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8. 13:20

은총에 대한 오해 (사무엘하 10: 1- 5)

은총에 대한 오해

2010년 2월 7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0: 1-5

(삼하 10:1, 개역)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삼하 10:2, 개역)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 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삼하 10:3, 개역)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그 주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객을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다윗이 그 신복을 보내어 이 성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삼하 10:4, 개역) 『이에 하눈이 다윗의 신복들을 잡아 그 수염 절반을 깎고 그 의복의 중동볼기까지 자르고 돌려보내매』
(삼하 10:5, 개역) 『혹이 이 일을 다윗에게 고하니라 그 사람들이 크게 부끄러워하므로 왕이 저희를 맞으러 보내어 이르기를 너희는 수염이 자라기까지 여리고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라 하니라』


인간 대 인간의 만남에서 오해가 생겼다는 내용입니다. 다윗이 호의를 베푸는데 암몬 왕인 하눈은 마치 자신의 나라를 치기 위한 스파이를 파견하는 그런 적대적 행위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전쟁이 일어나서 17-18에 보면, 그 암몬이라는 나라가 대패를 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과연 사람간의 사소한 오해가 이런 파탄을 야기할 것일까요? 아닙니다. 다윗은 보통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인간은 다른 인간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작용하게 됩니다. 이 언약 작용으로 인해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 대 하나님의 관계로 확대가 됩니다.

예를 들면, ‘개’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 개념에 맞는 개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냥 삽살개, 진돗개, 셰퍼드, 달마시아 같은 개들이 있을 뿐입니다. 이들을 한데 집결해서 말하기를 ‘개’라고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있습니다.

철이, 영희, 순희, 동영이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모아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사람들만 있을 뿐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에 의하면 다윗이라고 하더라도 대단한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약을 내리시는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담’이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아담이 행하는 모든 것은 나머지 모든 인간들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적도 없는 우리 모두는 선악과 따먹은 그 벌을 다같이 받게 됩니다. 이런 관계에 있는 아담은 ‘보편적 단독성’이라고 합니다. 단독성이란 ‘한 사람’을 뜻하고, ‘보편성’이란 그 뒤에 튀는 사람없는 숱한 일반 사람들이 붙여있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뒤에 얼마나 많은 인류들이 태어났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묵묵히 아담만 상대하십니다. 인간이 아무리 훌륭하든지 간에 우리 조상되시는 아담이 저질러놓은 죄의 구조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 죄의 구조 안에 갇힌 꼴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눈에 의하면 다윗은 그냥 보통 사람일 뿐입니다. 결코 다윗의 끝에 아담이 있고 그 아담의 끝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쉽게 말해서 ‘아담을 통해서만 하나님과 통한다’는 사실을 보통 인간들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각자 자신들이 알아서 하나님과 통한다고 보는 겁니다. 이런 인식으로 인해 하눈은 다윗의 ‘보편적 단독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 말고 다른 아담을 만드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마지막 아담’,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비로소 아담이 갖고 있는 보편적 단독성이나 다윗이 갖고 있는 보편적 단독성의 참 내용이 그들 내부에서 펼쳐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다윗이 베풀어주는 것은 단순히 사적인 동정심이나 배려 차원이 아닙니다. 다윗이 베푸는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로서 베푸는 것이라고 효력이 있는 동시에 그 은혜를 거절하는 것은 단순히 다윗에게 징벌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식이 됩니다.

쉽게 말해서, 복음을 믿는 자들의 복음 전달을 거부하는 것은 천국에 도저히 들어갈 수 있는 인물임을 확인하는 과정에 해당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눈이라는 작자와 지난 번에 나온 므비보셋의 존재를 비교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둘 다 다윗이 어려워했을 때에 도움을 준 집안입니다.

므비보셋의 아버지 요나단으로부터 다윗은 혜택을 입었으며 하눈의 아버지 나하스에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상 21:10에 보면,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가니”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다윗은 보답을 하기 위해 찾아갔지만 사람들은 다윗의 위상을 일반인들과 같은 것처럼 오해한 것입니다.

하지만 므비보셋은 다윗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였습니다. “나 같은 개 같은 인간을 돌아보시나이까?” 그런데 하눈은 결코 이런 고백을 해내지를 못합니다. 자존심 때문입니다. 자기 구조, 자기 세계를 따로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 난 뒤에 행하는 의로운 행위를 의롭다고 인정해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바로 므비보셋과 같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자기만의 영역을 따로 고수하겠다는 비복음적 사고방식인 것입니다. 하눈의 이러한 은혜에 대한 배반은 출애굽기 1:8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선조들이 받은 은혜를 후손들이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과의 대표자가 아님을 알지 못하고 선조들, 즉 보편적 단독적과 자신과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하눈을 미워서 전쟁하는 줄 알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하눈은 그 은혜를 짓밟고 모독했습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미워합니다. 하지만 실은 그런 미움을 드러내는 그 모든 행위도 실은 예수님이 주신 은혜의 힘으로 합니다. 이런 은혜를 사람들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므로 모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때에 지옥에 간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을 미워하지 못하고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주님에게 대드는 것이 아니라 후회합니다. 왜 그동안 받은 은혜에 대해서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자기 영광을 돌렸느냐 하는 식으로 후회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천국 뿐만 아니라 지옥에서도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는 지옥에 속한 자들이 주장하는 협박이나 미움에 두려워하지 맙시다. 왜냐하면 그들과 우리 사람에는 골짜기가 있어서 우리가 저리로 건너 갈 수 없고, 저들도 우리 있는 곳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천국은 아무나 갈 수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같이 미천한 자들에게 대해 베푸시는 은혜를 우리가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17강-삼하10장1-5(은혜에대한오해)-2sa100207.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17강-삼하10장1-5(은혜에대한오해)-2sa100207.avi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17강-삼하10장1-5(은혜에대한오해)-2sa100207.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