞고 이쪽은 틀렸다, 가 아니라 ‘이쪽과 저쪽이 틀 릴 수밖에 없고 그것이 같지 않음의 기준을 내세우는 내가 옳은 거야, 주님이 옳은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설교를 처음부터 새로 합시다.

    우리는 지금 성경을 보면서 ‘백군 편에 설까요, 청군 편에 설까요, 하나님이 인정하는 편에 서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영광을 돌려서 하나님과 합세해서 구원받고 천국 가겠다.’ 이렇게 나오는데 글쎄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진짜 하나님의 뜻은 모르고 자기밖에 모르는, 자기 구원받는 것 밖에 모르는 욕구의 발산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을 오해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며칠 전에 어떤 목사님과 이야기를 했는데 굉장히 기쁜 이야기를 들었어요. 목사님께서 미국에서 어떤 분을 만났는데 운전 중에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내 나이 74살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면서 후회하는 점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교회 갔던 일이다.’

    그 소리를 듣고는 제가 그 사람을 찾고 싶었어요. 그 사람을 찾아서 간증집회를 하게하고 싶어요. 미국은 기독교 국가이고 교회 가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야 사람대우를 받으니까요. 그 나라에서 74년 동안 살면서 교회를 다녔지만 늙어 죽을 날이 가까워서 보니 내가 실수한 것은 오직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은 것, 그것 하나 실수했다고 한 겁니다.

    왜, 그게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을, 하나님 믿고 교회 간다는 그것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기에 시간낭비를 했다고 술회한 겁니다.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하셨다는 거예요.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아무 일 없는데 왜 남 따라 교회 따라 문화 따라 환경 따라 왜 교회 다녔던가, 평생의 실수가 교회 다닌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그런 고백을 70대에 가서야 하지 말고 왜 20대에 하지 않았느냐.’ 그겁니다. 그 이유는 교회가 뭔가 사람들을 꾀이는 요소가 있습니다. 그게 뭐냐, ‘여러분, 사랑받고 싶지요? 외롭지요? 생활하는데 힘들지 않습니까? 정보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정한 이웃이 되어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이웃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아플 때 돌봐주고 절망할 때 위로해주고 기뻐할 때 같이 기뻐해주는 천국백성이요 한 형제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삽시다.’ 라는 식으로 해 왔던 거예요.

    그런데 나이 74살이 되어 보니 그것은 하나의 사람 꾀이기에 불과했지 전혀 그것은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일종의 친목단체에 지나지 않았어요. 동호인, 친목그룹, 축구나 같이 하면서 노는 모임, 서로 위로하고 위로받는 곳, 기껏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그것을 쉽게 하면 ‘서로 서로 이용하기’입니다.

    그동안 그분이 평생 살면서 다녔던 교회가 항상 사랑이 넘치는 교회, 행복이 넘치는 교회, 우정과 애정이 넘치는 교회, 위로와 관심이 넘치는 교회, 그래서 이 세상사는 동안 외롭지 않고 힘들지 않게 살게 하는 상품들, 재료거리들, 교회라는 것이 기껏 그것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빠졌느냐, 교회라는 것이 기껏 그 정도 밖에 안 되고 교회로서 갖추어야 할 최선의 상품거리다, 라는 그 교회가 저주받을 교회인 것을 누가 옆에서 이야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내가 객지에 살면서 외로워서 교회 나가서 그 교회 교인들하고 사귄다 합시다.

    ‘아, 이 교회는 사랑이 많구나. 그래서 나는 이 교인들의 사랑을 받고 사랑받은 만큼 사랑을 하면 우리가 한 형제가 되겠지.’라는 생각이 지옥갈 수밖에 없는 저주받을 생각이라고 그 교회에서 그 이야기를 해 줄 수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해버리면 있는 사람도 나가버리니까요. 사랑받고 싶어 왔는데 ‘사랑받고 싶다는 것 자체가 엉터리고 그것이 마귀생각입니다.’ 해버리면 그 교회 누가 붙어 있겠어요. 나갈 수밖에 없지요.

    저는 그분이 74세가 되기 전에 20대 혹은 30대 40대에 진작 그 이야기를 교회에서 들었어야 된다는 겁니다. 저는 그 사람을 데리고 한국교회 돌아다니면서 간증을 하고 싶어요. ‘쓸데없는 짓거리들을 하고 있다. 여기 왜 모여서 이 짓을 하고 있는데? 예배를 왜 하며 설교를 지금 왜 듣고 있는데?’라는 식으로 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진솔하게 그 실상을 죽 이야기하고 싶어요.

