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0. 18. 10:20

부활의 목격자 (마가복음 16장 1- 7절)

부활의 목격자

2009년 10월 18일                        본문 말씀: 마가복음 1:1-7

(막 16:1, 개역) 『안식일이 지나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가서 예수께 바르기 위하여 향품을 사다 두었다가』
(막 16:2, 개역)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은 때에 그 무덤으로 가며』
(막 16:3, 개역)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막 16:4, 개역) 『눈을 들어 본즉 돌이 벌써 굴려졌으니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막 16:5, 개역) 『무덤에 들어가서 흰 옷을 입은 한 청년이 우편에 앉은 것을 보고 놀라매』
(막 16:6, 개역)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막 16:7, 개역)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키므로 말미암아 인간들 앞에 내세우십니다. 그렇게 되면 '죽었다가 사셨던‘ 예수님 말고는 달리 인간이라고 할 만한 인간은 없습니다. 기존에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이 스스로 구원받기 위해 애쓰면 쓸수록 그들은 예수님을 더욱더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만 더할 뿐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입니다. 평생을 오로지 하나님 섬기는데만 매진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손에 의해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은, 곧 인간의 구원의지에 처음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고리도후서 11장에 보면,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고린도교회에는 전파되고 있다고 사도바울이 경고하고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와 복음을 말하고 성령을 말하지만 실은 양의 탈을 쓴 악마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무엇이 참된 복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두 가지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으로 이해하는 십자가와 ‘영’으로 이해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육’으로 이해하는 십자가는 곧 자신은 그대로 있고, 단지 십자가 사건을 자신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서 믿어주므로서 구원되어 천국간다고 여기는 것이 육으로 믿는 십자가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영’으로 믿는 십자가는, 그 십자가는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덮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인간은 십자가 사건을 만들어지는데 있어 죄인으로서 가담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질 때는, 사람이 골라 잡을 수 있는 항목이나 내용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 백성을 죄인의 이름으로 잡아다가 흠없는 어린양 되시는 예수님과 함께 죽게 하시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그 십자가 사건 안에서 비로소 “나는 산 자가 아니라 살아도 죽은 자로서 사는 거구나”를 알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2:20의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대하는 하나님의 일, 즉 기적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는 일체 손 대지 말고 그냥 있는 데다 다 더 크게 추가해서 채워주는 것을 기적으로 여깁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구원방식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표적’을 기대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기적뿐이다‘고 말입니다.

요나의 기적이란 곧 메시아가 사람들 손에 맞아 죽는 일입니다. 이 일로 인하여 인간 세계란 결코 살만한 세계가 아니라 원래부터 죽어있는 세계라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인류의 온 사람들 맞은 편에 예수님을 세워두시되 십자가 죽으심으로 세워두시는 이유는 이 세상이 이미 죽어버린 세계임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 구원되고자 하는 그 자체가 그럴 자격이 아예 인간에게 없음을 십자가를 통해서 통보해주시는 겁니다. 왜 인간은 이처럼 태어나면서부터 죽어버린 존재입니까? 그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사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악과는 의외로 너무 쉽게 허물어집니다. 사람들 생각같으면, 이 위험한 과실 근처도 못가도록 조치할 것임에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냥 방치해주신 것 같고 게다가 먹음직도 하고 탐스럽기만 합니다. 사람이 이 과실을 따먹는 순간 비로소 인간은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금지를 어길 때만 비로소 자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란 곧 ‘언젠가를 하나님의 법을 보란 듯이 어길 수 있는’ 자유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즉 인간에게 자유를 사용할 권한이 있다는 것으로 인하여 이제부터 무엇을 하든지 간에 그 모든 영광과 자랑거리는 다 자신에게로 쏠리게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은혜로’라든지 ‘성령의 능력’이라는 것으로 포장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지킬 때도 내 자유이지만 안 지키는 것도 내 자유라는 겁니다.

자유는 자유대로 챙기고 의는 의대로 챙길려고 합니다. 반성하는 것고 회개하는 것도 모두 자기의가 되고 맙니다. 이로서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 과실과 무관한 신을 따로 생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자유를 시험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주니 이번에는 예수님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즉 “우리가 당신이 죽음 속으로 떠밀어 넣을테니 당신이 진짜 하나님이라면 우리를 무안하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보란 듯이 살아 돌아오너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몰래 부활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손에 잡히지 않는 방식으로 그들을 만나십니다. 이것은 천국이나 구원이라는 것이 결코 인간의 손이나 자유의사는 결정권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죄로 인하여 죽으신 그 예수님의 자의에 의해서만 이루어짐을 나타내보이기 위함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손수 잡아서 제물로 바쳐라‘고  하셨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그저 교회 출석해서 예배라는 쇼를 관람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진짜 신앙생활은 그것이 아니라 십자가 달리신 그 예수님깨서 부활의 힘으로 우리 안에 쳐들어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바치라고 하신 것은, 아직도 너의 것을 가질 수 있을 정도로 너를 의인으로 보고 있느냐를 물으시는 겁니다. 즉 십자가의 피 앞에서 인간이 과연 자신이 더 이상 세상을 살 가치가 있을 수 있다고 여기느냐를 다구쳐 물어시는 겁니다. 이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믿으려면 이렇게 믿어야 옳은 믿음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 뒤에 예수님을 부활시키시므로서 그 어떤 인간도 죄인이 아닌 자가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따라서 이는 구원될 자격자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그 어느 누구도 천국갈 가치가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부활을 목격한다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부활 속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천사가 이런 말을 합니다. “놀라지 말라”고 말입니다. 즉 도무지 인간에게는 놀랄 일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차질없이 진행되는데 뭐가 우리 입장에서 놀라느냐는 겁니다.

우리가 뭔가 새삼 놀란다는 것이 수상합니다. 그만큼 우리들이 평소에 신앙생활이랍시고 하는 것이 “하나님, 저를 당황하게 만드는 나쁜 일이 생기기 말아주세요. 이렇게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잖아요”라는 흥정심리가 깔려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이미 죽어버린 자에게 있어 남아 있는 것은 부활의 주님이 찾아와서 우리를 납치하는입니다.

이렇게 되면 납치범이신 예수님과 인질은 영원히 함께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십자가라는 쟁기를 가지고 인간들의 내부를 해부해서 홈이 생기도록 파버립니다. 그렇다면 그 홈따라 예수님의 피가 흘러갑니다. 그 피가 흐르는 경로가 우리가 앞으로 푹 잠수해서 통과해야 될 유일한 구원의 길입니다. 온통 피로 둘러싸인 환경에서 우리 성도 할 것은 피의 능력에 감사하는 일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믿음 생활이 장난이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임을 알게 하옵소서. 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빼앗겨도 당연함 처지에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84강-막16장1-7(부활의목격자)-mar091018.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84강-막16장1-7(부활의목격자)-mar091018.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마가복음-2008/84강-막16장1-7(부활의목격자)-mar091018.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