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28. 22:49

영적 가뭄 (예레미야 14장 1- 6절)

영적 가뭄

2010년 1월 2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4:1-6

(렘 14:1, 개역)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렘 14:2, 개역)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렘 14:3, 개역)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렘 14:4, 개역)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렘 14:5, 개역)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버리며』
(렘 14:6, 개역) 『들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여 하는도다』


가뭄이 일어나니 사람들이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모릅니다. 자신이 살기 힘든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게 다가오게 됩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일단 자신이 의젓하게 살아있어야 세상이 좋은 세상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자기 살기가 괴로우면 이 세상은 질이 떨어지는 더러운 세상으로 간주됩니다.

이처럼 인간들의 관심사는 궁극적으로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로 쏠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이냐입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는 것처럼 가뭄이 드니 사람들은 자신이 품고 있는 생각을 유감없이 드러냅니다.

살아남으면 당당하고 살기 힘들면 무슨 벌이라고 받은 양 여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이 도리어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가뭄 들지 않았던 것이 자신들이 그만큼 선하게 살아온 탓이라고 여기게 마련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인간이 선하게 살면 인생을 힘들게 살지 않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커나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의 가뭄은 하나님의 언약을 말해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즉 장차 메시야가 세상을 침투하고 개입하는 것처럼 가뭄도 그런 차원에서 침투하고 개입한 겁니다. 가뭄이란 메시아의 발자국 소리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사람의 행동과 연관된 가뭄이 아니라 메시아의 행위와 관련된 가뭄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런 생각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타고난 태생이 자기 위치로 세상의 변화를 읽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한결같은 원칙은 이 신체라는 껍데기가 세월 따라 줄기차게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착한 이나 나쁜 이나 사람의 신체가 죽음을 향해 질주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신체라는 껍데기 속을 어떤 내용으로 채우느냐 하며는, 매일같이 일어나는 세상의 변화 속에서 자기만이 특별하다고 여기는 사건을 주의 깊게 따로 기억하게 됩니다. 이것이 특이점입니다. 즉 사람이 하루 일과를 그래프를 그려본다면. 아침이 지나가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침을 대표하는 특이점이 됩니다.

그리고 정오 쯤에 일어난 사건 하나가 또 기억될 것입니다. 그것도 특이점으로 잡아봅시다. 그러면 아침의 특이점과 정오의 특이점을 선으로 이어봅니다. 그렇다면 그 선들은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변곡선을 그리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루 종일을 다 그려보면 무슨 윤곽이 드러나는 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윤곽선입니다. 즉 나만의 윤곽선입니다. 이 윤곽선이 그날이 자신을 주체가 됩니다.

이렇게 되면 순전히 일방적으로 특이점을 골라 잡은 것이 됩니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나의 이 주체를 다른 내용을 바뀌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루가 지나면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고 닳아지고 없어지는 특이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라는 주체의 내용은 빈 자리가 생길 것입니다. 그 빈 자리는 내일의 새로운 특이점으로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일되면 나라는 주체는 다른 윤곽선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장담 못하고 새로운 변화에 따라 늘 변신을 꿰하게 됩니다. 이런 입장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단정 짓지 못하는 주체에 말입니다. 한 예를 들면, 10년 전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이런 내용입니다 고 전도하다가 지금에 와서, 그 때 내가 오해했습니다. 잘못 전했습니다고 나온다면 듣는 사람이 과연 신임을 하게 될까요? 또 언제 달라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주체를 형성을 하는 특이성은 선악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이 싫어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자신이 벌받고 있는 중이라고 여기고, 자신이 좋아하는 환경이 주어지면 자신이 착한 일해서 주어진 상이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과오입니다.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과 에서가 나옵니다. 야곱은 과거에 형을 멋지게 속여먹은 적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일로 형이 항상 자신의 목숨을 노린다는 점 때문에, 형이 자신에게 다가온다는 소문을 듣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형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자기 나름대로 특이점을 정하고 운곽선을 만드는 식입니다.