    뭔가 죽어서 좋은데 가고자 하는 그 노림수까지라도 그것이 더러운 생각이고 그것이 탐욕이라는 것을 우리는 상상도 못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그런 것들이 전혀 숨어 있는 천국이 생각과는 달리 인간들이 고안해낸 천국이라는 겁니다. 사랑받고 싶으면 사랑받는다는 그런 사고방식이 지옥에나 갈 생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외부에서 인간형을 집어넣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새삼스럽게 만들어낼 때는 반드시 대비되는 두 종류의 사람을 만드시고 이쪽은 옳고 이쪽은 그르다가 아니라 이쪽저쪽 둘 다 생각하는 것이 자기생각밖에 안하는데, 모두 다 자기 사랑받는 것, 자기에게 유리한 것, 죽어서 좋은데 가는 것, 이것밖에 생각안하는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누어서 한쪽을 일방적으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예수님의 뜻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그 사람은 일방적으로 구원을 받는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문장이 좀 길었지요. 사람이 개과천선해서 구원되는 인간은 이 땅에 없다는 말이지요. 둘 다 똑같은 인간인데 똑같은 인간끼리 하는 말이 ‘너는 틀렸고 나는 옳다.’는 거예요. 저쪽에서 또 하는 말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겁니다. 주께서 둘 다 꿀밤 주면서 쥐어박고 둘 다 혹이 나서 이렇고 있는데 혹이 큰 쪽이 아니라 혹과 관계없이 한쪽을 그냥 데려가면서 ‘봐라, 구원은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렇게 사랑해서 용서해서 데려가는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주께서 사랑해서 데려가는데 데려감을 당하면서 우리는 뭐라고 하느냐하면 ‘거봐, 내 말이 맞잖아. 주님이 날 사랑하는 것이 맞잖아.’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너 입, 입 다물고 있어. 네가 그런 소리 할 게 못돼.’ 합니다. 주님께서는 사랑해서 구원하는데 우리는 하는 소리가 ‘봐라, 하나님이 날 사랑해서 구원한단다.’라고 지옥 가는 사람에게 나불거리면 하나님이 우리를 쥐어박아요. ‘글쎄, 너는 입을 다물라니까. 입을 다물라!’

    우리는 어찌되었든 간에 자기 행동 하나하나가 주님 앞에서 옳다는 그것을 내세우고 싶어서 미쳐 환장했어요. 본문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사람 야곱과 에서가 있습니다. 리브가는 낳을 수도 없는 애를 낳아놨어요. 쉽게 말해서 이것은 외부에서 도입된 아이들이라는 말입니다. 이 아이들은 단지 혈육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특별히 예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특별히 그러한 정보가 내장된 채 대비적으로 쌍둥이가 태어났어요.

    이것을 어렵게 말하면 숨겨진 하나님의 뜻이 이 역사 속에 나타날 때는 이 두 사람의 대비된 인형이 진짜 인간의 원형이라는 겁니다. 천국 갈 인간의 모델과 지옥 갈 인간의 모델이 야곱과 에서 이 두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9장에서는 두 사람이 다 약속대로 태어난 자식이라고 하는 겁니다.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로마서 9:9-13)

    육으로 태어난 자식 가지고는 하나님은 일 안하고 약속으로 태어난 자식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약속을 펼친다는 겁니다. 그러니 육으로 태어난 인간들은 끊임없이 메시아를 고안하고 하나님 고안하고 ‘이래야 교회답지, 이래야 옳은 신학이야, 이게 목사다운거야.’라는 식으로 고안하지만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는 그 다음부터 그 두 사람이 가는 길은 모든 인간을 대표하면서도 멍청한 거예요.

    그 다음에 어떻게 해야 될지 자기도 몰라요. 그냥 주님께서 성질 주는 대로 움직일 뿐입니다. 숨겨진 것이 나타난 것이 두 사람 야곱과 에서라면 그 두 사람이 나타내는 성질은 뭐냐, 복수입니다. 복수심입니다. 갑자기 이야기가 어려워지지요? 모든 사람 속에 뭐가 있느냐, 장로님도 죄, 죄, 하는데 죄가 뭐냐, 복수입니다.

    ‘내 인생 이렇게 한 게 누구야? 하나님이야? 하나님 나와. 예수야? 예수 나와! 너야? 나한테 한 번 맞 좀 봐라. 내가 얼마나 너를 싫어하는지?’ 인간의 감추어진 것은 복수심이고 그 복수심과 맞닿은 것이 영적 세계입니다. 그림으로 그리면 쉬운데 인간은 개나 뱀 돼지하고 달라요. 영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중간매체입니다. 인간의 육신과 영적생활의 그 접촉점에 뭐가 있느냐하면 인간의 복수심이 있는 거예요. 그게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겁니다. 가인이 아벨을 복수심으로 죽여 버린 거예요. ‘너 때문에 내 인생이 버렸다. 너만 없었으면 내 인생은 건전했는데, 나는 괜찮은 인간인데 너 때문에 망가졌다. 너 때문에 내가 죄인으로 들통 났어. 내가 널 죽여 버리겠어.’

