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12. 21:44

더 나은 의 (마태복음 5장 17-20절)

본문 : 마태복음 5장 17-20절
제목 : 더 나은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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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5장17-20더나은의100912

마5장17-20-(더 나은 의)-100912-우리교회(한윤범 목사)

마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노하지 말라


제가 오늘 아침에 서울서 여기 대구까지 왔습니다. 원래 제 자리는 여러분이 앉아 계신 그 자리에요. 저는 이 자리가 훨씬 더 편합니다. 여러분이 앉아 계신 자리가 편합니다. 이 앞에서 여기까지 몇 걸음 되지 않습니다. 제 느낌은 아침에 서울서 대구까지 오는 거리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지고 가슴에 담고 있는 제 말씀이 어떻게 전해질지 예측이 안 됩니다. 어쨌든 오늘 본문 말씀 가지고 ‘더 나은 의’란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증거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또 자주 접해야 합니다. 시편에 많은 시들, 시인들이 글을 써놨지만 주야로 묵상하라는 식의 내용들로 가득 채워져 있죠. 시편 119편 같은 말씀 속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이 어떠한지 정말로 생생하게 기록이 되어 있고 그 시편 시인들의 감동, 감격한 다 모습들이 거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들을 어떻게 읽어야 되느냐 하는 문제에 늘 고민에 빠지죠. 얼마나 몇 장이나 얼마나 많이 읽을까 이것도 물론 고민이 되겠지만 어제는 읽었는데 오늘은 못 읽었다는 이것도 걱정이 되지만 어떻게 읽느냐 라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죠. 그리고 왜 읽느냐라는 그 이유도 중요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에게 양식이잖아요. 밥이잖아요. 그럼 어떤 식으로 읽을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마가복음이 있죠. 성령께서 마가에게 마가복음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이미 기록된 성경으로 우리 한글로 쓰인 마가복음을 쭉 읽어보면 1장 1절부터 끝장까지 내용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아먹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1장 1절이 시작이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1장 1절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했으니까 ‘아 이 말씀, 마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네.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되었다는 거네. 그럼 끝은?’ 또 궁금해서 읽어보면 ‘아, 끝은 또 예수그리스도로 끝나는 거네. 다시 오신다고 하셨네.’ 이렇게 쓰인 대로, 기록된 대로 성령께서 주신 은혜대로 읽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뭐냐 하면 우리는 살아 있다는 거예요. 살아 있다는 내 육신, 내 몸을 가지고 내 육신의 눈을 가지고 읽고 성경을 해석하고자 하니까 이 쓰인 성령에 의해서 기록된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믿어지지가 않아요. 우리 생각대로 우리 육신대로 끌고 가서 성경을 읽게 되면 어떤 결과가 나오겠습니까? 그러면 내 육신의 맞는 것으로 성경이 해석되고 설명이 될 수밖에 없어요.

마가복음 중간, 8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전도를 하러 다니십니다. 거기서 제자들에게 ‘얘들아 사람들이 나보고 뭐라 하느냐?’하고 물어요. 제자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 합니다. 세례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에 한사람입니다. 여러 가지 들었던 이야기들이 전해지죠.

