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 10:11

전쟁의 장난 요소 (사무엘하 2장 14-17절)

전쟁의 장난 요소

2009년 11월 1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14-17


(삼하 2:14, 개역) 『아브넬이 요압에게 이르되 청컨대 소년들로 일어나서 우리 앞에서 장난하게 하자 요압이 가로되 일어나게 하자 하매』
(삼하 2:15, 개역) 『저희가 일어나 그 수효대로 나아가니 베냐민과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편에 열둘이요 다윗의 신복 중에 열둘이라』
(삼하 2:16, 개역) 『각기 적수의 머리를 잡고 칼로 적수의 옆구리를 찌르매 일제히 쓰러진지라 그러므로 그곳을 헬갓 핫수림이라 일컬었으며 기브온에 있더라』
(삼하 2:17, 개역) 『그 날에 싸움이 심히 맹렬하더니 아브넬과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의 신복들 앞에서 패하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희생에 의해서 만들어진 땅입니다. 사람들이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는 무엇이나 고마워하고 감격했습니다. 하지만 세월지나면서 감각이 무디지고 타성에 젖은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실은 이 땅에 무서운 땅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처음 다닐 때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듯이 살지만, 교회에 장기 근속하다보면, 교회 자체를 장난이나 치는 친목계 모임 정도로 알게 되면 하나님 임재에는 관심도 없어집니다. 뭐든지 시시하게 보게 됩니다. 이러한 경솔함은 어디서부터 도출되는 걸까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다윗은 하나님께 물어보고 행동에 나섭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적인 원수라고 해도 곧 하나님이 미워하는 원수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뿐만아니라 다윗이 약속의 땅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전쟁을 하기 위함이지 결코 자신의 전쟁을 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패의 대장들은 사태를 이렇게 진지하게 볼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위는 결국 이스라엘에 두고두고 ‘하나님의 전쟁’이 인간들의 ‘사적인 전쟁’과 맞물리면서 얽히고 설킨채 돌아가는 이유가 됩니다. 다윗패의 대장은 요압이요, 사울패의 대장은 아브넬 장군입니다.

이 두 장군이 서로 대진하고 있다고 심심하니까 여흥으로 철없는 아이들을 각자 12명을 차출시켜 장난삼아 전쟁놀이를 붙여보았습니다. 그러나 막상 아이들에게는 장난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은 전쟁을 벌리고 말았습니다. 일이 커지게 되었습니다. 수습하기가 곤란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인간들이 자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층을 가지고 세상을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위에 있는 층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게임의 층’입니다. 이 ‘게임의 층’은 자아에게 자극이 되는 일들을 그리워하는 층입니다. 즉 일단 사는데 여유가 있으면 그 다음에는 신나는 일을 찾게 됩니다.

도박과 게임에 빠지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사람은 세상을 게임하듯이 살아가므로서 자신이 이 사회에는 어느 정도로 대단하고 높은 위치에 있는지를 주위를 통해서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게임하듯이 상대를 하게 됩니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은 누구를 만나도 상대방의 신학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해서 자신이 그 사람을 승자로 인정할 것인지 아니면 자기 보다 못한 패배자로 취급할 것인지를 정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게임하는 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므로서 자신의 위상을 날로 증강시키고자 합니다. 높다 더 높은 위치에다 자신은 안착시키고 싶어합니다. 자신의 욕망이 만족할 때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정해진 자리는 본래의 자기 자리라고 우기고 싶어합니다. 어두운 영화관 실내에서 자기 자리 찾아가듯이 이리 부딪치고 저리부딪치면 결국 내 자리는 지정된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는 그 밑에 또다른 층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존의 자리요 생계의 자리입니다. 여유를 부릴 자리가 아닙니다. 사느냐 죽으냐가 결정짓는 다급한 자립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무슨 짓도 맞다하는 자리입니다. 취미나 오락이나 게임이나 하면서 세월 보낼 자리가 아닙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존심도 명예도 던져버릴 마음 준비가 된 자입니다.

바로 이 자리는 죽음과 삶을 결정짓는 자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면, 장난으로 시작된 윗층에서 시작된 전쟁이 결국 장군들의 죽음마저 위협받는 큰 전쟁을 낳게 되어서 사울패의 아브넬 장군과 다윗 패의 요압 장군은 서둘러 수습에 나서게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전체를 보는 눈이 없는 요압 장군의 동생 아사헬 장군은, 이번 기회에 형들의 원수가 되는 아브넬 장군을 자기 손에서 처리하여 자기 패에서 인정받고자 나섭니다.

꼭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애들이 끼어들다가 결국 애들이 앞뒤 사정도 모르고 과도한 행동으로 어른들은 난처하게 만드는 경우가 되는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아사헬의 경우가 그러합니다. 아브넬 장군은, 자기 패의 패배를 인정하면서 전장에서 물러가면서 사태는 진정국면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하는 아사헬은 형들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끝까지 적의 우두머리인 아브넬 장군을 치기위해 뒤쫓아갑니다. 아브넬 장군이 적의 수장답게 점잖게 나무랍니다. 그러나 아사헬 장군을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따라붙이면서 “나는 걸음이 빠르니 당신을 붙잡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아브넬 장군은 말하기를,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잡아라. 내가 너를 죽이게 되면 내가 너의 형 볼 면목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기 않자, 아브넬은 선수를 쳐서 긴 창으로 뒤따라오는 아사헬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장난으로 시작된 전쟁이 요압 가정에 큰 불행이 불러일으킨 것이 됩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전쟁을 빙자한 사적인 복수심과 얽힌 전쟁이 다음 기회를 노리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처럼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워 사적이 아님을 가장하지만 막상 일을 진행해보면 그동안 잠재된 사적인 감정이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의 전쟁이란 이런 사적인 복수심을 갖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원수로 들통나서 싸우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런 복수님 앞에서 하나님도, 사물도 제대로 관계맺지 못하고 오히려 노골적으로 자기 위주로 재편성해놓고 있다. 이것이 바로 자아가 받는 스트레스입니다. 사람들이 자아가 어디서 생기는지도 모르면서 자꾸만 두뇌만 몽롱하게 만듭니다. 실은 몽롱한 것이 아니라 멍청하게 합니다. 심하면 자살도 하게 됩니다. 즉 이들은 고통을 받는 자아만 제거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 보고 있습니다.

자아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라고 하나님이 신체성과 더불어서 만든 자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떡으로만 사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어있습니다. 불신자라고 할지라도 죽은 뒤 하나님께서 호출하면 그 호출에 응답하기 위해 저주받은 자아는 죽음 뒤에도 간직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의 부활을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꼭 살아있는 사람처럼 불러냅니다.

세상에 나가서 말씀으로 쓰임받는 자라면 다른 사람의 비복음적인 것을 발견하면서 믿음을 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사랑받고 사는 자’와 ‘미움받고 사는 자’를 구분지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자아로서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자아를 우리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않게 하옵소서. 말씀 전달을 위해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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