    복수심을 통해서 영적세계와 연결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 복수의 자리에 덜렁 누가 나타나느냐하면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복수의 현장에 나타나버려요. ‘내가 이렇게 만들었으니 날 죽여라. 날 죽임으로서 숨어 있는 악마야. 빨리 얼굴을 드러내. 모든 인간의 심령을 장악하고 있는 영적 존재인 악마야, 빨리 네 본색을 드러내. 너는 신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환장했잖아. 내가 하나님이야. 그러니까 너는 빨리 나를 죽이면 되는거야.’

    가룟유다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사람의 인내심도 양심도 보통이 아닙니다. 3년 동안 따라다녔고 재산 다 바쳤습니다. 양심이 얼마나 고왔던지 양심의 가책이 되어서 자살했습니다. 돈도 갖다 버렸어요. 가룟유다가 인간과 영적세계, 영적세계와 인간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같은 거예요. 인간에서 영적세계를 주선하는 그 고리는 악마가 주선합니다.

    악마 외에 어떤 것도 주선되지 않습니다. 이게 우리 혈육의 원형이에요. 우리가 부모로부터 태어나면서부터 악마가 주선한 채 태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레위기 강의하면서 ‘인간의 출생 자체가 처벌이다.’라고 했습니다. 출생자체가 심판이고 처벌이에요. 어릴때는 몰랐지요. 내가 그토록 신을 미워하고 싫어하는지를 몰랐지요.

    74살이 되니까 비로소 입이 터졌는데 ‘내가 교회 가서 신을 믿은 것이 바보였다. 있지도 않은 신을 왜 믿었을까? 이 바보, 바보! 차라리 그 시간에 돈을 벌었다면 더 벌었을 것인데. 그 하나님에게 얽매이지 않았으면 보다 자유롭게 살았을 것인데. 나의 자유를 도대체 어느 놈이 빼앗아간 거야. 신, 당신 때문에 난 내 자유를 맘껏 발휘를 못했잖아. 주눅 들어 살았잖아. 왜 그런 사실을 74살이 되어서야 알게 하는거야.’

    얼마나 그 분이 솔직한지 제가 그 이야기를 듣고 감동했어요. 우리교회도 74살이 되기 전에 진작 그런 고백들을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하는 이야기는 이겁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믿고 교회 믿고 예수 믿는 것은 그 이유가 하나밖에 없어요. 복수하기 위합니다. 누구에게, 예수님에게 하나님에게 복수하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나를 죄인 취급했지만 나는 당신을 믿어줌으로써 나는 죄인 아닙니다.’라고 죄인 아님으로 행세함으로 말미암아 죄인 아님의 자리를 만들어서 그때부터 ‘죄인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을 힘들게 한다면 당신 책임이야.’라고 손가락질 하고 싶어서 교회 다닌 거예요. 한 번 보자는 거예요. ‘내가 10년 믿었다. 이래도 복 안줘? 좋다, 20년 믿었다. 이래도 복 안준다고? 좋아, 30년 믿어준다, 나도 오기가 있다.’ 가룟 유다하고 똑같아요.

    그런 버릇과 성질은 우리 부모한테 배웠어요. 그 부모는 또 부모한테 배웠고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부모한테 배웠어요. 이것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고친다는 사람이 아주 수상해요. 고쳐놓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주 수상해요. 고쳤다는 말은 그만큼 복수심이 더 깊숙하게 들어간 거예요. 이제는 애가 아파봐야 슬슬 본심이 나오지요. 교회 올 때 가스 불 틀어놓고 왔다가 집에 홀라당 불타봐야 슬슬 본심이 나오는 거예요.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주장은 이겁니다. 잘 들어보세요.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법적으로 나타난다.’ 중요한 것은 좀 적어놓으세요.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가 이 지상에 나타날 때는 항상 법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렇게 법적으로 나타나면 법을 잘 지키는 쪽과 못 지키는 쪽의 구조물이 돼요.

    철골구조물, 건축구조물, 그것을 가지고 두자로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는 법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교회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사람과 그 교회법을 서툴고 무식하고 못나서 못 지키는 사람과 레벨이 생깁니다. 율법사가 법 연구하는 사람들이고 법에 능통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숨겨진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고 우리는 그 법을 눈에 보이도록 구체화시켰다.’하는 겁니다.

