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9. 21:46

말씀의 위력 (누가복음 7장 2-10절)

본문 : 누가복음 7장 2-10절
제목 : 말씀의 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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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강-눅7장2-10(말씀의위력)-luk100718

말씀의 위력

2010년 7월 18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7:2-10

(눅 7:2, 개역)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눅 7:3, 개역)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눅 7:4, 개역)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눅 7:5, 개역)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눅 7:6, 개역) 『예수께서 함께 가실새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눅 7:7, 개역)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눅 7:8, 개역)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눅 7:9,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눅 7:10, 개역)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오늘 본문이 나타내는 현장에는 예수님이 계시고 그리고 유대인들이 등장하고 그리고 백부장이라는 이방인 장교가 등장합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고 유대인들이 이방인 장교만 있는 자리라면 우리들이 부담없이 끼어들어서 “신앙이 어떠니 저떠니, 예수님이 이런 분이니 저런 분이니” 하면서 우리의 의견을 내놓고 안 질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정말 예수님이 친히 계신 현장이라면 안 끼어들려고 할 것입니다. 마치 지각한 농땡이 학생이 담임선생님이 안 계실 때, 교실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행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들은 자신이 믿을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만을 시도하려고 합니다.

쉽게 생각해서 손에 가위를 가졌다고 봅시다. 그리고 그 가위로 자신쪽에서 시도해서 ㅅ하늘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것을 다 싹뚝 싹뚝 끊어봅시다. 즉 기도하는 믿음도 끊어버리고, 전도하는 믿음도 끊어버리고, 몫돈으로 헌금하는 믿음도 끊어버리고, 예배드리는 믿음도 끊어버리고, 성경공부하는 믿음도 끊어버립시다.

그러면 남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지요. 불신자가 되어 있겠지요. 그렇지요. 불신자가 되어야 그게 바로 신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위들고 설친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3:20에 나오는 말씀, 즉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실제 상황이 가위로 끊었다고 해서 끊어지겠습니까? 안 끊어질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아무리 우리 쪽에서 끊고 또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바로 그것이 ‘선물로 받은 하늘로부터 직접 부여받은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말하기 위해서는 필히 가위로 끊는 작업이 수반되어야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믿음과 이 이방인 장교의 믿음을 대조시키십니다.

한쪽은 지옥 가게 하는 믿음이고 다른 한쪽은 천국 가는 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참으로 천국가는 사람이라면 필히 지옥 가는 믿음이 어떠한 지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지옥으로 몰아넣는 믿음은 유대인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믿습니다. 그들의 육신의 능력을 믿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이 말씀을 해석해서 그 해석해 놓은 바를 실천에 옮겨서 자신들을 구원받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들의 해석에 따를 것 같으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지 않은 이방인들은 지옥갈 수 밖에 없는 저주의 백성이라는 겁니다. 그 말은 곧 이미 천국의 TO는 자신들 아브라함 혈통에 의해서 꽉 차버렸다는 겁니다.

이방인에게 돌아갈 정식 티켓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구세주이자 심판주이신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그 어떤 해석이든 인간이 자신의 혈통이나 육신의 가능성에서 나온 믿음이라면 결코 구원될 수 없고 지옥가야 하는 운명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신을 살리려 한다면 모조리 실패한다는 겁니다. 인간에게는 나올 수 있는 모든 믿음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떡해야 합니까? 그 방법은 자신이 자신을 관리해서는 아니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말씀처럼, “이래로 가라하면 가고 저리로 가라 하면 가는‘ 그런 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은 자신의 육신에게서 자신이 빠져나와야 한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를 관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폭파시키는 바에 맡겨야 하는 겁니다. 그 이유가 히브리서 2:14-15에 나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믿음을 가지고 설쳐도, 결국에는 자기가 자기를 계속 살려내고 구원하기 위해서 자기 육신을 사용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그렇게 되면 그 육신의 주인인 악마의 협박에 계속해서 시달리게 된다는 겁니다. 즉 죽을려고 하는 순교조차도 것도 실은 육신 안에서는 계속 살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가 될 뿐입니다.

어쨌든 육신이 있는 한 ‘죽기가 무서워’ 악마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바로 이 이방인 장교의 종이 병이 들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관여하시는 흔적이라고 보는 겁니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기 이전에 산 여기저기에 구멍이 뚫리고 수증기가 피어나오고 땅이 흔들리는 것이 ‘화산의 징후’가 되듯이 사람의 육신이 아프고 힘든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자기 육신 안에서 살고자 시도해서는 아니된다는 하나님의 말씀의 징후입니다.

