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9. 18:53

순한 어린 양 (예레미야 11장 18-23절)

순한 어린양

2009년 12월 9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1:18-23

(렘 11:18,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렘 11:19, 개역)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 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렘 11:20, 개역)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렘 11:21, 개역)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렘 11:22, 개역)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렘 11:23, 개역)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예레미야 고향 사람 아나돗 사람들은 그들 가운에 예레미야가 있음으로서 그들은 참 하나님을 접할 기회가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반응은 차갑습니다. 여호와 이름으로 예언하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협박에만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반대하는 자들의 반대는 그들 의지로도 중지시킬 수가 없습니다. 이미 그들의 영혼은 악마에게 넘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레미야로 인해 진리를 원하는 사람의 노선과 사람을 원하는 노선의 차이를 보고 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단순히 사람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있습니다. 진리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인생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 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예레미야는 예레미야가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예레미야답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오로지 진리에만 관심가진 사람으로 말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처럼 진리와 더불어 기뻐하고 진리와 더불어 감사하고 그 앞에서 늘 회개하는 삶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의식하는 것마저 허용될 수 없는 죄가 됩니다. 저주를 받아 마땅한 조치가 됩니다. 예레미야는 오늘 본문에서 자신의 신세가 ‘순한 어린양’의 신세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이렇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계시에 일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보다 먼저 선지자가 된 이사야의 예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이사야 53:7-8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 본인은 이미 이사야 6장에서 다음과 같은 계시의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천사들이 날개를 펄럭이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광경에 너무나 거룩하기에 이사야 본인이 자신이 너무나 더럽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보좌를 칸막이쳐서 가릴 만한 그 어떤 세상의 장벽도 존재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실제 현실성으로 이사야에게 다가오는 순간, 그는 이 세상 그 어느 구석도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개방되지 않는 구석이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누가 세상에 갈꼬”라고 했을 때, 이사야 선지자는 주저없이 손들고 자원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그 어두운 구석도 실은 이미 뚜껑이 날아간 상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거룩성 앞에 노출되지 않는 구석한 한 구석도 남아있지 않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합니다. “나 이사야는 망하는 백성 중에 같이 망할 자로서 거룩한 하나님을 뵙다”는 겁니다. 이와같은 이사야의 경이로움은 하나님의 보좌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하나님의 거룩성’이라면 예레미야에 있어 이 거룩성은, ‘순한 어린양’의 몰골이 지상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을 ‘순한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순하지 않는 것’은 어떤 것을 의미합니까? 순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즐기는 용도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반면에 순한 양같은 자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성질’을 증거하는 용도로 자신을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순한 어린양이 될 수 밖에 없는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보좌의 거룩성에 자신이 완전히 노출된 채로 살아가기에 그 진리의 거룩성에게만 관심이 가 있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은 이사야, 예레미야 뿐만 아니라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지속될 성도의 일관된 속성이 됩니다.

마태복음 5:3-10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세상에서의 개별적 성공담에 미쳐사는 자들이 아닙니다. 이 땅의 성공이란 곧 즐길만한 여유로운 힘을 많이 축적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런 상태는 ‘심령이 가난 한 ’가 아니라 ‘심령이 여유로운 자’기 됩니다. 애통하는 자가 아니라 호탕하게 웃는 자입니다. 즉 자기로 인하여 즐거운 자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요구하신, 십자가의 길이란 자신에 관한 추억보다 예수님의 기억이 대신해서 차고 넘치는 자들입니다. 이 기억 속에는 이사야, 예레미야의 기억도 함께 들어있게 됩니다. 마태복음 10:16에 보면,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가 순하고, 예레미야가 순하고, 예수님께서 순하고 순결하시므로서 졸지에 세상은 악한 이리로 노출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3:47-50에 보면,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 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 중의 현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우리가 조작해낸 현실을 버리고 예레미야가 보여주는 진리의 세계로 바꿔서 그 진리로 인하여 춤추고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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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09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1:18-23절/순한 어린양) 

