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12. 13:38

당신이 바로 그 사람 (사무엘하 12:1-7)

당신이 바로 그 사람

2010년 3월 7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2:1-7

(삼하 12:1, 개정)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
(삼하 12:2, 개정) 『그 부한 사람은 양과 소가 심히 많으나』
(삼하 12:3, 개정)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삼하 12:4, 개정)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삼하 12:5, 개정)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2:6, 개정) 『그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이런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나 갚아 주어야 하리라 한지라』
(삼하 12:7, 개정)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 붓기 위하여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다윗은 언약의 중심자입니다. 자신도 그 점에 대해서 익히 압니다. 소위 말씀 해석자로서 혹은 권위자로서 혹은 그 말씀을 백성들에게 적용시키는 자로서 자신이 행세해야만 자로서 하나님이 세웠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어느날 나단 선지자가 자기를 방문합니다. 그는 뻔히 일반 백성들에게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다윗에 자문을 얻거나 보고하고 온 줄로 알았습니다.

않으나 다를까 나단은 이스라엘 내에 있었던 일인 것처럼 하면서 이야기를 끄집어냅니다. 한 성에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부자고 하나는 가난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기가 사서 기르는 암양 새끼 하나뿐이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암양새끼는 자신의 딸처럼 귀한 양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떤 길 가는 사람이 부잣집에 왔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이 행인을 대접하는데 자신의 양과 소는 아꼈습니다. 이 부자는 소와 양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난한 자의 양 새끼를 빼앗아 자신에게 온 사람을 대접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나단을 다윗에게 전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다윗이 대단히 노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네 배가 갚아 주어야 하리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과연 율법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었을까요? 

양을 훔쳤으면 네 배를 갚아야 하는데 말씀이 출애굽기 22장1절에 나옵니다. “사람이 소나 양을 도적질하여 잡거나 팔면 그는 소 하나에 소 다섯으로 갚고 양 하나에 양 넷으로 갚을 지니라”지니라” 이 율법에 대해서 다윗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문자적으로 자 외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율법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신은 선악과 따먹지도 않았고 자신은 예수님 십자가 죽었을 때에 가담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징벌을 자신이 책임지는 것을 하나님은 옳은 처사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2:10에 보면,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하나가 마치 깔때기와 같아서 입구가 좁은 병에다 액체를 부을 때처럼 모든 성경말씀이 이 좁은 성경 말씀 안에 다 담겨 들어오게 됩니다. 따라서 해석을 할 때는 그 모든 성경말씀과 구조적으로 연계되어 있습니다. 다윗이 부자와 가난한 자의 만남이 이루어진 일에 대해 성경 말씀을 적용하면서 자신이 제 3의 인물로 관여되지 않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그저 판정만 내리면 객관성을 보장할 줄로 알았습니다. 이러한 오류는 요나 선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국에 있을 때,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계시에 해석은 자신이 담당했고 자신이 해석한 대로 그는 하나님께서 일을 진척시킬 줄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니느웨성에서 말씀을 전하고서는 자신은 제 3의 관찰자 입장에 서서 말씀의 추이를 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하나님께서는 요나의 예측대로 일이 전행되지 않게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요나는 삐졌습니다. 하나님은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이라고 외치면서 그는 자살을 기도합니다.

요나 선지자의 오류는 무엇일까요? 그는 본인이 할 수 있는 능력대로 해석했다는 이유 때문에 곧 그대로 하나님께서 일을 진척하리라고 여긴 겁니다. 이것은 곧 ‘자비롭고 은혜로운 신의 일’에서 자신이 빠져 있어도 이제는 괜찮은 여유로운 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마치 한 때 십자가 믿었다고 더 이상 십자가와 상관없는 자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새삼스럽게 요나에게 자비와 은혜의 진정한 대상이 누군가를 알려주시는 조치를 따로 해주셨습니다. 결코 선지자라고 해서 이방인들과 달리 은혜와 자비의 대상에서 초월한 상황이 아님을 알려주는 겁니다. 인간이란 자신이 저주받아 마땅함을 알 경우에만 자비와 은혜가 실질적인 효능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부자로 여기게 하셨고, 가난한 자를 우리아로 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쌍한 양 한 마리를 밧세바로 삼아 대입시켰습니다. 이는 우리아로 하여금 장차 오실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의 모습으로 미리 보이도록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으로 하여금, 장차 오실 메시야를 죽게 한 말씀 전문가로 역할하게 구조를 짰습니다.

이는 다윗으로 하여금 미리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과 따먹은 사건이 곧 인간이 하나님을 죽인 사건이게끔 하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네가 그 사람이다”고 지적해주심으로서 가능케 하셨습니다.

즉 다윗은 의인 혹은, 말씀 해석자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의 자리 있어야 했습니다.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저주받아야 마땅한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해야 했습니다. 이 점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진정 양 한 마리의 의미를 아는 자는 그 양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 그 사람에게만 해당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이 땅에서 살해당하도록 하셨고, 우리아로 하여금 다윗의 손을 죽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되면 소위 말씀을 알고 율법을 제대로 적용한다고 여기는 모든 자들이 결코 옳은 해석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건이 터지고 그 사건의 당사자로서 한 가운데 있어야지만 모든 말씀이 해석이 가능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인이 십자가 죽지도 않으면서도 갈라디아서 2:20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 십자가 사건이 다윗에게 피어오른다면 말은 곧 다윗은 언약의 중심에 놓여 있는 인물이라는 겁니다. 모세 시대에 있어 언약의 중심지에서는 매일같이 연기가 피어올랐습니다. 노아 언약 때에는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정결한 제물을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연기 냄새를 맛있게 흠향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는 물로서는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그 다음에 주어진 것은 지속적 은혜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다윗에게 죄를 아는 사건이 터졌습니다. 연기가 피어오른 겁니다. 광야 때,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이동하는 성막 중심에서 피어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은 성도를 이 세상의 중심지로 삼습니다. 성도 주변에 배치된 사건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죄에 대해서 부채상환이 불가능한 존재임을 알리는 사건들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네가 그 사람이다”고 지적하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미 용서받은 자됨을 보여주는 촛불로서 성도를 데리고 다니십니다. 성도가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늘 우리 머리에 예수님의 죽으심의 연기가 피어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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