이 육신은 곧 폭발할 것입니다. 산산조각 날 육신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의 육신에 문제점이 있음을 말씀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밖으로 자아를 뽑아내고 탈출시켜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살고자 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우리 성도를 다루는 방식은 매일같이 목조르듯이 죽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끊임없이 부딪히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마치 젤리 속을 헤엄치는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자기 것을 가졌다고 여기나 실은 그 안에 품은 것은 연약하게 허물어져야 하는 육신 뿐입니다. 마치 벗어놓은 양말처럼 안으로 마나 바깥으로 마나 남는 것은 양말 그 자체 뿐입니다. 껍데로만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인간의 육신이나 혈통이란 아담의 육신의 일부 분배받은 것입니다. 마치 피자 한조각 얻은 것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아담에게 주어진 그 모든 뻑뻑한 운명을 필히 우리들도 겪게 됩니다. 인간의 육신에 병이 들었다는 말은 그 배후에 죽음의 세력에 붙잡혀 있다는 말입니다. 죽음이 작렬하는 그 세력이 우리 인생을 둘러치고 쏘아대고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명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죽이시기도 하고 살리시기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 하시도, 아프게 하시기도 하시고 낫게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에게 맡기는 삶이요 천국으로 데려가는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21:15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지 말고,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하시는 분에게 다 맡깁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를 관리하지 말게 하옵소서. 죽어도 살려주시는 예수님에게 일임한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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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강-눅7장2-10(말씀의 위력)-luk100718

2010-07-19 17:01:44   녹취 : 오용익 


036강-눅7장2-10(말씀의 위력)-luk100718-(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7장 2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누가복음 7:2-10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을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원하시기를 청한지라 이에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가로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저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함께 가실쌔 이에 그 집이 멀지 아니하여 백부장이 벗들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에도 군병이 있으니 이더라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를 기이히 여겨 돌이키사 좇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보내었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 보매 종이 이미 강건하여졌더라.”


본문에 예수님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백부장이라는 것은 백 명의 군사들의 책임자니까 요새 말로 하면 중대장쯤 됩니다. 그 다음에 유대인들, 장로들이 나옵니다. 우리 교회 교인들이 이 자리에 있다 합시다. 솔직하게 우리가 여기에 합세할 맘이 듭니까? 이 모임에 백부장과 장로들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쉽게 그 모임에 가담하려고 할 거예요. 왜, 인간들만 있으니까.

만약에 ‘백부장이 있고 유대인들이 있는데 그 자리에 예수님도 계시더라.’라고 한다면 그 자리에 가고 싶지 않을 거예요. 지각한 학생이 언제 학급에 들어오느냐 하면 선생님이 조회 다 마치고 다시 교무실에 가면 ‘샘 갔나? 갔어?’ 하면서 살며시 가방 던져놓고 들어오지요. 그런데 선생님이 조회를 하고 있으면 그때는 못 들어옵니다. 질책과 꾸중을 들을까 싶어서입니다.

본문의 현장에 유대인이 있고 백부장이 있다면 같은 인간들끼리니까 ‘나도 한소리 해야지. 나도 믿음 좋은 척 해야지.’ 하고 촐랑대면서 참여하겠는데 거기에 주님이 계신다면 ‘주님, 만나고 싶었습니다. 주님 보고 싶었습니다.’ 하고 얼른 그 현장에 가기가 겁이 날 겁니다. 왜, 질책 당할까 싶어서.

‘너 인생 왜 그리 사는 거야? 구차스럽게 왜 그렇게 사는 거야?’ 하고 날 나무라면 내 위신을 찾을 길이 없잖아요. 나도 나름 열심히 살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같은 인간들끼리면 ‘너는 뭐가 잘났는데.’ 하고 대꾸는 할 수 있겠는데, 그게 아니고 그 현장에 예수님이 계신다면 우리는 예수님이 가고 나신 뒤에 그 현장에 얼굴 내밀 거예요.

‘갔어? 갔나?’ 하고 등장할 겁니다. 학생이 담임선생 무서워하는 것처럼 우리가 나보다 더 월등하고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 만나기를 겁내고 있다는 것, 이거 믿음 아니거든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인간들끼리 누가 믿음 좋으냐, 시합해서 승자는 천국가고 패자는 지옥 가는 식으로 인간들끼리 게임하고 시합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축구, 야구, 그런 게임에 환장을 하는데 제가 알기에는 그리고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말 잘못했습니까? 맞지요? 구원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어요. 그러면 친구도 없고 사람이 없는 곳이라도 누구만 있으면? 예수님만 있으면 ‘예수님 보고 싶어요.’ 하고 달려들어야지요.

