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17. 16:16

주님과의 논쟁 (예레미야 12장 1-3절)

주님과의 논쟁   

2009년 12월 16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2:1-3

(렘 12:1, 개역)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렘 12:2, 개역)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렘 12:3,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 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에게 따집니다. 일단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고서는 본격적으로 따집니다. 어떻게 해서 악한 자들이 만사형통하고 하나님을 배반한 자들이 평안하게 사는 이유가 뭐냐고 분통을 터트리면서 따집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들의 실상을 하나님께 보고합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을 인정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이미 마음으로는 벌써 멀어진 상태라고 일러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그들이 혼나서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으니 하나님의 공의를 그들에게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의 이런 심정은 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들어있는 마음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신약성도들이 알고 있는 바를 모릅니다. 반면에 신약의 성도들은 구약의 사정도 알고 신약의 상황도 압니다. 구약에서 예레미야 및 구약성도들의 한계가 무엇인고 하니 자신을 자기 구원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즉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기에 자신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잘 아는 바와 같이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은 우리가 평소에 예상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도저히 사람으로서 납득하기 불가능한 그런 속성을 지니시고 우리 곁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상식적으로 착하면 복받고, 나쁜 짓하면 벌받는 그런 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예레미야가 속해 있는 구조와 신약 성도들이 속해있는 구조가 확연히 다릅니다. 예레미야는 구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익히 아는 바를 근거로 하나님께 따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구약의 사람들 뿐만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그런 정의의 구조입니다.

사람들은 이 징벌과 축복이 주어지는 구조를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조의 전부라고 여긴 것입니다. 장차 오실 메시아는 이 구조를 도리어 전복시키는 방식으로 우리 곁에 오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구조는 무엇입니까? 쉽게 말씀드려서 이러합니다. 여름 낮에 차가운 돌 위에서 손자가 낮잠을 자고 있으면 할머니가 베개와 요를 가지고 와서 어린 손자의 머리를 받혀주고 요를 등 밑으로 조용스레 밀어서 차가운데 자지 않게 합니다.

그럴 때, 이 이런 손자는 여전히 자고 있습니다. 스스로 베개를 잡아당긴다든지 요를 자기쪽으로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할머니께서 하는 일에 그냥 자신을 내맡겨버립니다. 이럴 때 참으로 기분좋습니다. 자고 있는 자가 본인이 작업해서 요 위에 다시 눕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신약의 성도도 구약의 사람들처럼 같은 인간이기에 같은 구조로서 하나님과 상관하고자 합니다. 즉 선한 자는 만사형통하고, 악한 자는 뭘해도 일이 안 풀리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조치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성도에게 하나님께서 밑에 뭘 깝니다. 새로운 구조를 깔아넣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상도는 요처럼 그 구조 위에 놓이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천국에 그 성도를 들여보낼 때는, 성도의 행함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깔아주신 그 구조를 살살 당기는 방식으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나님 방식이 너무 획기적으로 잘 믿으려 하지를 않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믿는 자들에게 대박입니다. 큰 축복이요 엄청난 행운을 받은 경우가 됩니다. 이로서 성도는 전에 가졌던 구조, 즉 예레미야가 생각했고, 기존의 인간들이 능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구조를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이런 요가 등 밑에 깔리는 혜택이 없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구조로 그냥 질주하고 그 구조 안에서 세상을 다 지십니다.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1:24에서는 ‘내어버려 두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그들은 그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구조 위에 마음대로 신나게 뛰놀도록 방치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구조 자체가 이미 그들을 더욱더 정죄케 하는 구조라는 점과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이 구원하는 구조를 전혀 받아본 적이 없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노리는 바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져도 결코 복받음이 줄어들지 않고 도리어 더 많이 누리게 되니 받은 복이 훼손되지 않는 이상 구태어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낼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사고방식이 이미 하나님께서 실시하신 구원의 구조로부터 버림받은 상황인 것을 모릅니다. 물론 성도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인간들의 상식적인 축복과 저주의 기준을 버리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는 하나님께서 그냥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구조에 적응토록 합니다. 그렇다면 새로운 구조를 무엇을 의미합니까? 로마서 6:1-2에 보면,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미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겁니다. 성도를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로 만들어 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도가 원하는 축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아예 예수님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과 사귀면서 살도록 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면, 예수님의 지상 생활이 곧 성도가 통과해야 하고 감당해야 될 생활 태도가 됩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자’로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굽지 않는 마른 오징어와 아예 포로 만들어져 갈기갈기 찢어진 오징어와 비교해 보세요. 갈기갈기 찢어진 오징어포는 납작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이미 죄인으로서 예수님과 사귀고 동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말씀에 대해서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는 모든 말씀에 대해서 책임을 더 이상 묻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당연히 행함에 대한 보상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함에 의해서 은혜로 제공되는 것들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동행이 지속되도록 지속적으로 예수님께서 성도를 관리하십니다. 그냥 내어버려두는 법이 없습니다. 새로운 구조에 맞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는다는 말은, 바로 자신이 이미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사셨던 그 정신인 십자가 자시는 심정 안에 함께 들어온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 것 하나, 감사하지 않을 게 없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죽어도 갈 수 없는 천국에 예수님의 죽음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동행의 은혜를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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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6 우리교회수요설교녹취(렘 12:1-3/주님과의논쟁)
 
