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31. 10:48

다윗의 은혜 (사무엘하 9장 1- 8절)

다윗의 은혜

2010년 1월 31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9:1-8

(삼하 9:1, 개역)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삼하 9:2, 개역)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삼하 9:3, 개역)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삼하 9:4, 개역) 『왕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삼하 9:5, 개역) 『다윗 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삼하 9:6, 개역)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삼하 9:7, 개역)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삼하 9:8, 개역)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다윗이 요나단 집안을 돌보는 것은 자신의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앞에서는 누구나 다 시시한 존재입니다. 사람들은 착각하기를 자신이 죽을 때는 거창하고 화려하고 멋있고 의미있게 죽는 것 같지만 실은 아무도 관심두지 않고 홀로 죽는 그냥 그렇게 그런 죽음일 뿐입니다. 참으로 ‘시시한 죽음’입니다.

즉 죽음이라는 것 자체가 사람 손으로 질이 잡혀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질이 잡혀있기 때문에 이 죽음 안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개성을 살릴 수가 없이 시시한 죽음 속으로 조용히 빠져들어갈 뿐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허무하지요. 그런데 이 허무함이 실은 아직 죽지 않는 우리들의 일상 속에 푹 젖어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만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요나단 집안을 돌보는 것은 요나단이 살아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요나단은 죽어있어도 요나단과 다윗과의 맺은 언약은 죽을래야 죽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언약은 다윗이나 요나단 이라는 두 인간으로 맺어진 것이 아니라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게시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20:42에 보면, “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우리 두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영원히 나와 너 사이에 계시고 내 자손과 네 자손 사이에 계시리라 하였느니라 하니 다윗은 일어나 떠나고 요나단은 성읍으로 들어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인 인간들 끼리 맺은 언약과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언약과의 차이를 알아봐야 합니다. 사람이란 나 뿐만 아니라 숱한 사람들이 하나하나 따로 있다고 봅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해서 이름들이 다 따로 붙여져 있다고 사람들은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이런 생각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그냥 직접 인간을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보십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이란 하나하나 고유이름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이름 자체가 보통명사가 됩니다. 보통명사란 너 나 할 것이 모두 일괄적으로 하나로 묶어내어서 붙이는 이름입니다. 곧 ‘인간들’이 아니라 그냥 ‘인간’입니다. 그냥 ‘흙’이지요. 아담을 말합니다.

사람들과 사람들 끼리는 서로서로 개성이 있으니 딴 사람 같아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그렇고 그런 존재들일 뿐입니다. 즉 각자의 개성을 일체 인정해주지 않는 대상이 인간들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요나단 집안에 은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런 집안이 그렇고 그런 집단이 복을 전달하되 정작 복이 내려오는 곳이 ‘다윗 언약’이 만들어진 그 곳, 곧 하늘나라입니다.

인간의 그 어떤 개성도 인정해주지 않는다는 경우가 오늘날 구원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7:13-14에 보면, “장로 중 하나가 응답하여 나에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 내가 말하기를 내 주여 당신이 아시나이다 하니 그가 나에게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각자 사람들에게 옷 한 벌씩 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각자 기존의 옷들을 입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양에서 나온 피가 그 옷에 입혀지면 졸지에 요술처럼 그 옷에 하얗게 희어집니다. 참 신기하죠? 신학자들이나 철학자들은 이런 요술을 인정하지 않아요. 이처럼 피가 뿌려지면 아무리 각자 개성있는 옷을 입어도 그 개성들은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오직 하나의 옷으로 변모하고 맙니다. 하얀 옷으로 말입니다. 죄가 묻혀도 자꾸만 하야지는 옷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로의 통일을 뜻합니다. 바로 이처럼 죄인들의 죄마저도 깨끗게 하실 수 있는 그 분이 바로 인간의 고유명사로 나서게 됩니다. 그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유명사란 오직 그분에게만 해당되고 다른 사람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고유명사 되시는 참된 인간의 성격을 보여주기 위해 지상에 깔리게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그림자’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그림자 따로 있고 본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본체는 하늘에 있습니다.

즉 연탄처럼 시커먼 인간들이 사슬이 지상을 깔아서 흐르게 된다는 것만 보면 안됩니다. 하늘나라에서는 그 인간의 죄의 사슬과 동행하는 하얀 분이 계십니다. 이 분께서 지상에 그동안 말씀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이 말씀이 육신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로서 일반명사에 속한 일반인들 중에서 고유명사에 속한 예수님에게 속한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다윗이요 요나단입니다. 이 둘을 접합시키는 접착제로서는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인간하고 의논하지 않고 하나님 단 둘이서 모든 계획안을 결정지은 바 된 계획된 약속을 뜻합니다. 그 약속이 정해놓은 절차에 따라 지상에 펼쳐지니 지상은 하늘의 본체를 보여주는 흔적으로서 그림자가 됩니다.

그림자는 결코 본체와 끊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자력으로 끊으려고 하여도 끊어지지 않고 악마가 아무리 시험해도 그 사랑의 사슬을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체도 없이 자칭 ‘그림자’라고 나선다면 약간의 핍박과 자존심이 상하면 금방 자신이 나서서 친히 보복과 복수를 해버립니다. 곧 자신의 본체요 그림자인 것이 들통 나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본체가 되는데 붙어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그림자로서 사는 자들은 자신에 대한 공격에 대해서 무덤덤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전에 요나단에게 은혜를 입은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권세를 잡았다고 보지 않고 하나님께서 친히 권세를 잡았다고 보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자신이 승자되는 경우나 패자가 되는 경우는 어느 경우도 일어나지 않고 모두 하나님께서 늘 승자가 되는 경우 뿐입니다. 아버지께서 보낸 자들만 예수님에게 오게 되어 있고 구원은 예수님의 능력에 의해서 달성됩니다. 이로서 성도라는 그림자는, 혹은 보통명사는 오직 예수님이라는 고유명사를 증거하는 자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우리에게 있어 미완료라는 것이 없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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