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9. 21. 13:13

감추인 것과 숨은 것 (누가복음 8장 16-18절)

본문 : 누가복음 8장16-18절
제목 : 감추인 것과 숨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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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강-눅8장16-18감추어진것과숨은것-luk100919

감추어진 것과 숨은 것

2010년 9월 19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8:16-18

(눅 8:16, 개역)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눅 8:17, 개역)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눅 8:18,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의 모든 말씀 앞에서 우리는 그냥 관람객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화에서는 스크린에서 배우들이 아무리 설쳐도 그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직접 줄 수가 없습니다만,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빼앗기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실제로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우리 것’이라고 여긴 것을 빼앗는 식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 식으로 현존해 계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구경꾼 신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는 것을 ‘빼앗는 식’으로 일하시는 예수님 대신에 다른 식으로 거주 주시기만 하는 예수님상을 따로 찾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의 본성으로 인하여 오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난해한 표현을 사용하시면서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즉 인간들은 곱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쪽에서도 어렵게 말씀하실 수 밖에 없는 그 원인 제공을 우리쪽에서 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평소에 우리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식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대한 이해가 너무 어렵기에 제가 쉽게 관통할 수 있는 식으로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16절에 나오는 등불을 예수님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7에 나오는 ‘슴은 것’과 ‘감추인 것’을 예수님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8절에 나오는 ‘있는 자’ 와 ‘없는 자’ 앞에서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예수님이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다 빼앗기리라”는 정답이 수립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말씀하셔도 될 말씀을 예수님을 빼버리니 무척 난해한 말씀이 되어버립니다.

왜 예수님은 난해하게 우리에게 말씀해야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16절의 ‘등불’의 등장에서 이미 이유가 나타납니다. ‘등불’이 새삼스럽게 거론해야 한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께서 등장하기 이전까지 이 세상에서는 제대로 된 등불이 등장한 적이 없더라는 겁니다. 그만큼 이 세상은 깜깜하고 어두운 세계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곧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과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우리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을 비롯해서 우리 인간들은 자신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지도 않는 일을 자기네들끼리 만들어내어 놓고서는 그것으로 구원을 가름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님을 등불로 사용하시는 그것에 있습니다. 인간쪽에서 벌리는 종교적 의식이나 행사는 무용지물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예수님쪽에서의 움직임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움직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즉 “내가, 혹은 우리들이 집단적으로 이런 식으로 움직이는 것은 다 나와 우리의 구원에 보탬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집단적으로 먹혀들어갑니다. 등불이 기다리기 보다는 자신들 쪽에서 빛을 비추는 등불을 아예 제조하고자 나서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시도 자체가 실은 어두움에 속하는 겁니다. 이 어두움은 감추인 것과 숨겨진 것을 밖으로 드러내는 하나님의 작용을 거부하는 식으로 반발 작용을 드러냅니다.

화산 안에 있는 마그마가 밖으로 분출되면 용암이 됩니다. 그 뜨거운 용암들은 원래 화산 안에 품고 있었던 물질입니다. 그것이 밖으로 토해내니 자꾸만 산 비탈에 퇴적이 되는 겁니다. 이것처럼 예수님의 역사관이란 감추어진 것, 숨겨진 것이 자꾸만 밖으로 때를 만나 쏟아져 나와서 형성된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는 ‘나의 것’이라는 것이 성립될 수가 없는 겁니다. 상류에서 탁류가 밀어닥치면 중류나 하류에 피어난 풀들은 날마다 뽑히고 새로 돋어날 운명에 쳐해져 있게 됩니다. 나의 것이라는 것은 매일같이 늘 숨겨난 사건에 의해서 갈아치워지고 떠밀려서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실체들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왠지 내가 부모의 산고를 통해서 태어난 그 자체를 영원토록 나의 것이라고 구분지어 꼭 쥐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렇게 되면 발생되는 상황은 두려움입니다. 악마가 복음과 예수님 앞에서 취하는 태도는 오직 두려움입니다. 그 두려움에 인간들이 악마에 버릇에 합세해있는 겁니다.