예수님께서 정작 궁금한 것은 뭔가 하면 자신을 따라 다니는 제자들의 뜻, 생각이 궁금한 거예요. 그 육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늘로서 오신 그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는 육신의 모습을 가진 제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게 궁금한 거예요. “그럼 너희들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나에 대한 너희들의 생각이 뭐냐?” 베드로가 나서죠. “아, 주님은 그리스도입니다.” 아주 정확한 답변을 했습니다. “정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답을 이야기한 베드로 그리고 그와 함께한 제자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예수님을 쫓아가는 많은 무리들이 마가복음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훑어 읽어가다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알아본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장 1절이 뭐라고 기록되었다고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다. 모든 것이 예수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1장 1절에 표지처럼 달고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렇게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거예요. 모른다는 거예요. 예수가 누군지 모르는 거예요. 마가복음 15장 39절에 가면 이런 고백이 나오죠. 이방인 백부장의 고백이 나옵니다. ‘아, 저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막 15: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운명하심을 보고 가로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누구만 알아본 거예요? 하나님을 잘 믿고 계명을 잘 지킨다는 유대인들은 물론이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제자들조차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이방인인 백부장 한사람이 그런 고백을 해 버린 겁니다. 성경을 위한 책입니까? 아무리 읽어도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이 계시가 끝나고 완성된 채로 우리 앞에 주어져 있지만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우리가 성도라면, 우리가 예수를 믿는 자라면 이 말씀을 읽고 환한 빛 가운데 이 말씀이 다 떠오르고, 다 내게 적용이 되고 말씀을 좇아 살아가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어두운 구석에 그냥 쳐 박혀 있어요. 제가 꼭 그런 모습이었거든요. 예전에……. 뭐 그렇게 오래 되지도 않았습니다. 10 수년전 이야기 제가 그랬어요. 성경을 읽으면 다 알아먹는 것 같아요. 뭐 신학을 하고 있었으니까 다 알아먹고, 해석책, 주석책을 보면 “어 이런 뜻이네.” 잘 모르는 구절이 나오면 이미 선배들이 해 놓은 것 있으니까 뒤져보고 자료 찾아보면 “아 이게 이 말씀이구나, 이 뜻이구나! 아 그러면 어떻게 해야지, 이 말씀을 내가 지켜야지” 제가 살아 있거든요. 제가 살아 있는 몸으로 말씀을 보고 해석이 되니까 내가 지켜야겠다고 나선 거예요. 제가 잘나서 지켜야겠다고 나선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것은 우리의 그냥 본능적으로 반응해요. 그냥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오늘도 하라는 말씀이네. 하지 말라는 거네. 그럼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라는 식으로 나오게 되어 있는 거예요. 제 모습이 꼭 그랬습니다.  더군다나 거기다 플러스 신학까지 하고 장차 목사가 돼서 이 복음을 전하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그 열심 속에는 오죽했겠습니까?

제 딸의 이름이 하영이에요. 지금 이 방송을 보고 있을 건데, 첫 번째로 공개하는 비밀입니다. 제가 어둠에 있었을 때에 죄 아래에 있었을 때, 그 때 그 증거가 딸의 이름 속에 담겨져 있어요. 제가 말씀을 보고 ‘이것을 지켜야겠다.’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지 좀 더 어제보다 나은 나,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야지 하는 그 표가 그 이름 속에 담겨져 있다니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결혼을 하고 처음 낳은 아이가 딸이었어요. 어느 날 제 딸아이가 저에게 묻는 거예요. 제가 한씨인데 “왜, 아빠는 하영이라고 안 부르고 한하영이라고 불러?”라고 하는 거예요. 자기 딴에는 성까지 붙여서 한하영이라고 부르니까 거리감이 느껴졌나 봐요. 보통은 ‘하영아’ 이런 식으로 이름만 부르는데 그렇게 물어요. 그때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한 가지 기억나는 것은 제가 속으로 뜨끔했다는 거, “야, 네 이름에 내 아픔이 담겨져 있다. 내 죄가 그 이름에 새겨져 있다.” 하영이라는 이름의 뜻이 뭘까요?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는 뜻인데, 제가 그 당시에 “영”자에 필이 꽂혔어요. 제게 이름을 지어달라는 사람마다 다 “영”자를 붙여줬어요. 그 밑에 남동생 둘이 있는데 다 “영”자입니다. 제 사촌 가운데 이름이 “용”자 “칠”자 쓰는 사촌형이 있어요. 이름이 학생 때 사람의 놀림감이었어요. 커서도 이름이 콤플렉스가 돼서 개명을 신청해서 판결 받아 개명을 했어요. 아주 부르기 좋은 이름으로 바꿨습니다. 돈 몇 십만 원을 주고 작명소에서 했다는 그런 이야기 있었는데 어쨌든 그랬습니다.

