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0. 17:56

변할 수 없는 것 (예레미야 13장 20-26절)

변할 수 없는 것

2010년 1월 20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20-26

(렘 13:20, 개역)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뇨』
(렘 13:21, 개역)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렘 13:22, 개역)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렘 13:23, 개역)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렘 13:24, 개역)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이 흩으리로다』
(렘 13:25,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렘 13:26, 개정)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하나님에게 있어 말씀이 우선이지 인간이 우선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너무 심하게 다루신다는 느낌을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린애들이 주판을 가지고 마루바닥 온 천지를 밀면서 가지고 놀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지고 지상에서 다루시면서 자신의 성격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의 수치를 드러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인간이 수치를 느끼는 데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정체성에 상처를 입을 때 수치를 느낍니다. 쉽게 말해서, 은근히 기대한 바가 있는데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안 될 때, 무슨 실패를 느끼고 그 실패한 결과를 보면서 수치를 느낍니다. 자존심이 상했다는 겁니다.

특히 가까운 곳에 경쟁 상대자가 있다면 이 수치감을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아파트 바로 옆 집에 자기집 자녀와 같은 연배의 아이가 살고 있다면 애들 성격에 따라 수치와 자긍심을 번갈아가며 일어나게 됩니다. 경쟁에서 밀려서 패배했을 때 수치감을 갖는 이러한 수치감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갖는 수치감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수치감은 이런 자존심과 관련된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죄를 지어서 그 심판을 당하여 죄인되었음이 공개될 때에 수치감을 갖게 됩니다. 창세기 20장에서 아비멜렉 추장 가문의 여인들이 모두 임신이 되지 않을 때, 그들은 신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이 기도해주니 그들 가문의 수치를 물러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을 수치스럽게 만들어가면서까지 포로잡혀 가게 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대외적으로 이스라엘은 범죄한 민족으로서 다른 이방제국에 포로잡혀 간다는 사실이 온 천하에 공개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사용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성격과 본성을 세상 만방에 알리시는 겁니다. 이렇듯 겪여야 하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없다면 어떤 식으로 세상은 참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자기 하나님에게 어떤 죄를 지은 것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주체화되어 하나님없이도 자신들이 버틸 수 있다고 여기는 순간, 하나님의 분노를 유발시킨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주체화하게 되면 그 주체화를 드러내기 위해 외부의 간섭없이 독자적으로 이루어낼 일을 꾸미고 추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주체화된 행위가 하나님에게는 수치스럽게 될 범죄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독자적인 노선을 건설할 그 어떤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라는 주체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주체는 말씀이 주어지게 되면 단지 사건의 흐름으로 달라져버리게 됩니다.

바로 이 공식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실시하신 것입니다. 자칭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겼던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그 주체화는 수치화로 변했고, 그들은 단지 이방나라 포로잡혀가는 죄인의 모습을 띠게 된다데 바로 이 자체가 ‘말씀이 실시한 사건’이 되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원칙이 신약 때, 예수님에게 그대로 적용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찍어면 그것이 예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형상인 줄 압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있어 ‘하나님의 형상’은 물체화로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변해서 사건화로 대변됩니다. 즉 예수님은 분명 어머니 마리아를 닮은 용어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말씀이 임하게 되면 예수님의 전 생애는 ‘말씀의 사건’이 되는데 그것은 ‘죄를 짊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용모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부활의 영역 자체가 사건화된 말씀이요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따라서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입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고백된다는 사실이요 사건을 두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의 육체 자체에 말씀이 임해서 우리의 존재가 ‘말씀의, 사건화’가 되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전 생애와 우리의 전 생애가 결국 죄로 인해 수치스러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의롭고 거룩한 형상을 취하신 것은 기존의 육체적 형상이 아니라 말씀의 완성 차원을 말해주는 영적인 형상입니다.

