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0. 17:53

살리고 죽이고 (사무엘하 8장 1- 2절)

살리고 죽이고

2010년 1월 10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8:1-2

(삼하 8:1, 개역) 『이 후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서 항복 받고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메덱암마를 빼앗으니라』
(삼하 8:2, 개역) 『다윗이 또 모압을 쳐서 저희로 땅에 엎드리게 하고 줄로 재어 그 두 줄 길이의 사람은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리니 모압 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성도란 이 세상에서 자비가 가득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성도라면 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행위의 잔인함에 대해서 사람들은 의아해합니다. 너무 심하지 않느냐고 반문합니다.  이렇게 잔혹한 짓을 해서 무슨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겠느냐고 분개합니다. 

적어도 이미 구원된 자라면 두 번 다시 잔인하고 악한 행동은 나오지 않는 것이 성령받은 사람들의 취해야 될 마땅한 도리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다윗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과연 본인들이 구원된 자 맞는지 다시 되물어야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하는 행위를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상의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행위를 반대하면 곧 하늘의 하나님이 하시는 ‘주의 일’을 반대하는 자가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축약하면, ‘죽이고 살리고’입니다. 즉 ‘살리고 죽이고’가 아닙니다. 모든 자는 당연히 마땅히 다 죽어야 될 자들입니다. 그 죽을 자들 중에서 얼마나 다윗의 은혜로 살아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서 주님에 의해서 ‘살아남’을 안 사람은 ‘엎드려 죽어지낸 자’에게만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살고 죽는 것을 자신에게 원인이 되어서 살고 죽는다는 결과가 나오는 줄로 압니다. 로마서 9:15-16에 보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이 살고자 발바둥치는 그 간절함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구원하는 그런 계획은 아예 하나님에게는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원래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실 때, 인간 위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위주로 만드신 것입니다. 즉 인간을 위하여 인간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위하여 인간을 만들었습니다. 인간보다 언약이 우선입니다.

동네 가게에서, 출입구에 방울을 단 것을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주인이 딴 짓하더라도 “딸랑, 딸랑” 소리가 들어오면 손님이 들어선 줄로 알고 바짝 긴장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그런 방울을 달아놓으신 것입니다. 인간은 악마에 의해서 그 방울을 건드렸습니다. 선악과라는 방울입니다.

따 먹자마자 “딸랑, 딸랑” 소리가 났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완전히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서 배제당합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압 포로들처럼 납작 엎드려 있어야 될 처지가 된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나는 모든 작업은 바로 생명나무가 벌린 세사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낳게 합니다. 하지만 그 애는 구원받을 자가 아니라 저주받을 자랍니다. 그 다음에 이삭이 약속에 준해서 태어나게 합니다.

이처럼 이 이삭을 볼 때마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구원받는데 있어 그 어떤 기여도 하지를 못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생명나무가 이 땅에 일종의 불랙홀을 만들어놓은 셈이 됩니다. 불랙홀이란 검은 구멍을 말합니다. 그 구멍 안에서 인간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죽으셨던 예수님의 죽음이 담겨 있는데 그 십자가 죽음이 모든 것을 다 잡아당기는 힘에 발휘됩니다. 마치 결코 끊어지지 않는 강력한 고무줄이 나와서 오직 자기 백성들을 지속적으로 잡아당기게 됩니다. 그 인간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고를 치고 다녀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무관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윗 같은 경우에도 그는 모세 율법에 의하면 마땅히 죽어야 될 죄인이지만 그는 또한 그 모세 율법에 의해서 살게 되는 사람이 됩니다. 이처럼 같은 율법이라도 어떤 사람은 살리고, 어떤 사람을 죽이는 기능을 하게 됩니다.

이 모든 일들이 궁극적으로 가장 높이 설정된 언약에 매여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 전에 예수 안에서 택한 자만이 구원된다’는 원칙입니다.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으로서는 이 언약에 자신이 관여할 입장이 되지를 못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낳게 난 뒤에 이름을 짓는 것은 순전히 부모의 권한입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나중에 성장해서 “왜 나의 이름을 이렇게 옳지 않게 지었느냐”고 따지고 들게 됩니다. 이것은 부모의 주되심을 비웃은 행위가 됩니다. 즉 자식은 이제 자기가 독자적으로 살아있다고 여기면서 그 독립성을 가지고 부모에게 대들어보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이 항상 하나님에 대해서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일 높은데 자리잡은 언약인, ‘창세 전에 예정된 자만 구원’을 이루기 위해 그 땅에서 성도를 ‘날마다 죽고 날마다 살게 하는’ 일을 발생시킵니다. 왜냐하면 진정 죽어보지 아니하면 자신이 마치 살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주부가 설거지를 합니다. 하지만 말씀 안에서 볼 때, 그 주부는 설거지라는 죽을 죄를 짓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선악과라는 방울을 건드리는 일입니다. 즉 자신이 하는 선한 일이 마치 자기 구원에 원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착각하는 그 죄 말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그 자리에 생명나무 원칙을 작렬시킵니다. 곧 주되심을 작렬하는데 우리를 땅에 엎드리게 합니다. 이미 죽어 마땅한 자로 말입니다.

이런 작업 원칙이 고린도후서 4:10-11에 나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이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죽음에 넘기지 않는 일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제가 커피를 마시는 일도 땅에 납작 엎드리는 일이요, 우리교회 중학생이 수학시험을 치는 일도 땅에 납작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가게 열어서 손님을 접대하는 참으로 고상해보이는 직업도 사실은 납작 엎드리는 일에 불과합니다.

죽이고 살리는 일은 그 매사에 우리 예수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강도가 진정 자신이 잡혀서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 달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거리를 활보하면서 계속 강도짓만 했을 것입니다. 이로서 사람이 죽음을 모르면 삶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죽음에 넘겨본 자만이 구원이란 순전히 예수님의 긍휼하심에 근거함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언약이 우선이지 우리가 우선이 아님을 알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그 어떤 근심,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 모두 다 십자가에서 잡아당기는 고무줄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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