과연 그런 식으로 형의 마음이 누그러뜨릴 수 있을까요? 아니, 과연 형의 마음이 야곱이 생각한 것처럼 여전히 동생의 목숨을 노리는 감정을 갖고 있을까요? 여기에 제 3자가 개입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이 홀로 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드십니다. 야곱은 그 하나님을 공격하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에게 얻어맞고 난 뒤에 비로소, 그동안 자신이 일방적인 자기 윤곽선, 즉 자기 주체 위주로 세상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바로 그런 의식이 하나님을 공격하게 만들었다는 점과 연관시켰습니다. 비로소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자신이 결정하는 틀에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 따로 윤곽선을 만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도의 일과에서 성도로 하여금 자신의 전적 죄인이며 자신의 몸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거저주시는 선물인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작용하고 계시는 특이점이요 그 특이점의 연결이 예수님이 작용하시는 윤곽선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일반계시 따로 있고 특별계시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자연의 모든 변화는 전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관련지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에 종속되어집니다.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대하는 것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도 선인이나 악인에게 햇빛과 공기를 주시는 것은 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부터 오는 겁니다.

요한복음 17:2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으로 초점이 모아지지 않는 세상 일이란 전무합니다. 가뭄이라는 것이 왔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자신의 행위가 나쁜 짓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착한 짓을 해도 하나님께서 가뭄을 내리시는 겁니다. 사람의 행위와 상관없습니다. 순전히 예수님의 행하심을 드러내기 위한 조치입니다. 천국이란 마치 포도원에 일꾼 모집한 일과 같습니다. 먼저 온 자나 나중 온 자는 품삯이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도 구원받지 못하고 마치 가뭄을 내려주듯이 일방적으로 예정하신 사랑을 내려주시면 그 누구도 예수님 덕분에 구원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일생 속에서 예수님께서 작용하시는 특이성과 윤곽선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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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7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4:1-6/영적가뭄)
 
2010-01-29 15:12:08   녹취 : 오용익
 
20100127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4장 1-6절/영적가뭄(이 근호목사)

(기도)

하나님 아버지, 풀의 꽃처럼 바람 불면 언제 있었나 하는 정도로 없어질 수밖에 없는 무상하고 허무한 저희들의 인생, 하지만 이런 인생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짧다는 것을 기억케 해주시고 영원한 것은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주신 그 말씀이 영원함을, 이 시간도 그 영원한 말씀 속에서 다시 저희들을 바라보며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하고 분명히 그 ‘하늘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기다린다.’고 되어 있는데 왠지 우리는 이 세상 사람이 되고 싶어서, 이 세상 사람처럼 안 되면 안 되는 것처럼, 이 세상 사람처럼 안 되면 마치 낙오자가 되는 것처럼 그러한 생각이 자꾸 불쑥 불쑥 솟아 올라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했는데 그것이 우리에게 그대로 체험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도록, 말씀이 실제로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도록 그렇게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의 기준이 너무 세상 적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주목할까, 그것이 어느새 우리의 원칙이 되고 말았는지, 세상 사람들을 너무 의식하는 그런 육적인 사람이 되고 말았는지,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다시금 성경 속으로 들어와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실감나 하고 그것이 바로 현실인 것을, 그리고 세상이 환상인 것을, 오직 말씀뿐인 것을 저희들이 온 몸으로 느끼고 살 수 있도록 성령께서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4장 1-6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4:1-6
“가뭄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이라 유다가 슬퍼하며 성문의 무리가 곤비하여 땅에 앉아 애통하니 예루살렘의 부르짖음이 위에 오르도다 귀인들은 자기 사환들을 보내어 물을 길으라 하나 그들이 우물에 갔어도 물을 얻지 못하여 빈 그릇으로 돌아오니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며 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 머리를 가리는도다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어 버리며 들나귀들은 자산 위에 서서 시랑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아득하여 하는도다.”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이 자기가 살아 온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자기가 곧 죽을 지경인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끄러운 일로 간주합니다. 자기가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죄를 지어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간다, 거기에 반해서 지금 떵떵거리면서 여유 있게 사는 사람들은 분명히 나보다 지은 죄가 적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복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의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여유롭게 살아간다고 본인들이 생각을 그렇게 해요.

그런데 하나님의 원칙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습니다. 살려주시는 데까지만 살려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성공한 사람이고 내가 의롭기 때문에 남보다 더 오래 산다고 여기는 사람, 오래 살고 적게 사는 그 원인을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사람, 그 사람은 실패한 사람입니다.