이 영적 형상에서 성령이 성도에게 주어지면 이 때부터 성도는 말씀으로 인해 그의 신체적 형상은 난도질을 당하게 됩니다. 곧 죄있는 형상이 되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든 수치스러운 형상이 되는 겁니다. 이처럼 주님과 성도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것은, 다윗 언약을 통해서 한 분 하나님께서 두 주님으로 분리를 일하시게 된 여파입니다.

시편 110:1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성도의 자아도 둘로 분리되어져 있습니다. 하나는 기어이 하나님의 말씀을 반드시 지키고 싶어하는 자아와 또다른 자아는 그 의지를 꺽어버리는 자아입니다.

두 주님과 두 자아가 형성되면서 신약 때의 말씀 완성은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자아’와 그런 인간을 위해 대신 꼭 죽어셔야 하는 주님과 접속되도록 조치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말씀 적용’이 성취해낸 결과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이 흩으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아무리 해도 독자적으로 죄를 안 지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말씀이 개입해서 발생된 현실입니다. 흑인이 피부색이 변할 리없고, 표범이 무늬가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말씀이 관여된 진정한 인간들은 자신의 죄의 지배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바로 이점을 감안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의 영으로 찾아오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성도는 ‘죄인 중의 괴수’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접속하게 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말씀의 개입으로 사건화된 자들이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사건화 되지 아니하면 주체적으로 작용해서 독자적인 성취성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런 자는 이미 죽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 겉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예레미야-2009/046강-렘13장20-26(변할수없는것)-jer100120.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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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3:20-26/변할수 없는것)

2010-01-22 08:30:28   녹취 : 오용익

20100120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3장 20-26절/변할수 없는것(이 근호목사)

(기도)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성경에 보면 모든 인간을 어두움이라고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빛 되는 빛의 자녀도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이고 하나님의 세상 보기인데 이런 관점에서 저희들도 같이 볼 수 있도록 그야말로 모든 것이 공히 어두움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그 가운데 빛을 내는 성도들이 따로 있음을 감사할 수 있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께서 세상을 어둡다 할 때에 우리는 같이 어둡다고 말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부러워하고 우리가 갖고 싶은 것을 갖고 있는 그것이 마치 복 받은 것처럼 그렇게 부러워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성도보고 빛이라 했을 때 저희들은 빛이 된 줄 몰랐습니다. 그냥 하루 세끼 먹고 살면서 일상에 잠겨 있는 그런 존재인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주님이 보는 관점, 어두움은 어두움이요 빛의 자녀는 누가 뭐래도 빛의 자녀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시각과 안목을 저희들에게 주심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세상의 빛과 어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성도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3장 20절에서 2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2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3:20-26
“너는 눈을 들어 북방에서 오는 자들을 보라 네가 받았던 떼 네 아름다운 양떼는 어디 있느뇨 너의 친구 삼았던 자를 그가 네 위에 수령으로 세우실 때에 네가 무슨 말을 하겠느냐 너의 고통에 잡힘이 구로하는 여인 같지 않겠느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네게 임하였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구스 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같이 흩으리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네 응득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연고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데 상당히 심하게 다룬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의 이런 논리를 알아야 됩니다. 인간이 위주가 아니고 말씀이 위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할 때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택했지 이스라엘을 위하여 택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고난 받든 축복을 받든 축복도 고난도 뭘 받아도 자기들을 위한 고난, 자기들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받는 축복과 고난을 통해서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 비로소 세상에 드러나는 하나의 접촉점이 되는 겁니다.

주판이 알이 있어서 바닥에 죽죽 미끄러지잖아요. 저도 어릴 때 그런 놀이를 많이 했습니다만 어린애가 주판을 가지고 마루에서 미끄럼타기 놀이를 할 때 주판 입장이라면 상당히 속상하지요. 자기는 마루에서 미끄러지고 싶지 않은데 애가 자기를 갖고 노니까. 그런데 어린애가 주판을 가지고 그렇게 논다면 그 때 어린애의 성격이 주판을 통해서 외부에 그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판을 이스라엘로 보자 이 말이지요. 오늘날 성도라고 봅시다. 어린애를 우리 하나님으로 봅시다. 하나님께서 재미있다고 죽죽 노는데 주판이 거기에 대해서 이의를 걸 수가 없는 거지요.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사람이 말씀으로 지어졌다 하는 그것만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위하여 그 지어진 것을 계속 사용한다는 그것을 잊어버리고 놓쳐버려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이고, 이렇게 말씀으로 만들어주시니 고맙습니다. 제 볼일 볼 테니 주님은 주님 볼일 보세요. 제가 아쉬울 때나 교회 오겠습니다.’ 이렇게 하시는데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그렇게 하나님 볼일 따로 보고 자기 볼일 따로 봅니까? 인간에게 자기 볼일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볼일이에요.