두려움이란 자기 것이 따로 있기에 그 따로 있는 ‘나의 것’이 과연 이 땅에서 성공할 거냐 실패한 거냐를 놓고 마음 조려가면서 사태를 지켜보는 가운데 발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의하면 모든 것은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의 연속적인 작품이요 산물이라면 ‘나의 것’이라고 붙잡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 되고 두려움을 사서 발생시키는 셈이 됩니다.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그 곁에 구원받은 강도도 같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는 것을 보고 구원자로서의 능력 미달이라고 믿었지만 구원받은 강도는 도리어 그 저주를 통해서 자신과 그리고 자신을 태어나게 한 그 세상의 실상을 새롭게 알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마저 이 세상에서는 저주로 인생을 끝낼 수 밖에 없는 그런 세상에서 인간들은 나름대로의 보람과 가치를 갖고자 한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강도는, 천국이란 바로 이 땅에서 저주받은 그 하나님의 세계임을 알고 믿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현상이 그 강도를 구원시킨 그동안 숨겨져왔던 하나님의 뜻이 그 십자가 현상에서 때를 만나 발현된 결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18절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제가 임의로 바뀌어 보았습니다. “받는 자는 비로소 있겠고, 받지 못하는 자는 아예 없을 것이다”. 이게 더 쉬워보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없는 자는 있는 것도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이 훨씬 어려워보입니다. 그럼에도 왜 예수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바로 ‘빼앗기리라’를 성립시키기 위함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 태어난 우리 자신으로 하여금 옛날 출애굽 상황으로 성립시키기 위함입니다. 모든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체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마를 닮아서 끊임없이 우리 인생을 우리가 책임지려고 하는 그 태도를 빼앗고자 하시는 겁니다.

여행 때에 저의 여권과 돈을 아내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그런데 그 덕분에 무사히 여권과 돈을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갖고 계십니다. 바로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에게 곱게 악마가 손타지 못하는 곳에 간직하고 있기에 진정 하나님께는 우리의 방패요 상급됨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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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강-눅8장16-18감추어진것과숨은것-luk100919

2010-09-20 22:07:50 조회 : 29     이름 : 오용익  

 
043강-눅8장16-18(감추어진것과 숨은것)-luk1009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8장 16절에서 18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3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8:16-18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실제로 우리의 생활과 연결되는 대목들이 꼭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다 이루신다. 그러면 우리하고는 별 상관이 없겠네. 그러니 우리는 구경이나 하면 되겠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대목이 나와요.

‘빼앗긴다’는 대목이 나와요. 예수님께서 ‘내가 홀로 다 이룬다.’라는 것은 예수님은 영화 스크린 속의 배우가 아니라는 거예요. 영화는 관람하면 됩니다. 그 안의 배우가 튀어나와서 관람객을 친다거나 빼앗는다거나 그런 것이 없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함께 살아가고 계십니다. 그냥 말씀만 하고 구경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것을 빼앗습니다. ‘있는 줄로 여기는 자는 빼앗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내 소유입니다. 이것은 내 것입니다, 라고 여기는 사람은 다 빼앗기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그 하나하나가 실제로 계속해서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본문에 보면 “숨어 있는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숨은 것이 바깥으로 토해낼 때 그것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여기는 바로 그것이라는 겁니다. 화산이 폭발하는데 그 속에 마그마라는 것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술 먹은 사람들이 흔히들 토하듯이 산정상이 터지면서 토해질 때 마그마가 흘러넘치면서 용암이 되지요. 벌건 용암이 되어 토해지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밖으로 뱉어내진 벌건 용암은 실제로 안에 들어 있었던 거예요. 들어 있었는데 부글부글 끓으니까 사람들은 뭔가를 느끼면서 ‘땅이 좀 흔들리네. 왜 이렇게 땅이 흔들리지? 뭔 일이 있는가?’ 그런데 좀 있다 보니까 뒷산꼭대기가 터지면서 그 안에서 뭔가가 분출되고 있는 거예요. ‘아하, 저 분출되고 있는 저것이 지금까지는 그냥 산 밑에 있다가 오늘이 되어서야 산의 입구를 통해서 토해지듯이 분출되는구나.’ 하고 알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사실은 주께서 다 생각한 것이고 이야기 하신 거예요.

그것이 감추어진 것이고 우리한테 숨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바깥으로 드러나면 그것이 나의 인생이 되고 우리의 인생이 되고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것들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다 드러나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내일 되면 또 주께서 다 말씀하셨는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 내일분의 양만큼 내일 또 드러나질 것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드러내실 것이고 세상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 드러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은 우리의 더러운 버릇이지요. 화산에서 마그마가 터져서 용암이 되어서 분출할 때 ‘이것은 내꺼, 하나님, 이것은 내 것입니다. 빼앗기면 안 됩니다.’라고 여겼던 것이 그 다음날 더 밑에 있었던 마그마가 나와서 용암 되어서 나와 버리면 그 위에 내 것이라 여겼던 모든 것을 다 쓸어가 버리고 그것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어제까지 내 것이라 여겼던 것이 내일이 되면 다시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빼앗겨야 되는 거예요. 주시고 빼앗고, 주시고 빼앗고, 우리는 주시면 내꺼, 주시면 내꺼! 이 세상의 껍데기로 살고 있는 우리는 맨 날 내 것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네 것이라고? 그러면 내가 빼앗아갈게.’ 라고 빼앗아가면서 일하시고.