    더 구체화 시키면 법 잘 지키는 사람을 존중하고 법 못 지키는 사람을 우리가 무시해서 그로 인하여 ‘하나님, 저는 바빠서 못 지키지만 법을 잘 지키는 목사님을 존경한다는 의미에서 나도 법을 존중하는 인간으로 쳐주세요. 저 괜찮은 사람입니다.’라고 나설 때 그 사람의 신에 대한 복수심은 저 밑바닥에 점점 더 퇴적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법 지키는 인간인 내 인생이 꼬이기만 해봐라. 그 때는 내가 교회 불질러버린다.’ 이렇게 나옵니다. 그 예를 들어볼까요? 잘 나오던 교인이 몇 주째 안 나올 때는 목사의 법이 동원됩니다. ‘하나님, 심방을 갈까요, 말까요? 심방 간다는 법을 지키면 나오게 하시겠습니까? 그 심방 가는 법을 안 지키면 나오게 하겠습니까?’

    생각하는 것이 법밖에는 없어요. 몇 주 안 나온 교인에게 내가 심방을 갔다는 이 법을 지켜버리면 나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사람이 되고 나를 선한사람이라고 해주면 역시 나는 선한 사람 맞다, 이것이 확인이 되지만 만약에 심방을 갔는데 더 삐져서 교회를 안 나오게 되면 내가 법을 옳게 실천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하지 않는 하나님은 두고 보자, 해서 저 밑바닥에 뭔가 노림수가 있어요.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인간들이 연구한 거예요. 우리는 알고 있지요. 야곱은 천국가고 에서는 지옥 갔다고 알고 있는데 둘 다 같은 복수심을 노리고 한다면 똑같은 인간이잖아, 라고 되지요. 우리가 봐도 똑같은 인간입니다. 신에 대한 복수심이 있다는 것, 신에 대한 노림수를 갖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인간도 똑같은데 문제는 일방적으로 한쪽을 하나님께서 편애를 해버린 거예요.

    잘했기에 회개했기에 편애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 성질 그대로 가져가요. 그런데 일방적으로 편애한 거예요. 경부선 철로가 대전에서 한쪽은 대구 거쳐 부산가고 한쪽은 광주 거쳐서 목포로 가거든요. 기차 안에 있는 젊은 애들 다 ‘해방이다. 여행이다. 신난다.’하면서 기타 치면서 노는데 대전 지나서 언뜻 바깥 풍경을 보니까 한쪽은 목포로 가고 있고 한쪽은 부산으로 가고 있다는 말이지요.

    양쪽 다 까불고 찧고 노는데 ‘어? 풍경이 수상하네. 왜 부산 쪽으로 가지?’ 또 다른 한쪽은 ‘어? 목포 쪽으로 왜가지?’ 가는 풍경이 달라요. 왜냐하면 이것은 안에서 노는 그 젊은 애들과 관계없이 기관차 자체가, 철로 자체가 둘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누가 갈라지게 하셨는가? 기관사 되시는 우리 예수님께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이게 바로 성경이 이야기한 구원의 지혜입니다. 이제 본문을 보겠습니다. 저는 쉽게 한다고 했는데 그래도 장담을 못하겠습니다. 31절입니다. “또 가라사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꼬 무엇과 같은고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항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그때는 애들이 컴퓨터도 없었고 학원도 없었고 과외도 없었을 때입니다. 그냥 노는 것뿐이에요. 애들도 그냥 놀면 재미가 없는지 꼭 어른들 흉내 내면서 놀아요. 장터에서 노는데 한쪽 애들은 결혼식 놀이를 하고 한쪽 애들은 장례식 놀이를 하는 거예요. 둘이 서로 약속을 했어요. 서로 주최 측이 되려 하는 거예요.

    장례식 놀이 하는 애들이 하는 소리가 ‘우리가 장례식 놀이 할 때 너희들도 추임새도 넣어주고 장단 좀 맞춰다오.’ ‘그래, 알았다, 알았어.’ 이번에는 결혼식 놀이 하는 애들이 ‘얘들아, 우리가 이번에 결혼식 놀이 주최할 테니까 장단 좀 맞춰줘.’ ‘알았어, 알았다고.’ 애들끼리 놀이하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런데 애들 말을 믿을 수가 있습니까?