2009-12-10 13:19:32   녹취 : 오용익
 
20091209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1장 18-23절/순한 어린양(이근호목사)

(기도)

“저가 이스라엘을 향하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음으로 땅의 모든 끝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성도들을 향하여 진실과 성실하심이 일관되게 작용하시고 베풀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저희들의 애씀과 노력에만 관심이 있지,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성실하심과 맹세하심과 약속에서는 무관심했습니다. 이 시간 다시 우리의 눈을 우리 자신의 행동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무엇을 베풀어 주고 계신가에 다시 눈을 돌릴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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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간 우리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뭔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아무 대가 없이 그냥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고 천국 가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해준 것도 없이 주님께서 그 값을 대신 치러주시고 천국에 가게 했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경험상 스물 네 시간 풍성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달라고 다 같이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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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공로라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되지 않고 우리의 살 속, 뼈 속 까지, 우리의 가장 깊숙이, 심지어 우리의 자존심이 남아 있는 그 공간까지 주님의 은혜가 침투하고 주님의 공로가 차지해서 더 이상 우리 행함으로 우리 노력으로 구원되거나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온몸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고백할 수 있도록 날마다 성령께서 저희들을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례미야 11장 18절에서 2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69페이지입니다.

예례미야 11:18-23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그때에 주께서 그들의 행위를 내게 보이셨나이다 나는 끌려서 잡히러 가는 순한 어린양과 같으므로 그들이 나를 해하려고 꾀하기를 우리가 그 나무와 과실을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산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 이름으로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함을 내가 알지 못하였나이다 공의로 판단하시며 사람의 심장을 감찰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원정을 주께 아뢰었사오니 그들에게 대한 주의 보수를 내가 보리이다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아나돗 사람들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들이 네 생명을 취하려고 찾아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두렵건대 우리 손에 죽을까 하노라 하도다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청년들은 칼에 죽으며 자녀들은 기근에 죽고 남는 자가 없으리라 내가 아나돗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곧 그들을 벌할 해에니라.”


아나돗이라는 지방에 예레미야가 없었더라면, 있었더라도 입을 가만 다물고 있었더라면 그 아나돗 사람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참 모습에 대해서 들을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나돗 사람에게 예레미야를 보내셔서 예레미야가 그냥 입 다물고 가만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니까 아나돗 사람은 분개했지요.

그들이 분개했다는 것은 그들이 제대로 하나님아버지를 접해본 게 돼요. 하나님 아버지가 얼마나 우리 인간들에게 분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그들은 처음 알았지요. 예레미야가 없었더라면 예레미야가 그 지역의 제사장의 아들이 아니었더라면…. 아나돗 사람들은 예레미야의 고향사람들이거든요.

이 고향 사람들이, 예레미야가 그런 예언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그들은 참 하나님을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레미야가 전파하고 나니까 그들은 격분해서 뭐라고 협박을 하느냐 하면 ‘너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그런 식으로 설교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너 만약에 계속 설교하면 우리 손에 죽는다.’ 이 말입니다.

이러한 대우를 이러한 협박을 받는 것이 예레미야뿐만이 아니에요. 예수님 노선에 있는 모든 사람들, 영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이런 협박과 공갈을 받으면서 어두운 세상에게 참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예레미야가 학원 강사가 아니에요. 그냥 지식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고, 예레미야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그 사람 자체가 계시가 되어 버립니다.

본문 18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게 알게 하셨으므로 내가 그것을 알았나이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이 예레미야라는 ‘나’ 그 ‘나’는 예레미야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직접 예레미야를 만들고 계십니다.” 그 말입니다. 예레미야라는 거기에 여러분의 이름을 집어 넣어버리세요.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거기에 집어넣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들어가는 나, 그것을 흔히 육이라 하지요.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합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 자기가 자신에게 행한 노동이나 애씀 이런 것을 거론합니다. 그런데 영에 속한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이 모습은 내가 원했던 나가 아니야.’

