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 18:11

기도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 (예레미야 11장 14-17절)

기도 안 들으시는 하나님

2009년 12월 2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4-17

(렘 11:14, 개역)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렘 11:15, 개역)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렘 11:16, 개역)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렘 11:17, 개역)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기도 중지 명령이 선지자에게 떨어졌습니다. 기도를 중지하겠다는 것은 구출될 필요없는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기도는 구출과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기도로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성에서 구출된 것처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관한 내용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겠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에게 구원의 인도함을 받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기도 중지 명령을 내리므로서, 즉 기도하지 않는 선지자로서 예레미야를 내세우므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왜 선지자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지를 알기를 원하십니다.

기도가 중지되어야 될 이유는, 17절에 나옵니다. 바알 신에게 이스라엘과 유다 나라가 제사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반하는 행위가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알종교를 섬기는 자들이 여호와를 모르는 이방 민족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잘 안다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도데체 무슨 연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를 대신하여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고 싶어했을까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바알 종교에 대해서 관심두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모두들 자신들은 우상숭배자들이 아니라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라고 자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호와를 잘 안다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얼마든지 바알 종교로 넘어간 것을 감안한다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잘 섬기고 있다는 그 여호와 하나님은 실은 바알신이 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바알신을 아는데 있어 두 가지 방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 하나님부터 먼저 언급하고 그 다음에 바알신을 언급하는 방식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서 바알신에 대해서 알고자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은 바알신과 무관한 자라고 자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알신부터 먼저 소개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소개하게 되면 사람들은 걱정부터 먼저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해도 자신들이 바알신을 믿고 있음이 들통났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의 우상의 특징은 항상 ‘자기를 위하여 섬기는 신’이라는 겁니다. 명칭이 어떤 신이 되었든지 간에 사람이 자기 잘되라고 믿는 신은 모조리 다 우상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함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등장하게 한 백성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여기 USB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쪽 컴퓨터에 들어있는 정도 내용을 다른 컴퓨터로 옮길 때 그 정보를 담을 수 있는 작은 부품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은 애굽에서 나와서 일단 광야로 들어가게 됩니다. 광야란 말이 땅이지 실은 인간의 몸을 먹여살릴 만한 조건이 되지 못하는 땅입니다.

이스라엘에 빠져나온 애굽이나 앞으로 이스라엘이 정착해야 될 가나안 지방에서 우상을 섬기는 동네였습니다. 특히 가나안 지역의 10족속은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이미 땅에 정착한 민족입니다. 하지만 애굽에서 나와서 오도 갈데 없는 이스라엘은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황입니다.

두 발을 디딜 땅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먹여 살린 것은 땅에서 나온 산물이 아니라 하늘에게 떨어진 만나라는 기이한 양식이었습니다. 신명기 8:3에 보면,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만나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하늘에 내려온 언약의 떡이었습니다. 즉 바알을 비롯한 세상의 신들은 인간의 몸이 우선이요 그 몸을 입히고 먹이기 위해 대자연의 웅대함과 신비함을 향하여 부르짓는 신인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은, 하나님께서 실시하실 언약이 우선이었고 그 언약의 전달체, 혹은 운반자로서 늘 만들어져야 하는 ‘언약의 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죽음의 땅인 광야를 필히 거치게 하신 것입니다. 즉 ‘죽음의 자리’에서 인간은 ‘자기를 위한 신을 찾는 그 죄’를 볼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고린도후서 6:9-10에 보면,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는 자”라는 겁니다. 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느냐 하면, 사도 바울은 새언약의 전달체로서의 ‘새언약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몸은 그 몸이 만들어지는 세계관도 같이 붙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몸으로 오셨으면 그분에게는 묵시적 세계가 함께 있는 겁니다. 인간의 몸이 그 몸을 만들어낸 세계관을 말해주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세계가 따로 있음을 말해주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애굽의 야채나 음식을 먹이신 것이 아니라 낯선 양식인 만나를 주시면서, 곧 말씀에 의해 만들어진 몸인 것을 알려주십니다.