이런 인식자체가 성경에서 나오는 인식으로 바뀌어져야 되는데요. 그 당시 유대나라 사람이라든지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고, 우리의 죄악 된 신체가 뿜어내는 죄악 된 본성을 쉽게 벗어나지를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나라에게 가뭄을 보냅니다. 가뭄을 보내면서 이 가뭄에 의해서 온 나라가 죽을 지경이 된 자체를 두고 오늘 본문에 보면 그들이 “그들이 부끄럽고 근심하여 그 머리를 가리우는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물 찾으라고 종들을 보낸 모양인데 물이 없으니까 죽을 죄 지은 줄 알면서 빈 통 들고 그냥 돌아온 거예요. 이러한 사환들의 모습이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평소에 동일하게 갖고 있는 겁니다. 못사는 것을 굉장히 부끄럽게 여기는 겁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살려주셨다는 것,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그것을 아는 것을 고맙게 여겨야 될 텐데 내 힘대로 남들처럼 반듯하게 살지 못하는 것을 상대방과 비교해서, 남과 비교해서 참 서글픈 인생이라고 보는 것, 그런 자세부터 성경은 바뀌기를 원하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어요.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고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어렵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느냐, 언약밖에 있느냐.’ 그게 중요한 겁니다.

가뭄이 오든 비가 오든 간에 이것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약속대로 내리신 조치인 것을 믿으면 구원받습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한대로 언약대로 이루어져 가는 겁니다. 가뭄이 오는 것도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원칙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뭄이 왔고 가뭄이 아니고 비가 적당히 오는 것도 언약을 보여주기 위해서 적당히 오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보다도 아까 이야기한 자기자존심이라든지, 살아 있어야 남에게 내세울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우선이 되니까, 유다나라는 하나님의 언약에 속한 나라이기에 이걸 바꿀 필요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겁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꿀 때 꼭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의 개입, 하나님의 침투입니다. 제가 예를 들면 창세기 32장에 보면 에서가 나오고 야곱이 나오지요. 다 아시다시피 에서와 야곱은 형제간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형을 속였지요. 그래서 형은 동생에게 감정이 많이 있습니다. ‘잡히면 죽는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소문이 야곱에게까지 들려왔는데 야곱이 부자가 되고 독립해서 가는 길에 형 에서가 따라 붙는다는 소리를 듣고 위기를 느낀 겁니다.

그 다음의 야곱의 행동을 보세요. 야곱은 그동안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는 이 축복을 자기 힘으로 지켜내기 위해서, 왜, 그래야 자기는 복 받은 사람이 되니까, 이것 몽땅 빼앗겨 버리면 복 받은 사람 티가 안 나잖아요, 하나님에게 복 받은 사람이라는 이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서를 달래기 위한 책략을 쓰지요.

뇌물 가져다 바치고 그래서 형 마음을 풀어서 ‘형에게 제가 감정이 없습니다. 제가 형에게 잘못했습니다. 제가 형에게 예의는 차리겠습니다. 이 예물 받으시고 우리 좋게 지냅시다.’ 하는 식으로 그야말로 인간적으로 형을 달래려고 시도합니다. 야곱은 ‘이것은 나와 형, 형과 나 사이의 문제’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창세기 32장에 보면 야곱이 혼자 있을 때에 전혀 예상 못한 돌발 사태가 일어납니다. 제 삼자가 야곱에게 개입을 해버리지요. 개입을 해 버리면 어떤 식으로 구조가 바뀌느냐 하면 형과 동생 동생과 형, 너 나의 관계에서 그분이 지배하는 구조로 바뀌어 버립니다. 세상만사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항상 자기중심으로서 저 사람이 나에게 해를 줄 사람인지 도움을 줄 사람인지, 자기중심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어요.

다들 야곱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려면 ‘하나님, 하나님’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나에게서 뻗어나간 그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제발 형의 마음을 좀 누그러뜨려주세요.’라고 하든지 자기가 갖고 있던 계획을 계속 연장해서 내 뜻에 맞추도록 해주는 그런 하나님이죠.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내 뜻을 이루어주는 하나님, 우리는 그것을 벗어날 수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이 개입해버리면 형과 동생의 만남은 야곱이 생각했던 그런 형과 동생이 아니고 또 형이 생각했던 그런 형과 동생이 아니라 돌이 꽈당, 하고 박치기 해서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그동안 하나님의 뜻을,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배속시켜서 관리해 왔다.’는 겁니다.

저는 이것을 좀 어렵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전부 다 특이점이 있는데요. 특이점이란 수학에서 그래프를 그리면 그 선이 올라갔다가 꺾여서 내려간다든지,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그 점을 변곡점, 곡선이 변화되고 달라지는 지점이라 해서 변곡점이라 하고 또는 특이점이라 합니다.