그래서 나중에 죽을 때 되면 알지요. ‘아하, 내가 이렇게 살다가 죽어야 되는 것도 다 숨어 있는 뜻이었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본문의 말씀이 굉장히 난해해 보일 거예요. 17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16절에 보면 등불 이야기를 합니다. ‘등불은 덮어두는 것이 아니고 만인이 볼 수 있도록 높은 곳에 놓아둔다.’ 그런 이야기를 하시면서 ‘등불을 높은데 두는 것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 빛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고 그 다음에 17절에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라고 해놓고 그 뒤에 18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이 어렵지만 이것을 하나의 꼬챙이로 확 뚫는 방법이 있어요. 그것은 이 등불을 예수님 본인으로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등불이다. 이 등불인 내가 이 어두운 세상에 비로소 짠, 하고 나타났다. 나는 가만히 있는 성질이 아니다. 나는 뭔가 너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과거의 말씀 속에 이미 감추어진 것이고 숨어 있는 것인데 비로소 말씀이 때를 만나서 이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드디어 만천하에 공개되었다. 이제 너희는 죽었다.’ 그런 이야기죠.

그 다음에 18절을 사람들이 상당히 어려워해요.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이것은 “너희들이 세상을 볼 때 나는 이렇게 본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다시 한 번 고려해봐라.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안 드나? ‘나는 세상을 이렇게 봅니다.’라고들 했지? 그런데 내가 등장하고 난 이후에는 그것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이 들지 않나? 다시 한 번 생각들 해봐. 네 입장에서 ‘나는 이것이 진리라고 확정했다.’라고 하는 그것은 다시 한 번 고려해 봐야 돼. 그것은 잘못되었을 수가 있어.” 그런 뜻이고요.

그 다음에 “……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고 하는 것은, 그 있는 자 혹은 없는 자 앞에 무엇을 집어넣는가 하면 예수님을 집어넣는 거예요. ‘예수님이 있는 자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행한 것을 공짜로 다 받겠고’, 없는 자 앞에도 예수님을 집어넣어서 ‘예수님이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이 본문 해석은 수월하게 관통이 된 겁니다. 그런데 문제가 간단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등불로서 이미 드러날 때는……, 어렵게 하지 말고 쉽게 합시다. 예를 들어서 제가 3주 만에 여기 왔는데 ‘여러분 제가 여기 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는데 ‘저는 여러분 앞에 등불로서 다시 등장했습니다.’ 라고 한다면 이 말은 그 동안 어두웠다 그 말이거든요.

지난주, 그 지난주 설교하시는 그 목사님들의 설교는 어두움 자체였다 그 말이거든요. 그것은 설교도 아니었다 하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는 말이지요. 얼마나 건방지겠어요. 제가 인터넷으로 들어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큰일 났어요. 무슨 수로 그분들의 설교를 능가합니까,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이 나타나서는 ‘여러분, 그동안 얼마나 빛을 보고 싶었습니까? 제가 여러분의 등불입니다.’ 라고 한다면 그것은 상당히 건방진 이야기지요.

예수님께서 ‘비로소 등불이 떴다! 여러분, 빛을 보고 싶어서 환장했지요? 자, 빛입니다.’라는 말은 ‘그동안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했던 것은 다 그것은 엉터리였고 그것은 다 어두움 속에서 그냥 어두움을 더듬거리는 짓거리였습니다.’라고 등장하는 거예요.

‘등불을 감추지 않고 공개하겠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내가 메시아인 것을 더 이상 여러분에게 숨기지 않고 활짝 드러내는 식으로 앞으로 일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그런 식으로 등장하신 것은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등불은 구경도 못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등불은 맛도 못 봤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어둡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참 네가 어둠에 있느라고 고생 참 많이 했다.’라는 식으로 우리에게 말씀을 주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 어려워요. 이 본문이 진짜 어려운데, 방금 제가 관통했다고 쉽게 이야기는 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알아들었을 거예요.