2009-12-17 15:51:13 녹취 : 오용익

20091216우리교회수요설교/예레미야 12장 1-3절/주님과의 논쟁(이 근호목사)

(기도)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요동할 것이로다.”

하나님, 하나님 보좌 앞에서 공개되지 않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하나님의 보좌 밑에서 가릴 것도 아무것도 없고 숨을 곳도 없는 줄 압니다. 이 시간 우리 있는 그대로 나왔사오니 우리가 숨길 생각 하지 말고 주의 보좌와 천사들과 찬양하는 그 소리가 우리 영혼까지 미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우리가 이 시간 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범사에 늘 감사해야 될 근거는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는 겁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하여 인가? 철없는 우리 자신을 위하여 죽으신, 그 죽으심을 생각해 볼 때 모든 것이 감사 안할 것이 없고 다 고맙고 다 공손해지고 다 겸손해 지는 겁니다. 주의 죽으심, 그 값있는 생명을, 철없는 우리를 위해서 그냥 주시기 위해서 죽으신 그것을 우리가 잊지 말도록 다 같이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평생토록 인생주제로 삼는 것이, 어떻게 하면 살아남느냐, 그거였습니다. 잘 살아보느냐, 성공해서 살아보느냐, 으스대면서 살아보느냐, 남한테 부러움을 받으면서 살아보느냐, 사는 것이 우리의 주제가 되었고 꿈속에도 나타납니다. 하지만 철없는 우리를 위해서 주님께서 엄연히 죽은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요,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대신 죽인 것이 분명한 현실인데 우리가 이 엄연한 현실을 외면하고 살아왔습니다. 다시 한 번 주님의 죽으심과 결부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주님의 덕분으로 주님의 공로로 살아간다는 것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2장 1절에서 3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0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2:1-3
“여호와여 내가 주와 쟁변할 때에는 주는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패역한 자가 다 안락함은 무슨 연고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 마음은 머니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아시고 나를 보시며 내 마음이 주를 향하여 어떠함을 감찰하시오니 양을 잡으려고 끌어냄과 같이 그들을 끌어내시되 죽일 날을 위하여 그들을 예비하옵소서.”

예레미야가 분통이 터졌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요새 말로 하면 자기들이 ‘예수 잘 믿는다.’고 ‘교회 착실히 잘 섬기고 잘 다닌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 잊지 않고 하나님 늘 모시고 섬기면서 산다고 자부를 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가 보기에 아무리 봐도 점점 더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하고는 상관없이 점점 더 하나님의 뜻을 멀리하고 있어요. 옅어지고 있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사가 소멸되고 소실되고 있습니다.

마치 처음에 교회 나온 소녀가 은혜 받았다고 온 방에 십자가와 교회 관련된 스티커를 붙이고 팬시점에서 기독교계통에서 나온 것들을 사서 자기 방을 치장을 하다가 한 6개월 1년 지나면서 고 3 공부한다고 할 때에는 그게 전부 다 동방신기를 비롯해서 아이돌 그룹의 것들로 다 바뀌어서 기독교 냄새는 하나도 안 나면서 하는 말이 ‘엄마, 나, 그래도 하나님 안 잊었어.’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것처럼, 분명히 말은 하나님은 섬긴다고 하는데 점점 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듯이, 막 질주한다고나 할까요, 막 달아나듯이 하나님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는 장소로 쏜살같이 달아나기에 급급한 그러한 모습을 띠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예레미야가 그 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느냐 하면, 그동안 자기가 말씀을 전하고 복음을 전한 그것이 전혀 실적이 안 나타나고 자기가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것도 분하지만 또 뭐가 있느냐? 12장 1절에 보면 하도 분통이 터지니까 하나님께 질문한 거예요. 어떻게 해서 ‘악한 자가 만사형통’하느냐 이 말입니다.