세상의 우상들은 땅의 순환성, 곧 ‘봄→여름→가을→겨울→봄’의 덕으로 자신의 불멸을 꿈꾸면 신을 향하여 복과 영원한 구원을 염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을 닮고 자연의 신비로움을 담은 눈에 보이는 신을 섬기게 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준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말씀입니다.

신명기 6:5에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란 조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만으로 관계가 성사되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 사랑 관계로 주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행음을 했다’고 했습니다.

간음이란 이미 사랑관계 성립되었을 때나 성립하는 내용입니다. 바알을 섬기는 자기 백성을 ‘행음했음’이라고 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오직 사랑으로 구원하심을 분명히 하신 말씀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자 자기 목숨 잃으면 아무 소용없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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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2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예례미야11:14-17(기도를 안들어주시는 하나님) 
2009-12-03 12:44:54 이름 : 오용익

20091202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1장 14-17절/기도를 안 들어주시는 하나님
(이 근호목사)

(기도)

이 시간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 들 중에 있느니라.’ 마태복음 18장 20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함께 있다면 불안해하거나 초조하거나 염려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모독이 되고 불신이 되는 겁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주께서 항상 함께 있다는 것을 늘 잊지 말도록 해 달라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인간적인 안목으로 살다보니 우리 하나님 믿는 것도 인간적으로 인위적으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주께서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저희들이 믿어야 될 텐데 믿음보다 저희들이 눈에 보이는 것으로 걱정하고 염려했습니다. 이제는 영적 세계 안에서 주님의 지시 받고 주님의 명령받고 주의 말씀이 요구하는 대로 염려 없이 초조감 없이 순종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예레미야 11장 14절에서 1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69페이지입니다. 제가 읽습니다.

예레미야 11:1-17

“그러므로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거나 구하지 말라 그들이 그 곤액을 인하여 내게 부르짖을 때에 내가 그들을 듣지 아니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거룩한 제육이 그에게서 떠났거늘 나의 집에서 무엇을 하는고 그가 악을 행하며 기뻐하도다 나 여호와가 그 이름을 일컬어 좋은 행실 맺는 아름다운 푸른 감람나무라 하였었으나 큰 소동 중에 그 위에 불을 피웠고 그 가지는 꺾였도다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부하기를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기도중단을 지시했습니다.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아브라함의 기도를 들어서 자기 조카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구출 된 적이 있습니다. 선지자의 기도, 메시아의 기도는 구출용입니다. 모세가 기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말라.’는 것은 ‘구원하지 않겠다. 내버린 자식으로 간주하겠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같은 교인들끼리 ‘집사님, 절 좀 위해서 기도해주세요.’라고 할 때 그 말을 우리는 이렇게 들어야 됩니다. ‘저를 구원해 주세요. 구원되도록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런 뜻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런데 교회 잘 안 나오는 사람에게 ‘제가 성도님을 위해서 기도합니다.’라고 했는데 ‘기도하지 마세요.’라고 나온다면 ‘저는 구원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구원되는 것에 관심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은 어떤 내용을 품고 있느냐 하면,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기도를 통해서 저쪽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조치를 해 달라.’는 겁니다.

만약에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한다. ‘하나님이여, 우리 자식들에게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임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뜻입니다. 왜 그런 식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느냐 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본인도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구원된다는 것, 구원은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구출 시켜 줄때만 구출된다는 것을 자기도 익히 알았기 때문에 그게 구원의 원칙이기 때문에 그 구원의 원칙이 동일하게 자식들에게도 또 아는 사람에게도 주께서 주시기를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예레미야가 자기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주께서 뻔히 아시기 때문에, 평소에 예레미야가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심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지시하느냐 하면, ‘예례미아야, 그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자, 이것을 통해서 예례미야는 하나님과 한 편이었고 그 전에 예례미야가 기도한 것은 응답이 될 수 있는 기도를 했다는 뜻이 되는 겁니다.

