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21. 18:00

위장된 의도 (사무엘하 14: 1- 3)

위장된 의도

2010월 3월 1일                       본문 말씀 : 사무엘하 14:1-3

(삼하 14:1, 개역)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향하는줄 알고』
(삼하 14:2, 개역) 『드고아에 보내어 거기서 슬기있는 여인 하나를 데려다가 이르되 청컨대 너는 상제 된 것처럼 상복을 입고 기름을 바르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오래 슬퍼하는 여인 같이 하고』
(삼하 14:3, 개역) 『왕께 들어가서 여차여차히 말하라고 할 말을 그 입에 넣어주니라』


하나님은 다윗 가문을 통해서 다윗 언약의 진수를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다윗 언약을 통해서만 나타나는데 그 뜻은 다윗 가문의 힘의 쟁투 속에서 피어나게 됩니다. 힘 좋아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지만 자신의 본색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힘없이도 오로지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그 와중에서도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당연히 힘 좋아하는 자는 저주받는 쪽이요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깊어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분류가 성사되는 과정에서 다윗의 가족사는 인간들은 힘과 힘의 충돌로서 번져나갑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속성은 오늘날에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소위 다들 하나님을 찾는다는 교회가 권력의 장으로 그 본색을 드러내게 됩니다. 정치하는 곳이 되어버립니다. 힘없는 자는 힘이 없어 맥없이 밀리지만 그 밀리는 현장에서 비로소 다윗과 함께 하신 하나님께서 동행하고 계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힘 자랑하는 세력권 속에서 이해됩니다. 과연 우리는 힘을 원치 않고 있는 겁니까 아니면 우리에게 힘이 쏠리는 것을 축복이라고 해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의 신화에는 메두사라는 여자 괴물이 나옵니다. 머리카락 한올 한올이 다 징그럽게 꿈틀대는 뱀입니다. 뱀을 머리 하나 가득 지고 있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인간 세계가 이러합니다. 한 시민 한 시민 모두 다 자기 밖에 모르는 뱀들입니다. 그런데 그 뱀들이 모여서 도시를 이루고 국가 사회를 형성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하나로 움직이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각자 움직입니다. 이것은 국가 뿐만 아니라 개인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 군상들을 하나로 모으고 흩어지고 하는 것은 사건이 벌어질 때입니다. 사건으로 인하여 우루루 하나가 되었다가 다시 사건이 터지면 다시 각자 자기만을 위한 토굴을 만들고서는 쏙 들어가버립니다. 아파트에 있는 방마다 자기 토굴입니다. 들어가서는 안에서 문을 잠급니다. 밥 먹을 때만 다시 쏟 나옵니다. 그러다가 연속극 볼 때 다시 각자 방에서 기어나옵니다. 메두사들을 키우는 동물농장입니다.

요압은 다윗왕의 마음을 읽고 있습니다. 다윗왕의 마음이 압살롬에게 향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날마다 압살롬을 위해 슬퍼했다고 말합니다. 요압 장군은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아하. 다윗왕은 압살롬이 비롯 자신의 형을 죽였지만 그를 다윗왕의 후계자로 생각하는구나”라고 말입니다. 암논은 범죄함에도 불구하고 다윗 왕의 징계가 없음으로 왕권의 계승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점에 대해서 압살롬도 마찬가지입니다. 암논을 죽임으로서 왕위 계승자를 죽인 것으로 생각하고 싶은 것입니다.

다윗의 왕자 서열이 이러합니다. 첫째가 압살롬에서 죽임을 당한 암논이요 둘째가 길르압이요 셋째가 압살롬입니다. 요압 장군은 다윗 언약의 본질을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힘의 실체로 파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정치적 권력의 모양새로 이스라엘에 임재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따라서 요압이 자신의 힘을 계속 발휘하기 위해서는 차기 이스라엘의 권세가 누구에게도 이전되는지를 사전에 체크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일단 압살롬에게 다윗 왕이 신경 쓰고 있다고 여기고 이런 환경이 압살롬과 다윗 모두에게 깊은 공로자의 입지를 깊게 가져갈 기회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위장된 연기에 능한 여인하나를 데려다가 왕 앞에 보내는 마치 일반 백성이 사적인 하소연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다윗의 내사에 관여하게 됩니다. 그 위장된 과정에 등장하는 하소연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여인에게는 사랑하는 두 아들이 있는데 어느날 둘이 맹렬하게 싸우다가 하나가 그만 맞아 죽고 맙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은 형제를 죽인 그 아들을 그냥 살려두어서는 안되고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서 그 살아있는 아들마저 내놓아라 해서 어미로서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왕에서 하소연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명기 17:8-9과 신명기 21:18-21을 종합적으로 놓고 우리가 다윗 왕의 입장에 되어 판결을 내려봅시다.

“네 성중에서 서로 피를 흘렸거나 다투었거나 구타하였거나 서로 간에 고소하여 네가 판결하기 어려운 일이 생기거든 너는 일어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실 곳으로 올라가서 레위 사람 제사장과 당시 재판장에게 나아가서 물으라 그리하면 그들이 어떻게 판결할지를 네게 가르치리니”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 그의 부모가 그를 끌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즉 하나님의 엄정한 법은 인간들이 얼마나 사사로운 정과 이해관를 초월해서 시행되어야지만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거룩으로 무장될 수 있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회라는 점이 부각되면서 그 업무의 중앙에는 제사장이나 재판관이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다윗왕을 바라보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왕이 다윗언약에 준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최고 재판관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것은 곧 제사장이나 재판관이 개인적 입장을 대변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로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거룩한 나라를 거룩되게 유지해야 될 책무를 지닌 자라고 보는 겁니다. 곧 왕의 말이 진리와 공정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의 이야기는 단순히 가족사에 대해서 상담하려 온 정도가 아니라 이스라엘 내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죄를 어떤 식으로 제거하느냐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집니다.

최고 재판장이 되는 왕이 난처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의로움에 의해 왕의 사적 영역이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법의 보편성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만 실은 요압의 입장에서는 왕의 판단과 권력에서도 한계가 있음을 빌미로 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압살롬 쪽으로 권력의 추가 기울어지게 작용하고 싶은 의도가 깔려있는 겁니다.

다윗왕은 이 여인에게 다음과 같은 판정을 내립니다. 마을사람들이 요구가 부당한 것은 아니라 최고 재판장인 내가 그 아들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령한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는 겁니다. 바로 요압이 여인을 보내어서 듣고 싶은 답변도 이 답변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보편적인 공의성이라는 것도 권력 따라 요동친다는 현실성을 권력 이전의 정당성을 보장하는 담보로 삼아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로서 다윗은 이미 자신의 가문이 힘의 대결장으로 변질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 기대할 것이 사라지는 겁니다. 가문의 세상적으로 더러운 동네가 되었습니다. ‘다윗 언약’을 빌미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존재하는 그 자리가 얼마든지 더러운 힘의 자리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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