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0. 20:54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무엘하 3: 1- 5)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2009년 11월 8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3:1-5

(삼하 3:1, 개정)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삼하 3:2, 개정) 『다윗이 헤브론에서 아들들을 낳았으되 맏아들은 암논이라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의 소생이요』
(삼하 3:3, 개정) 『둘째는 길르압이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의 소생이요 셋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삼하 3:4, 개정) 『넷째는 아도니야라 학깃의 아들이요 다섯째는 스바댜라 아비달의 아들이요』
(삼하 3:5, 개정) 『여섯째는 이드르암이라 다윗의 아내 에글라의 소생이니 이들은 다윗이 헤브론에서 낳은 자들이더라』


오늘 본문에 다윗의 6명의 아내와 6명의 자녀들이 각각 나옵니다. 이 다윗의 집안은 결코 다른 집안보다 신앙적으로 우수한 집안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다윗은 점점 강하여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해진다”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이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항상 상대적인 대비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다윗의 집안과 사울의 집안의 차이가 인간들이 흔히 생각하는 선과 악의 차이가 아니라 다른 차이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다윗 쪽으로 사람들을 집결시키게 됩니다. 즉 집결시킨다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힘이 모아진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진짜 선과 악의 기준이 점점 내부적으로 명확해지고 구체화된다는 말입니다.

즉 왜 다윗의 집안은 강성하는지 그 이유를 제대로 알려면 왜 다윗 집안에서 비로소 악의 전모와 본질이 밝혀져야 하는지와 관련있습니다. 강성함의 원인은 건성이나 겉으로 파악해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원래 전쟁이란 이스라엘과 타 민족간에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에는 언약이 있은 반면에 다른 민족에서는 언약이 없습니다. 언약이란 저주를 축복으로, 죄를 거룩과 의로 바뀌는 장치를 말합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함께 있으면, 다른 민족들은 자동적으로 저주가 임하고 이스라엘은 자연적으로 축복이 임해서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되고 난 뒤에는 내부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전쟁이 이처럼 내부적으로 확산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일부로 하신 일인데 왜냐하면 그 전쟁의 한 가운데에, 바로 언약의 진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언약의 제대로 돌아간다는 것은, 죄의 진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그것마저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엄청난 자비의 만남이 성공적으로 성사될 때 가능합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6명의 아내와 자식이 나오지만 참으로 언약의 진수를 보여주는데 관여하는 아내는 다윗 본인의 아내가 아니라 우리아라는 죽은 분의 아내입니다.

즉 밧세바입니다. 그리고 그 밧세바와 다윗의 사이에는 태어난 아이도 일주일만에 죽게 됩니다. 이 죽은 자가 곧 진정한 진리의 진수를 보여주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는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산 자들은 종잡을 수 없는 정도로 늘 빈번하게 변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자는, 자신의 죽음으로 인하여 자신을 죽게 한 그 죄악된 원인이 그 죽음이 영구히 품어버리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죽은자 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를 말할 서ㅜ 있게 됩니다. 언약, 특히 새언약에 있어 이미 죽어버린 자가 산 자들을 살려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살아있는 자가 파악하는 언약과 이미 언약대로 죽어버린 자가 품고 있는 내용이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산 자들은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아들여서 자신을 구원시키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는 본인들이 변동 있는 식으로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항상 유동적으로 스스로 자신의 믿음을 배신할 가능성을 품고 있습니다. 구약 이스라엘이 망해버린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살아있는 본인들은 언약을 산 채로 준수하여 살아있는 자신을 더욱더 살게하겠다고 시도한 겁니다. 이것은 언약적이라 아니라 차라리 비언약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런 비언약은 하나님의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메시아께서 다윗의 자손을 통해서 주어진다면 다윗의 가문 자체는 진정한 언약과 엉터리 언약정신의 만남이 성사되는 공간이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정신이 하나님 나라에 못들어가는 의식입니다. 사울의 집안과 세력들이 이 사실을 마음껏 보여주게 됩니다. 10절에 보면 “이스보셋이 아브넬을 두려워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칭 왕이 되리라는 자가 자기 부하가 무서운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왕은 실질적인 통치력을 상실한 왕입니다. 아브넬은 리스바라는 사울의 첩과 통간을 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이스보셋이라는 차기 왕을 노리는 사울의 아들은, 부하가 감히 자기 집안을 능멸하는 것이 분해서 한 소리했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더 거셌습니다. 쉽게 말해서 “내가 너를 다윗의 위세 앞에서도 견디도록 힘을 써주고 있는데 그 은혜도 모르고 한 여인과의 허물을 문제삼느냐”는 겁니다. 즉 나는 당신 집안이 부려먹기 좋은 개가 아니다는 겁니다. 거기에다 아브넬은 더욱더 기세가 높아 엄포를 놓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는 이 사울의 집안이 아니라 다윗의 집안이 이스라엘의 왕가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귀순을 시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서 사울의 집단에 어떤 사적인 감정들이 충돌되어도 다윗의 집안 입장에서 큰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집안에서 큰 문제가 딴 게 아니라 사적인 복수심으로 인해 귀순한 아브넬 장군이 다윗 몰래 살해당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점점 강성해져 가는 다윗 집안 내에 이미 비언약적인 요소가 넘쳐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압이라는 장군은 전에 아브넬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 아사헬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몰라 아브넬을 살해하고 맙니다. 이 사건을 놓고서 다윗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28-29에 보면,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문둥병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그리고 귀순했던 아브넬의 죽임을 놓고 노래를 지어가면서까지 애통합니다. 이를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브넬을 죽인 것이 결코 다윗이 죽이고자 죽인 것이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즉 다윗은 사적인 복수심에서 동지와 적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적이 얼마든지 다윗 진영에 있을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고, 비록 다윗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하더라도 다윗에게 내려진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는 자는 언제든지 다윗이 받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올 수 있다는 겁니다.

다윗이 세상 보는 기준에는 분명 저주받기를 바라는 요소를 유발시킵니다. 좋은게 좋다는 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저주라는 것이 항상 ‘같은 편’이라서 같이 외부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그 진영에서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겁니다. 다윗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본질은 다윗의 이런 울음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비록 탕자라 할지라도 회개하고 돌아가면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보다 낫다는 겁니다. 비록 세리와 창기라도 회개할 줄 모르는 바리새인이나 낫다는 것이 언약이 보여주는 본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내부에 새언약이 작동하여 우리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구원받은 자임을 늘 확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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