‘난 알았어. 그게 해석인줄을 알아챘어. 이제 끝났어.’라고 했는데 막상 이렇게 등불부터 새로 시작하니까 그 뒤에 있는 말씀은, 정말 그 당시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이것은 진짜 어렵도다.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할 정도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 정도의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라는 이 말씀부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되면 저 상류에서 흙탕물이 밀려와서 바다로 빠지듯이 계속해서 위로부터 아래층에 있던 것이 위로 올라가고 내일 되면 현재 숨어 있는 것이 또 위에 덮쳐버리면 도대체 나의 소유는 고사하고 ‘나’라는 것 자체가 누가 만들어 가느냐하면, 말씀 자체가 나를 만드는 것이 돼버려요. 인생을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인생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를 지금 살게 만드는 것이 말씀에 입각해서 지금 내가 살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나’라는 주체는 날아가 버리는 것이고 없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고 그 살아 있는 내가 말씀 지켜야지, 라는 논리 혹은 원리는 예수님의 새로 뜬 등불, 빛에 의하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 탁류에 휩쓸리는 양상으로, 자꾸 외부에서 덮치듯이 모든 말씀을 이루어 나가시는 겁니까? 사람에게는 본인이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 하는 그 자체가 악마의 생각이라는 것을 본인이 모르고 있어요.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가 뭐냐 하면, 본인들이 지금 그렇게 해서 구원되는가, 라는 그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 안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 붙들고 묻고 싶어요. ‘당신 그렇게 해서 구원 되겠어요?’ 저는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구원이 되겠습니까?’ ‘구원, 그거야 어떻게든 되겠지요.’ ‘어떻게 되겠지요, 할 문제가 아니라 구원문제는 당신은 별 신경 안 쓰지요? 돈 벌어서 먹고 사는 그 문제만 신경 쓰지요? 그래서 구원되겠습니까?’ ‘교회 가면 목사가 있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되겠지요.’ 그렇게 이야기하거든요.

현재 한국교회가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요.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내가 등불이다’라는 식으로 예수님이 주체가 되어서 일을 하는데 비해서 한국교회는 자기가 자기를 소유해서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서 자기가 행동을 내놓으면서 자기스스로 구원되고자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이 시킨 적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구원되겠지’라고 하면서 죽을 날만 고대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한 거예요. 교회 오는 것? 하나님이 시킨 적 없습니다. 교회 와서 예배드리는 이런 것은 하나님이 시킨 적도 없어요. 교회 와서 예배드리면서 성경보고 있으면 구원받은 것처럼 느껴질 뿐이고, 그것을 기성세대가 자식들에게 가르쳤을 뿐이고, 전혀 하나님이 시킨 적도 없어요.

하나님 이야기는 ‘내가 등불이다.’ 그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내가 빛으로 등장했다. 빛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어둠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뭘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교회 다니면 구원받아요? 누가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한국 장로교회가 그렇게 이야기하던가요? 교회 없으면 지옥 간다고요? 어느 건방진 인간이 그 따위 소리를 해요.

초대교회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초대교회가 무슨 교회가 있습니까? 교회는 로마교회에서 처음 세웠지요. 교회라는 것조차도 없어요. 이 말은 구원문제가 인간의 손에서 이미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손가락이 열 개, 발가락이 열 개, 이렇게 이미 나타나 있는 거예요.

나타난 것을 딱 잡아서 ‘이것은 부모님이 10개월 동안 고생해서 낳아주신 이 몸은 내 몸이다.’라고 나타난 것, 드러난 것을 내 것이라고 쥐고 내 것을 구원시키는 이 문제는 나한테 달렸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장차 뒤에서 홍수로 뒤통수를 치면서 나타나는, ‘이게 어디서 까불어. 네 몸? 네 것이 어디 있어?’라고 내려치는, 숨어 있는 말씀을 사람들이 모르는 거예요.

엎어지고 자빠져야 돼요. 십자가가 이렇게 서 있잖아요. 서 있을 때 거기 있는 강도들이 다 봤습니다. 강도들뿐만이 아니고 로마 군인들도 다 봤어요. 하지만 그 십자가가 자빠져서 그냥 된 통으로 얻어맞은 사람은 구원받은 그 강도 한 사람밖에 없어요. 그 사람은 자기가 있고 옆에 십자가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가 자기한테 덮친 거예요.

덮쳐버리니까 강도는 알았어요. ‘하나님이 하나님한테 저주받는구나. 하나님마저 저주받아야 될 세상에 내가 그동안 태어나서 살아왔었구나. 저주받는 메시아를 통해서 비로소 천국을 알게 된 겁니다. 하나님마저 저주받는다면, 이 세상이 하나님마저 저주받게 하는 세상이라면, 이 세상 좋다고 여기서 출세하겠다고,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에 지금 이시간도 돈벌이해야 된다는 식으로 살아온 우리는 오죽 저주받아야 마땅하겠습니까, 당연히 저주받아야지요.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도 한번 거쳐 가니까 저주로서 우리와 빠이빠이 해야 될 그런 세상 속에 우리는 아예 태어나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도 저주로 마감되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당신이 거기서 내려와서 구원하면 믿겠다.’고 아직도 주제파악을 못하고 있는데 그 구원받은 강도는 ‘맞습니다. 저주받아야 할 사람은 납니다. 이 세상 자체가 모두가,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는 그 자체가, 이 세상에서 살았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아 마땅합니다. 믿습니다. 그 저주를! 저는 그 저주를 믿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거예요.