하나님이 자기 성격을 드러내는 겁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 교회 와서 성경을 모를 때는 하나님을 잘 이용해볼까 싶어서 왔지만 이 말씀을 지으신 분이 성령이잖아요. 성령이 지었다면 우리도 성령이 없이는 이 말씀의 진위를 캐치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그 사람이 교회 올 때 육적으로 왔다가 성령이 오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그동안 처음 교회 올 때부터 가져왔던 그 선입감에 대해서 참 무척이나 터무니없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가지고 교회 왔구나,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좀 이용해 볼까 싶어서 버티다가 나중에 성령이 오고 난 뒤에는 애들이 가지고 노는 주판처럼 하나님께서 나를 움직이시면서 하나님의 자기성격을 드러내는 작업을 나를 통해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럴 때 우리는 이스라엘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역사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내용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주판으로 다루어서 사용하는데 “이스라엘아!” “예” “너 참 죄 많이 지었대.” “그랬습니까?” “그래서 너희들하고 죽이 잘 맞는 어떤 이방나라 수령으로 하여금 너희들을 혹독하게 다루도록 내가 조치를 했다.” 그것은 북쪽나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한테 잡혀 가는 것을 말합니다.

가면서 “너희들은 그 사람들을 친구로 봤는지 모르겠지만 그 바벨론이라는 제국이 너희들을 아주 부끄럽게 만들 것이다.” 여기서 나온 게 ‘수치를 당한다.’는 겁니다. 수치에 두 종류가 있어요. 하나는 죄 때문에 생기는 수치가 있고 다른 하나는 죄 때문이 아니라 자기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생긴 수치가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사람과 사람이 경쟁을 할 때 내가 꼭 이기고 싶은 사람한테 패배할 때 그 때 수치를 느낍니다. 그 수치는 죄 때문에 생긴 수치가 아니고 ‘아, 내가 저 인간한테 지다니….’ 내가 저 인간한테 졌다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말은 자기가 ‘나’라는 인간을 따로 생각을 해 둔 것이 있어요.

특히 옆집에 중3이나 고3이 있다면 은근히 양쪽 부모들은 애들 성적에 따라서 수치를 느끼고 또는 승리감을 느끼고 그래요. 말은 안하지만, 서로 떡도 나누어 먹고 그렇게 하지만 둘이 비슷한 연배의 애가 같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원수가 되는 겁니다. 그럴 경우에 내가 수치당하면 저쪽에서 기가 살고 저쪽에서 수치를 당하면 내가 기가 사는 그런 앙숙 같은 관계가 되는데 그런 수치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수치라 하는 것은 되고 싶은 내 목표가 미달했을 때, 내 욕망을 채우지 못했을 때 그 때 수치를 느끼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수치는 수치 취급도 안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치는 뭐냐? 주님의 심판 때문에 생기는 수치입니다. 창세기 20장에 보면 아비멜렉 추장에서 수치가 생겼어요. 아비멜렉 추장이 죄짓지도 않았어요. 죄를 지을 뻔 했습니다.

아브라함 부인인 사라를 가질 뻔 했음에도 불구하고 집안 전부가 태가 닫혀서 애 임신이 안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임신이 안 되면 ‘임신이 안 되는구나.’ 그런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아예 우리 가문을 통째로 차단시켰다, 우리 가문을 지구상에서 없애버렸다, 저주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옛날에는 자식을 못 낳으면 저주였습니다. 너희 가문은 끝, 하고 신께서 버린 가문입니다.