해 봤자 응답이 되지도 않는 기도 같으면 주께서 ‘예례미아야, 네 기도는 해도 소용없고 안 해도 소용없다. 하든지 말든지 네 맘대로 해라.’ 이렇게 방치했을 것인데 ‘예례미아야, 기도하지 말라.’는 말은 그 전에 이미 효과 있는 기도를 할 수 있는 그런 입장, 자리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예례미야의 기도는 마치 뭐와 같으냐하면 메시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하는 기도와 같은 효력을 사전에 예수님 오기 전에 미리 보여주는 거죠.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도하지 말라는 그 조건이 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겨났다는 뜻인데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짓을 했기에 선지자의 기도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기도를 중단해야 되는가? 그것이 오늘 본문 17절에 나옵니다. “바알에게 분향함으로 나의 노를 격동한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의 악을 인하여 그를 심은 만군의 여호와 내가 그에게 재앙을 선언”한 거예요.

여기 ‘바알에게 분향했다.’ 바알에게 제사 드렸기 때문에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약을 펼칠 때 ‘바알을 섬기지 말고 여호와 섬기라.’는 이야기를 교회들 마다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교회들마다 뭘 모르냐 하면 바알신이 어떤 신인가는 몰라요. 교인들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고 시어미도 모르고 목사도 모르고, 바알이라는 신이 무슨 신인지를 몰라요.

용어만 바알이면 다 바알 신 인줄로 알고들 있는데, 바알 신을 이야기 할 때 두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여호와부터 출발해서 ‘여호와는 이런 분인데 바알신은 이렇다.’라고 여호와부터 출발해서 바알신과 비교하는 방법이 있는 반면에, 또 하나는 ‘바알신은 이런데 여호와신은 이렇다.’ 해서 바알 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하고 거기에 대해서 대비되는 입장에서 여호와에 대해서 이야기해줘서 바알도 알고 여호와도 같이 아는 그런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에 여호와로부터 출발해서 바알 신을 알아버리면 어떤 단점이 있느냐 하면, ‘여러분 여호와 믿지요?’ ‘예’ ‘예수 믿지요?’ ‘예’ ‘그러면 바알 신에 대해서 이제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라고 해서 이미 자기 자신들을 여호와 잘 믿고 예수 잘 믿는 사람으로 그걸 기정사실로 굳게 해 놓고, 그 다음에 바알 신을 이야기하면서 ‘바알신은 부처 믿는 사람이고 바알신은 조상제사 드리는 사람이고 이방인들이 믿는 신이고 ….’ 이렇게 되어 버려요.

왜 교인들이 바알 신에 대해서 모르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만 알았으면 되었지 우리가 남의 신까지 알 필요는 없다.’ 이래 되는 거예요. 그래서 바알신이 어쩌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는 겁니다. 그런데 바알 신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해 버리게 되면 바알 신 이야기를 가만 들어보면 오늘날 한국교회 이야기하는 것 하고 전부 다 똑같아요.

그리고 교회에서 하는 행세 말고 집에서 하는 행세가 바알 신을 믿는 사람들의 행세하고 똑같다 이 말이지요. 그러니까 그들은 이름만 예수 붙이고 여호와 붙이고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 다 붙여서, ‘이 정도 하면 예수 믿는다고 생각하고 여호와 믿는다.’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알 신을 믿는 것을 보니까 세상에, 자기가 바알종교를 믿고 있는 거예요.

특히 성경에서 이방인들이 바알 신을 섬기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사람, 유다사람이 바알 신을 섬긴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유다 이 사람들이 여호와에 대해서 이미 전통적으로 확고한 여호와를 믿는 민족이고 여호와의 백성이라고 확실해져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그들의 마음가짐이 어떻게 변질되었기에 바알 신을 섬기는 사람으로 달라지는가, 그 내막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지 아니하면 결국 한국교회는 바알 신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게 됩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 바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바알 신으로 기울어서 섬기게 되었는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 하면, 결론부터 이야기 할 게요, 그 이유가 바알 신부터 우상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나를 위하여, 내 주체를 위하여, 내 자아를 위하여 신을 믿고자 할 때, 그 관계는 여호와가 되든지 삼위일체가 되든지 예수가 되든지 그게 뭐가 되든지 다 바알신이 되는 겁니다.

