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29. 10:41

다윗 성 (사무엘하 5장 6-10절)

다윗 성

2009년 11월 29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5:6-10

(삼하 5:6, 개역) 『왕과 그 종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 땅 거민 여부스 사람을 치려 하매 그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소경과 절뚝발이라도 너를 물리치리라 하니 저희 생각에는 다윗이 이리로 들어오지 못하리라 함이나』
(삼하 5:7, 개역) 『다윗이 시온 산성을 빼앗았으니 이는 다윗 성이더라』
(삼하 5:8, 개역)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수구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절뚝발이와 소경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소경과 절뚝발이는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삼하 5:9, 개역) 『다윗이 그 산성에 거하여 다윗 성이라 이름하고 밀로에서부터 안으로 성을 둘러 쌓으니라』
(삼하 5:10, 개역)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흔히들 임금이 사는 집을 궁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일반인들의 주거 환경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보기에 다윗성이란 역시 다윗이라는 왕이 사는 주거지역을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에서는 달리 봅니다. 천국의 기능이 일어나는 곳으로 봅니다. 즉 아무도 들어가지 못할 곳에 다윗이 들어갔다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사야 4:3-5에 보면,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에 있어 생존한 자 중 녹명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으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케 하실 때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그 거하시는 온 시온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성이 나옵니다. 그 성이 실제로 있답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분명해졌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합니다. “내가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집혔습니다. “다윗성에 내가 있느냐 내가 없느냐 그것이 문제로다”고 해야 옳습니다.

예루살렘성, 곧 다윗성은 아무나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성의 원주민인 여부스 사람들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버티고 있는 이 예루살렘은 막강한 도성이라는 겁니다. 다윗 같은 자들이 함부로 탐을 내고 넘볼 수 없는 도성이라는 겁니다.

다윗 같은 무리들을 내치는 것은 예루살렘성에 사는 주민들 가운데 가장 능력이 떨어지나 소경이나 절뚝발이라도 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다윗의 세력이 이 예루살렘성을 점령하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 불가능을 말하는 엄포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 무리는 이처럼 세상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모멸과 모독을 마음껏 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시와 불가능성을 우리의 현실인 것을 수긍을 하고 수용해야만 합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것은 분수에 넘는 일입니다. 구원이란 사람의 능력으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는 교회에서 숱하게 봐왔습니다. 자기 노력으로 구원을 시도하는 자들이 결국 하나 둘씩 다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런 불가능한 예루살렘을 다윗성으로 고집해서 차지하게 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소경과 절뚝발이보다 못한 자들도 명단이 있는 자들에게는 들어갈 수가 있는 세계이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사야 4장에 보면, 거기에 기거하는 자들은 들어서자마자 이미 ‘거룩한 자’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거룩한 김집사님, 거룩한 최권사님”이라는 호칭을 받게 됩니다. 왜 이런 대우를 받게 되느냐 하며는 바로 그들이 세상에 있을 때,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의 작용으로 이미 그들의 죄를 다 씻어내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씻음과 심판의 기능이 지금도 일어나는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삼층천 같은 천국을 두 눈으로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허락하신 것은, 심판과 소멸의 기능들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죄와 관련되어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들춰내시는 일을 성령을 통해서 행하시게 합니다.

우리는 “찬송가 몇 장을 찾아 불러봅시다.”고 하시면 찾아서 잘도 부릅니다. 하지만 “성경 말씀을 지킵시다”고 한다면 성경의 그 어느 한 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그저 카피를 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 무능한 소경과 절뚝발이들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까? 바로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다윗성’이 발휘해내는 구원의 기능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내가 여기 있다”는 식의 인생관은 아무 소용없습니다. ‘어디에 어느 공간에 놓이느냐’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습니다. 집에 가면 누워있는데 교회오면 안보인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죽은 자요 없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즉 ‘다윗성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있어도 없는 자요 살아도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에 있어 다윗성 기능, 곧 예루살렘성 기능이 일어나는 곳이 어디입니까? 예수님 당시에 숱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결국에는 자진해서 다 떨어져나갔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이해하는 구원을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결코 생명이 없느니라”고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육적인 요소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살과 피가 아니라 예수님이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이 그 당시 사람이나 요즈음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불가능한 요구로 인하여 사람들은 더는 예수님과 동행하지를 않았습니다. 이 원칙과 다윗성의 기능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진짜 죽을 자는 살고자하는 너희들이라는 겁니다. 살과 피란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죽어야만 했던 예수님이 살려주지 아니하면, 혹은 그분의 살과 피가 아니라면 아무도 살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숨이 끊어질 때 죽은 자가 아니라 그 전부터 우리는 죽어있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죽은 자가 자진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같이 달린 강도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할 때는 저를 생각해 주세요” 여기에 그 강도는 천국을 ‘당신의 나라’라고 본 것입니다. 즉 더 이상 자신의 나라를 고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구원이란 곧 ‘나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세계’로의 이전입니다. 이 세상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따라서 성령께서는 오늘날 날마다 우리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우리를 쳐박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와 살로만 먹고 살게 하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을 날마다 죽은 자로 알게 하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입각해서 살아가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07강-삼하5장6-10(다윗성)-2sa091129.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07강-삼하5장6-10(다윗성)-2sa091129.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무엘하-2009/07강-삼하5장6-10(다윗성)-2sa091129.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