‘악한 자가 만사형통하고 패역하고 배반한자가 마음이 편안하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근심 없이 불안감 없이 넉넉하게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더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들이 그렇게 살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이 그런 식입니까?’라고 묻는 거예요. 12장 1절에 ‘제가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는 것을 인정해드립니다.’ 하고 이야기가 시작되니까요.

예레미야나 우리나 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다만 차이점은 예레미야는 구약사람이고 우리는 신약에 있는 사람이에요. 구약 사람들은 신약을 모르고 신약의 성도는 구약에 있는 사람까지 알고 신약시대에 우리에게 주어진 것도 알고 둘 다를 알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시대에 예수님을 통해서 왜 우리에게 예수님이 찾아와야 되고, 도대체 예수님이 우리에게 혜택을 주시는 것이 뭐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주신 것이 뭐냐를, 구약의 예레미야가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것까지 우리가 접수를 하면서 ‘아하, 예레미야가 궁금해 하는 것, 답답해하는 이 해답까지 우리에게 이미 넘겨주셨구나. 우리는 이런 질문 이런 답답함에 대해서 이미 해답을 가진 입장이구나.’ 하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구약 사람들의 한계, 아직까지 예수님이 십자가 지기 전까지의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로움, 하나님의 공의로움의 기준을 어떤 기준에서 정했기에 이런 답답함을 자초했는지를 알아야 되고, 두 번째는 우리가 신약시대에 와서 그런 답답함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마저 이미 해결이 되어 버렸다는 겁니다.

어째서 그러냐? 구약입장에서 봅시다. 구약성도들이 생각한 것이 뭐냐 하면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안 되고 말아먹고 버려야 되고 하나님 믿는 사람은 만사가 형통하다.’할 때 그들은 뭘 느끼느냐 하면 ‘아하, 내가 알고 있는 이 구조, 하나님과 성도가 맺은 이 관계가 이것이 진짜 정답이구나. 그래 이 정답을 내가 붙잡아야지.’라고 붙잡을 수 있는 근거가 되지요.

‘역시 내 생각이 옳아. 그럼! 나쁜 짓 한 놈은 벌 받고 착한 일을 하면 복 받고, 맞아. 역시 내가 생각한 그것이 맞는 거야.’라고 확신을 가지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면 구약성도들이 뭘 놓치느냐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 예상 밖에 오셨다는 사실을 놓치게 되는데 그 사실이 그들의 구조 안에 들어갈 자리가 없어요. 

메시아가, 우리 예수님께서 예상 밖에, 우리는 도저히 생각도 못하고 상상도 못한, 우리가 알아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게 엉뚱한 식으로 축복이나 구원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구조 안에서는 들어갈 자리가 없지요. 예레미야에게 이런 난처한 지경이 생긴 것은 예레미야에게 어떤 의미에서 복입니다.

‘네가 생각했던 구조, 박살내라. 그거 시효 끝났다. 유통기한 끝났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상식인 것을 내가 능히 알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로운 구조라는 것, 체제로 알고 있지만 이제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예레미야의 이 구조가 잘못된 구조라면, 이것이 하나님과 백성의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착한일 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다.’는 이것이 하나님과 성도의 바른 관계가 아니라면 그러면 신약에 와서의 바른 구조는 뭡니까, 물으신다면 로마서 1장에 잘 나와 있어요.

‘내어버려두사’ 하는 겁니다. 내어버려두는 구조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가짜들, 버려야 될 자들, 저주 받을 자들에게 그냥 내어버려 두시는 겁니다. 그걸 세 글자로 줄이면 ‘내비 둬!’ 하는 겁니다. 그냥 내버려 두라는 거지요. “아니, 하나님! 그들을 내버려두면 그들은 좋다고 설쳐대고 활개 칠 것인데요. ‘봐라. 하나님 안 믿어도 복만 잘 받더라.’ 그렇게 설쳐댈  건데요.” 이렇게 걱정하잖아요.