구약성경에서 우상이라고 했을 때는 반드시 여호와 하나님과 대비가 되는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반대로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서 이스라엘과 유다가 있었던 거예요. 없는데서 새로 만들어 낸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이스라엘이 탈출해야만 했던 그 애굽나라의 신과 그리고 이스라엘에 들어가야만 했던 땅의 열 족속의 신들은 전부 다 그 신들의 특징이 자기를 위하여 신을 모시고 섬기고 경배하고 분향하고 제사 드리고 예배하는 그런 신들이었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보면 됩니다. 애굽에서 나왔던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는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신은 머무르는 신이 아니고 공중에 붕 뜬 신이 되어 버렸어요. 땅이 없으니까. 땅이 없어도 섬길 수 있는 신이 여호와 신입니다. 그런데 붕 떴는데 착지가 되어버리면 그것은 바알 신이 되는 겁니다. 참 쉽죠, 잉?

오늘날 이야기로 하면 욥처럼 재산 날아가고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종기로 뒤범벅이 되어서 도무지 이 땅에서 더 이상 아무 소망 없는, 완전히 절망적인데 그 때 비로소 섬기고 싶은 신, 섬겨야 될 신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나의 죽음의 자리에서만 만나는, 한쪽은 죽고 한쪽은 살고, 이런 식으로는 절대로 만나지지 않는, 바알 신을 섬기는 이 땅에서 죽음을 당했던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만나려면 우리도 같이 이 땅에서 발 디딜 곳이 없는 절망, 어두움, 깜깜함 그 안에서만 만나는 거예요.

그걸 ‘십자가안, 예수 안’이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이트에 갔더니만 제목이 그래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얻은 예수님’이라는 사이트를 본 적이 있어요. 모든 것을 잃고 예수를 얻었으면, 자 문제 나갑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까, 모든 것을 얻었습니까? 고린도후서 6장에 보면 ‘모든 것을 얻었다.’고 되어 있어요.

그런데 누가 봐도 그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어요.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설명하면서 ‘우리는 죽은 자이기에 산자’라는 말을 하니까 어떤 사람의 글, 양무리인지 뭔지 하여튼, 거기서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어떻게 죽은 자가 산자냐 이 말이죠. 그 사람들은 이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살았다는 거예요. 죽고 난 뒤에 예수 믿고 살았다는 겁니다. 그게 아니고 ‘죽은 자기 때문에 산자가 된다.’는 말을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나는 죽은 자나 산자다.’(고후 6:9) 이래 이야기합니다.

‘죽고 난 뒤에 살았는데 왜 자꾸 죽었다고 하느냐?’ 이래 막 공격을 해 대는 거예요. 완전히 불신앙이 들통 났어요. 그들이 얼마나 바알종교인지가 다 들춰진 거예요. 바알종교는 땅의 종교입니다. 땅의 종교에서 자기 몸도 땅의 일부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주변에 있는 땅에서 무엇을 제공하느냐?’에 따라서 자기가 사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땅을 떠날 수가 없어요. 자연과 하나가 되고 땅과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죽고 사는 것은 땅에서 나오는 열매에서 나오는데 땅에서 나는 곡식과 열매는 시간적으로 순환구조를 가집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다음에 뭐지요? 봄이잖아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다음에 또 뭡니까? 봄이지요.

사람이 죽으면 흙이 되고 자식이 태어나고 죽으면 또 흙으로 되고 또 자식이 태어나고…, 마치 곡식이 흙에서 솟아 나와서 열매를 맺고 썩으면 다시 흙이 되고 다시 싹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바알종교의 특징이란 이 몸을 위하여 주변의 자연세계와 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바로 바알종교입니다.