이렇게 반대로 이야기해요.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 믿고 하는 이것은 내가 원했던 바가 아니야. 나는 차라리 너희들처럼 세상 적으로 육적으로 그냥 즐기는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 그렇게 살고 싶어 해. 하지만 내가 나 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내가 나에게 손대서 된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걸 가지고 증인의 삶이라 하지요. 그래서 이 세상은 두 가지 노선이 있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나를 이 꼴로 만든 하나님을 증언하는 증인의 길이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고 나머지 사람들은 기껏 자기밖에 모르니까 자기 즐기는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참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살련다.’라는 것을 가지고 그것이 영이 아니고 육이기 때문에 그걸 지적하니까 육에 속한 사람들은 예레미야 같은, 스데반집사 같은, 사도바울 같은, 예수님 같은 분들에 대해서 분개하고 대들지요. ‘너 죽인다’ 하는 것이 단순히 협박이 아니었어요. 왜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느냐 하면 협박이라 하는 것은 겁주기 위해서 자기 의지를 발동하지만 육에 속한 사람은 악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라 진짜 죽여 버립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자기 맘대로 못하니까. 표정관리가 안 돼.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설교하는데 복음을 아는 교인들이 그 자리에 있으면 목사가 표정관리가 안됩니다. 막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니까. 이것은 마찬가지로 복음 아는 사람이 복음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 전할 때에도 표정관리가 안돼요.

어떻게 자기의지로서 할 수가 없고 결국은 영의 사람들은 영의 사람들끼리 따로 모이게 되어 있고 육의 사람은 육의 사람으로 한통속으로 모이게 되어 있어요. 유유상종이라고 종류대로 갈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많은 목사님들을 봤는데 목사님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예레미야같이 삶 자체가 계시가 되는, 쉽게 말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런 목사가 드물어요.

목사들이 신앙생활을 안 합니다. 목사들이 신앙생활 해버리면 뭘 로 즐거워하느냐 하면 진리 가지고 즐거워해요. 그런데 목사가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사업을 하면, 교회라는 목회 사업을 해버리면, 진리 만나는 게 관심이 없고 사람 만나고 싶어 해요. 그것도 유력한 사람, 돈 되는 사람, 단골. 진리와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유력한 사람이 나를 알아준다는, 돈 되는 사람 만나는 것을 가지고 즐거워해요.

왜? 처음에 이야기했지요. 자기 즐거우면 그만이니까. 목사가 신앙생활을 안 하고 있으니까 사람 만나서 자꾸 가르치려고 하는 거예요. ‘너는 나한테 배우고 나는 너에게 가르쳐야 된다.’ 가르치려고 하니까 여기서 목사는 하나의 연극배우가 되어 버립니다.

성경말씀대로 전혀 살지 않으면서 성경은 전하려고 하고 그리고 성경을 전하면서 자기 신앙생활 안하는 것이 들통 날까 싶어서 더 은밀하게 숨기면서 지적으로 보이려 하고 논리적으로 보이려 하고 굉장히 십자가만 전하려고 복음적으로 보이려고 애를 쓰는, 자기관리를 하면서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는, 그 수법은 5년, 10년, 20년 되어야 그 수법을 능수능란하게 쓸 수 있기 때문에 일반 교인들은 그걸 눈치 채지를 못하지요.

그런데 선수는 선수를 알아본다고…,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복음적인데 목사가 신앙생활 전혀 안하고 있어요. 이런 예레미야 같은 탄식이 없어요. 목사의 설교의 그 모든 논리와 깊은 신학과 복음에 대한, 십자가에 대한 해박한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의 본심은 뒤로 빼돌리고 감추고 있는 겁니다. 진리에 눈이 돌아가고 진리에 마음이 빼앗기고 진리 앞에서 내가 지금 목사인지 집사인지 구분도 안 되고 진리 안에서 춤추는 그런 사람은 그렇게 되지 않아요.