    결혼식 놀이를 한다고 ‘자, 피리를 부니까 너희들을 춤을 춰야지.’ 해놓고 피리를 ‘빌리리, 빌리리, 빌릴리리.’ 하고 부는데 춤을 안 추는 거예요. ‘에라이 씨!’ 이쪽에서 결혼식을 하고 있는데 춤을 추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삐졌어요. 그러고 있는데 저쪽에서 ‘자, 장례식 한다. 관 들어간다. 에고, 에고!’ 하면서 ‘좀 같이 울어줘.’ 하는데 아무리 애곡을 하여도 울지를 않네요.

    이 세대라는 것이 항상 자기가 벌이는 놀이중심으로 자기가 주최 측이 되어서 주최 측이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간에 남이 장례식을 치르든 결혼식을 치르든 뭘 하든지 간에 자기가 집에서 부침개를 하고 있으면 그것에 대해서 방송사에서 와서 카메라를 들이대면서 오늘의 명품요리라고 소개를 해주면서 관심을 집중해줘야 된다는 식이에요.

    안 그렇습니까? 집에서 부침개 하고 있는데 온 동네방네 소문 다 나고 방송국에서 그 소문 듣고 카메라 들고 와서 마이크 들이대면서 ‘이 부침개가 이 동네에서 제일 명품 부침개라면서요?’ 할 때 얼마나 기분 좋겠습니까? 이 세대라는 것은 ‘옳고 그르다. 그르다 옳다.’를 한시도 자기를 떠나서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것이 이 세대의 특징이라고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누가 자기 허락 없이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되면 이것은 이유 없이 무조건 나쁜 거예요. 왜, 자기 허락을 안 받았으니까. 29절에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고 이야기했어요. 세례를 베푸니까 어떤 사람은 세례를 받았어요. 그런데 29절에 보니까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오직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은 그 세례를 받지 아니한지라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지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베푸는데 왜 그들은 세례를 안 받습니까? 자기가 세례주최가 아니거든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것밖에 없어요. 내가 벌이는 일이 아니거든요. 사람이 수동적인 것보다 더 기분 나쁜 일이 없어요. 이쯤해서 설교 한 것 다시 정리해 봅시다. 야곱과 에서가 있는데 왜 그들이 인간의 원형이라고 했느냐 하면 한쪽은 진짜 지옥가게 되어 있고 한쪽은 천국가게 되어 있기에 원형이라고 한 거예요.

    야곱과 에서가 쌍둥이로 태어났어요. 다른 인간은 보지 마세요. 하나님의 계시를 듬뿍 담은 인간이 그 두 인간이니까 그 두인간이 어떻게 하는가를 보자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둘이 다 차이가 없다 이 말이죠. 야곱이 천국 간다고 어떤 행세를 했나 들여다봐도 둘이 다 차이가 없어요. 둘 다 공통적으로 왜 내 중심으로 안 따라주는가, 그 주를 향한 복수심과 악한 감정, 분노 그런 것이 충돌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러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 사람이 구원받고 안 받고는 그 사람이 행동을 어떻게 했느냐와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지요. 일방적으로 그 둘 사이를 양쪽으로 쪼갠다는 것입니다. 둘로 쪼개놓는데 나중에 야곱은 알지요. ‘아하, 내 인생이라 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죄의 원형을 보여주기 위해서 내가 태어났구나.’

    야곱이 그런 소리를 해요. 에서는 그런 소리 하지도 않고. ‘내가 개판같이 사는 이것도 인간의 더러운 속내를 다 뒤집어서 끄집어냈구나.’라고 보여주는 역할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이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목포로 가고 부산으로 갈라지는 기관차처럼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지요.

    야곱과 에서를 통해서 나중에 야곱이 알게 된 것은 뭐냐, ‘나는 어디까지나 수동적 인생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서 기계입니다. 말하는 기계, 밥 먹는 기계, 꾸벅꾸벅 졸면서 예배하는 기계, 이런 수동적인 기계에 불과한 거예요. 기계에 불과하니까 내세울 것이 없는 거예요. ‘주님, 제가 이런 것 때문에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내세울 것이 없는 거예요.

    내세울 것이 없도록 하신 거예요, 하나님께서. 네 것을 내세워서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구원방식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이라는 겁니다.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이것저것 내놓아보지만 그런 것으로 구원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되도 않는 것을 다 내세우는 거예요.

    ‘주여, 이 정도 하면 어떻습니까, 이정도 하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내세우는데 내세울 것이 없는 거예요. 내세울 것이 없으니까 야곱은 ‘우리가 갖고 있는 옳다 그르다, 의 차원은 아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영적인 세계에서 오는데 그 영적인 세계에서의 옳고 그름의 기준은 우리가 아니고 우리 외부에 따로 계신다는 거예요.