우리는 왜 교회 와서 축복을 믿으려고 합니까? 그 강도는 예수님이 부활되기도 전에 저주받는 것을 통해서 저분이 진짜 우리의 메시야임을 믿게 되었어요. 이걸 한국교회 누가 알려줍니까? 복 받으려고 교회 오지 ‘제대로 저주한번 본때 있게 받아보세요.’라고, ‘우리 다 같이 저주받읍시다. 저주 받는 사람이 삽니다.’라고 외치는 그런 교회가 어디 있어요. 교회 망하려고 환장을 했지.

사람이 저주를 받게 되면 그 다음에 어떤 복이 주어지느냐 하면 자기 인생의 성공이나 실패를 걱정하지 않는,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모든 두려움, ‘남들은 성공했는데 왜 나는 실패했을까?’라는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그것을 노린 거예요.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을 본문같이 어렵게 이야기하는 것은 ‘너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렵게 꼬아놓았다.’라고 하는 거예요.

저주받아야 마땅한 인간이 ‘나는 저주받으면 안 돼. 나는 복 받아야 돼.’라는 선입관에 의해서 저주받으라고 주신 말씀을 가지고 복이 오는 말씀으로 자기 맘대로 뒤틀어지게 꼬아놓으니까 꼬아놓은 것을 풀기 위해서 더 꼬아야 되는 거예요. 오른쪽으로 꼬아놓은 것을 왼쪽으로 꼬니까 우리들 보기에는 힘들게 더 꼬이고 꼬여서 비비꼬인 것으로 된 거예요.

지금 주님 보시기에는 우리 인간이 어느 정도로 마귀의 똘마니냐 하면 안절부절 하면서 구원받겠다고 온 애간장을 다 태우고 있는 거예요. 이러면 어떻게 될까, 저러면 어떻게 될까, 벌벌 떨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이렇게 하면 좀 더 나은 인생을 살까, 사업하는데 사업실패하지 않을까, 성적 떨어지지 않을까, 마누라 바람나서 도망치지 않을까, 교인수가 떨어지지 않을까, 내 몸이 이렇게 아프다가 내일이나 모레쯤 갑자기 죽는 것이 아닐까, 모든 것이 초조와 불안과 두려움이거든요.

두려움이 어디서 오는가 하는 것은 인간은 몰라요. 그게 악마가 조성해놓은 이 세상 자체의 저주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악마를 저주해서 그렇게 만들어놓았는데 인간이 같이 덩달아서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덜덜 떨고 있는 놈은 악마밖에 없어야 되는데 악마의 종이 되어서 악마 따라서 같이 벌벌 떠는 거예요.

인생 실패할까봐서. 실패라는 의식은 뒤에 감추어지고 숨어 있는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고 현재 나타나 있는 몸뚱이 이것이 나에게는 제일 중요한 가치라고 딱 단절시켜서 ‘너는 가.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돼.’ 이렇게 나만 딱 쥐고 있을 때 그 때부터 그 사람은 거기서 계속 두려움이 발산됩니다.

마귀를 아예 잡은 거예요. 본인을 잡았다 생각하지만 마귀 잡았어요. 마귀의 특성은 벌벌 떠는 겁니다. 숨은 것이 드러날 까봐서 감추인것이 드러날 까봐서 벌벌 떨고 있는 거예요. 실패할까봐서 떠는 것, 요한일서 4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쫒는다.’