정 낙원 목사님이 수원에 가서 강의하니까 목사님들이 하는 말이 ‘이거요, 우리 목사들끼리만 듣고 평신도들은 넣어주지 맙시다.’ 하는 거예요. 진리 앞에서 무슨 평신도가 있고 무슨 목사가 있습니까? 진리 앞에서 평신도 목사 장로 관계없이 같이 덩실덩실 춤을 춰도 시원치 않을 판에, 진리 앞에서 성경공부하면 될까, 가르치면 될까…. ‘어어? 저거 정 낙원 목사님한테 한수 배운 것인데 우리한테 써먹네.’ 이렇게 들통 나면 소위 일본말로 목사의 가오, 목사의 권위, 이걸 찾을 수 없어서 장사가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이 성경말씀을 보고서도 이걸로 장사를 하려 하는 거예요. 마치 점치는 사람이거나 손금 봐주는 사람이에요. 손금은 너나 봐라! 손금 보면서 그 사람 눈치 보면서 어떻게 복채를 더 받아낼까, 거기에 신경 써서 적당하게 조정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예수님은 아주 간단한 문장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이다.’ 차라리 목사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자기보고 ‘순한 어린양’이라고 했어요. 순한 어린양인데 자기 고향사람들이 ‘너 죽인다.’ 이래 나왔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순한 양’하고 ‘안순한 양’ 하고 차이점이 뭘까요? ‘안 순한 양’은 인생을 즐기는 그 자체가 보람이고 ‘순한 양’은 진리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순한 양입니다.

진리 앞에서, 더 정확히 말해서 진리의 현실성, 지금 현실이 진리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그 현실성, 현실감, 그냥 지식이 아니라 온 몸이 진리 안에 푹 빠져 있다는, 피부 세포 하나하나 따끔따끔하게 다가오는, 진리가 쏘아대는 그 현실성, 내가 지식을 어떻게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질 필요도 없이 아예 그 진리라는 우물 속에 빠져버렸어요.

이것은 안가지려고 해도 진리가 막 쏘아대는 거예요. 벌떼처럼 막 쏘아대는 거예요. 매일 같이 진리가, 말씀이 나를 쏘아대는데 여기에 무슨 목사가 있고 집사가 있고 구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여튼 목사들은 주일 아침이나 수요일이 되면 ‘오늘은 이 본문가지고 무슨 설교를 할꼬?’ 이래 하는 거예요. ‘본문 가지고 어떻게 설교할까?’가 필요 없어요.

자기 평소에 살아가는 것이 있잖아요. 살아가는 것 그대로 이야기하면 돼요. 그런데 이 본문 가지고 설교를 짜내려 하면 자기 평소에 살아가는 것은 따로 고 설교 내용은 또 따로 고, 그래서 오늘같이 교인들이 별로 안 될 때는 설교 대충 해버리고 많이 모였다 싶을 때는 신바람 나서 해버리기 때문에 설교 녹음하고 설교 녹취하는 것을 그렇게 괴로워해요.

예레미야의 이 ‘순한 어린양’이라는 이 용어는 먼저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이 그 뒤에 죽지 않고 일관성 있게 흘러가는 겁니다. 강이 안 흐르면 연못 되지요. 막혀만 있으면 호수되지요. 그런데 성경은 바다로 가는 강물 같아서 중간에 이사야에서 끝장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다음에 예레미야 있고 예레미야 다음에 에스겔 있고 계속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 다음에 아모스가 있고 호세아 …, 이렇게 지류로 죽죽 퍼지는 겁니다. 결국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천국까지 이어지는데, 이 ‘순한 양’이라는 것은 이사야 53장에 보면 잘 나와 있지요.

여러분이 잘 아시지만 이사야 53장 7절, 8절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이사야의 이러한 예언은 예수님에게 바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고, 강물이니까, 그 다음에 어린양의 요소가 점점 더 주어지면서 예수님에게 절정에 이르지요. 점점 더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했으니까. 그러면 이사야 이분은 이러한 관점을 어떻게 받았느냐? 이사야 6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거기서 천사를 만납니다. 천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하고 천사들이 여호와 앞에서 거룩하게 찬양하는 그 광경을 보고 난 뒤에 이사야가 그게 진리인줄 알아서 그 진리가 머릿속에 들어온 것이 아니고 그 현실 속에, 거룩이라는 현실 속에 자기가 잠기게 되었어요.

