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15. 07:43

낮추어라 (예레미야 13장 18-19절)

낮추어라

2010년 1월 1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3:18-19

(렘 13:18, 개역)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렘 13:19, 개역)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열 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가되 온전히 잡혀가도다』


성경을 대할 때마다, 이 성경 말씀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유효한 말씀인가를 따져보게 됩니다. 옛날 유다나라의 왕과 왕비들이 적군들 손에 농락당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할지라도 오늘날 우리에게 그것이 무슨 이슈가 될 것인가라고 시비걸 수가 있습니다. 즉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들에 대해서만 특별히 책망하시는 말씀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현대 국가들은 모든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전신을 왕과 귀족 위주의 나라들이었습니다. 이는 곧 모든 백성들이 부러워하는 모델적인 삶을 왕실에서 이루어져왔다는 겁니다. 또한 그 왕실의 화려하고 여유로움은 백성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이상적인 생활양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을 기점으로 해서 오늘날 모든 나라는 “우리도 왕처럼 왕비처럼 잘살아보자”는 기치 하에 민주주의 제도가 보편화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너도 나도 왕 아닌 자가 없고 왕비 같지 않는 부인네도 없습니다. 궁색한 삶을 살더라도 그들의 꿈만큼은 자칭 왕이요 왕비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되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과 왕비에 대한 질타는 오늘날 모든 나라,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말씀이 됩니다. 모두가 옛날의 왕같은 인격적인 대우를 받는 현실의 실현하다고 믿고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나라에 이런 수모를 안기는 것을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근원적인 인간은 무엇 때문에 존재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창세기 3장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아담의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이 대지 위에서 힘들게 살아간다는 성경 내용을 접하면 누구나 자기 생각부터 먼저 하겠습니다. 즉 “우리 조상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어도 우리가 이런 고생을 안할 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자기 생각’을 할 자격이나 권리가 없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너희들이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이렇게 봐야 합니다. “너희가 선악과릂 따먹는 날에는 하나님만이 아는 그 죽음의 실체에 너희도 같이 체험하게 될 것이다”고 말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되기 위해서 만들어진 피조물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죽음이 찾아와 인간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원히 소멸시키지 않으시고, ‘죽음의 내막’을 알려주는 소재로 사용하게 되는 겁니다. 쉬운 예를 들면, 어떤 융통성이 말을 하는 아버지가 잘못 행동하는 아들을 나무라면서 회초리를 듭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는 이 회초리 맛을 봐야 돼!”라고 하면서 때립니다.

그런데 이 소리를 들은 자식이 일반 보통 자식이라면 이렇게 빕니다. “아버지, 제가 다시는 나쁜 짓 안 할께요 한번만 용서해주세요”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처럼 정말 융통성없는 아들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면 제대로 말한 것일까요? “아버지의 회초리 맛을 제가 혀를 갖다 대어 맛보니 짭쪼롬합니다”고 말입니다. 아마 일반적인 아버지 같으면 아버지를 놀린다고 더 매를 맞습니다. 하지만 정말 융통성없는 아버지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장하다 아들아, 내가 정말 듣고 싶은 말을 네가 했구나”고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심은 인간의 처지나 변명을 듣고자 함이 아니라 본디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와 역할이 무엇임을 알려주고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었음을 통고하려고 찾아오시는 겁니다. 본디 인간은 인간을 위한 일은 전혀 허락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의 일을 증거하기 위한 용도로 지음받았고 부름받은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나라란 애굽 나라에 없습니다. 애굽 나라에 있는 자들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입니다. 이들은 찾는 하나님은 조상에게 찾아온 그 하나님입니다. 찾는 이유가 결코 이 애굽에서 나가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냥 그 자리에 편히 쉬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강제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만들어서 애굽과 분리시키겠다고 고집하신 것은 하나님이시오, 하나님의 언약이요,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히브리들이 요구한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나라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결코 그들은 애굽을 온전히 떠나온 것이 아닙니다.