이런 것이 어려운데요. 쉽게 하겠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버려두라는 말은 신약에서 자기백성을 건질 때 우리보고 면접시험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면접시험을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발바닥에 뭐가 깔리느냐 하면 우리를 태우고 갈 발판이라는 이름의 구조가 우리 안에 우리 허락도 없이 우리 안에 쑥 들어와 버려요.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이 참 고맙다. 어른들이 참 고맙다.’ 느낄 때가 언제냐 하면, 큰 것이 아니고 아주 사소한 것이 있었어요. 여름에 낮에 잠이 와서 그냥 눕게 되면 누군지 모르는데 분명히 어른의 손인데 베개를 가져다가 머리 밑에 받쳐줄 때, 잠결에 느끼죠. 눈은 안 떠져요. 잠결에도 느끼는 것은 누군가 내 머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는 것, 아주 작은 거지요.

나는 자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베개를 잡아당기거나 베개를 달라고 한 적이 없어요. 그냥 나는 가만있는데 베개가 들어와요. 또 어떤 어르신네는, 우리 할머니라고 말은 안하겠습니다만, ‘하이구, 야야, 이 차운데 그냥 자믄 입 돌아간대이.’ 하면서 몸을 들어서 밑에 요를 깔아줄 때, 그게 바로 구조 아닙니까?

우리는 아무것도 한 적도 없어요. ‘나는 이게 필요한데’라는 생각을 한 적도 없어요. 여기 예레미야에 나와 있는 이 가짜들도 내버려 두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치해도 우리는 데모할 입장도 안 되고 우리가 ‘왜 날 천당 보내주지 않습니까?’ 하고 시위할 수 있는 권리도 없어요.

우리는 그냥 내버려둔 채 지옥가도 괜찮은 존재에요. 그런데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따뜻한 요에 베개를 우리 밑에 쫙 깔아버렸어요. 깔고 난 뒤에 그 요위에 있는 우리를 보고 따지거나 우리를 닦달 내는 것이 아닙니다. ‘너 똑바로 했어, 안 했어?’ 이걸 따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깔아준 그 요만 살살 잡아당기면 우리는 그 요 위에 실려서 눈 떠보니까 회복실이고 눈 떠보니까 천국이에요.

이것은 사람들이 너무 큰 횡재라서 믿지를 않아요. 이게 너무 큰 횡재라서 사람들이 감히 믿을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럼 사람들이 뭘 믿는가? 오늘날 예레미야 같은 구조, 옛날 구조 ‘하나님이여, 착한 일을 하면 만사형통해야 되는데….’ 착한 일을 해도 잘 되는 것도 없고 조용한 것은 제가 참을 수 있는데 나쁜 짓을 한 자가 오히려 만사형통할 때는 사람이 속이 뒤집어 집니다.

이것은 약이 올라도 보통 약이 오르는 것이 아니에요. 복음을 포기한 교회는 날로 부흥되고 복음 전하는 교회는 날로 쪼그라들고, 이럴 때 사람은 분통을 터뜨려요. 꼭 예레미야 같이 됩니다. ‘하나님, 정의로운 것 맞지요? 하나님 공의로우신 것 맞지요? 하나님은 복음 위주인 것 맞지요? 그러면 제가 한 번 묻겠습니다.’ 꼭 이래 나와요.

‘어떻게 정의로운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습니까?’ 더 쉽게 노골적으로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 복음을 안 듣고 거부하는 사람에게 주께서 매를 좀 때려줘야 그들이 정신을 차려서 ‘아이고, 우리가 잘못 되었구나. 우리가 문제 있구나. 천부여, 손들고 이제 옵니다.’ 할 것이 아닙니까?” 하고 아예 우리가 시나리오를 그렇게 짜잖아요.

