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5. 14:59

어그러진 길 (예레미야 14:10-12)

어그러진 길

2010년 2월 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4:10-12

(렘 14:10, 개정) 『여호와께서 이 백성에 대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어그러진 길을 사랑하여 그들의 발을 멈추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받지 아니하고 이제 그들의 죄를 기억하시고 그 죄를 벌하시리라 하시고』
(렘 14:11, 개정) 『여호와께서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복을 구하지 말라』
(렘 14:12, 개정) 『그들이 금식할지라도 내가 그 부르짖음을 듣지 아니하겠고 번제와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지 아니할 뿐 아니라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내가 그들을 멸하리라』


선지자의 입장이 난처해졌습니다. 백성들에게 있어 선지자란 축복을 제공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낸 자라는 인식을 견지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대로라면 선지자란 축복주려는 분이 아니라 도리어 저주를 주기 위해 등장하신 분 같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면 으레 축복주시는 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저주하기 위해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란 날때부터 자기를 ‘선한 의지’를 가진 자로 규정하면서 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변에 일어나는 그 어떤 일도 다 자신의 선함에 협조하기 위해 벌어진 일로 간주하고 맙니다. 즉 그 어떤 경우도 자신이 얼마나 추잡하고 더럽고 저주받아야 함을 알려주는 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해석 오류가 그대로 예수님에게도 이어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사도가 되기 전에 사울이라는 이름으로서 스데반 집사의 죽음에 관여했습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를 비롯해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 처단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기 눈에 뜨이는 사람들을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일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경유해서 눈에 보이는 자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즉 사울이라는 사람은, 자신과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여호와 하나님의 생각에는 아무런 하자나 문제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그 관계가 정상적이라고 간주하고 난 뒤에 예수 믿는 자를 판단하게 되는 그들 예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악마적인 요소라고 단정내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장에서 사울이 다메섹으로 내려가는 길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찾아들었습니다. 이 때 사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모순되는 말을 내뱉게 됩니다. 즉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한 것입니다. 이 문장에서 분명히 사울은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그래놓고 곧 이어 “누구십니까?”라는 말을 합니다.

즉 사울은 자기에게 찾아온 분이 하나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한 나사렛 예수다”라고 말입니다. 이로서 그동안 사울이란 사람이 경유했다는 그 하나님은 실은 악마가 심어준 허상적인 여호와였습니다.

이로서 모든 인간의 모든 신 개념은 다 악마가 심어넣어준 개념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사울이 경험한 바와 같은 경로를 거쳐야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알고 있던 하나님으로부터 인하여 밉상받고 핍박받는 그런 분‘으로서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흠모할 거리가 있는 메시야를 메시야로 모시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참된 하나님은 이사야 53장에 의하면, ‘흠모할 것이 없는 분’입니다. 이로서 사도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은 구약을 해석하면서 인간에서부터 출발해서 바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을 잘못된 하나님이 되고 반드시 십자가 새언약을 통해서 구약을 해석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축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저주하시는 하나님이고 그들을 위하여 복을 빌어주어서도 아니되고, 그들의 금식이나 기도도 듣지 않겠다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뜻을 나타내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로 인하여 발생된 것입니다.

즉 새언약으로 들어가서 구약을 해석하게 되면, 이 땅은 쉴새없이 저주가 뿜어져 나오는 곳입니다. 인간들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난 뒤에 그들은 저주 천지의 세계에서 저주를 온 몸으로 받아내면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생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저주스러운 운명입니다.

이 생존차원에서 사람들은 축복과 저주를 생각하면서 신을 그리워하게 되는데 바로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해석 오류가 발생되는 이유입니다. 예를 들어서 광야 시절의 경우를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들게 광야를 통과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그들은 자기 하나님에 대해서 원망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를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만나 주심은 생존차원에서의 인간들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함이 아니라 생명차원에서 주시는 양식이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생존차원에서 생각하기를, 이 땅에서 고생을 많이 하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죽어서는 천국, 곧 생명의 나라에 넣어주리라고 여기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애당초 하나님께서는 선악과 따먹었다는 이유 때문에 생명나무 과실을 아예 못먹도록 하셨습니다. 이는 인간들의 고생을 근거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어떻게 주어지는 겁니까? 그것은 생존의 차원이 아니라 생명의 차원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광야를 거치고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약속의 땅이란 약속+땅입니다. 곧 저주가 뿜어져올라오는 땅이 약속을 만나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로서 덮어지는 겁니다. 이 약속은 바로 생존이 아니라 생명차원에서 거저 주시는 것이요 은혜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약속의 땅에서 약속의 의미를 잊어버리면 땅에서 올라오는 저주에 그대로 노출하도록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란 그저 자신의 생존에 유리하라고 하나님이 찾아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그들을 그릇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빠가 죽었다고 자매가 예수님에게 화를 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생존차원에서 예수님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차원에서 볼 줄 모르는 이 자매를 보고 예수님은 도리어 우십니다. 즉 나사로는 생존의 차워에서 죽어야 생명의 차원에서 사는 겁니다. 이점에 대해서 예수님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저주의 땅에서 죽으시고 생명의 나라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은 생존차원 밖에 모르기에 차라리 이 땅에는 죽는 것이 축복입니다.

신랑에게 신부란 자신의 영광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있는 자기 신부를 위하여 신랑되시는 예수님께서 사랑을 해주시게 되면 이제 신부는 생존의 세계에서 죽어도 생명의 세계에서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경우, 생존차원에서 축복이라고 여기는 그 껍데기는 과감하게 벗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저주성이 그대로 노출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생명의 차원이 따로 있음을 압니다. 이럴 경우에만 진짜 은혜가 뭔지 축복이 뭔지를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서 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가 얼마나 잘못된 인식을 갖고 사는지를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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