몸만 거리상 떨어졌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 애굽적인 의식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생존 위주’의 의식입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던 것도 생명을 얻기 위함이 아니라 생존을 본장받기를 위함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곧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광야를 거치면서 자기들 속에 애굽적 의식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았습니다. 곧 생존이 진리인 것을 인정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람이란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애굽에서 살았던 자들은 전에 살던 삶의 환경이 애굽적이기에 몸과 마음도 모두 애굽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은 광야로 이끄신 것은, 생존이 아니라 생명의 사람으로 바꾸기 위해 애굽이라는 환경 대신 ‘언약 완성’이라는 환경 구조를 유발시키신 것입니다. 이 환경 안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십니다.

언약이란 사람이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만이 성취하실 몫입니다. 그래서 광야에서 내리는 양식은 만나였습니다. 즉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이름의 과자입니다. 이 애굽에서 알지 못한 양식으로 산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언약의 백성’, ‘생존이 아니라 생명의 나라’라는 말이요, 사람이 자체적인 힘으로 꾸려나가는 나라가 아니라 동행해주시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유지되는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나라가 옳지 못한 일을 했을 때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되시는 분의 죽음 체험에 같이 체험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왕과 왕후는 죽음을 맛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4:19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구원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예 ‘하나님의 형상’이 구조적으로 부각되는 현상을 위해서 자기 백성을 참여시키는 일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나오고, 그 이스라엘에서 언약이 나오고, 그 언약에서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분이 나옵니다. 이로서 인간이란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위한 소재요 배치물 역할을 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부메랑처럼 나 위주로 성경을 보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 속에 계시는 주님을 드러내는 사명을 가동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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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3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3:18-19/낮추어라)

2010-01-14 08:49:36  녹취 : 오용익 
 
20100113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3장 18-19절/낮추어라(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고 나의 부르짖음을 주께 상달케 하소서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대저 내 날이 연기같이 소멸하며 내 뼈가 냉과리 같이 탔나이다.”(시 102:1-3)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의 위로와 기쁨과 행복은 세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행하심에 있는 줄 압니다. 저희들이 이 시간 하나님이 어떻게 행하신 것에 대해서 고마워하고 감격하고 찬양하는 귀한 시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눈 돌리면 세상이 두려워집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용하려 하고 그 세상에 섞여서 자기를 숨기려고 합니다.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그냥 흘러가고 싶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십자가로 눈 돌리면 그때 우리는 사명이 생기고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뭔가 할 이야기가 생깁니다. 그냥 세상 흘러가는 대로 무의미하게 같이 흘러가지 말게 해주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에 대해서 뭔가 할 말이 있는, 할 말을 하고 사는 그런 사람 되고자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실제로 하나님은 사람이 되셔서 실제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실제로 사흘만에 부활했는데 저희들은 예수님이 다녀가신 그 세상 안에 같이 살면서 그저 세상을 닮아가려고 세상에 숨어버리기를 원하고 세상이 현실인줄 알고 성경은 현실이 아닌 것으로 그렇게 밀어붙이고 치워버리는 그런 태도를 보이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이 의미가 있듯이 저희들도 주께서 이 땅에 보내신 그 사명이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하여 부각되게 해주시고 그것이 소실되지 않도록 주께서 인도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가는 길이 주님이 가신 그 길과 같은 길인 것을, 그것이 현실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3장 18절에서 19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3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3:18-19
“너는 왕과 왕후에게 고하기를 스스로 낮추어 앉으라 관 곧 영광의 면류관이 내려졌다 하라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열자가 없고 유다가 다 잡혀 가되 온전히 잡혀 가도다.”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왕과 왕후가 잡혀 갔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역사적 사실입니다, 라고 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역사적 사실이 맞기는 맞는데 남의 일이잖아. 내일이 아니잖아.’ 그렇게 되지요. ‘내일도 다 신경 쓰기 힘든데 남에게 일어났던 그 일까지 왜 우리가 거기에 신경 써야 되고 관심을 가질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옛날 이스라엘 왕들이 바벨론에 잡혀갔구나. 하지만 내 삼촌 내 조카 내 가족은 안 잡혀 갔으니까 나와 상관없다.’ 그렇게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왕과 왕후가 잡혀간 이유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낮추기 위해서 잡아갔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심각합니다. 사회학을 공부하면 나오는데 옛날에는 왕과 왕비 귀족이 따로 정해져 있어요. 그것이 꼴 보기 싫다고 1789년에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납니다. ‘너만 왕 행세하나? 너만 영지를 넓게 가지고 계속해서 자자손손 대대로 귀족만 할 거냐? 우리도 잘 살아보자. 우리도 귀족이 되어보자.’ 해서 시민혁명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그때 그런 일이 없었어요.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날 때 모델이 있었어요. 무엇이 되겠다고 노리고 시민혁명이 일어난 거예요. 그것이 뭐냐? ‘너만 왕족이냐? 우리도 왕족 해보고 귀족 해보자.’ 그래서 뒤집어서 왕의 목을 단두대에서 공개적으로 자른 겁니다. 왕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왕을 자를 수 있는 당신보다 더 왕 같은 사람이 여기 있는 우리 모두다.’라는 거예요.