그러면 제가 옛날 어두움에 있을 때에 그 이름, 멋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라.’ 아이에게 부담을 팍팍 주는, 지은 이름이 이제 빛으로 넘어왔습니다. 이제는 조금은 복음이 뭔지 알고 가르쳐 주셨으니까 이제 말씀은 내가 지키는 게 아니야 다 이루신 분이 있어 이러한 복음 안에서 그 이름을 바꿔야 될까요? 제 사촌 형처럼 개명 신고를 해야 할까요? 신고하러 갑니다. 신고서 작성해서 직원에게 서류를 제출합니다. “이거 이름 바꿔 주세요.” “아, ‘한하영’ 이름 괜찮은데” 하영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다 예뻐합니다.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어, 이름이 예쁜데 왜 바꾸려 합니까?” 그럼 제가 이렇게 대답을 해야겠죠. “예전에 제가 어둠에 있을 때, 개혁주의 아래 있을 때 지은 이름입니다. 그게 마음에 안 들고 자꾸 제 죄가 생각나서 이 빛 가운데 옮긴 자로서 바꿔야겠습니다. 뭐로 바꿀까요?” 그렇게 하면 그 직원이 알아먹을 까요? 제가 뒤에 뉘우쳐 떠오른 생각이지만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계속 “한하영”, “하영”이라는 이름을 부르면서 저는 계속 그냥 그 이름이 새겨진 나의 죄를 생각나게 하는 그것으로 그냥 그 이름은 남아 있어야 돼요. 그런데 요즘에는 감각이 무뎌져서 그런지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못합니다. 끝날 까지, 제가 이 세상 떠날 때까지 하영이라는 이름을 보면서 딸이 저와 함께 사니까 1년 365일 같이 먹고 같은 공간에서 볼 때마다 ‘내 죄, 내 죄’ 그러한 흔적을 가지고 이 말씀을 드려다 보면 죄다 이 말씀은 내게 “이것은 하라. 이것은 하지마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무엇인가 요구를 하는 거예요. 저는 그 요구를 응답을 하려고 반응을 하려고 애를 쓰면서 다니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이 뭡니까?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거잖아요. 이 성경이, 이 기록된 계시의 말씀이 그래서 계시잖아요. 감춰진 것을 드러내 준다, 보여준다는 의미로서 하나님께서 감춰진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때에 이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계시다. 이것이 첫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냥 내 육신을 가지고 들어가서 읽고 해석하고 적용하고자 하는 그런 자세가 아니고 이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이라는 그런 태도를 가지고 성경을 읽어야 된다는 것이죠.

평일에는 세장 읽고 주일에는 넉 장 읽으면 1년이면 일독한다 하는 그런 양의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지를 기록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 이 말씀을 통해서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그 아들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고 그 시작이 어떻게 되었고 그 경과가 어떻게 되며 어떻게 완성시키는지 우리는 그 입장에서 봐야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잘못하면 성경책이 어떤 책이 되어버려요? 예전에 제가 했던 식으로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말라는 식으로 윤리 책이 되고 도덕책이 되어 버리잖아요.