사람들은 세상 살 때 만나는 그러한 변곡점, 특이점을 자기 머릿속에서 이어버려요. 여러분이 어제 한 일중에서 기억나는 것만 기억나고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을 수가 있어요. 만약에 어제 차사고가 났다. 그러면 그것은 변곡점, 특이점이 되어서 몇 년이 지나도 잊지를 못하지요. ‘하, 그때 속도 좀 줄일걸. 괜히 박아서 돈 50만원 물어줬다.’ 그 특이점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어제 아침 7시 46분에 뭐했나, 하면 몰라요. 사람은 이 세상에 있는 무쌍한 변화를 가지고 자기중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 자기가 기억하는 특이점을 선으로 이어버립니다. 그게 바로 이것이 ‘나’라고 만드는 ‘나’라는 윤곽이 드러나는 윤곽선이 되는 겁니다. 하루 24시간을 살 때 일기를 쓴다면 나에게 기억나는 사건들만 딱딱 쓴다 이 말이지요.

그 사건과 사건사이에 점을 이어버리면 그것이 선이 되고 그 선으로 만들어진 그것이 나의 영역이 되는 겁니다. 그 영역은 어디서 흘러나오냐 하면 이 껍데기같이 늙어가고 있는 이 신체에다 그 내용을 채워버려요. 채워버리면 매일같이 그 내용물이 달라집니다. 우리 속에서 자꾸 뭔가 사라집니다.

옛날에 있던 사건들은 자꾸 없어지고 달아나고 엷어지고 옅어지고 그 빈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빈자리가 새로운 사건으로 계속 채워지는데 채워질 때 마다 나만의 영역이 계속 만들어지지요. 그러니까 내일 되면 또 오늘 있었던 나만의 영역은 또 취소가 됩니다. 이것이 몇 개 빠져요. 차사고 난 것은 좀 오래 가겠지요. 그것은 몇 달 갑니다.

그 지점은 남겨두고 나머지 특이점은 또 새로 등장해요. 연평도 인근해역으로 북한에서 대포를 쏜다, 그것도 하나 포함될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희미하지요. 자기 일이 아니니까. 갑자기 세금고지서가 날아왔다, 이런 것은 쏙쏙 들어가지요. 그러니 인간의 주체, ‘나’ 인간의 윤곽이라는 것은 본인이 내용을 무슨 내용으로 채우느냐에 따라서 본인모습이 빨간색도 되었다가 노란색도 되었다가 파란색도 되었다가, 자꾸 달라져요.

이 색깔은 얼굴색을 말합니다. 기분 좋을 때는 분홍색이 되었다가 기분 나쁠 때는 울퉁불퉁, 얼룩무늬색이 되었다가,, 몸이 건강할 때는 기분 좋고 신바람 나는 밝은 색이 되었다가, 몸 안 좋으면 간이 나쁜지 어쩐지 시커멓게 되었다가, 나의 색을 도저히 종잡을 수 없어요. 왜 종잡을 수 없느냐 하면 내일 모레 되면 또 무슨 특이점이 생겨서 오늘 있었던 일은 그 윤곽선을 다 지우개로 지워서 뭉개버리고 새롭게 선을 이어서 ‘나는 이거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라는 우리의 내용물이 그렇게 달라져도 달라지지 않는 것이 뭐냐 하면 끊임없이 그런 가운데 내 몸은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계속해서 늙어가고 시들고 있고 힘이 빠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내일 되면 내일에 맞춤 ‘나’가 되니까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모른다는 말은 내가 나를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는 거예요. 종잡을 수 없다는 겁니다.

내가 나를 딱 잡아서 ‘나’라고 볼 수 없는 그냥 바깥에 있는 사건에 의존하는 안목이라면 그런 눈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겠습니다. 만약에 ‘나는 5년 전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했는데 5년 뒤에 ‘아니야. 하나님의 형상은 그게 아니야.’ 바뀐다고요.

나도 내 자신을 파악 못하는 그 머리와 안목을 가지고 감히 성경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형상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다고 해봤자 그것은 지금까지 자기가 그어놓은 자기윤곽선, 자기에게 일어났던 사건의 특이점들을 자기 임의로 연결시켜놓고 그 연결점 안에서 허용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콕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이 성경을 본다는 것은 기껏 현재 내가 붙잡고 있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허술한 나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아마, 하나님은 이런 분일거야.’ 라고 자기 맘대로 자기가 결정하는 거예요. 내일 되면 또 다른데요. 그래 가지고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구원이 안 되지요. 어제 예수 다르고 오늘 예수 다른데 둘 중 어느 예수를 잡아야 구원받겠습니까?