사람이 자식이 없으면 자기의 부활의식이 없습니다. 분명히 자신은 죽지만 자기 자식이 나의 신체의 일부가 되었다면 내 자식이 살아 있는 한 비록 자신이 죽어도 내 신체의 일부가 자식 안에서 살아 있기 때문에 죽음도 커버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식 없이 그냥 죽어보세요. 나는 어디서 찾습니까?

자식이 있는 사람은 자식의 얼굴을 보면서 ‘네 얼굴이 내 얼굴이다.’ 하고 나의 흔적을 남겨서 기분이 업 되지만 자식도 없는 채 내가 죽어버리면 나는 뭐가 됩니까? 옛날에는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 뭐라고 하느냐? 신께서 심판을 내릴 경우에 우리에게 수치가 된다, 그런 원리가 있었습니다. 심판으로 인하여 수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왔을 때 아담이 벌거벗음으로 인하여 부끄러워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수치스럽게 하겠다, 그렇게 합니다. 치마를 얼굴까지 들어올려서 평소에 감추고 있었던 하체를 다 드러내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를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서 이방나라 바벨론 제국에 잡혀가게 할 때 그냥 가는 것이 아니고 치마를 얼굴까지 들어올려서 하체를 다 드러내는 꼴로 포로 잡혀 가도록 하나님이 조치했다.’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떤 경우에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진다는 것을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범조로, 대외적으로 알려주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운명을 맞이하고 있다고 자기 백성을 철저하게 다루고 있지요. 그것이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위함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은 이 수치스런 가운데서 무엇을 알아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어떻게 짓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하고, 여기 있는 내가 뭘 더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확신가질 때 그게 바로 하나님 보기에 하나님이 있으나 마나 하게 만드는 수치가 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이렇습니다. 마귀가 와서 우리에게 주는 확신, 믿음이 있어요.

‘네가 하기만 하면 된다. 뭔가 성과를 내고 업적을 남길 수 있다.’라는 것이 점점 더 믿어지고 확신에 차오를 때 그 때 그 사람은 하나님을 더 이상 의지할 필요가 없는 마음이 들어요. 이게 바로 마귀가 우리에게 확신시킬 때 그렇게 하는 겁니다. 하면 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여자가 치마를 머리까지 들어올려서 하체를 보여준다는 식으로 끌려간다는 것은 사람이 내가 하면 뭔가 한다, 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있으나 마나 하는 존재로 만들어버렸다는 말이지요.

내가 이렇게 하면 이런 결과가 나올걸, 하고 예상결과를 잡았다면 그 예상이 깨어지는 것이 말씀이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요 사랑이라는 겁니다. 세상에 내가 해서 되는 일이 없구나, 하는 거예요. 절망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희망이에요. 내가 해서 되는 일이 없다는 그 자체가 이것은 즐거워야 됩니다. 이것은 잔치 벌일 일이에요.

주께서 이끌어주시고 다 주께서 손댄 결과가 나에게 풍성하게 주어졌지 내가 해서 한 것은 없습니다, 라고 생각할 때 더 이상 그 사람한테는 마귀가 집적댈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어요. 좀 해라, 해라, 하나님 그만 믿고 네 할 일 네가 알아서 하란 말이야, 하고 집적대야 하는데 ‘어이 마귀야! 백날 해봐라. 소용없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지 내가 해서 된 것은 아무것도 없단다.’ 할 때는 마귀가 교만스럽게 만들려고 쑤실 구멍이 없어요. 건드릴 여지가 없다 이 말이지요.

성도들이 언제 하나님께 얼굴을 외면하느냐 하면 ‘자, 이정도 해서 되었으면 어떤 성과가 나오겠다.’고 생각할 그 때 그 성과가 나중에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자기의 하체가 되는 겁니다. ‘나 내 힘으로 된다고 하다가 이렇게 당했습니다.’ 하고 만방에 공개하도록 하나님이 그런 조치를 내릴 때 그 사람 사실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성도기 때문에 그런 조치를 하지요.

