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8. 18:41

다윗의 알리바이 (사무엘하 11: 6- 9)

다윗의 알리바이

2010년 2월 28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1:6-9

(삼하 11:6, 개정) 『다윗이 요압에게 기별하여 헷 사람 우리아를 내게 보내라 하매 요압이 우리아를 다윗에게로 보내니』
(삼하 11:7, 개정) 『우리아가 다윗에게 이르매 다윗이 요압의 안부와 군사의 안부와 싸움이 어떠했는지를 묻고』
(삼하 11:8, 개정) 『그가 또 우리아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내려가서 발을 씻으라 하니 우리아가 왕궁에서 나가매 왕의 음식물이 뒤따라 가니라』
(삼하 11:9, 개정) 『그러나 우리아는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왕궁 문에서 그의 주의 모든 부하들과 더불어 잔지라』


인간의 죄는 상호 다른 두 개의 하나님의 마주침에서 발생됩니다. 참되게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과의 만남에서 인간은 숨어있는 자신의 죄가 발각됩니다. 인간이 생각한 하나님이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죄를 감추기 위한 용도로서 동원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셔서 제대로 하나님 믿는 자를 등장시켜 다윗 앞에 세우게 됩니다.

우리아 장군은 왕의 말을 듣지 아니했습니다. 그가 다윗으로부터 죽임을 당한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왕이란 부하의 생명을 살릴 수도 있고 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아 장군은 상급자인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아니한 겁니다. 이것은 곧 왕의 인식에 동의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이 세상을 보는 눈을 따로 갖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와중에서 우리아 장군이 죽습니다. 여기서 과연 우리아 장군이 패배자인가 하는 점이냐 하는 것입니다. 장수의 패배란 전쟁터에서의 죽음입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아 장군은 암몬이라는 이방나라의 군사력에 밀려서 죽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아군이라고 여겼던 이스라엘의 수장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억울한 죽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 우리아 장군은 공격을 받게 되었을까요? 그는 하나님의 언약궤에서 시선을 떼지 아니했습니다. 11절에 보면, “우리아가 다윗에게 아뢰되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야영 중에 있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부하들이 바깥 들에 진 치고 있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 내가 이 일을 행하지 아니하기로 왕의 살아 계심과 왕의 혼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아 장군의 하나님은 언약궤를 사수하는 하나님인데 반해서 다윗의 하나님은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용도로서 동원되는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서 죄가 아닌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섬긴다는 하나님의 성격을 통해서 인간의 죄가 가득 담겨있다는 사실이 폭로됩니다.

언약궤란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는 곳이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민족은 이기고,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저주가 임한 민족은 패배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그런 전쟁을 우리아 장군은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런 우리아 장군을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한 용도로 끌어당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만 관심이 있는 우리아 장군은 본의 아니게 다윗의 의도에 못맞추어준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장군은 결코 월권행위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아 장군이 결코 다윗왕을 수사하고 있거나 의심하고 있는 것도 아니요 다윗이 자기 아내를 건드렸다는 것을 안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윗 왕이 자기 아내를 임신시킨 실수를 무마하기 위해서 자신을 돌발적으로 끌어들여 다윗 자신의 씨를 마치 우리아의 자식이라고 덤터기를 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세계에 소속된 자아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긴다고 해서 우리가 억울하게 안 죽을 것이라는 오해를 갖지 않아야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도의 목숨을 가지고 세상을 죄를 드러내는데 사용하십니다. 우리아가 참으로 하나님을 위한 사람이라는 증거는 그가 암몬 전쟁에서 영웅이 된 사람이 아니라 도리어 암몬 전쟁에서 희생물이 되었다는 바로 그 점에 있습니다.

즉 우리아 장군이나 다윗이나 혹은 요압이나 모두 자신들의 적이 누구가 되는 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적이란 항상 자기 자신을 유일한 동지요 아군이라고 전제한 다음에 정립되는 법입니다. 오로지 “나는 나의 생존과 영광성만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바탕이 확립되어 있기에 누구든지 이 정신만 갖고 있다면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가 눈에 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오로지 우리아 장군에게는 진정한 하나님의 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적은 암몬 나라가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아에게 찾아온 하나님만이 옳은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다윗에게 죽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가 장군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단지 다윗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의 정당성과 의로움을 훼손할 노선 한가운데에 우리아 장군이 놓여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판단할 때는 기분따라 판단하게 됩니다. 단지 내가 밉다는 것 때문에 상대방이 망하고 죽기를 소망하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와같은 일방적인 의로움을 발각당하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희생물을 그 앞에 대령시키는 겁니다.

심지어 예수님 본인이 직접 우리 앞에 등장된 우리의 희생물이 되는 겁니다. 지금 다윗왕이 자신에게 제안 한 것은 “제발 하룻동안만이라도 전쟁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아내와 더불어 풀어라”는 거였습니다. 하지만 우리아는 거절합니다. 이게 바로 화근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만을 생각해서 자신의 일신상의 안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점 때문에 다윗의 일신상의 안일을 정당화시킬 적절한 재료가 되지를 못하고 도리어 다윗의 죄를 유발시킨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모든 말씀과 뜻의 본질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신의 정당성과 의로움을 유지하기 위한 용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거론하지만 정작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뜻대로 쓰임받는 종들은 그런 인간들의 자기 위주의 해석과 이해에 동조하지 못하는 쪽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런 하나님의 종들을 하나님께서 세상의 힘에 의해서 희생당하도록 조치하므로서 세상이 얼마나 다른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지를 들추어내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아를 이렇게 희생케 했던 그 다윗의 평소의 성경 해석관은 어떠했습니까? 20-21절에 보면, “혹시 왕이 노하여 네게 말씀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성에 그처럼 가까이 가서 싸웠느냐 그들이 성 위에서 쏠 줄을 알지 못하였느냐 여룹베셋의 아들 아비멜렉을 쳐죽인 자가 누구냐 여인 하나가 성에서 맷돌 위짝을 그 위에 던지매 그가 데벳스에서 죽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성에 가까이 갔더냐 하시거든 네가 말하기를 왕의 종 헷 사람 우리아도 죽었나이다 하라”고 했습니다.

즉 다윗은 사사기 9장에 나오는 성경 말씀을 그대로 자신의 의를 주장하는 경우에다 사용해버립니다. 성에 가까이 간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우리아 장군에 성에 가까이 간 것은 그의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성경해석이 자신이 계속 살아야 될 이유를 제공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성경말씀의 완성은 ‘살아야 될 이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성도는 어떻게 죽을 수 밖에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경건치 않는 자가 주님의 준비한 언약으로 의해 의롭게 됨을 알게해 주옵소서. 바로 그 언약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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