그 순간 이사야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내가 망하는 백성 중에 하나다.’ ‘화로다. 나는 저주받아 마땅하다. 더럽다.’ 그런 뜻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사야의 안목에서 볼 때 성전에 가야 하나님의 보좌가 계신 것이 아니고, 완전히 성전의 모든 벽이 허물어지고 트여져 버렸어요.

세상과 성전이라는 그 경계선, 부동산이 다 터져서 지금 누가 저 세상 끝에서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여관에서 모텔에서 저 은밀한 곳에서 무슨 짓을 하든지 관계없이 전부 다 하나님의 거룩한 보좌 앞에서, 그 빛 앞에서 하는 짓들이 되는 겁니다. 기도원에 가지 않아도, 사우나시설에 가 있어도 거기가 하나님의 보좌가 바로 보이는 같은 공간이 돼요.

하나님의 보좌가 계시고 거기서 천사가 거룩하다, 하고 그 앞마당이 세상입니다. 거기는 마귀도 있을 것이고 이단도 있을 것이고 갓 바위에서 아들 성적 올려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핵폭탄 만드는 김정일도 있을 것이고 탈레반 알카에다도 있을 것이고 세상 뒷골목의 술집, 룸살롱, 온갖 것 있더라도 좀 거리가 멀다 뿐이지 그것은 여전히 같은 궁정,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같은 궁정이에요.

이사야가 이걸 발견하고 난 뒤에는 그야말로 톱으로 켜서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내가 죽는다는 그것이 아무 의미 없어요. 왜냐하면 사나 죽으나 주님의 보좌 앞에 있기 때문에. 사람 죽어 봐야 주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결합시켜서 악한 자는 악한 자의 부활로 나올 것이고 선한 자는 선한자의 부활로 나올 것이 뻔한데 죽고 사는 게 뭐가 문제이겠습니까? 진리가 뭔지 알아버렸는데.

여호와의 거룩, 그 거룩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보좌 쪽에서, 어린양의 보좌 쪽에서 계속해서 약속이 턱을 넘어서 계속 이쪽으로 어두운 세상 쪽으로 흘러넘치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이사야가 ‘이 세상이 더럽다. 아무리 전해도 안 듣는데 누가 갈꼬?’ ‘제가 가겠나이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은 제 소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구석에 있든지 바닷물 속에 들어가더라도 하늘 끝에 가더라도, F16타고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도 하나님의 보좌가 있고 달에 가도 하나님의 보좌가 거기 있고.

하나님의 보좌라는 조명발에서 피할 수 있는 구석진 곳은 어느 한곳도 없어요. 심지어 마귀가 득실거리는 해인사 대웅전에서도 거기서도 주의 보좌입니다. 해인사 주지의 머리, 파랗게 깎아서 빛나는 그 대머리 뒤에 보좌가 있다니까요. 거기서 해인사 주지를 만나는 게 아닙니다. 사람을 만나는 것이 아니고 진리와 만나는 거예요.

‘주지, 헛된 생각 하지 말고 예수 믿으세요. 당신 지금 주의 보좌 안보이나?’ 진리와 함께 만나요. ‘나는 오늘 유명한 해인사 주지 만났다.’ 이렇게 사람하고 만날 필요 없어요. 이사야의 경우에는 거룩한 보좌가 전 세계를 펼치고 있다는 이런 안목에서 이사야가 펼쳐진다면 예레미야는 그 보좌가 어두운 구석에 내려왔을 때 그 거룩한 하나님의 모습이 순한 어린양의 모습으로 점차 변해가서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심지어 죽인다고 협박받는 모습으로 주님께서 예레미야와 함께 있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보여주는 겁니다. 심지어 고향사람들에게서.

그렇다면 예레미야가 전하는 이것은, 이사야가 보았던 거룩한 보좌 앞에서의 그 순결함, 그 거룩함이 지상에 내려왔으니까 그만큼 더러워지고 훼손되겠습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아주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순한 어린양의 모습이 어떤 모습인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3절에 보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아, 순하지요?