그런 식으로 성경을 대하면 꼭 조직폭력배들의 조직 강령하고 다를 게 없어요. 우리조직의 위계질서를 헤치면 야구방망이로 50대 맞는다. 우리 조직을 탈퇴할 때는 새끼손가락을 잘라서 받쳐야 된다. 이런 것을 지키는 것과 이 말씀을 내가 지키겠다고 들어가는 것과는 별반 차이가 없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 교인이 되었으면 십일조 해야 되고 1년 52주를 꼬박 지켜야 되고 서리집사 이상 되면 수요예배는 물론이고 금요예배 참석하고 가능하면 새벽기도회에도 참석하십시오. 이런 식으로 규약을 정해놓고 이런 조직의 규약을 지켜 나가는 것과 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라는 건 하고, 하지 말라는 건 하지 말라는 식으로 지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냐는 것이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 좀 더 고상합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이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이것은 고상한 거다. 조직폭력배의 강령 지키는 것과 비교하지 마라, 감히 어디다 같다 비교 하냐!”는 얘기죠. 성과 속이 구별되어 있다는 식으로 표현하잖아요. 이 본문의 말씀, 특히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 이어지는 산상 전체의 말씀을 가지고 해석하는 결론을 가지고 우리에게 적용하십시오. 하고 제시하는 내용은 이것은 지구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구가 뭡니까? 최고의 삶, 산상수훈은 최고의 선을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최소한 성도라면 이것을 목표를 두고 다 이루지는 못할지언정 그것을 목표를 향해서 달려가기는 해야 됩니다. 라고 해석해서 우리에게 던져 주는 거예요. 뭐 어쩌라는 거예요? 지키라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요. 그 정도로 우리는 거룩하고 아주 고상한 말씀을 그 정도는 대접을 해 줘야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그게 되십니까?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스스로 우리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가 살아 있음을 스스로 알아버립니다. 제가 요즘 한 달 어간에 병원에 자주 갈 일이 있었는데 신생아실에 가면 간난 아기가 있잖아요. 울고불고 난리치잖아요. 왜 웁니까? 물론 아파서도 울지만 보통 건강한 아이라면 배가 고프면 울잖아요. 본능적으로 웁니다. 그런데 그 본능적으로 우는 것이 나는 살아 있다는 표시잖아요. 내가 배고프니까, 배가 홀쭉하니까 모유를 주시던가! 그게 아니면 분유라도 사서 내 홀쭉한 배를 채워주십시오. 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냥 나는 살아 있는 거예요. 살아있다는 것을 앙앙 거리면서 누구에게 떠버리며 다닙니다. 이러한 모습으로 성경말씀이 다가 올 때에 그냥 내가 지키는 식으로 “아, 본문 말씀이 어렵네. 해석을 찾아보니까 이 말씀은 조금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 성도가 가야될 방향, 최고의 목표치입니다. 여러분 최고의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도록 열심을 내십시오.” 

우리 설교도 이렇게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만약에 설교를 이렇게 하는 식으로 하면 아, 이렇게 떨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방향을 제시하고 그저 신학을 10년 공부하고 10년 목회 경력이 되면 이제는 노하우가 잔뜩 쌓여가지고 뭘 제시하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것이 잔뜩 쌓입니다. 노회에 가면 그러한 정보를 서로 교환을 하면서 ‘아, 이렇게 했더니 교인들이 말 잘 듣던데’ ‘교인들 말 잘 안 들어? 그럼 조금만 더 밀어봐 조금만 더 푸쉬해 봐’ 뭐 이런 식의 방법론들 제시하기가 훨씬 쉽거든요. 그리고 듣는 여러분들도 편하지 않습니까? 주일날 예배 참석해서 오늘 1,2,3 이번 주에는 이 세 가지만 지키면 되는구나! 과외 부록으로 하나는 안 지키면 되겠구나! 얼마나 편해요. 그러면 예배 참석한 보람도 있잖아요. 이미 결과물을 가지고 챙겨 가면…….

만날 이 십자가 마을 설교하는 거 보면은 여러분 결론이 뭔지 다 아시죠? ‘예수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지?’ 라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설교한 목사는 목사대로 따로 놀고 들은 교인들은 교인대로 따로 노는 거잖아요.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 그만큼 성경을 대하는, 주를 믿는 것에 결정적으로 방해를 해 버려요. 그래서 이 땅에서 내 육신을 가지고 온전히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내게 전달되어 온다는 것, 그 자체가 기적입니다. 이미 기적을 사랑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떤 삶의 구렁텅이에 어두운 가운데 빠져 있더라도 그것이 접수가 되면 하나님의 세계와 이 세상의 세계가 따로 분리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것이 두 번째 말씀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에요.