사람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출발한 이 시민혁명에 의한 이 민주주의체제가 2010년도 전 세계 220국 모든 나라, 실제로 독재를 하든 어쨌든 겉으로는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가 된 겁니다. 그 말은 현재 60억 모든 인구가 각자 자기를 뭐라고 여기느냐 하면 왕이라고 여기고 자기 아내는 왕후라고 여기면서 또 그걸 목표로 하면서 그걸 지향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회인데 그것을 경제적으로 뒷받침 해주는 사회를 가지고 자본주의 사회라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왕과 왕후의 마음을 낮추었다는 말은 이것을 오늘날 21세기에 적용시키면 하나님의 이 원칙이 오늘날 그대로 우리에게 다 주어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2010년도의 오늘날은 나 자신 외에 누구를 섬길 맘이 없어요. 그렇다면 왕이 뭐냐 하면 섬김을 받는 대상이지 왕이 누구를 섬긴다는 이것은 왕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 역사에서 왕이 따로 있고 임금이 따로 있었어요. 임금은 고려나 조선시대의 사람은 임금이 되고 왕이라는 호칭은 저 대국이라 했던 중국에서 썼던 겁니다. 그래서 같은 오야붕이라도 막 먹은 것이 아니에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임금은 한 수 아래고 왕은 최고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게 약이 올라서 고종부터는 고종황제라고 하면서 ‘너만 황제하나, 나도 황제 한다.’ 그래 된 겁니다.

그 시기에 중국은 마지막 황제로 끝나버리지요. 결국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다 같이 낮은 자리에서 높은 자리의 왕으로 한번 살아보자 하는 추세로 지금까지의 역사가 왔었고 그것이 대세고 저 밀림의 작은 흑인부족들도 국가라는 이름으로 국민들을 각자 왕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구조 속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왕과 왕비를 낮추었다 할 때 여기에는 우리보고 그냥 겸손해라, 까불지 말라, 쉽게 말해서 그냥 마음을 낮추어서 겸비하게 살면서 하나님섬기라, 하는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깊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깊은 내용이 무엇인가? 그 깊은 내용은 창세기 3장부터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우리가 성경 볼 때 창세기 3장에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선악과 따먹으면 네가 죽으리라.’ 할 때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이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 들으면 어떻게 느껴지십니까?’ 하면 ‘안 따먹었으면 안 죽었을 것인데 따먹어서 죽었고 고생했다. 안 따먹었으면 되었을 것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성경전체를 보면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말이 그런 얕은 의미를 갖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깊은 의미를 갖고 있느냐? ‘이제부터 너는 죽음이 뭔지를 맛보아야 될 피조물로 나로부터 다루어질 것이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아빠가 매를 딱 듭니다. 매를 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 형하고 싸웠지. 네가 매 맛을 봐라.’ 하고 딱, 딱 때립니다. 원래 아버지가 이 회초리 맛을 보라고 때렸으면 정답은 이겁니다. ‘아버지, 회초리 맛이 좀 따가운 맛이 있네요.’ 이래야 되는데 회초리로 때리면 뭐라고 하느냐? ‘형하고 다시는 안 싸울게요.’ 합니다. 아주 미스테릭한 일입니다.