요새 대우증권거래소 가보세요. 거기서 화면 보고 있는 사람들, ‘삼성전자가 얼마 올랐나?’ 하고 보고 있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하면 아무도 안 듣습니다. ‘순하다’는 레벨이 어느 레벨인지를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이거 교회가 안 믿습니다. 교인들도 안 믿어요. 교인들도 지금 누가 누가 영악스러운가, 영악스러움 대결하고 있는데 교회조차 순하다 하는 것,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등신’이라는 뜻이에요, 교회 내에서도. ‘심령이 가난해야지. 왜? 난 복된 자니까.’ 이걸 뒤돌아서면서 ‘빙신!’합니다. ‘나 주님 때문에 애통해야지. 왜? 그게 복이 있으니까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어이구 쪼다!’ 이래 됩니다.

순한 목사, 목사취급 못 받습니다. 교인들이 목사가 오게 되면 ‘숫자 얼마 불릴 겁니까? 교인들 얼마나 증가시킬 겁니까? 얼마나 사업가의 기질을 발휘할 것입니까?’ 교인들부터도 그 목사가 영악스럽기 짝이 없는, 다시 말해서 100프로 악마의 영을 가진 목사를 원합니다. 순한 예수님, 어린양 닮은 사람은 사절합니다.

목사 뽑을 때는 국민일보 기독교란에 이렇게 해야 돼요. ‘순한 양 같은 목사는 사절합니다.’ 만약에 순한 목사가 와서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됩니다.’ 그거 가지고 일 년 내내 해 보세요. 그 다음해에 잘려 나갑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느냐?’ 교인들이 십일조 내고 아까운 돈 내면서 교회 온 이유가 뭐냐 하면 성공할 수 있는 비결과 축복받는 비결을 내놓으라고 오는데, ‘여러분, 그것은 교만한 겁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해야 됩니다.’ 하면 세상에 그 교회 문 닫지요. 교회 될 리가 없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마음이 청결한 사람 이 세상에서 못살아납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이것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천국에서나 통할 이야기지 이 세상에서 이것은 남한테 밉상 받는 인간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방금 읽었던 이 산상설교의 팔복을 자녀들에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용기가 과연 부모들에게 있느냐, 이 말입니다. 부모는 자기새끼 볼 때마다 ‘너는 성공해야 된데이. 이 성공 못한 부모의 한을 담아서 너는 곱빼기로 성공해야 된데이.’ 자녀가 침대에서 ‘엄마 기도해줘’ 하면 “그래 기도해줄게. ‘하나님 아버지, 애통하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안 합니다.

예레미야는 흐르는 큰 강줄기에 이미 포함된 사람이에요. 이렇게 포함되면서 외부적으로 무엇을 비춰주느냐 하면 장차 오실 메시아가 바로 나 같은 사람과 똑같은 심성으로 온다는 겁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 메시아 이후에 하나님의 백성 될 사람들도 예레미야와 이사야 같은 사람만 백성이 된다는 이야기에요. 그러니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한테 이것은 아주 무서운 이야기에요. 예수님 이후에도 예레미야처럼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 된다는 구절이 어디 나오느냐 하면 마태복음 10장 16절에 나옵니다.