이 말씀은 인간들이 그동안 얼마나 예수님의 십자가 없이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오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성경에서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이 말씀을 지켜서 구원에 성공하리라고 여기는 사람들, 그 사람은 백날 해봐야 마귀가 가는 곳에 갈수밖에 없어요. 십자가를 빼버리고 십자가가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십자가를 안다, 인간을 하나님이 사랑해서 주셨잖아.’ 그것은 십자가 아닙니다. 구원받은 강도가 봤던 그 십자가가 십자가예요. 왜입니까?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합시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항상 우리에게 닥칠 때는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는 식으로 오십니다. 그렇다면 그 강도에게 현실이라는 것은 내 모든 의와 내 모든 존재의 가치를 빼앗고 거기에 저주까지 퍼부으시고 ‘이것이 본래 내가 몰랐던 감추어진 진리의 일면이었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동안 그 사람이 강도질을 평생 하면서 살아온 것은 뭐냐 하면, 강도질을 해서라도 남들 사는 것처럼 한번 살아보려고, 실패 안하는 인생 되어 보려고 무리해서 그 나쁜 짓을 한 거예요. 처음부터 내가 저주받을 인간 같으면 나쁜 짓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할 필요가 없지요. 싱글벙글 살아가요. 두려움이 없으니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숨어 있는 것이 나에게 덮쳐서 된 거거든요. 상당히 어렵게 되어버렸는데 출애굽기를 예를 들어봅시다. 출애굽기의 뜻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갇혀 있다가 나왔다는 말이거든요. 갇혀 있다가 나왔다. 지금부터 2천 4백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옛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갇혔다가 나왔단다.’라는 것을 옛날일로 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너희들은 갇혀 있어. 내가 아니면 너희들은 거기서 출애굽 못해.’라고 지금상황으로 만들어주는 거예요.

옛날 갇혀있던 출애굽당시의 이스라엘만 벌벌 떠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시대의 우리는 이 시대의 애굽에서 벌벌 떨고 있는 겁니다. 실패할까 싶어서. 거기서 빼내주는 것이 천국이거든요. 출애굽 때 어린양 피를 문설주에 발라서 죽음의 사자가 피를 보고 넘어가잖아요. 지금은 예수님의 피를 보고 이 애굽같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빠져 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얼추 다 알아요.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것을 내가 몰랐었는데, 또 안다고 해도 지식으로나 알았는데 이게 실제로 밀려와서, 숨어 있는 말씀이 밀려와 보니까 지금 내가 그 출애굽과 같은 상황 속에, 하나님의 말씀 한 가운데 놓여 있게 된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기서 더 이상 나를 믿는다는 것은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예수 믿는 것을 내가 믿는다.’라는 이것이 성립이 안돼요. 그냥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예수님의 열매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에 어두움이라고 지칭된 대표적인 사람들이 누구냐, 바리새인들이거든요. 이 바리새인들은 그 감추어진 것, 숨어 있는 것에 대해서 누가 관리하느냐, 자기 자신이 그것을 찾아내는 겁니다.

18절을 봅시다. 진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면서 좀 알아듣도록 하면 좋은데 왜 이렇게 비비 꼬아서 하느냐? 쉽게 합시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받는 자는 있겠고 받지 못한 자는 아예 없을 것이다.’ 얼마나 쉬운 말입니까?

다시 이야기할게요. ‘받는 자는 새삼 있게 되었고 받지 못한 자는 아예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면 예수님도 좋고 우리도 좋고 다 같이 좋을 것 같은데 제가 한 이 말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입니다. 이것은 무지무지 어려운 이야기잖아요.

왜 이렇게 어렵게 이야기하시느냐? 제가 한 말 중에 뭐가 빠졌는가 보세요. ‘받는 자는 새삼 있게 되었고 받지 못한 자는 아예 없을 것이다.’ 제가 지금 한 말과 본문 말씀을 비교해 보면 뭐가 하나 빠진 것이 들어 있을 겁니다. 그것은 ‘빼앗기리라’ 하는 단어가 제가 한 말속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요.

여기에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할 때에 여기서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인간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하는 사람들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오늘날 한국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있습니다.’라고 할 때에, 있는 것과 있는 줄로 아는 것 사이를 예수님께서는 지금 구분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무엇까지 할 수 있느냐 하면, ‘주님께서 은혜를 주심으로 이렇게 있습니다. 저한테는 주님 주신 것이 있습니다.’라는 여기까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거예요. 그것까지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 같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은 홀라당 다 빼앗긴다는 거예요. 제가 이야기하면서도 정말 어렵습니다.