    따로 계셔서 그분은 자기가 하는 것은 무조건 옳아요. 그러니까 두 사람이 있는데 한쪽은 일방적으로 천국 보내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지옥 보내는 이 행위가 우리 보기에는 터무니없지만 그렇게 가르시는 그분 입장에서는 무조건 옳은 거예요. 35절 봅시다.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본문 때문에 본문 전체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지혜는 너무나 어리석어서 사람의 논의 대상이 안 됩니다. 노벨상에 복음 상 없고 십자가상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노벨상 같이 종교인들에게 주는 상이 있어요. 템플턴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주는 상인데 그것은 복음상이 아니고 그것도 마귀상입니다.

    복음에 대해서 상을 줄 수가 없어요. 너무나 어리석어서 사람들이 논의할 가치가 없어요. 상이란 것은 상 받을 사람이 상 받을 짓을 해야만 주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집사님, 복음 알지요? 상 줄게요.’ 하면 집사님이 ‘내세울 것이 없는데요. 제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요.’ 이런데 무슨 상을 줍니까?

    ‘나는 저 사람과 똑같아요. 아무것도 내세울 것도 없고 한 것도 없어요. 내 속에 신에 대한 복수심만 잔뜩 깔고 앉아 있는데요.’ 그렇게 복수심만 가득 깔고 앉아 있는데 가만 보니 풍경이 이상한 풍경이라. 자꾸 바깥 풍경이 십자가만 보이는 풍경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십자가 안에 들어 있어요. 십자가가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너는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피로 구원받는다. 네가 잘나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 거야.’ 자꾸 끌고 가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안에서 ‘그게 옳습니다. 맞습니다.’ 옳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는 자기 자녀들에게만 무조건 옳은 거예요. 왜 자기 자녀에게 무조건 옳은가 하면 주님보시기에 인간은 뭘 해도 무조건 나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무조건입니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무조건이니까 이것은 신학의 대상이 안 됩니다. 복음은 신학의 대상이 안돼요. 성경공부의 대상이 안돼요. 무조건이니까. 장례식을 치르는 아이들은 자기 장례식에 참여하지 않는 결혼식 놀이하는 애들보고 ‘저놈들이 나쁘다.’고 하는 거예요. 왜? ‘내가 주최를 했는데 왜 참석을 안 하는가?’

    이 말은 ‘나는 옳은데 너는 나쁘다.’고 하는 거예요. 결혼식을 하는 쪽은 뭐냐 하면, ‘우리는 옳은데 결혼식놀이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흥을 돋우지 않는 너희들이 그르다.’고 하는 겁니다. 저희들끼리 자기들이 기준 가지고 옳다 그르다 싸우는 더러운 세상의 실상이라는 겁니다. 그 더러운 실상의 세상에서 벗어날 인간은 아무도 없는 거지요.

    33절에 보면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고 했거든요. 왜 떡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는데 그걸 보고 귀신이 들렸다고 합니까? 세례요한이 와서 소통을 하려면 바리새인과 율법사들, 신학박사들이나 목사님들한테 와서 ‘목사님들, 목회하고 선교하면서 하늘나라 확장하는데 고생 많지요? 제가 이런 복음을 가지고 있는데 전해도 되겠습니까?’ 하면 ‘예, 전하셔야지요. 우리가 목사 증 하나 내 드릴까요?’ 이런 식으로 좀 물어서 이단인지 아닌지를 확인받은 연후에 하면 아무 문제없지요.

    그런데 세례요한이 나타나서 세례를 준 것은 바리새인과 율법사들의 허락도 안 받고 한 짓이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볼 것도 없이 무조건, 무조건, 무조건 귀신들렸어요. 왜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을 그런 식으로 보냈을까요? 세례요한이 바로 에서와 야곱처럼 약속의 자녀의 모습으로 외부에서 일방적으로 투입되는 계시의 입안자로 등장한 겁니다.

    보통 인간이 아니에요. 보통 인간은 악마가 들렸지만 이 세례요한은 날 때부터 성령 받아서 예고한대로 태어났기에 영적인 안목, 영적인 세계의 접촉점을 가지고 육적세계의 악마 들린 사람과 접속을 해서 이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자기 잣대를 가지고 옳다, 그르다, 하고 얼마나 주장하는지를 까발리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요한이 오기 전에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우리는 마음이 열렸습니니다.’ 한때 한국교회가 ‘열렸다’는 것이 유행이었어요. 열린 공간, 열린 예배, 열린 교회, ‘우리의 마음을 활짝, 우리의 심령을 활짝 열어서 대화가 가능한 우리들이니 우리교회 오세요.’ 했지요. 그 활짝 열린 곳에 하나님께서 세례요한이라는 원자폭탄을 집어넣어버렸어요.