학생이 평소에 담임선생님을 사랑했다면 ‘선생님 있나?’ ‘계신다.’ ‘그럼 내가 가야지.’라고 선생님이 보고 싶어서 달려들 겁니다. 그런데 학생치고 선생님 좋아하는 사람 아무도 없잖아요. 저희들끼리 좋아하잖아요. 학교에 가는 목적이 뭡니까? 선생님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들끼리 놀려고, 시간 때우면서 놀려고 가잖아요.

교회가 뭡니까? 교인들끼리 놀려고 교회 가잖아요. ‘나는 예수님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 그래서 나는 예배가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다는 것을 저주하고 싶어. 왜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예배가 없는 거야. 왜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예배가 없는 거야. 나는 주님이 보고 싶은데.’ 갈수록 이런 사람이 적어집니다.

‘샘 갔나? 갔어?’ 이런 식으로 주님 없는 교회라면 맘껏 다니고 예수님 이야기만 하는 곳이라면 설교시간 다 끝나 가면 오고. 누가 구세주입니까? 교회가 우리를 건지는 겁니까, 예수님이 우리를 건지는 겁니까? 교회가 건지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건지십니다. 본문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그리고 유대인이 아닌 이방나라 로마 장교 한사람을 대비시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그냥 ‘음, 너희들 있구나. 볼일 잘 봐라.’ 하고 그냥 나가신 것이 아니고 그 현장에서 뭔가 한 소리를 남겼어요.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 있는 사람 못 봤다.’ 한 소리 툭 던지고 갔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믿으려면 똑바로 믿어. 이 장교처럼 믿어야 믿음이야. 너희들은 믿음도 아니야.’라는 말씀을 툭 던지고 간 겁니다. 똑같은 말씀이 마태복음 8장에도 나오는데 거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소위 하나님, 하나님 찾는 사람은 지옥 불에 들어가고 자기가 하나님백성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천국 가지고 못한다.’는 겁니다. 말만 천국백성, 천국백성 노래를 불러요.

그것은 그냥 자기가 하는 소리일 뿐이고,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기대, 자기야망이고 소망일뿐이고 실제로 천국 가고 안 가고는 우리 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천국에 가냐 마냐 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 손에 달린 것이 아니에요. ‘천국 간다고 장담하는 너희들은 지옥에 가고 너희들보기에 지옥 간다고 확정지은 이 장교가 천국을 차지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 천국갈수 있는 대단한 믿음이 내 안에 있는 믿음과 일치되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천국 이야기한다고 해서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이야기했잖아요. ‘이런 믿음 아니면 천국 못 간다.’고 작정을 했어요. 구원자는 주님이고 심판 주는 주님이기 때문에 문제출제를 하신 분이 이것이 정답이라고 하면 그것이 정답이에요.

토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거 외운다고 제가 애먹었습니다. 그 책에 보면 그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서 ‘여러분, 천국 보내 줄 테니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고 하니까 예수님이 직접 오셔서 ‘그거 아니거든! 그거 교회가 아니거든. 구원은 내가 하지 교회가 하는 것이 아니거든.’ 하니까 총회니 노회의 어르신들이 하는 말이 ‘주님은 어른답게 그냥 뒤에 빠져 계세요. 우리가 알아서 하게 우리한테 맡겨 놓으세요. 우리가 사람들 모아서 천국 보내주는데 왜 자꾸 어르신이 직접 나섭니까? 비켜나시고 우리에게 하청을 주라니까요. 우리가 천국 보내는 여행사인데 우리한테 맡겨놓으면 우리가 천국 보내고 수수료는 먹고 천국은 보내주면 되지 않습니까?’ 이런 대목이 나와요.

그것은 작가가 러시아 그 당시의 썩은 교회들을 보고 하는 말이 ‘목사들의 관심이 돈에 있다.’ 하는 거예요. 제가 글 하나 썼지만 교인들이 펄럭일 때마다 돈이나 흘릴까 싶어서 거기 보는 거예요. 그들에게 좋은 신학은 다른 것이 아니고 돈이 되는 신학은 좋은 신학이고 돈이 안 되는 신학은 나쁜 신학이 되는 겁니다.