이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세계와 그리고 이 말씀을 잘 지킨다고 하는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나오는데 말씀을 잘 지킨다고 하는 그들의 세계가 엄연히 분리되어 있고 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이게 뭐 아무에게나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은 드러나요. 이게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관점이에요. 율법의 세계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가 따로 있구나! 여러분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내 모자라는 것, 부족한 것을 채우는 식이라면 그거 열심히 해서 채우면 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런데 사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주께서 우리에게 제시하는 방향이라는 것은 그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그렇게 채우는 식이 아니고 이미 너는 다른 세계로 옮겨졌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정말로 열심인 사람은 어떤 의문을 가지냐 하면 ‘옮겨졌으면 옮겨진 거기서는 뭘 할까요?’ 라고 나와요. 그것은 옮겨졌다기보다도 자기만 옮겨진 거예요. 자기만 옮겨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뭐를 지키겠다고 나가는 거예요. 말은 예수를 믿는데, 말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인정은 하는데 자기 몸과 자기 생각은 이미 다른 쪽에 있는 것이죠.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죠. 그들이 천국가고 지옥 간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다르다는 거잖아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것은 다르다는 거죠. 부자가 건너편을 보니까 아브라함이 보였던 거예요. 부자는 타는 목마름을 아브라함에게 부탁을 하죠. 나사로에게 손가락에 물 한 방울을 찍어서 나에게 달라고 하죠. 아브라함이 한 이야기가 너와 나 사이에 뭐가 있다고 합니까? 커다란 구렁이 있어서 커다란 해자, 웅덩이가 있어서 내가 너한테 갈 수도 없고 네가 나한테 올수도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다른 세계입니다. 천국과 지옥만 다른 세계가 아니고 말씀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하나님의 세계에도 여전히 천국과 지옥처럼 또 다른 세계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율법을 이야기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라고 하면서 율법을 끄집어내요. 예수님께서 율법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을 대할 때에 사람들이 ‘내가 이것을 지킬 수 있어.’ 라고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접하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끄집어 낸 겁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율법을 우리에게 주실 때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고 율법 자체에도 아무런 하자가 없는 복음임에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노림수를 살펴보지 못하고 그냥 덥석 물어 버린 거예요. 뒤에 할 얘기인데 자꾸 앞에서 생각이 나고 있습니다.

율법을 대할 때에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쉽게 이야기 하면 하나님 말씀, 하나님 말씀도 전체적으로 보면 법이잖아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대책이 없다? 법을 지키는 쪽으로 나가 버리면 말씀 전체는 그냥 내가 그대로 다 지키는 것들만 남아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으니까 이제는 거룩한 말씀을 지켜야지.’ 그런 식으로 계속 나가 버리는 거예요. 그런데 이 말씀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노림수는 뭐냐 하면 내가 너희에게 지키라고 준 법이 아니고 너희가 말씀을 보고 법을 봐도 너희는 지키지 못할 거야라는 것이 그 속에 담겨져 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덥석 물어버린다는 것이죠.

성도는 이 법을 보고 말씀을 보고 절대 지킨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왜, 법을 보니까 어떤 것은 지킬만한 것이지만 어떤 것은 못 지키는 것으로 나타난단 말이에요. 그러면 ‘아, 이걸 못 지키는 거구나! 한 두 개가 아니네. 하나님 나 이거 못 지키겠습니다. 도저히 안 됩니다. 아무런 방법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라고 항복을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노림수는 뭐냐 하면 이 법을 던져놓고 네가 항복을 하느냐, 네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느냐, 아니면 지키겠다! 달려드느냐 이 두 가지입니다. 이 두 가지의 어떤 것에 속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는 천국이요, 하나는 지옥이에요. 물론 그렇게 선택하는 것이 내게 있는 것은 절대 아니죠.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어느 한 쪽에 속해 있는 거예요.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어떤 모자란 것, 부족한 것을 채우는 식으로 한다면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 거예요. 쉽게 이야기해서 마귀의 세계, 마귀가 지배하는 세계에 속해 있던지 주께서 지배하는 세계에 속해 있던지 소속의 문제라는 거예요.