제가 방금 한 이 유머 같지도 않은 유머에서 이런 대화를 가지고 시비를 거는 제가 잘못되었지요. 아버지가 회초리로 때리면서 ‘이 회초리의 맛을 한 번 혀를 대서 봐라.’ 하는 그런 식으로 하는 아버지는 없잖아요. ‘형하고 싸울래, 안 싸울래?’ ‘안 싸울 게요’ 이게 정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진짜 융통성이 없고 고지식한 아버지가 ‘이놈 회초리 맛을 봐라.’ 하고 때릴 때 그 융통성 없는 둘 다 똑같은 아들이 하는 말이 ‘아버지, 회초리 맛이 좀 짭조름합니다.’ 하면 이웃이 볼 때 둘 다 미쳤다고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런 미친 답변을 요구하는 거예요. ‘하나님, 선악과 안 따먹을게요.’ 그게 아니라 ‘너는 이제부터 네가 몰라도 되는 죽음이라는 것을, 하나님만 알고 있는 죽음의 그 맛, 죽음의 맛에 너는 동참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 주님께서는 인간을 개별자로 남겨둔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죄를 짓고 심지어 악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소재와 그 도구로서 이탈된 적은 일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악과 따먹고 하나님의 그 깊은 뜻은 모르고 마치 아빠가 ‘회초리 맛을 봐야 되겠어, 이놈!’ 하면 ‘회초리 맛은 짭조름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해야 될 것을 가지고 ‘다시는 안 싸울게요.’ 하고 자기문제로 와버려요. 다시 제가 이야기할게요.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죽었다고 하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이고, 우리조상이 안 따먹었으면 우리가 이런 고생 안 할 것을….’

죽음의 맛을 봐야 되는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는 것이 아니라 재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 덮쳤다고 자기가 재수있는지 없는지, 자기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그런 입장에서만 찾는 거예요. 어렵지요? 그러면 약간 더 쉬운 것 할게요.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 나왔다, 우리가 그렇게 알고 있지요. 애굽나라에 이스라엘 없습니다. 거기에는 히브리인들이 있어요.

분명히 아셔야 돼요. 애굽나라에는 이스라엘이 없어요. 히브리인들, 아브라함의 육적인 자손들만 있는 겁니다. 애굽나라에서 이스라엘이 갈라져 나올 때, 이것을 분리, 거룩이라 하는데 그렇게 갈라져 나올 때는 본인들이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 테니 주님께서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민들 동의 다 받았으니 우리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습니다.’ 하는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애굽나라에서 그냥 편안하게 살기를 원했지 애굽나라와 찢어지고 갈라져서 따로 나온다는 아이디어는 히브리인들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그저 같은 인간들이 같이 살면서 편안히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한 거죠. 그러면 히브리인들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만드는 아이디어는 누구 아이디어냐 하면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 생각입니다.

‘너희들은 이제 언약의 나라가 뭔지 그 맛을 봐야 될 그런 대상자로서 선택되었다.’ 하는 겁니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 회초리 때릴 때 ‘나는 형하고 다시는 안 싸울게요.’ 라는 소리가 나와도 용납을 하겠지만 너 이스라엘은 회초리를 때리면 ‘와, 회초리 그것 맛있네요. 그거 못되게 맛있네요.’라는 말을 해야 된다.”하는 특수한 사명을 지닌 나라가 등장한 거예요.

이 말은, 다른 나라들은 ‘야, 우리나라가 살기 편한가? 살기 좋은가?’ 이런 것을 계산하는 나라라면 이스라엘나라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거 해야 될 증인으로서의 새로운 나라가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안에 하나님의 이름이 동행하고 개입되는 거예요. 성경을 천 독을 해도 자기주체의 유리한쪽으로 봐버리면 성경 완전히 빵점입니다. 맹탕이에요.