이 몸을 위하여 예수가 계시고, 이 몸을 위하여 예수 믿어야 되고, 이 몸을 위하여 교회 와야 된다는 것, 그것 백 프로 바알종교입니다. 그걸 가지고 땅에 속한 몸, 땅에 속한 사람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호와 종교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생각하는 기존의 몸이 아니라 하늘의 언약이 담겨 있는, 언약의 말씀이 담겨 있는 언약의 몸으로 다시 만들어 가는 몸이 그 몸이에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은 땅에 속한 몸이 아니고 하늘의 언약으로 구성되어 가는 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 인자의 몸이 마치 묵시의 세계를 품고 있듯이. 사람의 몸이라는 것은 그 몸을 있게 한 세계관이 붙어 있는 거예요. 몸이 가면 그 세계관이 같이 이동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인자의 몸으로 왔을 때는 하나님의 세계관이 같이 따라 온 거예요.

그걸 성령으로 만들었다 해요. 성령에 의해서 되지요. 제가 어려울 줄 알았어요. 신명기 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한 뒤에 바로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광야라는 것을 거치게 하는 거예요. 광야에서 양식이 뭐냐 하면 광야에서는 애굽에서 먹던 짬뽕, 자장면이 아닙니다.

애굽에서 먹던 음식은 일체 없고 뭘 먹느냐 하면 만나를 먹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아는 양식은 이 몸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양식이 있어서 이 몸을 위해서 양식이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신명기 8장에 보면 ‘네가 너희에게 만나를 주는 것은 너희를 낮추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세상에 밥 먹으면서 자기 몸을 낮춘다는…, 어떻게 배가 부른데 맘이 낮추어 집니까? 하나의 원칙적인 구조를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세상의 바알 종교는 내 몸이 먼저 있고 몸을 위하여 신이 존재하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을 담는 그러한 기구, 용기, 그릇으로 이스라엘이 있는 겁니다.

언약이 먼저 있고 그 언약을 담기 위해서 우리 몸이 있는 거예요. 여기 달린 이걸 뭐라고 합니까? USB지요. 이게 뭐냐 하면 컴퓨터 정보를 담아서 다른 컴퓨터에 집어넣으면 이쪽에 있던 그 정보내용이 저쪽 컴퓨터에 고스란히 옮겨가는 거예요. 이 USB가 바로 정보의 몸이라면 우리가 언약이라는 정보를 담고 있는 USB에요. 우리가 USB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땅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언약이 필요한 거예요. 땅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 나를 살려주는 겁니다. 자장면이 나를 살려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언약이, 십자가의 새 언약이 지금 죽어도 나를 살게 하는 거예요. 밥 먹고 살기 위해서 목사노릇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우리 최 일규 집사님이 그런 질문했지요. ‘장로가 뭡니까?’ 장로는 순교자에요. USB. 요한계시록의 24장로의 특징이 뭐냐? 순교자들입니다. 목 베인 영혼들이에요. ‘고참이 먼저 복음 위해서 죽어야죠.’ 그 말입니다. 그게 장로라는 거예요. ‘복음이 그리도 좋다면 먼저 죽으이소.’ 그게 장로에요. 그게 목사다 이 말이지요.

분명히 죽어 있는데 안에 있는 언약 때문에, USB, 안에 들어 있는 그 언약이라는 정보 때문에 산자가 되는 겁니다. 분명히 죄를 짓는데 안에 있는 USB, 언약 때문에 의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땅에 있는 바알 종교는 신의 종류가 여러 가지에요. 어떤 지역에 갈 때마다 신의 종류, 하나님의 종류가 다르다는 말이지요.