    이래도 활짝 열었나 보자, 하고 집어넣어버렸어요. 자기들 딴에는 활짝 열어서 인간성 좋다, 나는 절의 중도 용납한다, 하다가 막상 복음 가지고 집어넣으니까 ‘중은 용납하되 십자가 복음은 용납 못한다. 귀신들렸다.’ 이렇게 욕할 수밖에 없어요. 왜? 십자가, 하나님의 지혜는 감추어졌기 때문에 논의의 대상이 안돼요. 너무나 어리석어요.

    말도 되지 않도록 복음이라는 것이 어리석어요. 너무 어리석어서 말을 끄집어내기가 뭣해요. 뭘 따지고 들 수가 없어요. 그래서 복음을 만나면 오히려 복수심만 치밀어 오를 뿐이에요. 예를 들면 한 80된 노인보고 ‘교회 다닌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모태신앙입니다.’ ‘그러면 80년이 되셨군요.’ ‘그렇게 됐네요.’ ‘그런데 그것 다 헛것입니다.

    나이 80이든 90이든 다 헛짓이고 예수 피만 믿으면 오늘 밤에 천국 갑니다.’ 할 때 80년 동안 했던 그것이 무효라는 것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겠지요. 바로 그 작전을 주님께서 쓰시는 겁니다. ‘헛짓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만든 법이었습니다.’ 숨겨진 것이 나타날 때는 오직 세례요한같이 예수님같이 오직 어리석은 하나님의 십자가지혜로만 나오는데 인간들은 자기들이 아는 지혜로서 파악이 가능한 법의 구조로서 하나님의 뜻을 동결시켜 놓았습니다.

    얼음처럼 묶어놓고 그것을 옳다고 본 겁니다. 진짜 여러분들이 열렸다면 그 법에서 떠나야 됩니다. 교회에서 떠나야 됩니다. 우리교회는 이 우리교회에서 떠나야 돼요. 그런데 우리교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떠나가서 다 어디로 가느냐하면 다 자기 집구석으로 들어가요. 그러지 마시고 우리 교회에서 떠나서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교회 떠나라고 하니까 무지무지 좋아하면서 ‘목사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다.’ 해놓고는 자기 집구석에 가 있어요. 복음 알아서 뭐하는데요? 74살 먹은 노인처럼 ‘이제는 해방이다. 복음을 알았다.’ 하고는 집에 가서 놀면서 축구나 하고 있어요. 그러지 말고 십자가 속에 들어가야 돼요. ‘내가 이 모양 되고 내 인생이 이렇게 되는 것이 무조건 옳습니다.’ 그 발언을 해야 돼요. 무조건 옳습니다.

    ‘내 애가 아픈 것이 무조건 옳고 사업 부도난 것이 무조건 옳고 내 인생 이렇게 버린 것이 무조건 옳고 무조건 잘하셨습니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내 바퀴가 지금 천국 가고 있습니다. 이 지혜는 나에게서 난 지혜가 아니고 주님의 지혜입니다. 법? 나 법은 모릅니다. 욕하려면 욕 맘껏 하라고 해요. 내가 간음했고 살인했고 다 했다, 다 했어. 법으로 한다면 난 꼴찌요, 세리요, 창기입니다. 하지만 그것과 내 구원과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법 지켰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안 지켰다고 지옥 가는 것도 아니고 숨어 있는 어리석은 지혜는 십자가 지혜밖에 없습니다. 세례요한이 와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해요. 그래서 지혜란 무엇인가? 무조건 반대,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인간이 하는 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에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대해서 지혜를 받은 사람은 주님이 하신 것은 무조건 옳습니다, 라고 되는 거예요.

    정리하면 사람이 옳다, 그르다, 할 경우에는 자기가 주인공이 될 때 스스로 자기가 옳다, 그르다, 하는 것을 판정해요. 여기서 벗어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돼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바로 이것하고 전혀 무관하다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세례를 받으라 하는 것은 ‘물속에 처 박혀!’ 그 말이거든요.

    ‘처박히면 구원 받습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그냥 처박혀 있어, 그냥!’ ‘물 몇 방울 ……’ ‘그런 것 따지지 말고 그냥 처 박혀 있어, 그냥! 그만 죽어라.’ 죽음 이후의 세계는 경쟁이 없고 차별이 없습니다. 이 세상 어떤 차별도 죽음 이후의 세계에는 없습니다. 숨어 있는 것이 나타날 때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나타날 때는 살아 있으면서 어떤 직업이냐, 어떤 선행을 했느냐, 그런 모든 차별을 다 없애는 식으로 숨어 있는 지혜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거예요. 세례요한과 예수님을 통해서.