천 번을 또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이 접었다고 학되는 것 아닙니다. 종이학 천 마리 접고 그 다음에 천 한 마리째 종이 접을 뿐입니다. 인간이 자기 유리한 쪽으로 성경을 보면 천 번을 봐도 자기 유리한 것 밖에 안 나와요. ‘아담만 잘했어도 내가 이 고생 안할 것인데’ 하면서 맨 날 자기 생각으로 되돌아오는 거예요.

그걸 부메랑이라 하는데 휙휙 돌아서 결국 나한테 오는 거예요. 남들 보면 하나님 사랑 하는 척 하는데 그게 휙휙 돌아서 나한테 돌아와서 결국 자기 손에 잡히는 겁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인력으로 자기 관심사에서 떠나서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일을 일으켰습니까?’ 하고 하나님관심사로 돌아가는 법은 없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다시 육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무슨 설교를 듣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저게 나한테 유리한 이야기인가, 저게 나한테 불리한 이야기인가? 저게 내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가?’ 그런 것을 계속 생각하지요. 하나님이 날 가지고 어떻게 일을 할 것인가, 하는 그것은 생각을 안 하지요.

자 그러면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을 뽑은 것은 하나님께서 언약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여기에서 오늘 설교에서 가장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언약이라는 것이 이스라엘사람을 여기에 놓고 거기에 언약을 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의 구조를 먼저 생각해 놓고 짜 맞추는 식으로 어떤 사람은 원망해야 되고 어떤 사람은 대들어야 되고 어떤 사람은 언약에 위반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은 대전에서 했던 것인데 안 가신 분을 위해서 다시 할게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나님형상으로 만드신 것을 여러분이 아시지요? 그 형상이 구조입니다. 그게 구조에요.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또 하나 제시해드리겠습니다. 갈라디아서 4장 19절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라고 되어 있거든요.

이걸 대부분 사람들은 내가 점점 착해지고 훌륭해진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내 안에 뭔가 구조가 튀어나오는 거예요. 두드러기라고 하지요. 뭔가 음식 잘못 먹어서 몸에 나는 것인데 그게 원래 피부층 위에 도드라지게 생겨서 완전히 구조가 드러나잖아요.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뭔가 툭 튀어나오면 이스라엘 구조 됩니다. 이스라엘구조에서 툭 튀어나오면 하나님의 형상돼요. 하나님의 구조에서 그게 뭉쳐져서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어려운 말을 아주 빨리 해버렸어요. 애굽이라는 것에 두드러기가 나면 이스라엘 되고 이스라엘이라는 것에 두드러기가 나면 하나님의 형상되고 그 형상이 뭉쳐져서 장차 오실 메시아 하나님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은 내가 착해져서 내가 괜찮게 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어떤 형상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형상이라는 그 구조물에 내가 속해 있다는 것이 구조물이 부각되면서 나는 서서히 그 형상의 하나의 종으로서 점점 더 그 가치가 소실되고 없어져 가는 거예요.

나는 사라지고 주님의 형상은 떠오르는 겁니다. 스티로폼을 물에 잠기도록 집어넣어도 떠오르고 집어넣어도 떠오르는 것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운 것이 아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리운 겁니다. 우리안의 그리스도형상이 스티로폼이에요. 그게 떠올라야 돼요. 하나님의 형상되시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기 때문에.

그럼 우리는 뭡니까? 우리는 그리스도형상을 만들기 위한 하나의 소재지요. 원재료, 원자재, 외국에서 수입해서 쓰는 원자재요.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내가 주인공이니까, 내가 주인공이고 내가 나를 만드는 조각가가 되니까 성경을 봐도 괜찮은 자기를 만들기 위해서 분주하기 짝이 없어요.

‘어느 구절을 지키면 내가 근사해지는가?’ 맨 날 자기 자신을 근사한 조각품으로 만드는데 급급했지 내 안에 있는 스티로폼을 떠오르게 하는 데는 도통 관심이 없어요. ‘누굽니까? 나를 구원하신 분이.’ 이게 안 된다니까요. ‘나 주님 알아서 이만큼 근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만 생각하는 거예요. 결국은 성경 봐도 부메랑처럼 자꾸 던져도 휙휙 돌아서 내가 던진 것만 나한테 꽂혀서 귀엽다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강아지 되지요. 물어라, 하면서 공을 던져놓고 그것을 물어오는 강아지를 쓰다듬으면서 ‘아이고, 귀여워라. 내가 헌금해 줄게~’ 하듯이 자기 잘남을 교회 와서 재확인하는 거예요. 이게 교회의 일상이라면 이것은 애굽입니다. 왜냐? 언약이 안 나오기 때문에. 스티로폼이 안 나오기 때문에. 스티로폼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 폼만 나오지요.

