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4. 08:14

심판과 긍휼 (예레미야 12장 14-17절)

심판과 긍휼

2009년 12월 23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2:14-17

(렘 12:14, 개역)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산업으로 준 산업을 다치는 나의 모든 악한 이웃에게 대하여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그 땅에서 뽑아버리겠고 유다 집은 그들 중에서 뽑아내리라』
(렘 12:15, 개역) 『내가 그들을 뽑아낸 후에 내가 돌이켜 그들을 긍휼히 여겨서 각 사람을 그 산업으로, 각 사람을 그 땅으로 다시 인도하리니』
(렘 12:16, 개역) 『그들이 내 백성의 도를 부지런히 배우며 사는 여호와 내 이름으로 맹세하기를 자기들이 내 백성을 가리켜 바알로 맹세하게 한 것 같이 하면 그들이 내 백성 중에 세움을 입으려니와』
(렘 12:17, 개역) 『그들이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반드시 그 나라를 뽑으리라 뽑아 멸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오늘 본문은 짧지만 중요한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이방민족들 가운데 뽑아내어 의식이 달라지게 만들어서 그들 가운데 다시 심을 때, 그동안 이스라엘을 괴롭게한 민족들은, 이 달라진 이스라엘을 본받지 아니하면 멸망 받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과정에 동원된 민족인 이스라엘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땅에다가 ‘참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알려주어야 될 위치에 놓여 있는 민족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세상의 중심부에 놓여 있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느 장소에 가던, 바로 그곳이 이 세상의 중심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면서 이처럼 중심부를 따로 만들어놓으시고 그 중심부에서 나오는 힘으로 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자 할 때는 이 땅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중심부의 활동을 찾아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창세기 2장에 벌써 나옵니다. 에덴동산이 바로 그곳입니다. 그 에덴동산 한 가운데는 두 개의 특별한 나무가 있으면 그 중심부에서 물이 흘러나와 에덴동산 전부를 먹여살리는 구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구조를 포기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 구조를 알면 실은 하나님의 뜻을 전부 안 것이 됩니다. 에스겔 후반부에 보면 새성전의 설계도가 나오는데 그 새성전의 특징이 물이 흘러넘쳐서 주변에게 생명을 나누어주게 된다는 겁니다. 바로 그 물이 나오는 지점이 성전의 지성소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성경 맨 마지막에 있는 요한계시록 22장에 봐도, 천국에서 만물을 살리는 생명의 물이 어린양의 보좌에서 흘러나오는 물입니다. 이처럼 중심부없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따로 뽑아내시는 겁니까?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인간이 만든 세상이라고 여기고 그 세상을 계속해서 더욱더 인간의 나라답게 만들기 위해서 오늘도 분투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다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보고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들 자신과 그들의 나라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데 그 원리가 자신들의 지혜와 용기와 결단력으로 앞 길을 헤쳐나간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대로 그들은 움직였습니다. 그들 이스라엘이 지나간 자국과 역사들이 모두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흔적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스라엘을 가지고 말씀의 내용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9에 보면,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구약의 그 이스라엘이 오늘날 성도들입니다. 보통 사람이 성도가 되면 바로 이 말씀의 사명에 묶이게 됩니다. 이 사명으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자기 것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면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은 그냥 하늘의 선물을 창고에 방치하는 식이 아니라 그 은혜를 우리들 자신을 달라지게 만들어버리는 힘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즉 ‘나는 나의 것이다’고 여겼던 것에서 ‘나는 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다’로 바뀝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달라지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와서 자신이 희망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듬뿍 축복해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는 방식과 일치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할 자격이 박탈당했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성도에게 덮칠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이 기거하는 가나안 땅은 원래 하나님께서 상속해주신 땅입니다. 그런데 주변에 있는 이방 나라를, 예를 들면, 암몬, 에돔, 모압, 블레셋 같은 나라들이 탐을 내고 침범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들 민족 가운데서 유다 이스라엘을 따로 뽑아내셔서 잠시 다른 나라에 포로 잡혀 가게 하시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적인 조치이며 결국에는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는 겁니다. 이 때 돌아오는 그들은 예전같이 않게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어떤 희생을 하셨고 사랑을 행사했는지를 압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접하고서도 만약 이방민족들이 여전히 우상을 섬긴다면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로 자기 본토로 돌아오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면을 새롭게 알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은 그동안 전쟁을 치렀습니다.

전쟁이란 적과의 충돌입니다. 과연 그 적이 누굴까요? 인간이란 고통을 당하면 분노합니다. 자기 자신의 본색으로 급히 되돌아오게 되어있습니다. “누구야, 나를 힘들게 한 작자가! 숨지말고 정체를 드러내라”는 식으로 분개합니다. 이점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준 사랑과 긍휼이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면서 이 세상에 대해 분개하시고 분노하십니다.

바로 이러한 분노와 분노의 충돌이 전쟁입니다. 이 영적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알았던 것은 바로 자신들의 중심성이며 그 중심부로 있게 한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대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12:2-3에 보면,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복과 저주를 결정짓는 중심부에 놓인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랑하는 자기 자신 이삭을 바친 겁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을 천하의 더러운 자인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제공했다는 그 아픔과 사랑에 동참케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있는 자가 진정 오늘날의 성도요 이스라엘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몸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면 이런 사명감과 사랑에 감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나름대로의 살아가는 방식이 따로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정신이 바알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정신입니다. 자기로 인하여 자기가 사는 것, 바로 이점에서 성도는 돌아서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의 포부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알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포부로 자리잡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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