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5. 15:00

무조건 이기고 (사무엘하 8장 3- 8절)

무조건 이기고

2010년 1월 24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8:3-8

(삼하 8:3, 개정) 『르홉의 아들 소바 왕 하닷에셀이 자기 권세를 회복하려고 유브라데 강으로 갈 때에 다윗이 그를 쳐서』
(삼하 8:4, 개정) 『그에게서 마병 천칠백 명과 보병 이만 명을 사로잡고 병거 일백 대의 말만 남기고 다윗이 그 외의 병거의 말은 다 발의 힘줄을 끊었더니』
(삼하 8:5, 개정) 『다메섹의 아람 사람들이 소바 왕 하닷에셀을 도우러 온지라 다윗이 아람 사람 이만 이천 명을 죽이고』
(삼하 8:6, 개정) 『다윗이 다메섹 아람에 수비대를 두매 아람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
(삼하 8:7, 개정) 『다윗이 하닷에셀의 신복들이 가진 금 방패를 빼앗아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삼하 8:8, 개정) 『또 다윗 왕이 하닷에셀의 고을 베다와 베로대에서 매우 많은 놋을 빼앗으니라』


전쟁이라는 것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지만 만약에 승자가 된다고 한다면 신나게 여깁니다.. 사람들은 전쟁은 싫어하되 승자 쪽에 서는 것은 좋아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전쟁을 오늘날 우리들에게 그대로 적용시키고 싶은 것은 다윗이 전쟁했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기고 또 이기고 늘 이긴다는 점이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전쟁은 사람 대 사람의 전쟁이 아닙니다. 하나님 대 사람의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이 점을 간파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 대 사람의 전쟁에서 그 ‘사람’이라는 항목에 바로 우리 자신들이 포함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늘 하나님께서 이기기 위해 우리는 늘 져야하는 겁니다. 이래도 ‘하나님의 전쟁’에 가담하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전쟁의 최종 영원한 항상 하나님께서 가져 가십니다. 다윗의 전쟁에서도 예외가 없습니다. 전쟁은 다윗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윗마저 하나님 앞에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등장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 앞에 ‘져야 함’의 의미란 바로 우리가 평소에 갖고 있는 모든 노림수가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박탈 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의 원칙에 대해서 우리 인간들이 관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원래 지금 우리가 딛고 사는 환경이 되는 이 땅은, 노아 홍수 이후의 땅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애슴과 무관하게 은혜로만 유지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공기를 은혜로 주시지만 그것 뿐만아니라 ‘언약’이라는 것도 은혜로 주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은혜라고 받아들이고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방치해놓고서는 잊어버리려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을 자꾸 상기하게 되면 본인이 원래 노리는 바를 당당하게 수행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 유지를 오로지 전쟁을 통해서만 유지되게 하도록 하십니다.

전쟁이 일어나려면 나쁜 편과 좋은 편으로 나뉘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좋은 편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권리를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 저는 이러이러한 공로를 내세웠기에 마땅히 좋은 편이 되어 하나님께서 누리는 그 승리에 참여케 해주옵소서”라고 주장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다윗마저도 그러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구원에 참여하는 것은 그를 철저하게 죄인으로 만드신 이후에 일입니다. 그래야지만 하나님의 전쟁에서 오로지 하나님만이 최종 승리자로 계속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오로지 ‘은혜로만’ 유지되는 땅인 점을 우리는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 하나님편에 서서 전쟁을 하게 되는 군사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칼들고 총들고 나서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인간들은 자체적인 범주가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 전쟁에서 군사로 나설 자들도 이 범주 안에 놓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의 조건을 사용하시면서 그 구조조건과 상관없는 구조를 내세워서 전쟁에 나서게 하십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 사람들은 인간들이 납득할 수 있는 힘을 의존합니다.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이방민족들은 말의 힘을 의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그 말의 힘을 잘라버립니다. 이것은 인간들의 힘이 출처에 대한 부정이요 공격이요 곧 인간을 품어 주고 있는 그 세상구조에 대한 정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해도 자신이 낳고, 자라나고, 처해있는 구조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아 언약, 즉 노아를 통해서 부어주신 은혜로 유지되는 땅에서 사람들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못하는 ‘씨=자손’과 ‘땅’을 얻게 하십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 “네 씨가 하늘의 별같이 번창할 것이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듣는 아브라함은 자식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땅이라는 것도 기존에 인간들이 알고 있던 그 땅이 아닙니다. 약속의 땅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은 기존의 인간이 처해있는 삶의 구조와 전혀 다른 구조로 대체되는 식으로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이 교체에 필요한 전쟁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도 일어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 빼놓고 누구나 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물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곁가지들을 쳐나갑니다. 약속의 땅 가진 자의 자격으로 그들을 치게 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하며는, 약속의 땅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약속의 땅의 취지는 영원히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약속의 땅의 취지를 무산시키는 무수한 적들을 척결해나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이런 언약 원칙에 준해서 오늘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전쟁을 개시하십니다. 바로 이런 대상자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곧 하나님의 전쟁의 군사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서 우리는 우리가 염두에 둔 세상의 삶의 구조가 바뀌어지는 경험을 겪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필히 받아낼 수 있는 건저하고 거룩해보이는 요인들을 집결시켜 하나님에게 당당하게 요구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입장에서 은혜의 시작입니다. 즉 도대체 어떤 것들이 사정없이 깨어져야 하는지를 우리가 알 수 있는 기회를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들이 결국에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밑바닥에 깔려있는 용서와 은혜라는 것을 까마득하게 잊고서는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그런 힘의 뭉치에 탐을 내었다는 비은혜적이고 비언약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전장에서 전선이 이루는 경계선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경계선, 곧 영과 물질의 경계선에는 이처럼 자신의 죄를 알아챈 우리들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매일같이 전쟁하시고 어디에 근거해서 매일같이 은혜주시는지를 알게 하십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영적 전쟁의 최전선입니다. 초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첫사랑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스데반 집사나, 욥의 고난을 봐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친히 쓰신 영적 군인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경우, 우리는 당장 죽고 싶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본다는 고린도전서 13:12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이 생존의 자리, 힘의 자리가 늘 깨어져서 그 팀 사이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젤리처럼 솟아나옴을 놓치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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