옛날 우리 조상들이 신 섬기는 게 그렇잖아요. 이사 가는 날 달력에 표시하지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떤 지역의 신에게 굴복을 해야 복을 받고 어떤 날짜에 이사를 가야 복을 받는 겁니다. 안 그러면 나한테 해가 오니까, 이 몸이 우선이니까, 신과 타협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애굽에서 나와서 공중에 붕 떴던…, 광야라는 것은 말이 땅이지 땅 같지도 않은 도저히 살수 없는 땅이에요.

살 수 없는 땅에서 만나, 언약의 정보, USB처럼 해서 붕 뜬 상태에서…, 지금 가나안땅은 그야 말로 바알섬기는 땅이에요. 그 땅에 이스라엘백성들이 들어가서 점령을 함으로 말미암아, 그야말로 이 바알이라는 종교는 헛것이고 아무것도 아니고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 땅에서 살기 위해서 자연과 조화롭게 하기 위해서 웅대한 자연의 법칙에 기가 죽어서 그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적응하게 되면 뭔가 내 몸이 좀 오래도록 살지 않을까, 하는데서 인간이 지어낸, 인간이 눈에 보이는 식으로 관찰해서 만들어낸 종교가 바로 바알신입니다.

그래서 바알 신들은 형상을 만들어야 돼요. 눈에 보여야 된다고요.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회당을 크게 짓고 교회당을 예배당이라고 하는 이유가 그게 바알종교 심성이기 때문에 그래요. 눈에 안보이면 뭔가 허전해요. 그런데 이 여호와 하나님종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신명기 6장 4절에 보면 이래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래 되어 있어요.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라.’가 아니라 ‘어느 장소에 오너라.’가 아니라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는 거예요. ‘네 맘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말은 ‘너를 사랑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행음’이란 말이 나옵니다. 본문 11장 15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많이 행음하였으므로….”

총각과 처녀가 사귄다고 해서 행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행음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관계가 성립되어 있는 가운데서 행음이라는 말, 간음이라는 말이 성립이 돼요.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과 백성사이에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 아니라 마음 적으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걸 요구하는 거예요.

그런데 땅에 있는 인간의 육체로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믿고 사랑한다는 말이 오늘날 참 드문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 나오라. 교회에 사람들 숫자 채워라. 헌금 내라.’ 인간이 할 수 있는 하나님지시는 그렇게 흔한데 ‘당신이 공중에 붕 떠도 하나님을 사랑하겠습니까?’라는 말은 요새 교회에서 하기가 실례가 돼요.

아무도 사랑하지도 않는데 ‘사랑하라’고 하면 듣는 고객들이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목사님, 그 따위 소리를 하지 말고 뭔가 하라고 하세요. ‘청소하라, 예배시간에 일찍 나와라’ 이렇게 뭔가 하라고 하시면 할게! ‘선교헌금 다달이 내라.’ 내가 할게! 하지만 ‘네가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라.’ 그런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거예요.

‘예수님 사랑하라.’는 말은 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분이 저한테 물어요. ‘목사님, 신자가 뭡니까?’ ‘예수님 믿는 사람입니다.’ ‘그게 뭔 뜻입니까?’ ‘교회도 안 믿고 내 집안도 안 믿고 나도 안 믿고 아무것도 안 믿고 예수만 믿는 사람입니다. 내 직장도 안 믿고 통장에 있는 잔고도 안 믿고 오직 예수만 믿고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어떤 사태, 사업이 절망적이 되고 가정에 우환이 있고, 자식이 아프다든지 자기 몸이 아프다든지 하게 되면 그 전에 그렇게 주님을 사랑한다 했는데, 갑자기 사랑이 없어져 버려요. 사랑 대신에 따지고 원망하고 대들고 반항하고, 그렇게 됩니다. 그걸 제가 어렵게 이야기 할 것 없이 쉽게 이야기해 볼게요.

네 살 박이 개구쟁이 엄마가 장에 데리고 가게 되면 꼭 말썽을 일으켜요. 애가 엄마 치맛자락 잡고 막 발로 찹니다. 자기 맛있는 것 안 사준다고. 그런데 그 맛있는 것 사줘보세요. ‘엄마, 사랑해!’ 이래요. 자기가 좋아하는 맛있는 것 사주면 ‘엄마, 사랑해!’ 하고 안 사주면 엄마 무릎에 자장면 가락을 마구 차올립니다. 축구를 해요. 자기가 원하는 것 사달라고.

