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4. 21:39

다말과 암논의 연애 사건 (사무엘하 13: 1- 2)

다말과 암논의 연애 사건

2010년 4월 4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3:1-2

(삼하 13:1, 개역)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다윗의 아들 압살롬에게 아름다운 누이가 있으니 이름은 다말이라 다윗의 아들 암논이 저를 연애하나』
(삼하 13:2, 개역) 『저는 처녀이므로 어찌할 수 없는 줄을 알고 암논이 그 누이 다말을 인하여 심화로 병이 되니라』


‘아름답다’, 그리고 ‘처녀’라는 요소의 매치가 왜 미혹거리가 되는 겁니까? ‘추한 유부녀’는 왜 총각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수는 없을 걸까요?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이 이 근원적인 문제까지 밝혀주십니다. 아름다운 것은 당연히 원하고, 추한 것은 당연히 멀리한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 왜 아름다움과 추함을 우리 임의대로 정해놓고 판단하느냐라는 문제까지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몸이 우리가 다루고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몸이 해야 될 것을 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이 우리를 데리고 다니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몸이 있는 이상, 세상의 모든 것은 우리 몸이 유혹에 발동되어 설쳐서 구성된 세상입니다.

즉 세상 전부를 자신의 몸의 욕망의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암논은 ‘아름다운 처녀’를 사랑합니다. 이러한 시도가 남들 보기에는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으니 본인의 몸은 그런 것을 개의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이성이나 정신은 자신의 몸을 감당하지 못해내기 때문입니다.

몸이 움직이면 이성과 정신은 그저 따라갈 뿐입니다. 몸이 행하는 짓을 변명이나 하면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암논은 배다른 자기 누이 동생의 아름다움에 미혹받아 차지하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몸입니다. 몸이란 자신이 주체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러했습니다.

인간이 옳고 그름을 차후에 알았다 할지라도 몸이 발산하는 욕구를 잠재울 수는 없습니다. 처음 인간은 순진무구한 존재였습니다. 사랑이니 미움이니 하는 것을 알지도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암논의 죄악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말의 변화에 초점이 있습니다.

다말은 처녀입니다. 아직 뭐가 사랑인지 뭐가 미움인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암논의 완력 앞에서 비로소 그녀는 사랑이 무엇이며 미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처녀성이 상실하면서 주어진 것은 사랑의 힘과 미움의 힘입니다. 즉 인간의 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을 준수할 수 있는 몸이 되지 못하고 사랑과 미움의 힘에 의해서 휘돌리는 대상물로 전락한 것입니다.

먼저 건드린 자가 임자가 된 셈입니다. 죄가 인간을 먼저 건드렸습니다. 이로서 인간은 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마치 몸에 병이 들게 되면 그 때부터 몸이 병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 몸을 관리해서 ‘병든 몸’으로 사용합니다. 즉 몸 전체가 병을 발현하는 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죄를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힘으로 죄 짓고, 아니 짓고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체가 죄의 몸입니다. 따라서 암논이 다말을 만난 것은 이미 죄의 몸이 된 자가 아직도 사랑과 미움이 뭔지도 모르는 자와의 만남입니다. 죄의 몸이 완력으로 다말을 피해자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로서 인간의 세계는 전부 죄의 힘과 힘의 마주침이요 흐름이요 만남이 되었습니다. 사기를 당해 본자만이 사기꾼이 되는 것처럼 인간 속에는 복수심이 뱀이 똬리를 틀듯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미움으로 충만하면서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세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을 ‘미움의 피해자’라고 우기지 마세요.

벌써 사랑과 미움의 구조 속에 놓여지게 된 자체가 본인의 몸도 이미 사랑과 미움의 구조 밖으로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인간성이란 본인도 미처 모를 정도로 악랄하기 그지없는 본성들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사람이 누구를 사랑할 때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마치 자기 속에는 천사의 마음씨만 가득 들어있는 것인줄 압니다.

참으로 자신을 순수한 심정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정신세계일 뿐이며 몸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그 사람을 차지하는 그 순간부터 예상 밖의 미움 감정은 인간의 몸을 휘감아 돕니다. 이것조차 사람마음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자신을 사랑한 것 뿐입니다. 자기 말고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우깁니다. “전에는 나는 너를 사랑했노라”고 말입니다. 물론 마음 같았으면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몸은 결코 자신의 마음에 순응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마음이 몸에 요구에 부응할 뿐입니다.

어느새 암논의 마음 속에는 다말에 대한 미움이 가득찼습니다. 본인이 원하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몸이 그런 감정을 유발한 것입니다. 사무엘하 13:15에 보면, “그리하고 암논이 그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한지라 암논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대신 다말의 마음은 사랑을 알고 버림받았다는 참담함으로 가득찼습니다. 차라리 사랑이라는 힘을 몰랐으면 미움의 힘이라는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다말은 암논으로 인하여 순진무구함에 벗어나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는 사랑과 미움의 구조 안에 같이 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십계명이나 율법이라는 하나님의 계시가 우리들의 일상성과 어떤 연관을 갖고 주어졌는지를 알아봐야 합니다. 사람들은 율법이 주어지면 마치 우리들이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은 우리의 몸이 발산하는 죄를 들추어내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일체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폭로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우리 몸에서 행사하는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몸이 발휘하신 사랑입니다. 요한일서 4:8-10에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즉 이제부터 사람의 운명이란 자신이 벌리는 복수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랑에 의해서 죽느냐 사느냐가 결딴납니다. 따라서 압살롬의 벌리는 누이동생을 위한 복수극은 전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화목제물에서만 우리를 사랑이 제공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힘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 힘으로 우리의 피해를 복수하지 않게 하옵시고 오로지 화목제물쪽으로만 눈 돌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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