꼼수 쓰고 머리 싸매고 계획 잡아서 ‘틀림없습니다. 이것은 백 프로 됩니다.’라고 했던 것 하나님께서 고맙게도 실패로 끝나서 자기가 떠벌여댔던 모든 사람들에게 ‘꼴좋다! 네 심정이 어떠냐?’ 하고 놀림감이 되는, 수치스럽게 만드는 식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것이 말씀의 위력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하는가? 이것이 하나의 공식인데요. 인간이 내가 할 수 있다는 어떤 주체가 형성되게 되면 거기에 말씀이 침투하게 되고 그러면 이것이 ‘나’라는 것은 사라지고 하나의 사건의 흐름으로 퍼져버려요. 제가 지난 월요일에 그런 강의 했습니까?

정육점의 돼지고기가 어떤 형태를 가지고 있는데 폭탄을 터뜨려버리면 돼지고기라는 것이 날아가 버리고 한점은 50미터지점에 가 있고 또 한점은 30미터 가 있고 조각조각 다 나듯이 말씀은 폭탄이 되어서 말씀을 껴안는 순간 우리는 완전히 폭파되어서 내 것이라고는 없고 내 것이라고 여겼던 그 현장에 하나님의 말씀이 턱 하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네가 너 된 것은 이 말씀 덕분인줄 알아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우리에게 유발시킨다는 것, 그 유발시키는 이유가 뭐냐? 이제부터 오늘 설교 진짜 어려워집니다. 단단히 각오해야 되지요. 예수님의 형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왔을 때 예수님의 얼굴을 알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이 부활하고 난 뒤에는 예수님 얼굴을 못 알아 봤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형상이 인간의 고깃덩어리 형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라, 한 것은 예수님의 용모, 예수님의 인물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형상이 예수님이 십자가 지고 부활하고 난 그 과정을 거쳐서 인간의 고깃덩어리 형상이 아니고 사건에서 사건으로 이동하는 형상으로 변한 겁니다.

제가 말을 해도 참 어렵게 합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의 마리아를 닮았던 모든 인간의 용모, 얼굴은 자체가 사람 얼굴이 아니었고 죽음이라는 수치스러운, 자기 백성의 죄를 지고 가는 그 이유 때문에 하나님 앞에 저주받은 용모와 얼굴을 하고 가신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십자가 질 때 비디오카메라 찍고 사진기 들이대서 찍어봐야 그것은 예수님 형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합해서 통째로 어두움에 속한 형상이고 죄의 형상이고 다른 말로 해서 심판의 형상이고 죽음의 형상인 거예요. 죽음의 형상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고 난 뒤에는 예수님의 얼굴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하고 나서 예수님의 얼굴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던 간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의 형상이 되는 겁니다.

성도가 본받아야 할 것은 이 죽음의 형상에서 영의 형상으로 넘어가는, 이 넘어가는 바로 그 코스를 밟아나가야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어떤 여자가 성형수술을 했다. 코를 세워서 얼굴이 예뻐졌다. 성형하기 전에도 그것은 죄의 형상이고 죽음의 형상이고 성형하고 난 뒤에도 그것은 죄의 형상이고 죽음의 형상이에요.

그러면 목사님 말대로 영의 형상을 본받으라고 하는데 그 영의 형상은 뭡니까? 영의 형상이란 자기가 갖고 있던 이 용모가 곧 죽음의 형상인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느냐 하면 말씀을 집어넣어 버리면 이 형상, 고깃덩어리인 이 육체가 깨어져서 하나의 사건이 되는 거예요.

