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0. 18:24

미갈의 오해 (사무엘하 6장 16-23절)

미갈의 오해

2009년 12월 20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6:16-23

(삼하 6:16, 개역)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저를 업신여기니라』
(삼하 6:17,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삼하 6:18, 개역)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삼하 6:19, 개역)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눠주매 모든 백성이 각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삼하 6:20, 개역)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가로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1, 개역)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삼하 6:22, 개역)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삼하 6:23, 개역)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사람 앞에서 행하는 일과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일이 어떻게 다른 걸까요?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이란 그 행하심이 이미 확정지어져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출애굽기 33:19-20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원칙을 끄집어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이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는 하나님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아무도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계심을 하나님의 얼굴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인 은혜와 사랑을 입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라라는 겁니다. 이로서 진짜 하나님 믿는 자와 믿는 척하고 있는 사람이 구별됩니다.

사람의 죄란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얼굴이 돌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긍휼을 무가치한 것으로 차버리는 식이 됩니다. 긍휼 안에서 세상을 보는 것과 긍휼 밖에서 세상을 보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오늘 본문은 말해줍니다.

긍휼을 원하는 사람은 일찍 감치 자기 가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마 5:7)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본 것과 미갈이 본 것이 상호 달랐습니다. 똑같은 사건의 현장에 같이 있었다고 해도 뽑아내는 현실성은 사뭇 다릅니다. 미갈은 자기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반면에 다윗은 자기로부터 벗어나 긍휼 안에 있습니다.

미갈은 다윗과 함께 옷 벗어 춤출 준비가 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주변에 사람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법궤가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지를 않습니다. 법궤는 그저 상자로만 여깁니다. 마태복음 11:17에 보면,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미갈은 현재 자기 위치보다 더 귀한 곳으로 없다고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소중한 자기를 대외적으로 지키기 위해 체통을 유지해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미갈은 왕후로서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다윗이라는 남편의 왕다움이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미갈과 엮이지 않고 있습니다.

다윗의 다윗됨은 아내 미갈이 아니라 진정한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미갈의 눈에는 다윗만 살아있다고 보이지만 다윗의 눈에는 하나님이 엄연한 왕으로 살아계십니다. 모든 지시와 명령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윗에게 오게 됩니다. 지금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은 바로 법궤의 운반입니다.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미갈의 태도가 이상스럽고, 불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다윗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심의 특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게 되면 그 현장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나뉘어지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다윗에게 있어 하나님은 실존 인물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신앙인의 눈에는 다윗이 지금 정치적인 쇼를 벌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백성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긴다고 여기고 있는 그 마음을 이용해서 국정을 원활하게 이끌기 위해 왕이 백성들의 마음에 충족됨을 종교 행사를 통해서 과시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석하는 미갈의 눈에 남편 다윗의 태도는 너무 이상스럽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 중에 자기와 같은 비신앙이 많이 있을 것인데 다윗의 태도는 마치 전혀 왕다운 위신 있는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마치 주위에 사람이 전혀 없고 오직 하나님만 계시고 그 앞에 선 한 명의 신자로서만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은 지금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주변의 호응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잊었습니다. 자신을 잊는 순간, 타인들도 사라졌습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하나님의 존재성 때문에 자신의 존재성이 생각나지 않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그 실제성을 드러냅니다.

미갈의 눈에는 한 남자가 분별없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춤추게 함으로서 현재, 여기에 하나님이 와 계심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누가복음 10:16에 보면,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에 해당되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심지어 자기 존재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존재만 봐야합니다. 요한복음 13:20에 보아도 같은 취지의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로서 예수님에게는 성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같은 인간이면서도 복음의 영광에 도취되어서 자신의 존재까지 망각하면서 오로지 복음만 증거하므로서 예수님께서 말씀 가운데 현존하는 방식이 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달라진 사람을 이것이 지금 하나님께서 바로 이곳에 계신다는 증거가 됩니다.

만약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달라진 사람을 통해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면 실제로 예수님이 나타나도 예수님을 못 알아볼 사람입니다. 이 예수님에 의해서 달라짐은 기존의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될 수 없는 변화입니다. 다윗이 법궤의 존재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떡과 건포도를 나누어주면서 하나님과 더불어 있음에 대해 찬양하고 있는데 비해 미갈은 다윗의 행동을 업신여겼습니다.

이 업신여김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내부에서는 이 세상의 업신여김을 능가하는 속성이 작용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에서 오는 충격입니다. 즉 인간의 그 어떤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저지할 수 없음에서 오는 충격입니다.

다윗은 그 충격을 춤으로 표현했습니다. 춤은 그 사람과 분리되지를 않습니다. 춤추는 자는 춤추는 것을 관람하는 자가 아니요 분석하는 자도 아닙니다. 그냥 온 몸으로 발산될 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충격에서 오는 발산은 지존 세상에서 흉내 낼 수도 없고 예상한 것도 아니기에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오심은 그 어느 순간이나 어느 곳에서든지 모멸함과 동시에 공격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미갈에게 저주를 내려서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간의 가치를 근본적으로 무시하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무시하면 그 사람도 인자의 날에 무시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존중할 때, 상대적으로 예수님과 하나님은 무시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긍휼이 중요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체면을 유지하는 자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인해 뭉개지고 박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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