그래서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이스라엘이 나올 때 그 히브리인들이 주체가 아니고요, 그 히브리인들을 홍해까지 갈라지게 하면서 나오게 한 하나님의 언약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그 언약을 이루신 분은 히브리인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과 동행합니다. 다른 사람은 언약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오직 언약을 아시는 분은 오직 함께 동행하시는 여호와이름이 언약을 알잖아요.

히브리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애굽에서 나왔다고 우깁니다. 말짱 거짓말이었어요. 애굽에서 나올 때 뭔가 꼬리 같은 것을 길게 달고 나왔어요. 인간이라는 것은 스펀지 같아서 환경 바뀌면 그 바뀐 환경이 다 스며들어요. 그 환경이 빨간 환경 같으면 그 빨간 환경이 다 스며들어요. 파란잉크 같으면 스펀지가 파란잉크를 흠뻑 담아요.

듬성듬성 구멍 난 스펀지가 인간입니다. 환경에 적응해서 살게 마련입니다. 환경 바뀌면 환경 바뀐 대로 또 다른 스펀지가 되어버려요. 그런데 그 스펀지만 달랑 나왔다고 해서 애굽과 결별했다? 아닙니다. 겉으로는, 남 보기에는 애굽에서 나와서 좋다고 하면서 찬양했는데 사실은 꽉 짜면 죽 흐를 정도로 애굽의 정신과 사고방식을 싣고 그들은 천국 간다고,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한 거예요.

그런데 애굽에서의 사고방식은 생명이 아니고 생존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은 이유가 생명이 그리워서 여호와께 부르짖은 것이 아니고 생존이 어려워서 여호와께 달라고 하는 거예요. 그 정신머리 그대로 약속의 땅에 간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중간에 광야를 통과하게 했어요. 광야라 하는 것은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도마뱀 종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생존을 생명으로 바꿔야 돼요. 그러나 애굽에서 그들이 안 것은 그거예요. ‘자장면 시키신 분’ 그것, 잡채, 부추, 수박 그저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 애굽사람이든 뭐든 너나 나나 다 같이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하고 애굽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방 같이 좋아하고, 왜? 스펀지니까, 인간은 환경의 산물이니까. 교회가 복음을 안전해도 그게 교회인줄 알고 좋아하고, 왜? 스펀지니까.

그런 사람들을 생존에서 생명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모든 손을 다 놓게 만들 때, 양식을 주되 애굽에서는 구경도 못한 양식을 주는데 사람들은 그 양식을 일컬어서 ‘이게 뭐꼬?’ 이름이 ‘만나’에요. ‘뭐지?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이다.’ 왜 생전 처음 보는 음식을 줬을까요? 생전 처음 보는 음식, 이것은 바로 그동안 애굽사람들이나 주위의 이방나라들이 생전 처음 보는 그런 인간형을 광야를 통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내겠다는 겁니다.

사람이라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죽음을 앞두고 죽음을 피해서 도망치는 인간형이 애굽인간이라면 죽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경험해야할 죽음을 같이 동참해서 경험해야 될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과 동행할 수 있는 언약 맨, 언약의 사람들입니다. 왜? 장차 하나님의 이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진짜 죽음, 저주까지 경험하는데 그 저주의 죽음에 동참해야 될 사람이 오늘날 성도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십자가의 구조를 떠오르게 하는 하나의 배치물이고 하나의 소재에요. 물질소재입니다. 이 말은 죽음이 무엇인지 죽을 때가지 체득하면서 십자가 피라는 새로운 환경의 스펀지가 되는 거예요. 구석구석 힘줄 하나하나마다 예수님의 용서, 사죄의 피, 이 죄마저 용서하시는 용서가 뼈마디 마디 관절과 골수에 스며드는 겁니다.

