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3. 23:24

법궤에서 나온 복 (사무엘하 6장 12-15절)

법궤에서 나온 복

2009년 12월 13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6: 6-15

(삼하 6:6, 개역)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삼하 6: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삼하 6:8, 개역) 『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삼하 6:9, 개역)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삼하 6:10, 개역)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삼하 6:11, 개역)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삼하 6:12, 개역) 『혹이 다윗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삼하 6:13, 개역)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삼하 6:14, 개역)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삼하 6:15, 개역)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법궤는 소에 실려서 이동합니다. 법궤는 스스로 이동할 수 없는 궤짝입니다. 그런데 소가 발작이 일으켜서 그 위에 있는 법궤가 땅에 떨어지려고 할 때에 웃사라는 사람이 얼른가서 법궤를 붙들었습니다. 그랬더니만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노하셔서 현장에서 웃사를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일한 법궤가 이번에는 오벧에돔의 집에 당도하여 3개월간 있었는데 그 집에 그 복을 받았습니다. 과연 우리 인간이 이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다윗은 법궤로부터 그 어떤 원리도 끄집어낼 수가 없어 당황했습니다. 웃사가 저주받은 일을 통해서서 법궤와 함께 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가, 그 동일한 법궤로부터 복을 받았다고 소식을 접하고는 지체않고 법궤를 궁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비일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다윗을 이해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행하심보다 우리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를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동행’이라는 말을 이해했어야했습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과 동행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도리어 다윗과 동행해주시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도저히 동행 불가한 자를 하나님께서 동행해주심’의 의의가 살아나게 됩니다. 다윗은 오늘날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 싶으면 남의 것이라도 뺏아돌 태세요, 반대로 자기에게 손해가 된다 싶으면 주저없이 치워버리는 타입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이럼에도 불구하고 동행하시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다윗’과 ‘다윗의 자손’의 차이를 보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8:56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아브라함은 예수님 때를 고대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동행하신 그 결과에 대해서 본인들이 비로소 그 동행의 취지를 파악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저주받은 웃사’과 ‘축복받은 오벧에돔’ 모두다 다윗의 일생에서 일어날 ‘동행의 구조’, ‘동행하심으로 형상되는 공간’을 만들어내어 줍니다. 이 하나님께서 앞으로 다윗과 함께 동행하므로서 다윗은 저주도 경험해야 하고 축복도 경험해야 하는 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 속에서 다윗 본인과 다윗을 구원하실 ‘다윗 자손’과의 차이를 세상으로 나타내 보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동행이 왜 필요한 것입니까? 원래 성경 해석이란 성경 말씀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분과 해석권을 갖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만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반인들이 성경 해석으로부터 방치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여기에 바로 ‘동행’이 실시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해석해내지 못하는 것은 이미 태어나면서 유지하고 있는 자기 위주의 삶의 구조 안에 철저하게 박혀 살기 때문입니다. 구조가 잘못되었기에 사람들은 동행을 원하기 보다는 독자적으로 자기 구원은 자기 힘으로 획득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법궤를 바라보고, 다윗이 법궤를 바라본 안목이 이런 안목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의 의미하는 법궤가 있다하니 법궤로부터 덕을 보기 위해 자진해서 동행을 시도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동행하기 아니라 인간들이 원하는 동행을 바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웃사나 다윗의 경우를 보듯이 그들의 기존 삶의 구조가 차질이 일으켰습니다.

마태복음 6:31-33에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와 의와 동행하는 신자라면 이런 말씀 해석으로 의하여 지속적으로 지적받게 되어 있습니다.

열왕기상 17:4-7에 보면, “그 시냇물을 마시라 내가 까마귀들을 명하여 거기서 너를 먹이게 하리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하여 곧 가서 요단 앞 그릿 시냇가에 머물매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왔고 저가 시내를 마셨더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일반인들과 다른 삶의 구조를 보입니다. 즉 그는 죽음과 삶의 경계선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슬아슬하게 좁은 노선을 걷고 있습니다. 바깥은 양쪽 다 죽음이요 그 좁은 노선 위에서는 생명이 보장됩니다. 이러한 구조가 바로 하나님께서 동행하시는 삶이 구조입니다.

기존의 인생들이 염두에 두고 사는 생존의 구조란, 내가 마음놓고 처분할 수 있는 재물을 가득 옆에 처재어놓고 사는 것을 ‘산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나라와 의를 바라보면서 사는 관계성’이 곧 ‘산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말씀하시는 삶의 구조란 ‘죽음으로 둘러싼 구조’ 안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5:24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동행의 목표는 ‘죽음과 저주와 무관한 인간 되기’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인간들의 의식구조로서는 도저히 죽음과 저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동행은 이런 다윗을 가지고 구원자, ‘다윗 자손으로서의 구원방식’을 끄집어 내시는 목적으로 시행하시는 겁니다. 이런 비인위성에 인위적으로 장악하려고 한다면,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복과 저주를 관리하려고 덤빈다면 그 삶의 구조는 저주받아 마땅한 구조가 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충돌’을 보여주기 위해 법궤를 이동시켰고 그 이동은 이제 다윗의 평생을 통해서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씨’의 정체를 보여주기 위해서말입니다. 무서운 하나님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사히 복을 받는 오벧에돔의 경우가 결국 다윗의 영원한 지위가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과 동행함이 우리 노림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였음을 반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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