내가 주님께, 예수그리스도 안에 속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말씀을 지키는 식으로 나오지는 않는다는 거예요. 물론 처음에 지키는 식으로 접근했다 할지라도 ‘나 도저히 못 지키겠어요. 하나님, 못 지겠습니다. 항복입니다.’ 라고 선언을 해 버린다는 거죠. 그게 회개이고 고백이지 않습니까? 여기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어떤 식으로 나와요? 열심히 지키는 식으로 나오죠. 마태복음 3장 15절 이후에 보면 장로들의 유전, 전통해가면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자기들 끼리 법체계를 세워서 또 거기에 조항들을 만들어서  확대 재생산을 해 버려서 자기 공동체에게 지키도록 배포를 하고…….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죠. 철저하게 대조하는 모습이 나오죠. 두 세계에 있는 사람이 대표적으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말씀을 지켰다는 쪽으로 나오고 한 사람은 못 지켰다는 식으로 나오죠. 바리새인들이 기도할 때 하는 얘기가 뭡니까?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저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성경 말씀에 없는 거예요. 그렇죠?  그렇게 하면 더 거룩한 채로 보일까봐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저기서 기도하는 세리와 같지 않습니다. 저 세리와 같이 남의 것을 뺏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괜찮은 놈이라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세리는 어떻게 기도합니까? 말씀을 쭉 보고 법을 보니까 지킨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세리자체가 말씀을 못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삶입니다. 창기도 마찬가지지입니다. 말씀 못 지키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할 수 있는 말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 하나도 못 지켰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것 밖에 없는 거예요. 복음은 너무나 원리가 간단하지 않습니까? ‘내가 아무리 드려다 봐도 도저히 못 지키는 거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세계야 예수님께서 다 지키시고 시작하시고 이루시고 완성해 버리신 거야 나는 거기에 끼어들 틈이 없다!’라는 것을 알아버리면 ‘그럼 난 죄인 맞네!’ 라고 해버리면 끝나버리는데 그게 안 되면 이 세상에 사는 마귀에게 눌려 예전의 저와 같이 어두움에 눌려 살면 그 고백이 안 되는 겁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완성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완전케 완성,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등장하셨다는 것은 바로 그 율법을 다 완성, 완전하게 하셨다는 거죠. 18절에 보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이 있어요. 율법 자체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일점일획이라도 버릴 수 없다고 하고 있어요. 예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거예요. 좀 전에 예수님께서 율법을 거론하신 이후로 잠시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말씀, 율법과 선지자라고 하면 구약 성경 전체를 의미한다는 것 아닙니까? “구약 성경 전체를 내가 완성했다. 다 끝내 버렸다.”는 거예요.  더 이상 너희가 거기 가서 왈가왈부할 게 없다는 거예요.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서 너희들이 애쓰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완성된 그 속에서 무엇을 거기서 건드릴게 남아 있냐는 얘기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등장하셨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새로운 완성자로서 나타나 버린 거예요.

율법을 완성하신 자가 그 앞에 있으면, 그분이 등장해 버리셨으면 율법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그 태도가 어떻게 비치겠습니까? 완전히 미치는 거예요. 절대 그럴 수가 없는 거잖아요. 우리는 아무리 들여다봐도 지킬 수 없는데 그분이 다 지켜버렸다고 나타나 버렸으니까 우리는 어찌 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율법 외에 한 의, 바로 하나님의 의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 버렸다고 사도바울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미리 정하여서 부르신 자들은 예수님께서 완성자로서 나타나셨다는 것을, 그 비밀을 알아버린 사람이 돼버립니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셨어,’ 하는 것을 ‘아,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믿습니다.’ 라고 하니까 그를 의롭다고 쳐주고 영화롭게 하고 천국에 집어넣어 주고…….  우리는 율법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그냥 질질 끌려가다가 주님과 함께 천국에 그 속에 그냥 있는 거예요.