말씀으로 고기 같은 우리를 자를 때마다 집어넣는 이 모든 것이 말씀으로 자르고 그 빈 공간에 말씀의 핵심을 거기에 집어넣고, 그러면 우리가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예수님의 용서가 스며 나오고 자비가 스며 나오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한테 좀 잘못했다고 멱살 쥐고 싸울 때 우리는 주님의 용서가 왔기 때문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를 해 줄 수가 있는 겁니다.

임금님이 하는 말이 ‘어이, 신하! 너 나한테 얼마 빚졌나?’ ‘백억 빚졌습니다.’ ‘다 갚아 줄게.’ 그런데 그 신하는 돈 20원 안 갚았다고 종 잡아넣지요.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할 그 인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기도문에 나오지요.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해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해 달라.’ 저의 구조가 주님의 구조고 주님의 구조가 언약의 구조고 언약의 구조가 지금의 나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왕과 왕후가 낮아져야 된다. 사적으로 말해서 ‘에구, 왕과 왕후가 참 안되었다.’ 하는데 그들이 잘못되고 거짓된 우상, 여호와라 하지만 깨보면 완전히 우상으로 가득찬 이런 나라의 왕과 왕후가 수치스럽게 벌거벗은 채 그야말로 ‘이방나라 민족에게 포로 잡혀 가고 면류관도 다 깨지고 남방의 성읍들이 봉쇄되고 열자도 없고 다 잡혀가는’ 수모를 당하는 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서 그런 것은 맞지만 더 깊은 의미는 뭐냐?

하나님의 언약의 죽음이 무엇인가를 체험하는 가운데서 그들은 죽음 속에 들어갈 때 비로소 생존이 그리운 것이 아니고 생존보다 생명이 더 그립다, 하는 것을 이들만은 체험할 수 있는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이번 수련회 마지막 시간에 제가 이야기했어요. 우리에게 생명이라 하는 것은 현재 내가 꼬집어보면 살아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살아있는 것보다 더 살아 있는 것이 생명입니다.

왜냐하면 이 꼬집어보면 있는 이 살 갗이 언제 떨어질지 모르고 이것이 언제 흙이 될지 모르는데 우리는 이 불확실한 생명 쥐고 이것 살려보겠다고 죽을까봐서 벌벌 떱니다. 그런데 왜 영생가지면 좋으냐하면 그것은 어떤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것 보다 더 확실하게 살아 있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에 주님의 그 영생은 이미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갖고 있기에 예수님과 하나 될 때 우리는 생존이 아니라 생명의 부속품으로 합류될 수 있는 그러한 성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윤리와 도덕으로 해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언약으로 약속으로 말씀의 완성으로 해 주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말씀의 완성 안에서 뭐가 되느냐 하면 바로 ‘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으로 가담하기 때문에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될 때 다시 말해서 실패자가 될 때 다시 말해서 죽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평생을 통해서 온몸으로 체험할 때 그런 죽음의 체험 안에 가두어두게 한 그것이 곧 생명 안에 이미 네가 포함되었다는 보증이 되는 겁니다. 제가 말을 너무 어렵게 해서 실례가 되었습니까?

이 땅에서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오면 재수 없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야말로 예수님이 경험했던 그 십자가경험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생명에 이미 들어온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 사나 죽으나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먹든지 마시든지 감사할 수 밖에 없다 이 말이지요.

왜? 우리는 애굽이 아니니까. 우리 안에서 나를 살리는 하나님의 형상이 늘 떠오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일 때 성경 천 독을 하고 만 독해도 ‘오직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 능력으로 이렇게 구원받았습니다.’ 하는 모든 영광과 감사를 오직 주께만 돌리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혹시 잘못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나 유리하도록 내 인생 편하게 살려고 그래서 하나님이 십자가구원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어 있음을,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남들이 기피하는 죽음도 경험하고 남들이 알지 못하는 생명도 경험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맛을 맛보게 해 주시는 이 은혜를 저희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