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25. 10:01

다윗의 전쟁 (사무엘하 2장 1- 3절)


다윗의 전쟁

2009년 10월 25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2:1-3

(삼하 2:1, 개정)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아뢰되 내가 유다 한 성읍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올라가라 다윗이 아뢰되 어디로 가리이까 이르시되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삼하 2:2, 개정)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과 갈멜 사람 나발의 아내였던 아비가일을 데리고 그리로 올라갈 때에』
(삼하 2:3, 개정) 『또 자기와 함께 한 추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을 다윗이 다 데리고 올라가서 헤브론 각 성읍에 살게 하니라』


참 이상한 일입니다. 왜 다윗은 문제가 일어나면 하나님께 여쭈어봅니까? 그것은 모든 일을 자기와 관련된 일로 보지 않고 하나님께 관련된 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다윗이나 우리는 조용하고 살고 싶습니다. 누구하고 원수처럼 지내면서 싸운다는 것은 우리 취향에 맞지 않습니다.

이 말은 곧 우리는 교양인이 되고 싶은 겁니다. 인격도야에 나서고 싶은 겁니다. 우리가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내부 인격됨이 훌륭해지고 거룩해지기를 원합니다. 예수를 믿는 만큼 사람 됨됨이가 향상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의도가 하나님에게 물어보지도 않으면서도 제대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안목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께 물어본다는 것은,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와 관련된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련된 사항이라는 점을 받아들이는데서 비롯됩니다. 하나님과 관련된 사항이라는 말은 곧 ‘나’라는 인간조차 내가 되고 싶은 내가 될 수 있었기에 여기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나무를 옮길 때, 소나무만 달랑 옮기지 않습니다. 소나무 주변을 동그랗게 파서, 나무 뿌리가 말라죽지 않기 위한 환경도 더불어 옮겨집니다. 주변 상황이 빠진 소나무는 소나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무 뿐만 아니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는 것은 자기 주변에서 자신의 역할과 상황을 물어보는 겁니다.

지금 다윗에게 전쟁이 기운이 돕니다. 만약에 다윗이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전쟁을 치르려고 한다면 자칫하면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적이란 자기에게 해꽂이한 세력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힘들게 하면 어떡하겠습니까? 아마 하나님마저 적으로 규정해서 원망하면서 달려들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상화을 일방적으로 자기 의를 드러내는 유리한 상황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도권을 하나님에게 맡기지 않고 여전히 자기 주도권을 자신이 쥐고 싶어하는 본성이 발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래 전쟁의 시작은 아담 때부터입니다. 아담의 범죄를 계기로 하여 하늘의 전쟁의 땅의 전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 12장이 이 사실을 말햅니다.

문제는 이 전쟁이 사적 전쟁이 아니라 영적 전쟁이라는 말입니다.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인간들은 영적으로도 죽은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다룰 때, 사적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 주변을 형성하고 있는 영적 존재와 그 전쟁에 시작하면서 다루고 계십니다.

악마가 인간을 시험한 이유는 신약 때와서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을 악마는 행함으로 접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식으로 천국을 이룰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바로 이 틀어짐이 영적 전쟁으로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32-33에 보면,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악마라는 영적 존재의 사주를 받는 자들의 특징은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행함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 즉 “오른 뺨을 때리거든 왼 뺨도 내어놓아라”(마 5:39)의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누가 자신의 오른뺨을 때리면 실제로 왼뺨을 내어놓든지 아니면, 이것을 소위 ‘십자가 정신’에서 도출된 포괄적 양보의 미덕과 ‘자기 비움’의 정신을 기초로 해서 적극적 의미로 전환시켜 타인을 용서하는 것으로 이 본문을 달성했다고 여기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정신이 악마의 정신이요 십자가로 달려들다가 깨어질 수 밖에 없는 더러운 악마의 근성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자기 내부에서 영적 전쟁을 해소시켜 소멸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는, 자신이 지금 하나님과 전쟁을 벌린 당사자인 것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영적 관계를 삭제시키고 인간들이 행할 수 있는 그 끝을 거룩의 영역에다 접속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본의 아니게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라는 영적 전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기에 그 ‘하나님의 형상’이 발휘해야만 하는 전쟁 구조에서 면제될 수 없습니다.

이제 인간은 좋든 싫든 하나님의 전쟁의 와중에 놓이게 됩니다. 그 전쟁의 구체적 속성은 창세기 4장에서부터 나옵니다. 거기에 가인이 하나님께 제사드렸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가인은 화를 냅니다. 왜 화를 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를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다른에는 더욱 더 바른 예물로 제사드리면 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왜 가인이 화를 내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동생 아벨의 제사를 받았다는데 있습니다. 즉 가인에게 나타난 악마의 본성이란 자신의 행함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무시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신 제사와 비교가 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가인은 동생을 죽이게 되는 이 살인이 곧 예수님을 사람들이 죽인 원천 동기로 작용합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본인의 결정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 가에서 일어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38년된 병자는 말하기를, 아무도 나를 먼저 번쩍 들어서 호수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기에 여태 병이 못낫고 있다고 말합니다. 즉 그 38된 병자는 평소에 자신이 세운 원칙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단지 그 끝 자락에 신의 긍휼과 자비를 요청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 메시아의 일이란 이미 자신이 설치해놓은 ‘은혜 받을 구조’를 부정하지 않고 마저 채우는 식의 메시아여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 방식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냥 그 사람의 병을 고쳐주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믿음의 의미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38년된 병자가 자신이 예수님 덕분에 구원받은 것을 자랑한다면 그도 마찬가지로 십자가 앞에서 와장창 깨어질 자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담요를 들고 ‘안식일법’으로 가득채워진 그 사회법 속을 관통케 합니다. 이것은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사적 구원만으로 즐거워하고 건지면 다 건진 것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짜 자기 성도를 세상의 단단히 구조로 보냅니다.

38년 된 병자의 평소 관심사는 결코 사회나 정치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계산해놓은 사태를 유발하는 동기에 쓰여져야 합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베드로가, 자신은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노라가 장담하는데 이것 역시 행함에 속하는 발언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 주변에 있는 대립되는 영적 대치기류를 읽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악마가 너를 지옥으로 데려가기 위해 청구했지만 내가 기각했다. 나 예수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지 아니하면 너도 구원될 수 없던 자이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물어봅시다. 또 무슨 사태가 기다리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 사태 속에서 날마다 깨어지면서 그저 주신 십자가의 공로로 인한 영생에 감사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성질을 죽인다고 주의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를 위해 쓰임받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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