이것은 자기뿐만이 아닙니다. 남한테도 마찬가지에요. 10년 전에 친구한테 전도 했는데 10년 후에 친구를 만나서 “친구야, 좀 보자. 내가 잘못 전도했다. 미안하다. 내가 복음을 알고 나니까 그게 아니더라. 아, 그때 내가 실수했네.” 그러면 친구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10년 후에 또 보자. 또 10년 후에 볼 때 지금 한 것은 네가 어떻게 취소하는가 보자.” 그렇게 되는 거예요.

심지어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 내가 십자가 잘못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가 다가 아니라는 거예요. 교인들은 목사님은 한결같은 줄 알았는데 변하니까 교인들은 이제 마음 자세를 단단히 먹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너는 네 마음대로 믿고 나는 내 마음대로 믿는다.’ 전부 다 자기 마음대로에요.

교회는 완전히 친목단체가 되고 진리라는 것은 아예 기대조차 안합니다. 만 날 바뀌는데. 자,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아야 되고 전해야 되는가? 오늘 본문에서 가뭄이라 하는 것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가뭄이라는 것은, 이 가뭄을 오라고 인간들이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가뭄이 오면 안 된다고도 이야기한적 없어요.

그런데 막상 가뭄이 오니까 괜히 저희들끼리 부끄러워서 ‘우리가 죄지었구나.’ 이래 나온다 이 말이죠. 그것도 하나님 보기에 밉상이라. 가뭄 오고 안 오고를 너희들의 윤곽선, 자기주체에 그 사건들을 선을 그어 놓고는 ‘벌써 석 달째 비가 오지 않는다.’ 그걸 중요한 이슈로서 특이점을 삼고 윤곽선을 만든 거예요.

‘이것은 분명히 우리가 말씀을 안 들었기 때문에 가뭄이 왔다. 그러니까 다음부터 말씀 잘 듣자.’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자기 맘대로 턱 매겨놓고 성경 해석하면서 가뭄을 특이점으로 넣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가뭄은 사람을 주체로 만드는 가뭄이 아니고 메시아의 주체를 위한 윤곽선이 되는 겁니다.

이게 어려워요. 장차오실 메시아, 구세주가 어떤 분인가를 매겨주고 보여주고 그것을 규정짓는 특이한 사건으로서 가뭄이 오기 때문에 이 가뭄이 오고 안 오고에 대해서 착한 일을 한다고 가뭄이 물러가고 나쁜 짓을 한다고 가뭄이 오고, 그런 법은 없습니다. 출애굽기나 민수기, 레위기에 보면 ‘너희들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고 범죄 하면 너희들에게 가뭄이 오고 저주가 임할 것이다.’ 한 거예요.

그 언약을 하나님께서 지켜 나가기 때문에 인간들은 그대로 주어졌다는 것을 인간 쪽에서 모릅니다. 이게 진짜 어려운 이야기죠. ‘너희가 내 말을 어기면 삼, 사대까지 벌을 받으리라.’고 십계명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망령되이 어기면 삼, 사대까지 벌을 받고 만약에 잘 지키면 천대까지 복을 받으리라.’ 했을 때 사람들은 야곱처럼 자기 멋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버릇이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법을 자기 멋대로 임의로 규정을 해요.

규정을 해놓고 해석하기를 ‘이것은 내가 임의로 잘못했기 때문에 삼, 사대까지 벌을 받는다는 그것에 의해서 벌 받는 중이다.’라고 자기가 자기를 자기가 자기에게 판정을 내립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어서 헌금을 만 원 해야 되는데 돈이 아깝다고 오천 원은 세금내고 오천 원만 냈을 때 그 다음부터는 뭘 기다리느냐 하면 자기가 헌금 낼 때 오천 원 깍은 죄를, 자기가 죄라고 자기 맘대로 정해놓고 거기에 대한 벌이 어떻게 오는가, 그 다음날 기다립니다.