저놈이 몇 대 맞아서 ‘하나님, 제가 복음을 버려서 이런 매를 맞았으니까 이제 복음 알고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해서 돌아오는 드라마를 우리는 무척이나 보고 싶어 하는 거예요. 그런 드라마가 보고 싶다는 이 말은 우리가 은연중에 예레미야 같은 옛 구조, 구약에 근거한 구조를, 그 버릇을 아직도 못 버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구조에 의하면 구원받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절대로 내어버려두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반면에 지옥 갈 사람들은 ‘내비 둬! 내비 둬!’ 어떤 짓을 하든지 간에 그냥 내버려두는 거예요. 로마서 1장 24절에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네가 어느 정도까지 개판되는지 한 번 보자. 네 실상, 네 본성을 감추지 말고 다 드러내라.’ 그래서 내가 내어버려둔 자의 고백과 내가 내어버려두지 아니하고 간섭한 자의 그 구조가 어떤 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그 차이를 점점 더 뚜렷하게 벌어지게 하는 겁니다.

예레미야의 문제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의 기존의 구조를 중심으로 삼아서 자기로부터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떠난다고 본거예요. 그런데 장차 메시아를 보내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예레미야와 생각이 달라요. 장차 오실 예수님 중심으로 구조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예레미야에서 멀리 떨어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 보여줄 새로운 구조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겁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주님께 가까이 올수 있는 사람은,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모세, 아브라함, 그 누구도 자신해서 뚜벅뚜벅 주님에게로 걸어서 올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여름에 낮잠 자면서 자기가 손 집어넣어서 베개 넣고 이불 집어넣고, 그러면 그것은 잠자는 것이 아니고 잠에서 깨어 있는 거잖아요.

잠자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반드시 밑에 까는 요, 베개는 반드시 외부인이 그 밑에 깔아줘야 돼요. 깔아줄 때 잠이 깹니다. ‘아하, 우리 어머니가 우리 할머니가 내가 차가운데 자도록 그냥 내어버려두지 않았구나. 그렇게 자면 입 돌아간다고 주의하라고 깔아주시는구나.’ 그것을 사랑으로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구조가 없는 사람은 본인이 갈증이 나서 계속해서 본인이 원하는 사랑과 본인이 원하는 정의로움과 본인이 원하는 자기위주의 구조를 계속해서 시험하고 측정하는 거예요. ‘이렇게 개판으로 행동해도 벌 안 받는구나.’ 그 구조로 계속 가도록 ‘그래. 나는 확실히 알았어. 확신해. 하나님 안 믿어도 벌 안 받는다. 나는 결심했어.’ 그 구조를 유지하도록, 그걸 고집하도록 계속해서 방치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내어버려 뒀다는 말은 그들이 벌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깔아주는 그 따뜻한 요, 그것을 믿는 데서부터 점점 더 멀어질 때, 뭔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사실로부터, 평생을 다 갚아도 다 갚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고마움이 따끈따끈하게 다가오지 않고 항상 자기 설치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주고 자기가 애쓰고 노동하는데 의미를 준다면 그 사람은 교회 열심히 충성해도 이미 그 사람은 내어버린 사람이에요.

이미 주께서 버리고 포기한 자입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지옥 갑니까? 그것은 아니고요. 그렇다면 구조가 바뀌어야 하는데 이 예레미야 같은 구조가 신약의 성도의 구조로 어떻게 바뀌는가? 그 바뀌는 것이 로마서 6장에 보면 이래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라는 말이 나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이 말이 너무 어려워서 지금도 이 뜻을 파악하는 사람들이 제가 보기에는 거의 없어요.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인데 어떻게 죄에 거하겠느뇨.’(롬 6:1)라고 이야기했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멀리 나가 있는 우리 진주가 뭐가 먹고 싶다고 하느냐 하면 오징어를 여자 스타킹처럼 납작 눌러서 말려놓은 그것이 먹고 싶다는 거예요.

망사 스타킹 같은 그 오징어를 보면서 생각해 봤어요. 저 오징어를 누가 저렇게 완전히 납작하게 눌러서 갈기갈기 찢어지게 했는가? 그래야 잘 찢어지면서 맛있거든요. 보통 오징어는 구우면 양쪽으로 휘어서 말려지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납작하게 눌러서 이미 찢어진 채로 구워놓은 것인데 그걸 보내달라고 해서 부쳐준다고 하고 있는데, 그 오징어는 갈기갈기 찢어졌어요.

