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8. 10:56

다윗이 보는 세계관 (사무엘하 1장 1-10절)


다윗이 보는 세상관

2009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 1-10

(삼하 1:1, 개정) 『사울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말렉 사람을 쳐죽이고 돌아와 다윗이 시글락에서 이틀을 머물더니』
(삼하 1:2, 개정) 『사흘째 되는 날에 한 사람이 사울의 진영에서 나왔는데 그의 옷은 찢어졌고 머리에는 흙이 있더라 그가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매』
(삼하 1:3, 개정) 『다윗이 그에게 묻되 너는 어디서 왔느냐 하니 대답하되 이스라엘 진영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하니라』
(삼하 1:4, 개정) 『다윗이 그에게 이르되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너는 내게 말하라 그가 대답하되 군사가 전쟁 중에 도망하기도 하였고 무리 가운데에 엎드러져 죽은 자도 많았고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 하는지라』
(삼하 1:5, 개정) 『다윗이 자기에게 알리는 청년에게 묻되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
(삼하 1:6, 개정) 『그에게 알리는 청년이 이르되 내가 우연히 길보아 산에 올라가 보니 사울이 자기 창에 기대고 병거와 기병은 그를 급히 따르는데』
(삼하 1:7, 개정) 『사울이 뒤로 돌아 나를 보고 부르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한즉』
(삼하 1:8, 개정) 『내게 이르되 너는 누구냐 하시기로 내가 그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말렉 사람이니이다 한즉』
(삼하 1:9, 개정) 『또 내게 이르시되 내 목숨이 아직 내게 완전히 있으므로 내가 고통 중에 있나니 청하건대 너는 내 곁에 서서 나를 죽이라 하시기로』
(삼하 1:10, 개정) 『그가 엎드러진 후에는 살 수 없는 줄을 내가 알고 그의 곁에 서서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내 주께로 가져왔나이다 하니라』


오늘 본문에 두 가지 죽음이 나옵니다. 하나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죽음과 다른 하나는 ‘할례없는 족속의 죽음’입니다. 사울왕의 죽음은 ‘기름부음의 받은 자’요, 아마렉 소년의 죽음은 ‘죽어야 될 자의 죽음’입니다. 즉 이 세상에는 죽지 말아야 할 자의 죽음이 있고 죽어 마땅한 자의 죽음으로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죽음’을 통해서 세상을 분별하시고 보십니다. 즉 “너희들이 얼마나 잘 났느냐”가 아니라 “너의 죽음은 어떤 성질의 죽음이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사람이란 모두가 죽지 않기 위해 환장을 합니다. 매일같이 자신의 양심까지 속여가면서 사는 이유가 다 ‘조속히 안 죽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죽음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십니다. 마태복음 8:21-22에 보면,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생각하는 죽음이란, 숨이 끊어진 자를 두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숨이 끊어지지 않더라도’ 죽은 자로 봅니다. 정말 산 자가 되고 싶다면 예수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을 따르지 아니하면 같이 죽은 자로 분류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인간을 두고 하나님은 ‘죽은 자’로 간주하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도움으로 살아갑니다. 자기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새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사람들의 힘도 아니요 참새 그것들의 의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떨어지는 겁니다. 하물며 사람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힘으로 생명이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햇빛 주시고, 공기 주시고, 심장을 뛰게하시는 분이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거나 고마워하지를 않고 도리어 하나님을 심하게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교회마저 그러합니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과 자신의 노고를 칭찬하고 찬양해주기를 요청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도 같은 입장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음에 자부심을 갖고서 망하지 않고 패배하지 않는다고 장담했던 이스라엘이 왕도 죽고 패배하므로서 도대체 하나님이 함께 계심이 무슨 뜻인지 무색케 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자리’에 대해서 백성들에게 그 확고한 위치성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누구든지 이 ‘하나님께 기름부음의 자리’를 훼손하는 자는 필히 저주받아도 마땅하다는 점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조치를 취합니다. ‘기름부음’을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살려주는 것은 다른 민족과는 달리 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존재 때문입니다.

이 자리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결코 ‘할례없는 민족’에게 패배당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도 패배하고 왕과 그 왕자가 전사한 것에 대해서 다윗은 대단히 비통해합니다. 그래서 이 사실이 ‘할례없는 민족’들에게 알려지기를 않기를 기도합니다. 사무엘하 1:20에 보면, “이 일을 가드에도 고하지 말며 아스글론 거리에도 전파하지 말지어다 블레셋 사람의 딸들이 즐거워할까, 할례받지 못한 자의 딸들이 개가를 부를까 염려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할례 받지 못한 자들에게 이스라엘이 패배당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이 연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하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셔야 합니다. 로마서 5:6-10에 보면,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경건치 않는자’, ‘죄인된 자’, ‘원수된 자’, 그리고 ‘진노하심’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찾아오게 되면, 자신이 이러한 용어에 해당되는 사람인 것을 알게 됩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멀찍이 바라보게 되면 졸지에 자신은 경건한 자가 되고 남보다 덜 죄인이 되는 자요, 원수가 아니라 존경받고 사랑받는 관계요, 진노하심에서는 해당이 안된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십자가의 피가 다가오면 올수록, 심지어 그 십자가가 우리 안에 깊이 박히면 박힐수록 우리 자신이 경건치 못하고 죄인되고 원수되고 그리고 진노하심을 받아 마땅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할례받지 못한 자’들과 우리의 본성상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신을 자생적으로 ‘죽은 자’로 여기지 아니하고 ‘산 자’로 여긴다는 겁니다. 살아있는 나를 더 산 자가 여기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에스겔 선지자가 받은 계시가 나옵니다. 그것은 바로 어느 골짜기에 해골이 가득 차 있는 계시입니다.

그 당시에 이스라엘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바벨론 나라에 포로잡혀 가 있는 처량한 신세입니다. 왜 자신들이 남의 땅에서 고생하는지 그 이유를 모릅니다. 에스겔은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너희들이 우상을 숭배한 죄를 지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해골 무더기로 데려간 것은 바로 그 해골 무더기가 곧 인간 무더기인 것입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볼 때는 마치 산 자로 여겨지겠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바짝 마른 해골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에게 묻습니다. “이 해골이 어떻게 살겠는가?” 즉 “이 해골은 지금 죽어있다”는 말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그들은 사람이 되어서 비로소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이스라엘의 참모습입니다. 이를 때 하나님의 ‘기름부음’의 가치가 빛이 나는 겁니다. 즉 자신을 죽은 자로 보는 자만이 하나님이 함께 있음을 증거하는,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사는 참 성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산 자로 보지 말고 죽은 자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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