순 복음신학이 왜 좋은 신학이냐 하면 그것이 돈이 되기에 좋은 신학이 되는 겁니다. 이제는 말하고 싶다. 그것뿐입니다. 하나의 점포요 가게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는 믿음이 뭐냐, 그것은 유대인의 것과 비교해서 ‘저들같이 믿으면 안 되거든.’라고 하는 거예요. ‘믿음이 이것이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배경과 환경, ‘저들처럼 믿으면 안 되거든. 저들의 믿음은 지옥 가는 믿음이거든.’ 하고 지옥 가는 믿음을 먼저 이야기해주고 그것과는 다른 믿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하늘나라 가는 것이 아니고 주여, 주여 하는 가운데 ‘지옥 가는 주여’가 있고 ‘천국 가는 주여’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리고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지옥 가는 주여’가 어떤 믿음으로 부르짖기에 지옥에 가는가, 천국 가는 사람은 그것도 아울러 알아야 되고 그것도 획득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지옥 가는 믿음이 뭐냐, 믿을 수 있는 믿음은 다 지옥 가는 믿음이에요. 왜냐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거든요. 그야말로 인간이 육으로 믿을 수 없는데 믿어지는 것은 천국 가는 믿음이고 육으로 거뜬히 믿을 수 있는 믿음은 지옥 가는 믿음이 되는 겁니다.

중요한 것을 너무 간단하게 이야기해버렸네요. 길게 늘여봅시다. 가위를 가지고 뭘 끊느냐 하면, 인간이 믿을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을 다 끊어봅시다. 예를 들어 어떤 집사님이 기도를 열심히 기도했는데 철야하면서 기도했다고 한다면 그 기도했다는 것을 가위로 끊어버리는 거예요.

끊어버리면 기도와 천국과는 끊어지겠지요. 목돈이 생긴 어느 집사님이 헌금을 2천만 원을 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가위를 가지고 싹둑 잘라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헌금 2천만 원 하나도 안한 것이 되고 그 돈 가지고 술 마신 것처럼 되어버리고 기도 열심히 한 그것도 1분도 안한 것이 됩니다. 천 명을 전도했다? 그것도 가위로 잘라버립니다. 천명을 전도했다면 그 전도한 것을 믿기 때문에 그래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끊어버립시다. 냉면집에서 사리 끊듯이 다 끊어버립시다. 다 끊어버리면 남는 것이 뭐가 있을까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 믿을 수 있는 것, 육이오 때 폭탄이 떨어졌는데 주님께서 살려주셨다는 그런 간증들 다 끊어버리고, 병이 나았다는 이런 쓸데없는 것들, 이 모든 것을 끊고 다 끊어버리면 뭐가 되느냐, 불신자가 되겠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 그겁니다. 우리가 불신자가 되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나 혼자 웃으려고 하니까 미안스러운데요. 우리가 불신자가 돼야 돼요. 다 끊어버려야 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어지지 않는 것이 뭐냐, 빌립보서 3장 20절 같은 말씀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입니다. 이게 끊어집니까? 이게 안 끊어지지요.

‘나, 하늘의 안드로메다 별 땄다.’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키가 몇 센티나 됩니까? 안드로메다는커녕 로켓 올리는 것도 두 번이나 실패했는데, 통신위성 올리는 것도 실패했는데 무슨 안드로메다 별을 따옵니까? 안드로메다 별은 딸 수 있을지 몰라도 하늘의 시민권은 못 땁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가 모든 것을 끊고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너희 시민권은 땅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지라. 하늘에서 너희를 사랑한다.’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믿어진다면 진짜 그것이 내 믿음이 아니고 주님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면 우선 내 믿음부터 정리해야 됩니다. 가위 들고 내가 할 수 있는 전도, 헌금, 기도, 예배참석, 전부 다 끊어버려요. 전부 다, 다 끊어버리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라는 것은 믿어집니다.” 왜, 믿어지니까. 난데없이 믿어지니까.

이런 믿음, 가위로 끊어도 끊어지지 않는 믿음, 로마서 8장에 보면 주님이 준 사랑은 얼마나 질긴지 그 질김을 보여주기 위해서 환란, 핍박, 기근, 적신, 위험, 칼들이 막 들이닥치는 거예요. 마치 욥처럼 이요. 하루아침에 자식 열 명 다 죽고 재산 다 날아가고 자기 몸은 완전히 괴물의 몸같이 헐고 상해서 성한 데가 하나도 없고, 친구들이 저주하고 심지어 사랑하는 아내까지 저주하고 떠나버리고.

제가 『욥 안의 그리스도』라는 책을 썼지만 항상 욥을 생각해 보세요.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마귀하고 내기했습니다. 마귀는 말합니다. ‘욥이 가진 믿음은 자기가 만들어 낸 믿음입니다. 재산 꽤나 있고 자식들 하는 일 잘되고 있으니까 하나님 잘 믿는 겁니다.’라고 마귀가 우기니까, 마귀가 그런 식으로 인간을 지배했으니까 주님께서 ‘아니다. 욥은 내가 준 믿음을 갖고 있다. 내기 할까?’ 하니까 마귀가 ‘내기 합시다.’