내가 스무 살 때 산 것은 내가 아니고 죽음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살았고 서른 살 때 죽음의 사건이고, 예수님의 성령을 받고 난 뒤에는 사십 살 때 나오는 그것이 바로 죽음의 사건을 영의 사건 부활의 사건으로 바꿔준 사건으로서의 나의 몸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성도가 되어서 살아가게 되면 어떤 사람이 보기를 “아이고, 당신은 팍 갔네. 당신 나이 한 60되더니 팍 갔어.”라고 하지만 말씀이 들어가니까 말씀이 나오지요.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이 새롭다.” 이렇게 하거든요. 그러면 저쪽에서 “어느 병원에서 수술했는데?” 이러고요. “어느 병원에서 수술했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어느 병원에서 수술 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그 자체가 나에게 하나의 사건화 된 것이다.” 어렵지요.

다 살기 어렵고 다 하루 밥 세끼 먹고 사는 이 때에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새롭다.’는 이 말씀이 나온다는 사건은 우리의 솜씨가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령이 아니고야 그런 말이 나올 수가 없는 거예요. 원래 흉내는 내는데 육의 사람이 흉내 내는 그런 것 말고, 그야말로 진심으로 나오려면 이 현재 나의 육체가 죽어 마땅한 죽음의 형상을 끌고 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돼요.

그저 하루 세끼 밥을 채우는데, 점심때 떡 라면 먹고 채웠는데 이렇게 채우는 이것에 연연해 할 필요가 없다고요. 왜? 이것은 하나의 돼지고기니까. “이번에 떡 라면 먹는데 맛있습디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 떡 라면 먹고 오래 살아라.” 이렇게 되거든요. 하나의 주체가 되니까. 주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폭파시켜 버려야 돼요.

폭파시키게 되면 내가 살아 있는 것은 떡 라면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외치기 위해서 살아 있다, 말씀의 힘으로 살아 있다. 그것을 검증하는 거예요. ‘내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롭다.’ 하는 것을 검증하기 위해서 겉 사람은 썩을 때까지 계속 가져가야 되고 이것도 하나님의 솜씨고 속에서 새롭게 되는 것도 하나님의 솜씨고 둘 다 내 것은 없고 다 말씀이 사건화 된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난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아라,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라, 가 그 이야기입니다. 화장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이번 아이티에 지진 일어나서 20만 명 죽었지요. 어떤 교회에서는 안타깝다고 하고 선교헌금 보내자 하는데 그거 보낼 필요 없습니다.

성금 보내려고 하면 복음을 전하는 교회에 보내면 돼요.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죽을 사람이 죽은 거예요. 지진 일어나서 죽은 20만 아니라도 다 죽을 사람이에요. 죄로서. 남들 보기에는 하나의 인체고 주체로 보이지만 사건으로 보면 그냥 말씀대로 저주받고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하나의 사건, 어떤 사건, 어두움에 속한 사건, 죽어야 될 사건으로 보자 이 말이죠.

중국 같으면 몇 억입니까? 13억이 넘지요. 예수 안 믿으면 다 죽은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13억이 다 죽었다 해도 그것은 원래부터 죽어야 될 인간이 죽은 거예요. 이것이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고 난 뒤의 관점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 관점이 있느냐? 더 어려운 것을 이야기 할게요. 구약에서 다윗이 나오고 하나님의 율법을 어김으로 말미암아 주가 둘로 갈라졌습니다.

“주께서 내 주에게”, 주가 둘로 갈라지거든요.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그 율법을 위반하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주신 하나님과 율법을 못 지킨 인간대신 율법을 이루어야 될 하나님이 겹쳐 있다가 딱 둘로 분리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인간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7장에 보면 내가 되고 싶은 인간과 그것을 판단하는 인간, ‘나’가 둘로 갈라져서 나타납니다.

이쪽의 인간도 둘로 갈라지고 저쪽의 주님도 둘로 갈라지는 그것이 신약입니다. 구약은 이런 것이 없어요. 구약은 “하나님, 율법 주셨습니까? 내가 지킬게요.”라고 나오지요. 신약에서는 율법을 못 지키는 나와 “어이구, 율법도 못 지켜? 이놈아, 이놈아!” 하고 율법도 못 지킨다고 지적하는 나, 이렇게 나와 내 속의 나 두개가 공존해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님이 둘되면서 강력하게 율법을 요구하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은 ‘쟤요, 율법 줘도 못 지킵니다. 한쪽은 지키고 싶어도 율법을 어기고 싶은 다른 한쪽이 더 우세하기 때문에 못 지킵니다. 그러니까 쟤를 위해서 내가 대신 죽겠습니다.’ 하는 주님이 있다는 말이죠. 그러면 그 예수님 아니면 하나님을 알 길이 없어요.