‘집에 가면 맞는다.’ 이래도 안통해요. 엄마가 하다하다 ‘아이고, 창피스러워서. 사줄게’ 이래 되거든요. 이게 애가 엄마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자기만 사랑하도록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를 믿든 하나님을 믿든 바알종교에요. 타고난 바알종교 신자들입니다. 바알종교를 믿으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 발생적입니다.

다시 이야기할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여호와 하면서도 어떻게 바알종교를 믿느냐? 그걸 말릴 수가 없어요. 태생이 그러니까. 태생이 바알종교 신자로 태어나서 그냥 죽을 때까지 바알종교로 살아가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오히려 여호와를 사랑하는 것이 이상스러울 정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예례미야를 통해서 강하게 질책하지요. ‘다른 민족은 모르겠지만 내 민족이기 때문에 나는 손대겠다.’ 어떻게? ‘곤액’, 곤액이라 하는 것은 고통이지요, 난처한 입장, ‘고통을 주겠다.’ 그리고 그 고통으로 말미암아 다시 그 땅은 뭘 로 변하느냐? 이스라엘이 아니고 유다 아니고 애굽에서 나왔던 광야로 변합니다.

광야로 변했을 때 그들은 언약했던 언약의 말씀, 언약의 피, 언약의 살점,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새 언약의 살점을 다시 돌아보게 하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광야입니다. 발을 붕 떠야 돼요. 가진 재산, 자식, 교회 이런 것 필요 없습니다. 교회 사랑하고 교회 믿어야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예수를 믿어야 돼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고전 16:22)습니다. 이게 언약의 USB, 언약을 이동시키는, 정보를 하늘까지 전달하는 트랜스포터, 우체부와 같은 전달자, 내 안에 언약이 있어서 언약이 나를 살게 하고 죄인을 의인되게 하고 아무것도 없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예요.

‘이 모든 것을 얻어도 네 목숨을 빼앗아 가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마 16:26) 했습니다. 저는 가끔 이런 망상을 해봅니다. ‘내 재산이 한 7천억이다.’ 5 만원권으로 7천억을 집에 가득 재워놓았어요. 이렇게 상상을 해봐도 그것이 내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는 것을 상상만 해봐도 알 수 있어요.

만약에 내가 한 100평짜리 고급 아파트에 산다. 그 아파트 인테리어 대리석하고 내 구원하고 무슨 관계있습니까? 언약으로 구원받는데, 예수의 피로 구원받는데. 역시 아무 관계없어요. 그런데 내가 재산 한 천억이 있으면 그걸 보증하려 하니까, ‘내가 새 언약의 USB’라는 것이 빠져버리고 돈, 돈이 들어와요. 돈 걱정, 세상걱정, 자식걱정, 이게 들어오니까 내가 새 언약의 USB인지 아니면 ‘나’라는 욕심의 전달자인지 분간이 안돼요. ‘어두워~, 괴로워~!’

주님께서 ‘기도하지 말라.’는 자체가 그 당시에 회개를 촉구하는 겁니다. ‘기도하지 말라. 그래서 너희들이 하나님의 새 언약을, 예수님의 피를 말하지 않고, 피가 출렁이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바알종교고 하나님의 분노를 자처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자처하는 그런 교회, 그런 가정, 그런 개인이 된다.’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때로는 곡해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저희들 타고난 태생이 바알종교이기에 그런 줄 압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깨닫게 하시고 말씀이 들어와서 만나가 들어와서 이제는 만나로 말미암아 언약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을 낮추어서 이제는 땅의 사람이 아니고 하늘의 사람인 것을 확인케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가치 있는 보물을 놓아두고 세상적인 보물에 눈 돌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