‘됐나!’ ‘됐씸더’ 하늘나라 고스톱 친다고 땅에 있는 욥은 죽을 판국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으로 구원받는지, 아니면 욥 자기 믿음인지 양이 아니고 진짜 믿음의 질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서 그때부터 욥에게 시련이 들이닥치는 거예요. 사랑이요? 주께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이 믿음을 확인시키기 위해서 우리에게 사랑, 우정, 친구, 이런 것을 다 줘놓고 다 떨어지게, 잃어버리게 해요.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고 했습니까? ‘그대의 흰 손으로 나를 잠들게 하라.’ 사랑도 어느 정도 자기가 챙길게 있고 내놓을게 있으니까 사랑이지 아무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주제에 감히 사랑을 말해요? 여러분, 사랑을 깨보면 그 안에 힘이 들어 있습니다. 힘이 안 들어 있는 자는 사랑할 자격도 없는 거예요.

힘없는 인간은 이 사회에서 ‘너는 사랑할 자격도 없어.’ 하고 쫒아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등장한 이 현장은 이방인과 유대인 그 사이, 그 중간에 딱 서버려요. 예수님 십자가 지실 때 양쪽에 두 개의 십자가가 같이 섰잖아요. 양쪽이 두 십자가가 같이 천국 간 것이 아니고 한쪽은 지옥가고 한쪽은 천국 갔다 그 말이지요.

예수님이 등장하는 현장은 다 마찬가지에요. 등장하면 둘이 딱 대비가 되면서 그 현장이 천국이고 그 현장이 지옥입니다. 이쪽 보면 천국이고 반대쪽 보면 지옥입니다. 장교가 갖고 있는 믿음 갖고 있으면 천국이고 장교가 갖고 있는 그 믿음이 없는 유대인들은 지옥 가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믿음은 뭐냐, 혈육을 믿는 믿음입니다. 자기 육신을 믿는 믿음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능히 우리에게 납득이 되는 식으로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라고 오해한 겁니다. 그래서 어쨌든 간에 우리는 우리 육신이 발휘할 수 있는 것, ‘하나님의 말씀의 해석능력이라든지 이런 것은 버리면 안 된다, 열심을 내야 된다, 정성을 다해야 된다, 그 충성이 나한테서 나올 수 있고 보상 받는다.’ 이런 것을 붙잡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으로 능히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들의 육신의 해석에 의해면 ‘아브라함의 혈통인 우리들은 구원받고 천국가고 우리 빼놓고 나머지 족보들은 우리가 천국을 독차지하기에 그들은 천국에 자리가 없다.’라고 본 겁니다. 한쪽이 자리를 차지해버리면 다른 한쪽은 자리가 없어요.

의자 빼앗기 게임이 있잖아요. 의자는 두 개놓고 사람은 세 사람인데 노래 부르면서 서로 차지하기 하는 게임이 있잖아요. 천국의 자리를 한쪽이 독점하게 되면 한쪽은 국물도 없어요. 더 이상 들어갈 구멍이 없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알았습니다. ‘우리는 선택받은 사람이기에 선택받은 우리가 이 천국을 차지하는 것이 마땅하고 우리가 차지하게 되면 더 이상 이방인에게는 차지할 자리가 없다. 이방인들은 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 원칙을 그들은 알아먹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게 그들의 선택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나타나서 바로 그게 인간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거든요. 히브리서 2장에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의 육신바깥에서 너를 내쫒아라.’ 그 말이죠. 쉽게 말해서 ‘내 몸은 내 몸이다, 라고 했을 때 그 몸에 그냥 눌러 있지 말고 그 육체바깥으로 네가 빠져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거기서 그냥 눌러 살면 안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내 몸이라고 갖고 있는 그 육신을 못 이기기 때문에 육신이 ‘너 죽인다.’ 하면 겁을 내면서 ‘죽이지 마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살 수밖에 없는 이것이 인간이라는 거예요. 제가 말을 어렵게 했습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에 보면 ‘인간이 육신을 갖고 옴으로 말미암아 육신이 주는 그 죽음이 겁나서 평생토록 종노릇 하는 그것이 인간이다.’라는 겁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저, 예수 믿어요. 주여, 주여!’ 해도 ‘네가 육신에 그대로 있는 한 아무리 예수 믿는 척 하고 예수 사랑하는 척 하지만 사실 육신에 매여 있는 입장이라면, 육신, 어이! 죽인다, 하면 살려주세요, 하면서 대통령이 되었든 누가 되었든 어느 인간도 그 죽음에 꼼짝 달싹 못하면서 평생을 질질 끌려가면서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신세가 너희들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은 그 육신에서 자아를 빼내기 위해서 왔다는 겁니다. 처음 듣지요, 이런 이야기. 아까 제가 가위로 끊으라는 것은 뭐냐, 인간이 할 수 있는 기도, 전도, 예배참석, 선교하기, 헌금하기 이 모든 것은 아무리 해봐야 그 노림수가 뭐냐, ‘하나님 그러니까 제 육신 살려줘야 됩니다. 저 일찍 죽이면 안 됩니다. 저 오래 살고 싶습니다.’라는 생각이 기초가 되고 바탕이 되어서 ‘그저 죽기 싫다. 나는 더 살고 싶다.’가 몸부림 맘 부림 쳐서 외침으로 나오는 그것이 ‘주여, 주여!’라는 거란 말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런 예배, 기도, 헌금 안 받는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빨리 네 육신을 포기하고 거기서 나오라 그 말입니다. 인간이라 하는 육신은 꼭 양말 벗어놓은 것 같아요. 양말 벗어놓으면 어디가 안인지 어디가 밖인지 구분이 없습니다. 안이 밖이고 밖이 안 이예요. 전부 껍데기에요. 안에 뭐가 있는 듯이 보이지요.