그 예수님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두개의 자아 가운데 어느 쪽과 예수님께 코드를 연결시켜야 하느냐 하면 “저, 하나님 말씀대로 살게요.” 여기에 연결시키면 안 되고, 그것은 허상이고 조작된 것이고, “아무리 해도 저는 못 지킵니다.” 하는 자아와 “그래, 이 탕자야, 간음한자야, 내가 네 대신 졌다. 내가 용서해 줄게.” 하는 주님과 연결 될 때 지직지직, 하고 코드가 맞을 때 우리는 진짜 하나님과 만나게 된다 이 말이지요.

진짜 하나님을 만나려면 주님은 저쪽에서 십자가지고 나오고 우리 쪽에서는 ‘주여, 저 수치스러워도 마땅하고 저 죄인된 것은 당연합니다.’ 하는 죄인된 것을 가져나가고, 이렇게 죄인 된 우리와 주님은 십자가 지신 그것으로 마중 나와서 만나는데, 십자가가 사건화 되어서 우리에게 오고 우리는 말씀이 와서 우리를 폭파하니까 우리는 그 속에서 위선이고 교만이고 다 말씀이 와서 뜯어가 버리고 진짜 더러운 내 모습만 달랑 남을 때, 말씀으로 껍데기 지붕 날아가 버리고 주님은 십자가로 오고 그 십자가와 죄인 중에 괴수인 나와 만날 때 우리는 그 자체가 하나님이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드러난다는 겁니다.

그 작업을 지금 예레미야에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거예요. 이제 말씀의 결론을 맺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죄는 어떻게 되느냐? 변하지 말아야 돼요. 어떻게? 여기 말씀에 나옵니다. 13장 23절에 “구스 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찐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합니다.

이 말씀이 어려운데요. 쉽게 말해서 흑인의 피부가 안변하지요? 좋은 비누 아무리 써도 소용없습니다. 표범의 반점이 변하는 게 아니지요? 표범의 반점이 변하면 그게 소가 되지 그게 표범 되겠습니까? 아니지요? 마찬가지로 악에 익숙한 우리는 절대로 의를 행할 수 있다, 없다? 없다 이 말입니다. 없어야 돼요. 없어야 되기 위해서 말씀이 하나의 폭탄이 되어 우리를 터뜨리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말씀 볼 때 마다 ‘주여, 십자가 고맙습니다. 내가 또 위선적인 것을 감추려고 했는데 이 변하지 않는 죄, 이것이 나의 본모습인데 말씀이 와서 이것이 나의 본모습인 것을 들통 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작업을 예레미야 때 이미 했고 그 연장선에서 예수님께서 성령 보내셔서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은 이렇게 빈틈이 없어요. 우리의 문제는 이런 죄를 자꾸 감추고 ‘나도 할 수 있는데’ 라고 할 때 마귀가 자꾸 ‘이제는 하나님 그만 봐라. 십자가 그만 봐라. 이제 네가 거듭났으니까 할 수 있어.’라고 마귀가 그렇게 하는 이유가 주님과 주님사이에서 드러내려 하는 그것을 감추어버리고 여호와 삼위일체로 해서 통합시켜 버리려고 하는 거예요.

악마의 책략, 악마의 획책 때문에 구약처럼 ‘나는 그냥 하나님 믿기만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조작하는데 십자가만이 우리의 죄를 칠 수 있는 것은 창세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그런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창세전에 이미 계획된 대로 우리가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있어야 하고 창세전에 이미 예정한 대로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씻는 그 사건 그 말씀의 완성을 저희들을 통해서 증거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