제가 아까 우리가 낮잠 자고 있는 사이에 요를 밑에 넣었다고 하니까 일단 기분은 좋은데, 사실은 우리 구조가 만만치 않은 구조거든요. 현재 이 구조가 둘이 되면 안 되거든요. 이 구조가 하나가 다른 하나로 바뀌어야 되는데,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말은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쉬워요. 우리를 죄인으로 간주하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께서 죄인에게서는 기대를 일체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이 성경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만 뜨면 나의 착함에 나의 열심에 기대를 겁니다. 그러면 주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이미 그 구조가 갈기갈기 찢어놓은 오징어포가 되어야 되기 때문에 우리를 오징어포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찢어놓을 때 우리로 하여금 ‘너는 안 죽었다. 너는 생생하게 네 고집이 살아 있구나. 너는 너 밖에 몰라. 너는 말씀도 안 지키는 것이 너는 방종해.’라는 모든 성경에 나오는 모든 것이 더 이상 우리에게는 저촉이 안 되도록 만들어요. 미리 갈기갈기 다 찢어놓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우리의 답변은 뭐냐, ‘그래. 나는 죄인 맞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는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다.’ ‘죽었다 안 카나 그래! 내 죽었다 안 카나!’ 이래 나오는 겁니다. 만약에 우리가 안 찢어지게 되면 우리는 하나하나가 다 살아 있어서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이여, 왜 저 사람은 교회도 안 나오는데 저렇게 만사형통하고 나는 교회 나오는데 만사가 이렇게 안 됩니까?’라고 불평불만하고, 어려운 말로 ‘욕동’이라 하는데, 욕망과 충동이 자꾸 우리 안에서 춤을 춰요.

그러면 누가 괴로우냐 하면 내가 괴로워요. ‘하나님, 잘해보려고 하는데 잘 살아보려고 하는데, 잘 믿어보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왜 팍팍 안도와주십니까? 우리 가정 하나 되려고 하는데 왜 안도와주시고….’ 계속해서 그렇게 나와요. ‘예수도 안 믿는 저 가정은 만사형통하는데 우리 가정은 왜 이 모양 이 꼴입니까? 하는 족족 안 되고 주식 값은 폭락하고 땅을 사면 땅값 내려가고 ….’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게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라고 하는 그 구조가 우리를 떠받치고 있고 우리를 누르고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모르는 겁니다. 이걸 성경에서는 아주 쉽게 이야기합니다. ‘사귐’이라고 하는 겁니다. 누구하고 사귀냐 하면 예수님하고 사귀는 거예요. 오늘 설교를 간단하게 하면 이렇습니다.

예레미야는 뭐냐? ‘예수 잘 믿는 사람에게 복 주시옵소서. 돈 주시옵시고 하나님 잘 믿는 사람에는 만사형통하게 해 주시옵소서.’ 이러고 있는데 신약에서 하나님은 ‘내가 나를 줄게, 나를. 너희들은 돈이라든지 행복, 이런 것을 달라고 하는데 진짜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예수 그리스도 자체가 너와 함께 사귀는 것이고 너와 함께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라는 겁니다.

통째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을 주신다고 하면, 그게 어디에 써먹는데요? 취직하는데 쓸데가 있습니까, 공무원 시험 치는데 써먹습니까? 예수님이 세상 어디에 필요합니까?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잖아요.

예수님이 어디에 필요 하느냐 하면, 바로 옛날 구조를 아직도 고집하고 그 습관에 물들어 있는 인간을 오징어포 밀듯이 밀어서 ‘너는 나와 함께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내가 너에게 죄에 대해서 책임을 안 묻는 것처럼 너도 세상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 하는 식으로 쫙쫙 찢어 버리는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안 되면, 예수님과 더불어, 함께 있음으로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아니면 우리는 쉴 새 없이 세상에 대한 유혹과 시험과 악마의 고발과 정죄에 힘들어서 살수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우리에게 뭐가 일어나느냐 하면 ‘예수 믿는 티가 나야 되는데, 예수 믿는 표가 나야 되는데, 뭔가 잘되고 만사가 형통해야 될 텐데….’ 이러한 시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들이닥칩니다.