인생이라 하는 것이 우리 안에 뭐가 있는 듯이 보이지만 안에 아무것도 없고 그냥 우리 껍데기가 연장된 거예요. 오므라들면 안이 되고 펴면 바깥이 돼요. 꼭 양말 벗어놓은 것처럼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육신이 허물어지고 떨어져나가고 붕괴되는 겁니다. 본문에서 백부장의 종이 아프잖아요.

‘병들었나이다’ 할 때 병이라 하는 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악마의, 죄의 운반체에 불과합니다. 병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병을 유발시킨 그 악마, 그 죄가 진짜배기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너는 죄 덩어리에서 나오라는 말이지요. 육신을 고칠 생각 하지 말고 육신을 포기하라 그 말입니다.

사람이 병들면 자꾸 나으려고 하는데 병이라는 것은 더 센 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 징조, 흔적입니다. 화산폭발하기 전에 주변 여러 곳이 막 새잖아요. 그것을 화산폭발징후라고 하잖아요. 연세 많으신 분들 보면 안 아픈 데가 없지요. 다 아프지요. 온 몸이 다 아프잖아요. 지금 화산폭발 직전입니다. 그렇게 날 때부터 애지중지했던 그 육신이 화산폭발처럼 완전히 산산조각 나버리는 거예요.

안에서 지금 마그마가 끓듯이 끓는 겁니다. 파스 몇 장 붙인다고 해서 별 효과도 없어요. 그대로 폭발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이 장교의 하인에게 병을 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냥 맨숭맨숭하면 자기가 양말 벗은 놓은 것 같은 그 자기 껍데기가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뭔가 부딪히면서 뜻대로 안 된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어요.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는 겁니다. 뭔가 젤리 안을 헤엄치는 것처럼 빡빡해요. 뭘 해도 여기저기서 부딪힙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진공이 아니고 여기로 가면 여기 부딪히고 저리 가면 저기 부딪혀요. 어떤 일을 해도 어떤 사업을 시작해도 거기에는 라이벌이 있고 경쟁자 있고 좀 장사된다 싶으면 시기하는 사람이 달려들고 돈 좀 벌었다 싶으면 사기 치려고 달려들고, 도대체 세상이 왜 이렇게 빡빡하게 꽉 차 있느냐는 말입니다.

관청에 가서 서류 좀 접수 시키면 왜 그렇게 빨리 안 해주는지, 옆 사람은 벌써 통과 된 것을 보니 뭘 먹였어요, 아는 사람 있으면 빨리 되는 것을 가지고 아는 사람이 없어서 몇 달 가고 몇 년 가고, ‘우리들 세상’이라고 해서 텔레비전에 나와서 호소해 봐야 일도 되는 것도 아니지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왜 그런지 애들도 마찬가지에요.

학기 끝나서 방학하면 또 방학숙제, 경쟁, 학교 끝나면 천국인줄 알았더니만 취직, 이만한 조건이면 쉽게 아가씨 만나서 결혼할 수 있다 싶은데 막상 결혼하려고 들면 키가 작으니, 가문이 시원찮니, 종교가 다르니……, 도대체 하나님께서 세상을 수월하게 살지 않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이 세상이, 우리가 육신이라는 것이 전체 하나의 육신덩어리 가운데 뚝 떨어져 나온 육신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저주받은 아담의 육신 가운데 피자조각처럼 저주의 조각을 분배받은 것이 ‘나’라는 육신입니다.