기다리다가 애 성적이 내려가면 ‘봐라, 그럴 줄 알았어. 오천 원 까먹더니만 빈틈없이 애 성적 내려가는 걸 봐.’ 만약에 그 사람 말이 맞다면 애 성적 올리는 것은 쉬운 문제입니다. 그 다음 달에 헌금 2만원 하면 돼요. 헌금 깎아서 애 성적 내려갔다면 애 성적 올리는 것은 과외선생 붙일 필요 없습니다. 헌금 10만원으로 올리면 애 전교 일 등해 버립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선악과를 따먹은 법이 있어서 성경말씀을 일방적으로 결정해 놓고 자기 혼자 벌벌 떨고 있고 또는 착한일 해놓고 ‘천대까지 복을 받는다, 했으니 내 자식이 잘 되는가 한 번 보자.’라고 했는데 자식이 뭐가 잘 되었다 하면 ‘거 봐라. 역시 충성하니까 잘되잖아.’ 그 다음부터는 그 애가 나중에 퇴직해도 관계없습니다.

만약에 사표내고 퇴직했다면 그 다음에 교회 가서 또 잘하면 돼요. 이게 바로 악마의 종들인 한국교회 목사들이 한국기독교 150년 동안 우려먹은 짓입니다. 지금도 우려먹고 있고. 그것은 악마의 종인 삯군들인 목사가 악마고 똑같이 교인들도 악마기 때문에 서로 통하는 것이 있거든요. 주의 말씀은 전혀 모르고 자기윤곽선, 자기주체, 현재 자기 욕망하는 그것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러면 문제는 하나 남았어요. 주님의 윤곽선을 어떻게 찾아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되는 거예요. 그러면 정답은 이미 나와 버렸습니다. 어떻게 나왔느냐? 가뭄 내려오는 조치를 뭐로 보느냐? 메시아가 바로 이런 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흔히 말하는 자연계시를 뭐로 연결시키느냐 하면 특별계시, 메시아가 오는 특별계시에 종속된 자연계시로 삼아버리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겁니다.

사람들은 신학에서 이렇게 가르쳐요. ‘계시에 두 종류가 있다. 메시아 말고 풀이나 꽃 같은 것들로 계시하는 하나님이 있는데 그걸 가지고 자연계시, 또는 자연은총이라 하고, 그 다음에 자연은총가지고는 천국에는 못가고 우리 죄를 씻어주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로서 자연계시 + 특별계시(예수님 보내심)로 구원한다.’ 이렇게 두 개를 이야기합니다.

그거 엉터리입니다. 내가 아는 골로새서나 에베소서에 보면 이 세상 모든 것, 풀 한 포기조차 예수님과 연결되지 않는 자연의 움직임은 없다고 봐요. 심지어 예수님 재림하시면 자연계시고 뭐가 다 싹 쓸어서 불 타버리고 맙니다. 세상의 풀 한포기 참새 한 마리 팔리는 것까지 전부 다 모든 권세가 주의 이름, 나사렛 예수라는 십자가지신 그 청년, 그 분에게 모든 세상 권세가 다 쥐어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금 조치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피조물들이 피곤한 것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대해서 피곤한 거예요. 로마서 8장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 2절에 보면 ‘세상만사를 아들에게 주신 것은 영생 얻을 자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입니다. 어떤 것도 예수님과 무관한 그런 계시는 없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연계시, 그러니까 일반계시 따로 있고 특별계시 따로 있으니까 일반계시는 뭐로 보느냐 하면 ‘내가 죄지으면 벌 받고 착하면 복 받는다.’는 이것은 일반계시로 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 이슬람 믿는 사람들도 복 받은 이유가 술 담배를 안 하기 때문이라고. 복을 받았는데 복 받은 증거가 뭐냐? 그쪽 나라만 석유가 나온다는 거예요. 그런 이야기 못 들어 봤습니까? 지금 왜 목사나 부흥사들이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면 왜 저쪽은 예수를 안 믿는데도 잘 사느냐 그 말이죠. 두바이에 세운 빌딩 높이가 800미터나 되잖아요.

그렇게 돈이 모이고 석유가 펑펑 나고 부자들이 많고 예수 믿는 나라 필리핀 같은 나라 못살고 거기는 소위 천주교지만 기독교국가라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내란 때문에 못살고. 분명히 예수 믿으면 복 받게 되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개척교회 하면서 교인들을 수십 년 동안 우려먹어왔는데 왜 이슬람은 잘사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나온 것이 그들은 일반계시적으로 잘산다는 겁니다. 일반계시로 봐서 술 안하고 담배 안하니까. 그러면 여자, 첩 네 명 들인 것은 어떻게 할 건데요? 가뭄이 오는 것을 예수님의 발자국 소리라고 보자 이 말이죠.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가까이 있다는 소리라는 겁니다. 우리에게 찾아왔다는 거죠.