우리가 오늘 읽은 짧은 네 절에 성경말씀은 과연 성경 전체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드리고 어떻게 이해하는가! 라는 것에 하나의 기준점이 되는 말씀이라고 감히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대할 때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 자신의 행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다 그 세계는 서로 동떨어져있고 서로 합칠 수도 없고 서로 섞일 수도 없는 그런 세계라는 것을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어요. 그런 선견자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거예요 “당신은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지만 율법을 어기고 있잖아.” 라는 것이에요. “하늘로부터 온 사람이라면서 왜 율법을 안 지키고 법을 어기고 있지” 라고 하는 것이에요.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제자들이 길가에 이삭을 잘라 먹지 않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아무 제제를 하지 않아요. 그 모습도 유대인들의 눈에는 시비꺼리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안식일에 또 병든 자를 고쳐주고 하지 않습니까? 그 일 조차도 유대인들 눈에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법을 판판이 깨는 사람이 어떻게 법을 완성했다는 식으로 감히 이야기할 수 있냐는 것이죠.

결국은 그런 불만이 쌓여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일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정이 여러분 충분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성도는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 주시는 것인지를 아는 사람 “아, 죄인이다. 나는 항복이다.” 라는 사람이고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기서 무엇을 끄집어 내냐 하면 자기 의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미 내가 말씀을 지키겠다고 나선 이상 거기에는 자기 행함이 들어 갈 수밖에 없고 그것이 바로 자기 의예요. 의가 행함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공부 많이 한, 주석하는 사람들, 신학자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우리가 최고의 선을 이루도록 애를 써야 됩니다.’ 이것은 그것을 보여주는 본문입니다. 아주 고난위도의 윤리준수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어요. 그런 식이라면 그것이 바로 이 본문 해석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다면 바리새인에게도 기회가 있는 거예요. 바리새인의 그 행함을 보면 이미 그런 식의 해석은 천국과 완전히 가까이 있는 겁니다. 조금만, 한 걸음만 더 열심히 하면 천국에 쏙 골인할 수 있을 정도로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 믿음에 대해서 열심인 사람이 바리새인과 유대인들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주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죠.

19절 20절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요구를 하십니다.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지키지 못하면, 그렇게 바르게 가르치지 않으면 너희들은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주님의 요구가 있습니다. 이 법이라는 것은, 율법이라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행함을 요구해요. 아, 이 부분이 여러분에게 잘 전달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잘 들어보십시오. 법은 우리에게 행함을 요구해요. 예수님께서 19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요구 하는 거예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버릴 수 없고 그것을 버려서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지켜야 되고 그것을 행해야 된다는 거예요. 이것이 주님의 요구에요.

그런데 계속되는 20절 말씀에 보면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또 못을 박습니다. 아, 이걸 어떻게 풀어야 됩니까? 최고의 선을 지키고 고난위도의 윤리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틀린 해석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법적인 행함의 요구를 우리가 어떻게 풀어야 됩니까?

더 나은 의,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행함, 더 나은 의가 되어야 된다는 것, 더 나은 그들의 의, 그들에게서 나오는 더 나은 의라는 것이 과연 어떤 모습이에요? 우리에게 나올 가능성이 있는 겁니까? 저도 초반에 인간의 가능성을 타파, 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거론했다고 말씀했었습니다. 지키는 법을 들이대면서 과연 지키는 자가 있느냐, 아니면 못 지키겠다고 항복하는 자가 있느냐 라는 것을 계속해서 보는 거예요. 만일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라는 것을 내가 바리새인의 행함과 비교해서 “아, 내가 저 사람보다 법을 더 잘 지켜야지” 하는 식으로 나오면 그것이 하나님이, 주님이 요구 하시는 더 나은 의가 되겠습니까?