이 육신은 내 원대로 내 뜻대로 안되고 이미 주어진 이 저주받은 세상과 함께 저주받으면서 고통 받도록, 땀이 흐르도록, 해산하는 수고를 하도록, 우울증 걸리도록, 자살할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이 되도록 하는 그런 육신을 갖고 있으니까 빨리 너는 그 육신을 포기하고 나오라 그 말이지요.

나와 줘야 그 다음에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겁니다. 지금 이 장교는 자기 혈통을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제 아래도 군병이 있으니 이 더러 가라 하면 가고 이더러 오라 하면 오고 제 종 더러 이것을 하라 하며 하나이다.” 종과 주인 사이에는 어떤 관계냐 하면 종에게는 더 이상 ‘주인님, 이것은 제 것인데요.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주님이 너무 관여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하지 않을 때 그게 믿음 좋은 종이 되는 거예요.

종이라 하는 것은 주인한테 다 일임한 겁니다. 주인이 좋다면 나도 좋고 주인 계시는 곳이 내가 갈 곳이고 주인님 사시는 곳이 내가 살 곳입니다. 이 말은 이미 자기는 버릴 대로 다 버렸다는 겁니다.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내 인생 관리하는 겁니다.

10년 전인가 어떤 아주머니가 이런 발언을 해서 히트를 친 적이 있어요. 간통죄를 폐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논쟁이 있을 때에 어떤 아주머니가 간통죄로 고소를 당했던 모양이죠.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언제부터 나라가 내 몸 관리했나?’ 지금 그 여자는 관리하는 주체가 없어서 문제예요.

이게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지금 학급의 담임선생님이 없을 때 지각생이 들어가요. 왜, 저희들끼리 나는 내 맘대로 하고 너는 네 맘대로 하고 서로 자기 맘대로 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재미있게 살자는 거예요. 그래서 ‘샘 갔나?’ 하고 선생님이 교무실에 갔을 그 때에 기어들어오는 겁니다.

선생님이 있을 때 들어오면 질책 받고 간섭받거든요. 관리대상이니까. 오늘날 교회가 그런 데에요. 주님이 없는 교회를 골라가요. 왜,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인간들끼리 재미있게 살자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 설교했잖아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은 우리 인간들이 아닙니다. 교회도 아니고 목사도 아닙니다. 목사 모셔서 교회 세우고 간판 건다고 해서 그게 구원 안 해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이고 우리가 행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믿을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은 가위로 다 잘라버려야 돼요. 우리 육신이 할 수 있는 것, 내가 용기내고 결심해서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아예 우리 결심 포기하고 맡겨버립시다. 맡길 때에 나오는 것이 뭐냐, 주님께서 하신 약속에 맡기는 겁니다.

요한복음 5장 38, 39절에 보면,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인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이런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 성경 전체가 내게 대해서 증거 한다, 이것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인데 그 다음에 잘 놓치는 것이 나옵니다. 40절에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성경이 예수님을 향하는 그것을 아는데 그 안다는 그것을 내가 믿어버려요. 그러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알면 ‘내가 성경은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한다는 것을 믿는 겁니다.’라는 그 믿음을 가위가지고 잘라 버려야 돼요.

그거 믿는 것도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주님이 보고 싶다고 주님에게 가는 거예요.’ 그 아줌마는 국가가 내 몸 관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우리는 관리주체가 있어야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관리해버리면 우리가 우리를 걱정할 권리나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여러분 속에서 여러분을 날마다 내어 쫒으세요. 자꾸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육신을 쥐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지 말고.

주님께서는 답답한 거예요. 육신은 육신을 못 살립니다. 나의 행함이 나를 못 살려요. 그러니까 못 살리는 동네에 그냥 머물러 있지 말고 우리는 육신을 포기하고 거기서 바깥으로 나오면 돼요. 나오면 거기에 하나님의 새로운 육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께서 고맙게도 우리로 날마다 육신을 떠나게 만듭니다.

그게 뭐냐, 고맙게도 우리를 죽여주십니다. 지금 전혀 안 고맙다는 눈치인데, 매일같이 우리를 죽음으로 가까이 이끌어주셔서 우리가 떠나지 못하는 육신을 주의 약속과 힘으로 떠나게 하십니다. 떠나게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하면, 요한복음 21장에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합니다. ‘제가 믿을게요. 주여, 말씀하시면 제가 듣겠나이다.’ 이게 아니고, ‘성경과 신학을 이야기해주세요. 레위기를 강의해주세요. 제가 믿겠나이다.’ 이게 아니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합니다.

쉽게 말해서 ‘베드로야, 내가 여기 있음에 너는 너에 대해서 걱정을 다 버렸느냐.’를 묻는 겁니다. ‘이 예수님이 있으면 죽을 너희도 나처럼 살려줄 테니까 너는 더 이상 너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너 자신이 관여하지 말고 가위로 끊어버려라.’

