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 4. 00:51

징벌하는 성전 (사무엘하 7장 11-16절)

징벌하는 성전

2010년 1월 3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7:11-16

(삼하 7:11, 개정) 『전에 내가 사사에게 명령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아니하게 하고 너를 모든 원수에게서 벗어나 편히 쉬게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
(삼하 7:12, 개정)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 7:13, 개정)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삼하 7:14, 개정)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삼하 7:15, 개정)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삼하 7:16, 개정)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다윗은 하나님을 모실 집에 신경 쓰는 반면에, 하나님은 인간에 신경 쓰십니다. 즉 ‘왜 그런 쓸데없는 발상을 하느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인간으로서는 성전을 지을 수 없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계신 성전 짓기는 인간이 짓는 것이 아니라 따로 계시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분이 짓습니다.

여기서 ‘인간들의 성전 짓기’과 ‘하나님의 아들에 의한 성전 짓기’가 차이가 나버립니다. 인간들의 성전 짓기란, 그 성전 안에서 자신의 희생과 공로를 근거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을 달라고 요청할 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서 성전이 짓게 되는 그 성전 안에서 인간에 대한 변화가 발생하게 됩니다.

즉 “왜 우리는 우리 손으로 성전 지을 자격자도 못되는지”를 보여주는 성전이 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은 성전을 ‘기도하는 집’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지은 성전 안에서는 인간이 요구하는 바를 하나님께서 허용해줄 것이라는 긍정적 생각이 팽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전 짓기를 허락하셨다면 그 성전을 짓는 인간들의 취지까지 용납하겠다는 의사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입니다.

성전 짓는다고 인간들이 많이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인간적으로 자기 희생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보상은 기대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전적으로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하면 기도하는 집에 들어서서 기도한다면, 그 성전 안에서 인간들이 생각은 그 성전을 지으신 ‘하나님의 아들’의 생각과 일치되기를 요구받게 됩니다.

이것은 곧 ‘수정’입니다. 생각이나 발상 자체의 수정이 가해집니다. 이와같이 되면 그 어떤 인간도 지금의 자기 생각을 바꿀 의향이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아들’ 이지은 성전론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기 마련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2:19-20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사도들조차 이 말씀이 의미를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했습니다. 즉 단순히 ‘사람이 지은 방식을 예수님도 인정하고 고수하시되 단지 사람들이 46년을 지어도 완성 못한 성전을 예수님은 빠른 손놀림과 천사의 도움으로 3일 만에 후딱 지어낸다’는 식으로 이해했습니다.

여전히 ‘왜 인간들은 성전을 지을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행할 수 있음’의 정신을 포기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이 다시 부활하셨을 때에 비로소, ‘왜 인간들은 성전을 지을 수 없느냐’를 알게 됩니다. 즉 인간은 성전을 지어드릴 수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저주 받아 마땅하다는 존재라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3일 전에 십자가 죽으심으로 인해 모든 인간들은 이미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오로지 산 자만이 지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을 죽은 자들이 짓겠다고 나섰으니 그렇게 지어진 성전에는 저주만 충만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성전은 어떠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유비쿼터스처럼 언제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는 겁니다. 어디서나 등장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람들의 예상에 따라 미리 포착되거나 차후에 장악당하지 않게 소멸됩니다. 이러한 유비커터스의 경우가 마태복음 17장에 나오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구름 위에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 17:5) 예수님의 제자들은 돌변해버린 환경에 황홀해하면서 자신의 본심들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즉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는 인간은 자기 생각이 바뀌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말을 듣다’는 듣고 순종하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손수 지어나가시는 그 성전의 절차를 주시하고 주목해봐야 합니다. 보통 아내의 바른 말이라도 남편에게는 잔소리로 들리는 법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내가 다 죽어가는 소리로 잔소리를 해댑니다. 6개월만 지나면 자신이 죽는다고 단서를 붙여놓고서는 다음과 같이 남편에서 잔소리를 합니다. “내가 죽거들랑, 욕실내에 수도꼭지를 꼭 잠그고, 현관에 있는 신발장에 꼭 신발을 넣어라”고 말입니다. 이 순간 남편은 평소의 잔소리와 같은 내용이라고 할지라도 찌릿함을 느끼게 됩니다.

바로 예수님은 지금 변화산 이후에 죽음의 길로 가십니다. 정작 죄를 물어 죽어야 될 자들에게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자신의 아드님에게 그 많은 죄를 다 뒤집어 씌어서 처형하실 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 2장에서 말씀하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시는 성전이란, 기도하는 집으로서 예수님의 기도로 육적인 우리를 영적 인간으로 변화시켜내는 그 현장이 됩니다. 예를 들면, 여자분들이 아침에 얼굴에 분 바를 때, 어느 여자 할 것이 없이 자기 피부에 분바른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실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몸에 분바르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께서 손을 조종해서 그 여자의 얼굴에 분이 발라지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곧 이미 그 여자의 모든 것은 그 여자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변화가 곧 영적 변화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주는 것이 성전이 아니라 아예 성도 자체가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변하시키심을 증명한 증인으로서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몸을 자기 몸이라고 여기서 함부로 굴리면 안됩니다. 자살을 시도한다든지 혹은 자기 몸을 과도하게 학대하는 것도 해서는 아니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몸의 주인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전에 해당되는 성도의 몸은 하나님께서 다루어주시는 레바같은 겁니다. 혹은 손잡이 달린 자동차 기아변속기 같은 것입니다.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사람이 곧 하나님께서 친히 지으신 성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대로 우리 몸을 우리 것이라고 우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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