제가 가만히 보니까 바리새인들이 세리가 기도하는 것을 보고 우습게 여기는 것을 보니까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요. “야, 사람 무시하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구나, 그럼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잘 배려해야지.” 이렇게 하면 바리새인보다 더 낫은 의가 되어서 주님의 요구에 합치가 되는 건가요? 이 대부분의 해석이 그렇게 나옵니다. 비교해서 더 나아야 된다는 식, 더 나아서 결국은 골인, 골인, 고난위도의 윤리, 본문 말씀을 통해서 제시한 그 수준까지 이루어야 된다고 그렇게 우리를 유혹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거기 함정에 빠지시면 안 됩니다.

아무리 바리새인과 비교해서 내가 더 한걸음 더해야지, 더 좋은 거 해야지, 더 낫게 해야지 해봐야, 어느 세계의 일이에요? 그것은 이 땅에 일이잖아요. 그것은 다른 빛의 세계로 옮겨간 주님의 이야기, 다른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땅의 일이에요. 50보를 가나 100보를 가나 똑같습니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물해봐야 똑같습니다. 더럽기는 똑같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우리끼리 아무리 “너 목사님이 1번부터 10번까지 지키라고 했는데 몇 번까지 지켰어?” “나는 일주일동안 하루 한 가지씩 7개까지 밖에 못 지켰어” “아, 나는 8개 지켰는데, 내가 좀 낫네!” 이게 주님의 세계에서 가능하냐는 얘기에요.

그렇게 단순하게 비교해서 비교우위로 ‘내가 너보다 낫다. 난, 말씀을 지켰다.’ ‘내가 더 나은 의야’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신거야’ ‘하나님 내가 이렇게 했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율법 외에 나타난 예수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 의, 하나님의 행하심이라는 것은 우리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서 나올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우리에게서 그런 것이 나와 버렸다면 그것이 나온 사람은 절대로 “내가 그렇게 했습니다.” 라고 하는 고백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하나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라고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르는 거예요. 왜? 내가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님의 요구에 대해서 우리가 충족시킬 수가 없어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절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 주님이 요구하시는 법들을 충족을 시킬 수가 없어요. 절대 없습니다. “없으면 도대체 뭡니까?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어떻게 하라는 말이 아니고 ‘네 소속이 어디냐?’란 말입니다. 네가 여전히 땅에 살고 있다고 땅에서 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냐, 아니면 내가 땅에 사는데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그 분명한 생각 속에서 주님만 바라보고 사느냐 라는 네 소속이 어디냐는 것입니다.

성도가 다 땅을 딛고 산다고 해서 다 땅에 사는 사람 아니잖아요. 육신과 함께 영혼을 죽이고 살리시는 그분을 우리는 두려워 할 필요가 있는 거잖아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결론의 말씀은 다른 길, 다른 루트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 다른 길을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시작을 해 버리셨어요. 그리고 십자가를 지심으로서 다 끝내버리셨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찾을 길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 하면 바로 주의 십자가로 향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주님이 다 이루신 것이, 완성한 것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면 거기서 피 흘리신 그분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땅에서 우왕좌왕 하면서 ‘어,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나으면 천국 가겠네. 바리새인보다 내가 하나 더 지켰으니까 천국 갈 수 있을 거야.’ 라는 이런 식의 망발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죠. 주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주를 향하게 하고 십자가로 향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었다면 거기는 더 이상 다른 근심 걱정 없이 안심할 수 있는 그곳이죠. 이제 나는 더 이상 다른 길을 찾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가 이 말씀을 드려다 봐도 내가 지키고자 애쓰고 못 지킨 것 때문에 안절부절 하면서 나를 들볶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야말로 안식에 당도한 것이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의 결론을 내려놓았을 때, 더 나음을 위한 것은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바로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오는 그 하나님의 의, 사도바울이 로마서 3장 21절에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의, 그것이 이미 예수님으로부터 다 이루어져 버렸기 때문에 주를 믿는 성도는 그 길을 보면서, 주님 가신 길을 보고 그저 끌면 따라가시면 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바리새인보다 더 말씀을 잘 지키면 그것이 더 나은 의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댈 것은 주님뿐이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바로 그 십자가뿐입니다. 언제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눈과 우리의 모든 것을 주로 향하게 하실 때 거부하지 않고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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