하루하루 살면서 ‘주여, 이렇게 살면 죽습니까, 저렇게 살면 죽습니까? 이렇게 살면 내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죽음이라는 것은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이거든요. 그게 안 되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병이라는 징후를 주지요. 병들었다는 것은 뭐냐? 포기하라는 말이지요. 우리가 병들고 싶어서 병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안 아프고 싶은데 아플 때는 ‘내 주인이 내가 아니라 주께서 병으로 관여하셨구나.’ 그런데 그 병이 뭐냐, 그 내막을 더 캐보니까 죽음이에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나와 더불어 이 육신과 함께 죽으려고 작정을 하시고 매일 같이 죽입니다. 오늘 7월 18일이죠. 7월 18일 날도 우리 육신을 죽이십니다. 오전 예배 마치면 피곤할거예요. 이게 죽음의 흔적이 여러분에게 피어올라오는 겁니다.

계속 목 조르고 계속 죽이고, ‘죽어라, 죽어라.’ 하고 목 조르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물기 있는 비누처럼 헤헤거리면서 쏙쏙 빠져나가면 돼요. 거기서 쏙 빠져나와서 주님한테 빨리 죽여 달라고 그런 마음으로 살면 그 자체가 유체이탈, 희한한 소리가 나왔는데, 우리 육신이 따로 있는데 영혼이 또 따로 빠져나오는, 빠져 나와서 그 썩은 육신을 물끄러미 보면서 ‘아, 내가 너 때문에 고생 많이 했다. 네 자존심 때문에 네가 얼굴 화장하는 것 때문에 신경 많이 썼는데 이제 내가 너 포기했다.’

백부장의 종이 병들었다는 말은 주님께서 이렇게 병 주고 낫고 하는 것도 ‘이것은 네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 내가 관여할 문제다. 이런 믿음을 가진 자만이 천국간다.’는 거예요. 더 쉽게 하면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하나님은 부하게도 하시고 가난하게도 하시고, 병들게도 하시고 건강케 하기도 하시고.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하면 꼭 뒤에 말은 안 들어요. ‘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이것은 죽어도 안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이것은 때려죽어도 안 믿어요. ‘주여, 살리기도 하시고.’ 그것만 믿어요. 그런 것은 아직도 자기가 자기 육신의 주인이라고 버티고 있는 겁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3장에서 씨 뿌리는 비유를 했습니다. ‘씨를 뿌리매 밭에 떨어졌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우리 밭은 저주받은 밭이기에 씨가 오면 그 씨의 열매를 못 맺는 밭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밭인 줄 아시고 씨를 뿌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씨에 합당한 밭이 따로 만들어져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병을 주시고 병 뒤에는 결국은 이렇게 병들어 죽는다는 것, 죽음을 주시는 것은 이미 우리에게 ‘너는 죽어 마땅해.’라는 내용을 담아서 씨앗으로 와버려요. 와버리면 우리의 옛날 밭은 사라지고 그 말씀, ‘말씀대로 사는구나. 예수님이 살아 계시구나.’라는 것을 새롭게 열매를 맺는 새로운 밭으로 만들어요.

씨가 밭을 결정하는 것이지 밭이 씨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게 우리 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한다는 자체를 제가 포기하라는 그 뉘앙스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성경 말씀은 만들어가는 작품이 우리지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 내가 다듬고 광내고 불고 그래서 내가 내 작품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드는 내 작품은 항상 죽어야 되고 병들어야 되고 없어져야 됩니다. 없고 주님께서 만든 작품이, 이런 못난 놈이라도 주님께 감사할 줄 알고 비록 이런 형편이지만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할 줄 아는 것, 이것은 기적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알곡의 밭을 친히 관여하시고 일구고 있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우리를 관리하시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믿음은 족보나 믿고 혈통 믿는 혈육에서 나온, 자기 육신을 믿는 그런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난데없이 믿어지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 그게 왠지 믿어지시거든 앞으로 모든 생애의 남은 육신의 관리는 이미 여러분의 손을 떠났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조작해낸 종교믿음, 그것 예수님과 상관없는 믿음이고 괜히 한번 살아보겠다는, 이 땅에서 부자 되고 성공해서 살아보겠다는 탐욕의 결실인줄 압니다. 이제 그 탐욕의 결실의 믿음, 그것을 잘라버리고 거기서 빠져나와서 주께서 약속하신 생명이 하늘에 있다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그 약속이 우리의 흔적으로 징후로서 우리 존재가 그냥 발산되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