사실은 우리가 예수님 자체를 받은 그것이 전부 다 인데, 더 이상 필요치 않은데, 그분이 또 계속해서 우리한테 행하는 것은 교만한 생각을 계속해서 찢는 그 주특기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니까요.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말은 ‘더 이상 죄에 대해서 너한테 물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우리의 잘잘못에 대해서 시비를 안거는 대상이 되었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오게 되면 우리는 죄인이 돼버려요. 십자가를 통해서 죄인 되었으니까, 예수님이 함께 있다는 말은 예수님 자체가 우리한테 어떤 책임을 묻지를 않아요. ‘그냥 같이 가자 응? 너는 나하고 같이 가자.’ 이런 식으로 같이 가는 거예요.

요한복음 13장 37절에 보면 베드로가 ‘제가 목숨 바칠 테니까 천국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천국은 네가 죽어도 못 오는 곳이다.’ 합니다. 천국은 베드로가 죽어도 못가는 곳입니다. 천국은 죽어도 갈수 없는 곳이에요. 천국은 죽어도 갈 수 없는 곳입니다. 자살이요? 자살해도 못 들어가요.

다시 말해서 내가 나를 찢는다든지 내가 나를 골백번 죽여도 나는 천국 못갑니다. 그래서 새로운 구조에서는 예수님이 찾아와서 우리를 예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죽여 버리는데, 그냥 우리가 죽어버리면 그냥 죽는 것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으로 죽여 버리면 그것은 우리가 사는 것이 됩니다. 더 이상 죽을 이유를 우리에게 발생시키지 않아요.

더 이상 우리는 죽어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죽을 이유가 없어요. 우리는 지옥 갈 이유가 없습니다. 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것이 더 이상 세상을 부러워 할 하등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아직도 세상이 부럽고 남들 잘 되는 것이 부럽고 애들 공부 잘하면 부럽고 남들 집안 화목하면 부럽고, 왜 이렇게 부러워하느냐 하면 아직도 옛날 구조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옛날 구조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는 내어버려 두는 것이 아니고 다시 한 번 예수그리스도가 네 모든 것을 책임을 지고 대신 죽었다 하는 사실을 알려줌으로 말미암아 ‘너는 죄에 대해서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을 정도로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된다.’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더 드리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해요. ‘목사님,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제 설교나 강의를 듣고 나서 꼭 따라오는 질문은 그거예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되는데 왜 목사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자는 이야기를 왜 안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 능력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동의하는데 그 다음에 예수 믿고 나서는 점점 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야 하는데 왜 그 본받자는 이야기를 뺍니까? 그러면 이 목사의 복음은 반쪽복음, 1/2 복음이지 복음의 전부가 아니잖아요.’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어요.

당연히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죠. 그 사람은 구조가 없어요. 구조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힘으로 구원되려고 하는 사람이에요. 찾아오는 구조가 없어요. 자기 등허리 밑에 주님이 은혜로 깔아준 게 없어요. 그 사람은 아직까지 안 찢어졌어요. 죄에 대해서 찢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그 사람은 찢어진 오징어포가 아니라 그냥 산 오징어에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십자가 안에 들어가야 그게 형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땅에 오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십자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이미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 의롭다 하신 자를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맏아들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의 이 땅을 지나간 모든 아버지의 형상은 뭐냐? ‘주여, 제가 죽겠나이다. 십자가 지겠나이다.’ 하는 거예요. 십자가로 들어가게 되면 모든 게 은혜이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사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형상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자기 받은 모든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 보다 더 뛰어난 성령의 열매가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요.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길이와 높이와 넓이는 십자가 안에 이미 내가 놓여 있다는 이 사실로 인하여 주변에 깔려 있는 것이 내가 만든 구조가 아니라, 전에 있는 구조가 아니라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구조 안에서 이미 내가 새로운 형상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형상을 본받는 것이 아니고 형상대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

죄에 대해서 죽은 자, 형상대로 만들어지고 있는 거예요. 그 형상은 바로 십자가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처럼 그 길을 가게 된 것에 감사하는 것, 그게 진정한 형상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죄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인데 우리는 착하게 산 어떤 보상을 기대했습니다. 나쁘게 살면 벌 받고 착하게 살면 덤으로 보너스 받는다는 이러한 잘못된 구조를 아직도 견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하나님이 주신 십자가의 피를 헛되이 만드는 것이 우리가 아닙니까? 예수님 자체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보게 해 주시고 주님과 함께 동행 하면서 우리가 이미 죄에 대해서 죽은 자고 주께서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날마다 거저주신 그 은혜를 깨닫게 하는 이 사랑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