지금 빼앗길 것을 갖고 있다고 여기는 사람은 다 빼앗길 각오를 하라, 그 말입니다. 나는 네 것이라고 여기면서 준 적이 없다, 라고 하는 거예요. 더 쉽게 해 봅시다. 창세기 15장의 말씀을 제가 읽을 테니까 무슨 뜻인지 한 번 헤아려 보세요. “이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저는 신학교 가기 전에도 몰랐고 신학교 간 뒤에도 몰랐고 신학교 나온 지금까지도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요. ‘여호와가 나의 방패요 나의 상급이라.’ ‘방패’라는 말뜻은 알지요. 그것은 전쟁할 때 몸을 보호해준다는 말이고 ‘상급’이라는 것은 상을 주신다는 말이니까 그것은 다 아는 것인데, 왜 손에 쥐도록 주지 않느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손에 쥐어서 적들을 이겨내는 이런 방패를 안주시고, 상급이라 해서 보너스주시고 내가 원하는 돈 주시고 내가 원하는 구원을 나에게 넘겨주시는 것이 아니고, 왜 자꾸 멀찍이 떨어져서 저쪽 편에서 서서 ‘하나님은 너의 상급이고 방패’라고 하시느냐, 그 문제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부모가 애한테 ‘너 공부 잘하면 시계 사줄게.’ 할 때 애가 공부 잘해서 ‘엄마, 일등 먹었어. 시계 사줘.’ 하니까 안 사주는 거예요.

안사주면서 하는 말이 ‘엄마는 너의 상급이고 엄마는 너의 시계다.’ ‘아니 시계를 주세요.’ ‘아니야, 엄마는 너의 방패고 너의 상급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는 거예요. ‘우리가 원하는 주고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왜 약을 올리느냐 그 말입니다.’ 그 비슷한 이야기가 또 나옵니다. 엘리야하고 바알선지자들하고 850대 1로 싸울 때 엘리야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여, 지금 응답해 주소서.’ 한다고요.

왜 거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집어넣으면서 왜 엘리야의 하나님을 집어넣지 않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이야기인지 몰라요. 그런 것을 빠뜨려버리면 우리가 그동안 성경보고 신앙생활 한 이것이 전부 다 헛짓한 거예요. 반드시 내 것이 될 경우에만 나의 구원이 될 것이라고 여기는 그 썩어빠진 사고방식을 안 버린 채 계속해서 구원받고 천당 간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냥 내 구원, 내 생명, 내 목숨을 주님께서 갖고 있는 자체로 그 구원을 내가 안 갖고 있어도 구원되는 양으로 사고방식이 우리 몸에서 발생돼야 돼요. 우리 몸에서 생겨나야 된다 그 말이죠.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도 예수님이 갖고 있는 것이 더 든든할 때 그게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그걸 왜 몰랐는가, 그 말입니다. 내가 나대야 되고, 내가 나서야 되고, 내가 체험해야 되고, 내가 방언해야 되고, 내가 구원받아야 되고, 내가 기도를 잘해야 되고, 그래야 구원된다고 여기는 그 썩어빠진 사고방식, 그것이 바로 마귀의 표적이 된 겁니다. 그게 마귀의 노리개감이 된 거예요.

제가 여행하면서 느낀 점은……, 바깥의 이야기들은 하기 싫어요. 제 아내가 하는 말이 저에게 은혜가 된 겁니다. ‘당신은 여권이든 돈이든 당신이 갖고 있으면 안돼요.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저는 돈 한 푼도 없이 여권도 하나도 없이 다녔습니다. 바로 십자가 밑의 강도가 그것을 죽을 때 안 거예요. 네가 그동안 평생 살아온 것도 또 죽어서 낙원에 가는 그것까지 몽땅 주님께서 대신 가지고 주님께서 대신 십자가에서 값을 치른 거예요.

주님께서 ‘얘 죄 대신 내가 값을 다 치릅니다.’ 한 거예요. 그걸 내가 가지고 있으면 안 되지요. 십자가 질 의사도 없는데. 그래서 본문에 ‘있는 것, 없는 것’ 앞에다 예수를 집어넣으라고 했잖아요. ‘예수님이 있는 자는 더 받겠고.’ 교회 나와서? 웃기지 말라고 하세요. 십일조해서요? 아닙니다. 예배출석 잘해서? 아닙니다. 성경공부해서?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더 받는 거예요. 여권이든 현찰이든 다 예수님이 갖고 있었던 거예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사람은 더 받겠고 내가 갖고 있는 놈들은 다 빼앗기리라. 다 빼앗아 버린다.’ 이것을 고백하는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골로새서 3장의 말씀이 비로소 이해가 되실 거예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 3:1-3)

저 같으면 여기에 집어넣겠습니다. ‘고이, 아주 깨끗하게, 마귀가 손 안타는 곳에, 너희 영생을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 안에 고이 갖고 있는 것을 네가 믿으라.’ 하는 겁니다. 그게 믿음이에요. 그게 믿음이라고요. 내가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강도짓을 하든지, 개판 짓을 어떻게 하든지,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은, ‘너는 몇 년도에 태어나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는다.’ 하는 그것은 숨어 있는 것이 밀려오고 덮쳐온 거예요.