이것은 유명한 구절인데 ‘내가 너희를 보냄은 마치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는 양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라.’ 참 이 ‘순결’이라는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인지요. ‘나는 이제 순결 할래.’ 이러면 ‘나는 차라리 그만 살래. 나는 더 살고 싶지 않다.’라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 주어지느냐 하면 그동안 ‘내가 나를 살려야지.’ 라고 했던 그런 기억은 퇴출당하고 그 기억자리에 예레미야의 기억, 하나님이 갖고 있던 경험이 그 사람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육적으로 살게 되면, 육적으로 사는 그것도 나쁘지만 무엇을 자꾸 추방을 시키느냐 하면 예수님처럼 인간되는 방식을 내 쪽에서 자꾸 추방을 시키는 게 돼요. 추방을 시킨다는 말은 뭐만 남기겠다는 말이냐 하면 ‘나는 이 세상에서 남들처럼 성공하고 그 성공한 힘으로 즐기겠다. 돈이 없어서 못 즐기니까 내가 성공해서 돈 번 뒤에 즐기겠고 그 즐기는 것 중에 하나가 교회 가는 것이다.’ 하는 식으로 살아가는 그 사고방식이 자꾸 본의 아니게 자꾸 예레미야를 욕하고 이사야를 욕하고 예수님을 욕하고 스데반집사를 쪼다라 하고 사도바울을 미쳤다고 하고, 자꾸 그런 식으로 주님이 주시는 그 귀한 구원의 체험과 기억을 완강한 나의 기억, 나의 추억 때문에, 나의 고집 때문에 강제로 퇴출시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본문 맞지요. 예레미야가 자기 고향사람한테 밉상 받잖아요. 끝으로 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같은 그런 사람을, 어린양 같은 예레미야를 왜 만들어서 이 땅에 보내주는가? 마태복음 13장 47절, 48절에 보면 참 무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좋은 고기 나쁜 고기 나온다는 거예요. 제가 화요일에 부산강의 하면서 이걸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물에 있는 물고기에서 과연 그물이 셉니까, 물고기가 셉니까?’ 물었어요. 그물에 갇힌 물고기는 그물이 더 세요. 물고기는 그물 밖에 못 벗어납니다. 따라서 좋은 그물에 갇힌 것을 우리는 행복하게 여기고 감사해야 합니다. 예레미야같이.

빠져나가려고 해도 좋은 그물에서 못 빠져나가요. 마찬가지로 나쁜 그물에 갇힌 악마한테 갇힌 이 물고기는 자기가 아무리 목사로서 흉내 내고 십자가, 언약 이야기 다 해도 본인이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어떻게 할 줄을 몰라요. 그냥 목회하면 그걸로 남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으로 하루하루 때우는 겁니다. 본인 신앙생활이 안돼요.

다시 말해서 자기는 목회해서 성공하려고 하는 겁니다. 목사로서 성공하려고 하는 것, 남들 보기에 그럴싸한 목사 되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냥 진리로 좋아하는 그 자체가, 그냥 신앙인 되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성공할 것, 성공 다 해버렸는데, 순한 어린양으로서 이미 완료인데, 순한 어린양의 자세로써 목회에 성공하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마귀자식이 있어요. 목회 성공하는데 순한 어린양으로 하면 목회 성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노림수가 더러워요. 제가 십자가마을에서 분명히 이야기했거든요. “강사, 강사 하지 말고 글 좀 남겨라. 글 남길 때 ‘나는 이런 신앙생활 합니다.’ 라고 글 좀 남기라.” 이 말이지요. 쥴리라는 사람의 그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그 글을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요.

본 사람이 없어도 예수님의 피로 시작해서 피로 끝납니다. 그 사람 목회자 입니까? 아니에요. 그냥 평신도에요. 그런 글이라도 좀 쓰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아, 저 사람은 목사 이전에 신앙생활, 진리로 즐거워하는 사람이구나.’ 표가 날 것이 아니냐 이 말이지요. 그럼 같이 은혜 받고….

‘사람들을 모아주면 내가 강사로 서겠다.’고 하는 거예요. 뭔데? 뭔데? 뭘 노리는데? 그게 순합니까? 그게 순결이에요? 그게 심령이 가난한 겁니까? 자기가 자기 인생을 만들지 맙시다. 주께서 주신 그 십자가 피라는 그물에 갇힌 고기는 그 자체로서 이미 예수 안에서 천국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속이려고 해도 주님은 우리한테 안속아 넘어간다는 것을 이제 알았습니다. 주께서 만들어 내는 사람과 자기가 그것을 흉내 내는 사람,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주께서는 속아 넘어가지 않으오니, 차라리 우리가 주님 말씀 앞에서 늘 죄인인 것을 고백할 수 있는 주님의 십자가의 그물에 갇힌 그런 고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