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8. 23:18

성전 계획 (사무엘하 7장 1- 7절)

성전 계획

2009년 12월 27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7:1-7

(삼하 7:1, 개역) 『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삼하 7:2, 개역)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삼하 7:3, 개역) 『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삼하 7:4, 개역)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삼하 7:5, 개역)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삼하 7:6, 개역)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삼하 7:7, 개역)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신기한 일은 하나님께서 다윗이 평소에 마음에 담아놓은 생각에 대해서 반응을 나타낸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직접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았음에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평소에 사람들이 뭘 생각하는지를 다 탐색하고 계시다가 중요하다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응답을 해주시는 겁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자기 뜻을 드러내었습니다. 자기는 백향목 좋은 집에 사는데 하나님이 발이 임재한다는 법궤는 그냥 천막 안에서 한데 생활하는 것이 안쓰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겁니다. 이런 의식은 오늘날 소위 교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람들이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곧 하나님도 좋아할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어드려서 평소에 자신이 좋다고 여기는 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있으면 지금보다 하나님의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동질성에 가담하시는 분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과 차이나는 식으로 함께 계십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이 좋다는 것이 결코 하나님에게로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사람들이 나쁘다는 것이 결코 하나님에게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세계를 연장시켜 하나님마저 그 안의 합당한 하나님으로 끌어당기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만약에 이런 신이라면 인간은 자신의 죄나 한계나 문제점이 여전히 들추어지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이런데 동원된 신을 가지고 ‘우상’이라고 합니다. 팔공산 갓바위는 일반 절하고는 달리 그냥 바위에 갓 쓴 것에 불과합니다. 즉 밑천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 절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곳에 가서 신과 거래에 나서게 됩니다. “나에게 좋은 일이 생기면 그 일부를 당신에게 떼 드리겠습니다”라는 식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인간은 자신이 요구하는 것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지적받지 않게 되는 겁니다. 과연 인간의 문제점은 무엇일까요? 1945년 8월 10일 아침 8시, 히로시마의 평화로운 거리에 한 초등학교 여학생이 길을 걷고 있다고 봅시다.

그 소녀는 어제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산수 숙제를 받았고, 오늘은 그 산수 숙제를 해서 신나게 학교를 향하여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산수 수업 시간이 되면 선생님은 자기 숙제에 대한 칭찬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소박한 시간관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자기 위주의 소박한 시간관을 늘 만들어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섬광이 빛나면서 원자폭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 어린 소녀의 꿈도 순식간에 다 날아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자기 좋은 쪽으로 자기 위주로 산다는 것이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잘못 사는 것이 됩니다. 이런 사고방식을 견지하면 거기에다 ‘하나님의 집’을 지어들이겠다는 제안에 대해서 하나님의 반응은 단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발끈하시면서 거부하고 나신 것입니다. 즉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지은 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집’이라는 건축물이 결코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아니하면 생겨나지 않는다는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관여를 거부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 구상한 건물은 결코 진짜 하나님이 게실 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집에서 살고 싶어하십니다. 하나님의 집은 하나님 자신의 자랑거리로서 나타나는 집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자랑스러워 하십니다. 여기에 만약에 인간이 개입하면 하나님의 자랑거리에 인간이 고개를 쳐들고 쏙 끼어드는 식이 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온전한 영광을 돌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란 항시 자신이 자신의 자랑거리가 되고 싶어합니다. 누구를 거론하든지 간에 결국에는 자기 영광으로 되돌아오기를 원합니다. 바로 이러한 인간의 심보를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을 짓는데 있어 인간이 가담되는 것을 허락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집은 정녕 없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는 것을 계기로 하여 하나님 자신의 집 계획을 언급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집’에 관한 계획입니다. 이로서 사람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집’과 확연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그리고 자기 백성을 그 집에 넣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보고 하는 이야기가, “너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라”고 하셨습니다. ‘낚는다’는 말은 현재 그 자리에서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사람이 기존의 자리에 뜯게 나가면 대단히 불안해합니다. 허전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성전의 위력에 흡수당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즉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는 성전의 혜택을 벌써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과연 그 성전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날까요? 에스겔 47장에 보면, 새성전에는 물이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이처럼 물이 계속 나오는 성전은 우리 인간이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물이 먼저 있고 그 물에 의해서만 우리가 살기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물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물은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 벌써 나옵니다. 에덴의 전체는 그 물에 의해서 소생합니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이 사방을 살립니다. 물이 흐르다가 말라버리면 결코 천국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성령이 계속 나오는 사람이 이미 성전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분수대가 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분수대는 그냥 조형물에 불과합니다. 물이 단지 그 분수대를 통해서 분출될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물이 계속 나오는 사람은 그 사람의 직업이나 사는 장소나 경제 형편과 상관없이 성령이 계속 분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목숨 바쳐도 참여할 수 없었던 그 성전에 우리가 초청받게 되면 오로지 예수님의 거저주시는 은혜만 고백하면서 살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어디서, 어디든지 항상 예수님의 거저 주신 은혜성만 나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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