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3. 29. 07:53

다윗의 이름 (사무엘하 12:26-31)

다윗의 이름  

2010년 3월 28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12: 26-31

(삼하 12:26, 개정)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삼하 12:27, 개정) 『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삼하 12:28, 개정)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삼하 12:29, 개정) 『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삼하 12:30, 개정)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삼하 12:31, 개정) 『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


사적인 감정으로 전쟁하는 그 전쟁은 하나님의 전쟁하고 아무런 상관이 없고 이스라엘하고도 상관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유일하게 참 하나님을 드러내는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이 없다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모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나타난 움직이고 활동한다면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치 못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과 전쟁을 벌리게 하심으로서 단순한 차이남 정도가 아니라 필히 저주받을 민족들이 왜 반드시 저주받아야 하느냐를 알려주시고, 또한 축복받아야 될 자들은 왜 필히 축복받아야 하느냐를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인간들은 사적인 요구사항을 수용해서 벌리는 전쟁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나님만이 아시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여호수아 5:13-15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이르되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고 했습니다.

전쟁에 하나님이 개입했다는 자체가 이미 전쟁은 종결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전쟁에 누가 제일 방해하는 줄 아니십니까?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 자신들의 사적인 의견과 견해가 하늘나라의 정신만이 담겨야 될 그 전쟁을 인간적인 복수심으로 가득찬 전쟁으로 타락시켜버리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결국 멸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으로부터 혜택만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수기 33:51-53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 그 땅을 점령하여 거기 거주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소유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

뿐만 아니라 신명기 2:33-35에 보면,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를 우리에게 넘기시매 우리가 그와 그의 아들들과 그의 모든 백성을 쳤고  때에 우리가 그의 모든 성읍을 점령하고 그의 각 성읍을 그 남녀와 유아와 함께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진멸하였고 다만 그 가축과 성읍에서 탈취한 것은 우리의 소유로 삼았으며”고 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전쟁은 이스라엘 내부와 외부 전부를 관할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情)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하늘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벌어지는 전쟁인 인간의 땅에서 인간적인 전쟁으로 전화되어 버립니다. 감정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바뀌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갓난 유아들마저 사정없이 살려두지 말고 다 죽이라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느냐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여전히 자기네들이 전쟁을 하는 것이 하나님 전쟁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바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화성에 아바타족이 살고 있다고 칩시다. 그들은 비타민같은 알약을 먹고, 먹는 즉시로 배가 불러서 새끼를 낳는다고 칩시다.

이 광경을 본 우리 지구인들은 그 아바타족의 생식방식에 대해서 비웃게 됩니다. 너무 기계적이라니, 생명이 천시될 우려가 있다니 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지구인들이 10개월 동안 산고를 거쳐서 나오는 자식이라는 귀하고 소중하다고 간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광경을 보고 계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 지구인들의 관심사는 결국 자기 자식을 낳고 낳아서 자신의 본조 본능을 충족하는데 있지 아니한가? 너희들도 내가 보이기에 아바타족 같다”고 하시면서 진멸할 때에, 우리가 이러한 결정을 수용할 수 있는 안목이 과연 우리 안에 형성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즉 육으로 사는 인간들이기에 뭐든지 육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심지어 천국까지 육적인 공간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로마서 14:17에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남기시는 모든 말씀이란 필히 인간들이 자기 육적인 양상으로 신을 생각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고 실시되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의 방해자로 이미 인간들을 상정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도 공간적으로 땅에 있느냐 하늘에 있느냐를 따지려고 합니다.

안식일이란 하나님 창조의 기념일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지정하는 날입니다. 보통날을 안식날로 바꾸는 것은 시간만 순차대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다운 내용이 채워져야 합니다. 여기서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 개념과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시간 개념이 다릅니다. 인간들은 시간이란 자신이 어쩔 수 없다고 여기고 그 시간에 맞는 내용을 자기네 쪽에서 만들어 채울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관을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알리고 보여주는 시간으로만 쓰여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때’, 즉 사건의 발생을 두고 말합니다. 사건이 일어나고 그 다음 사건이 발생되는 그 간격을 시간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 사이에서는 오로지 먼저 번 일어났던 사건이 시간의 질을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시간이 먼저 있고 사건으로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먼저 생기고 그 사건의 질을 지속하는 흐름을 시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따라서 안식일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먼저 창조를 개시하셨고 그 창조가 마감되는 날 안식일로 규정하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안식하신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의 ‘안식’의 의도를 가지고 줄 곧 이 세상을 통치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안식, 즉 ‘창조 완성’의 의도에 위배되는 것은 모조리 저주받게 됩니다.

예수님과 밀밭 사이를 함께 걸어가는 그 제자들은 이미 안식일 완성을 혜택을 입고 있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과의 동행이 곧 새로운 질이 투입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이와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저주와 축복을 가름하는 사건이 되는 겁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얻어진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사건과 흔적을 증명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성도가 가는 일생의 자국들은 모두 주님께서 우리를 데리고 다니신 흔적들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업적에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경우가 나옵니다. 민수기 32:42에 보면, “노바는 가서 그낫과 그 마을들을 빼앗고 자기 이름을 따라서 노바라 불렀더라”

이런 전통이 오늘 본문의 요압에게서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28절에 보면, “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압 왕이 하나님께서 다윗과 언약을 맺어서 앞으로 모든 일이 ‘다윗 언약’ 안에서 진행됨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늘의 뜻이 다윗왕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이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 되려면 그 흔적을 자신에게로 돌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행함이 우선이 아니라 그런 행동이 나오도록 하신 하나님의 사건이 우선인 것을 만방에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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