‘그런데 그 인간도 예수님, 바로 나로 인해 구원받았어.’ 라는 그 감추어진 내막, 등불, 그 빛으로 인해서 우리는 천국의 복락을 받고 또 받고 또 받고 더 받는 거예요. 그 받는 과정에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저주받으셨고 사흘 만에 하나님께 복 받아서 부활된 겁니다. 그 과정은 이미 우리 바깥에서 벌어졌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그 가는 길에 우리의 생명이 주님 안에 있음이 연결된 사람은 그 주님을 내 소유로 만들지를 않습니다. 내가 예수 믿어서, 내가 내 걱정해서 구원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말이죠. 내 구원 내가 걱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 인생 실패와 성공을 내가 결정하고 내가 판단할 것이 아님을 아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저주받아서 구원했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을 살아도 100년을 살아도 저주받을 수밖에 없고 추석을 지내도 저주받는 추석이고 어딜 가나, 뭘 하나, 우리는 처벌이고 형벌이고 저주다 그 말이죠. 그걸 아주 즐겁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저주받는 인간됨을 알게 된 그것 자체를 복으로 여기고 고맙게 여기고 그것을 편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하이고, 고마워라. 하나님, 이제 나라는 것이 뭔지를 이제야 알았네요.’ 사람이 나이 먹는다고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저주받아야 마땅한 것을 알면 어린애라도 이미 인생 다 안거예요. 이미 어른입니다. 그러니까 생각나네요. 자기 맘대로 하는 행실 좋지 않는 애가 있어서 견디다 못해 청학동에 보냈답니다.

5박 6일인가를 예절교육 받으면 애가 달라질까 싶어서 보낸 겁니다. 이틀이 지나니까 애가 울면서 전화를 했어요. ‘엄마, 면회와도 괜찮아요. 엉엉.’ 하고 울면서 전화를 했어요. 아주 혼이 난 모양이죠. 똑바로 하라고 회초리를 들고 때리니까. 5박 6일 동안 예절교육 받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절바른 아이로 고쳐졌을까요?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예절교육 받고 왔다고 유세를 얼마나 떠는지 모릅니다. ‘엄마, 내가 이래 뵈도 예절교육 받고 왔어.’ 그게 ‘자기 의’입니다. ‘하나님, 제가 이래도 목사입니다, 장로입니다, 교회 봉사 몇 년 했습니다, 헌금 많이 했습니다.’ 이렇게 유세를 떠는 이것이 인간이에요. ‘내가 교회 하나 세웠습니다, 교육관 세웠습니다, 개척교회 열군데 세웠습니다.’ 이게 유세떠는 인간이에요. 강도보다 더 못한 인간이에요.

이런 것을 아는 것이 바리새인이고 서기관들인데 이 사람들이 말씀을 다 비비 꼬아놨어요. ‘나처럼 하면 구원받는다.’ 하면서 말씀을 다 비비 꼬아놓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으로서는 최고로 해석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이 말씀을 가위로 오려서 전 세계 내노라 하는 언어학자들한테 물어보세요.

해석 안 됩니다. 없는데 뭘 빼앗깁니까? 없는데 뭘 빼앗겨요.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앞에 뭐가 생략되었어요. ‘예수님에게 자신의 생명이고 뭐고 다 맡기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 없는 사람은 현재 있다고 여기는 그것까지 인생 성공했다고 재벌이라고 여기는 그것까지 다 빼앗기리라.’

거성그룹이 어떻고, 탁구가 어떻고, 다 빼앗기리라! 빵집이고 뭐고 다 빼앗기리라. 뭐 성공한다고요? 인생은 성공 없습니다. 인생이란 어느 누구도 성공 없습니다. 부러워하지 마세요. 대통령도 성공 없어요. 바위에서 뛰어내려서 자살이나 하고 그런다고요. 인생은 공평합니다. 왜? 등불이 아닌 이상 다 똑같아요. 예수님 빼놓고는 다 어두움입니다.

그것을 진즉에 알았으면……, 그것을 진즉 알게 된 것은 성령께서 어느 날 덮치니까 바로 내가 저주받아야 합당한 인간인 것을 싱글벙글 하면서 수용하는 거예요. 그리고 ‘내 생명은 주님께서 이미 가져 가셨군요.’라는 것을 아는 사람, 복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구원은 예수님이 해내신다고 예수님이 그렇게 누누이 이야기해도 우리는 못 알아들었습니다. 내 구원 내가 챙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 구원마저 빼앗기게 해주시고 주님 안에 간직하고 있는 우리이름 우리 생명,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우리를 구원한 예수님의 피, 그것과 우리 자신과 날마다 연계하면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