    ‘잘났다, 못났다, 하면서 까불지 마라. 십자가 앞에서는 똑같다. 왜, 이 십자가에서 나도 죽잖아.’ ‘저는 죽으면 안돼요.’ ‘네가 죽으면 안 된다고? 나도 죽는데? 너를 만든 나도 죽는데?’ 예수님이 죽으면 다 죽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산사람은 없습니다. 죽은 사람이 무슨 관에 들어갔고 죽은 자가 옷을 십만 원짜리 입었는지 그런 것은 다 의미 없어요.

    그 죽음이후의 생활을 가지고 네 글자로 ‘신앙생활’이라고 합니다. 죽음 이후에 경계가 없고 차별과 차이가 없는, 돈이 있고 없고, 학력이 어떠니, 장로 집사 목사 그런 차이가 없는 생활, 법에서 벗어난 생활, 법에서 탈출한 생활, 법을 떠나버린 생활, 죽었기 때문에 지킬 수 있는 인간도 사라졌잖아요.

    살아 있어야 법을 지키는데 죽어버린 인간에게 무슨 법을 묻겠습니까? 죽은 인간이기에 법과도 무관한, 그야말로 율법에 대해서 죽어버린 거예요.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것이 율법인데 그 율법에서 해방되어 버렸어요. 신앙생활이란 죽음이후에는 지혜로만 사는 거예요. 십자가의 공로로만, 용서와 사랑으로만 사는 거예요.

    사랑하겠다는데 뭐가 말이 많아요? 사랑은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무조건 사랑하시는 분과 무조건 이유 없이 사랑받는 대상, 이 세트로 되어 있습니다. 세트 아시지요? 햄버거세트, 빵 조각 사이에 고기 들어가고 양배추 들어가는 세트, 사랑해주시는 분과 사랑받는 분의 세트, 우리는 이유도 없이 무조건 사랑받고 주님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십자가 피로 사랑해주고.

    세례요한이 바로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다 처분했습니다. 우리 새로 시작하자.’ ‘너야?’ ‘아니야, 오실분이 새로 시작한대. 오실 분은 진짜 감추어진 지혜인데 그 분은 율법이 아니고 그분은 사랑이라.’ 라고 세례요한은 이야기했습니다.

    ‘오실 분이 와서 인간의 모든 것을 심판해버리고, 죽여 버리고 자기 택한 백성에 한해서 그분의 공로로만 살려내는 새로운 시대가 온다.’라고 하면서 세례요한은 물도 마시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우리는 죽었다’고 본 거예요. 그런데 그 뒤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먹고 포도주도 마시니까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저거는 또라이다. 세례요한과 반대로 하네. 저거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아서 귀신들렸더니만 이제는 맘대로 먹고 술 마시고 왜 저래?’

    그래서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조롱한 거예요. 지혜는 모든 것을 두 조각을 내면서 그 갈라진 틈에서 반대하는 사람의 입을 통해서 지혜가 고백되지요. ‘저 사람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짝짝짝!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저 인간은 더 더러운 세리의 친구고 천하의 죄인들을 구원하러 왔대. 웃기지, 그치?’라고 하는 그 이야기가 저쪽 입에서 나온 거예요. 어떤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목사님, 기독교 이야기를 해주세요.’ 하니까 ‘기독교에 이런 것이 있답니다. 나도 안 믿는데 당신도 믿지 마세요. 예수라는 분이 오셔서 피를 흘리면 온갖 도 다 없어지고 의인이 되어서 천국을 간다는데 나도 목사지만 안 믿습니다. 당신도 믿지 마세요.’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를 한 시간 반 동안 듣고서 울었다는 것 아닙니까?

    이게 무슨 이야기에요? 바로 악마의 입에서 진짜 복음의 진수가 조롱 섞여서 나온 거예요. 제발 부탁하기는 여러분의 분노가운데 복음 이야기하지 말고 감격 속에서 기쁨 속에서 ‘저, 이런 인간을 예수님의 피로서 감추어진 지혜로서 저를 구원했습니다. 내 인생 어떻게 버려놓든지 무조건, 무조건 잘 하셨습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피로써 건져냈다는 도구만 되고, 하나의 기계로서 이 땅의 구원받은 자의 원형으로서 산다면 그것은 그저 행운입니다.’라는 고백이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속마음 따로 있으면서 믿는 척 해 봐야 사람은 속고 목사는 속아 넘어가지만 천사까지 속아 넘어갈 수는 없는 줄 압니다. 이제는 주님 앞에서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다 보이게 해주시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 하시는 그 십자가 피가 저희들을 의인되게 했다는 고백이 감격 속에서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