그냥 찾아오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찾아왔다는 것으로 보자 이 말입니다. 죽어야 될 자가 죽는다는 거예요. 가뭄이 온다는 것은 그 동안 나쁜 짓 안하고 착한 짓을 해서 가뭄이 안온 것이 아니고 착한 일을 하나 안하나 장차 예수님이 오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뭄도 주시고 어떤 때는 가뭄이 안 오게도 하시고, 그렇게 한 거예요.

세상만사는 주님의 특이점을 그 선으로 이어버리면 예수 그리스도가 다가옵니다.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일어난 일들 중에서, 차 접촉사고 일어났다, 애가 성적 내려갔다,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과 관련된 것만 자꾸 선을 긋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긋지 마시고요. 오늘 설교 말씀에 은혜 되었다. 이것은 내 돈 버는 것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오늘은 다시 한 번 내가 내 자존심을 세우는 죄인인 것을 알았다. 그런 것과 같이 내가 너무 초심을 잊고 첫 사랑을 잊어버리고 세상사람 따라가려고 까불거리는 그 죄를 깨닫는 그런 선을 한 번 이어보세요. 주님의 윤곽선 안에 내가 놓여서 지금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바로 예레미야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의 잘잘못은 일방적인 생각이고 너희는 애초부터 잘못되었다.’ 끝으로 이 말씀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엘리야시대 때 가뭄 들었어요. 가뭄 들었을 때에 성경 보는 사람이 궁금해 했을 거예요. 가뭄이 들면 그 당시에 바알을 섬기는 놈들만 골라서 가뭄이 폭삭 들어야 될 텐데 왜 사렙다과부 같은 불쌍한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느냐 이 말이죠.

그것은 착한 일 하면 복 받는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복을 노리고 착한 일 할 수가 있기 때문에, 복은 메시아를 통해서 예수님을 통해서 거저 주는데 우리는 나의 윤곽선 때문에 나의 영역 때문에 내가 착한일 해서 보상으로 복을 얻어내려는 심보를, 그 사적인 것, ‘나’라는 영역에서 못 벗어나는 그 것을 차단시키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가뭄 들게 하시는 겁니다.

말씀 맺고자 합니다. 지금도 악인과 선인에게 햇빛 공기주십니다. 착한 일 한다고 주는 게 아닙니다. 착한 사람이나 나쁜 사람이나 둘 다 그냥 공짜로 줘요. 공짜로 주는데 이게 공짜인줄 아는 사람이 자기 윤곽선이 아니고 주님의 윤곽 안에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포도원 비유에서 아침에 열시에 오는 사람, 열두시에 오는 사람, 오후 세시에 온 사람, 다섯 시에 온 사람…, 천국이 뭔지 알아요? 그 천국은 공짜로 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천국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아니면 알 수가 없어요. 천국을 공짜로 받는데 이걸 행함으로 보상 받으려고 그렇게 가르치고 행함이 없으면 지옥 간다고 그렇게 가르치는데, 나쁜 짓 하면 그래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원래 지옥 가는 놈이 나쁜 짓 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는 다 지옥가야 됩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것은 착한 일 한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다 같이 지옥가야 되는데 하나님의 특이점이 ‘나는 너를 구원했어.’ 라는 자체가 우리 안에 박혀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특이점에요.

하나의 사건입니다. ‘희한하다. 너 같은 놈이 천당 오다니 참 희한한 일이다. 너 같은 강도와 세리와 창녀가 천당 오다니 …….’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특이점이에요.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습니까? 나 같은 인간이 어떻게 십자가 피의 은혜를 알게 되었습니까?’라는 것을 우리의 매일의 특이점으로 우리의 윤곽선으로 한 번 그어보세요. 우리는 매일 같이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얼마나 죄와 벌, 여기에 얽매여 있는지 마귀가 좋다고 웃고 마귀가 승리했다고 춤추고 있을 동안에 우리는 낙담하고 실망하고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모든 공로가 날마다 무산되고 있으나 마나 되어버리는 우리의 잘못된 믿음, 이제는 주께서 이 부족한 우리를 구원했다는 이 사실에 감격하고 늘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