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22. 19:12

다윗과 우리아 (사무엘하 11: 1- 5)

다윗과 우리아

2010년 2월 14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11:5

(삼하 11:1, 개역) 『해가 돌아와서 왕들의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 신복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저희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으니라』
(삼하 11:2, 개역) 『저녁 때에 다윗이 그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그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삼하 11:3, 개역) 『다윗이 보내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 고하되 그는 엘리암의 딸이요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아니니이까』
(삼하 11:4, 개역) 『다윗이 사자를 보내어 저를 자기에게로 데려 오게 하고 저가 그 부정함을 깨끗케 하였으므로 더불어 동침하매 저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11:5, 개역) 『여인이 잉태하매 보내어 다윗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잉태하였나이다 하니라』


다윗에게 아기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에게도 아기가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분명 다윗과 밧세바는 부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자녀가 발생했습니다. 보통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다윗에 작용해서 ‘다윗 언약’을 성사시킨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뿐만 아니라 다윗의 주변 인물들에게도 같이 하나님께서 일을 성사시키십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더불어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다윗 중심으로 파악하는 습성을 갖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흔히들 다윗이 죄지었다고 합니다. 밧세바와 간음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죽었으니 죄가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행위를 보고 죄가 아니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각한 그 죄가 과연 하나님 앞에서도 죄라고 간주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암몬나라와 전쟁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출정한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냥 예루살렘이 남아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지붕 위에 거닐게 하셨습니다. 그 때 마침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을 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밧세바의 몸매가 다윗으로 하여금 음욕을 일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참지 못하고 그 여인을 데리고 와서는 율법에 위반되지 않는 범위에서는 정을 통하고 밧세바로 하여금 임신케 했습니다. 월경 시기에서는 성관계를 해서는 안된다는 법이 있습니다.(레위기 18:19) 따라서 다윗은 그날이 지나갔기에 당연히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여기면서 밧세바와 정을 통했고 하나님께서는 아기까지 생겨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하나님께서 암몬나라와 이스라엘을 전쟁하게 하지 않았다면 다윗은 남의 아내와 정을 통할 리가 없었을 것이요 밧세바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할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일을 하나님이 홀로 다 주도적으로 하셨는데 무슨 죄라는 것이 성립되는 겁니까?

사람들이 다윗을 보고 ‘죄지은 자’라고 단정하는 것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용기를 내어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사고방식이 죄가 됩니다. 다윗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이런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렇지 때문에 그는 최선을 다하여 율법에 저촉되지 않는 방향에서 자신의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수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바로 문제는 다윗은 너무 오래 하나님 믿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교인들이 교회 오래 다니면 자신이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믿는 것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어느 단체나 어느 모임에 고참이 될 정도로 오래동안 관여하게 되면 그 조직의 모든 규칙을 우습게 보게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는 생각을 안 갖게 되고 그저 사람들이 의기투합해서 조성된 극히 인간적인 조직체라고 생각을 굳히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죄라는 의식은 사라지고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몰입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곧 자신의 생각이 같다는 것으로 자신은 적절하게 최선을 다하면서 살아온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교회 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관여하고 교회 일에 주인공처럼 행세하게 되면 주님 앞에 처음 나와서 가슴이 콩닥콩닥 뛰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복하는 그런 심정이 갖고 있지 못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처음 사랑이 사라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교회를 오래 그 교회에 관여한 자들이 주도하는 인간적인 힘들이 교차하고 짜여지는 세계가 됩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 말씀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하나님 뜻과 상관없이 자신의 욕망은 욕망대로 채울 수 있는 빈 틈을 노리는 식으로 교회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로서 교회 오래다닌 것은 처음 다닐 때보다 더 못한 셈이 됩니다. 교회의 일에 관여하게 되면 점점 더 복음에 대해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가 마치 복음으로 인한 긍정적인 열매라고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즉 복음이 전해서 교회를 낳았기에 그 교회만 붙들고 키우면 저절로 복음이 그 안에 담겨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그 교회 안에서 인간들이 상식으로 납득이 되는 식으로 죄와 의를 구분짓게 됩니다.

즉 교회를 포기하지 않는 대신 말씀과 복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전체 교회 분위기도 그렇게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복음과 복음으로 대화가 오고가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법적으로 준수가 되었는지 아니되었는지를 놓고 각기 자기 변명과 자기 방어술이 총동원됩니다.

다윗이 밧세바와 그냥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나온대로 정결한 기간을 고려해서 관계를 맺은 것도 말씀이 마치 인간들의 선악 구조에 의해 적법하게 적용될 것이라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자기 변명거리를 따로 마련해두는 상황에서 법이라는 숲 속에서도 죄인이 안되는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율법이해 층 밑에 또다른 하나님이 이해하시는 층이 따로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장기판 밑에 바둑판을 깔아두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장기두는 인간은 어떤 식으로 장기를 두더라도 바둑판의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모두가 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이 짠 판인 장기판 밑의 바둑판은 하나님께서 친히 짜신 세상판입니다. 즉 죄라는 것은 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그 판 위에서 자신의 위상을 모르는 것을 뜻합니다. 소위 구원받고 난 뒤에 또 착한 일을 덧붙여야 구원이 성사된다는 그 성화론 자체가 죄가 되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신의 행위성에 준한 장기판만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 밑에 있는 바둑판은 지금 한참 전쟁 중에 장군의 존재가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즉 밧세바는 다윗이 아무리 용을 써도 우리아의 아내이지 결코 다윗의 아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밧세바를 보면서 자신과 관계해도 될 사람으로 보았는데 이는 자신이 이스라엘이 왕이라는 장기판 위에서의 입지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밧세바와 다윗을 만나게 해서 다윗이 지금 하나님이 일하심과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행위 중심으로 하나님을 끌어당겨 정당화한다는 그 죄를 들추어내십니다. 이것이 바로 바둑판에서 본 다윗의 실상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십자가 복음 중심으로 일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시선을 돌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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