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16. 19:50

지워지지 않는 철필 (예레미야 17:1-4)

지워지지 않는 철필

2010년 4월 14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7:1-4

(렘 17:1, 개정)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 판과 그들의 제단 뿔에 새겨졌거늘』
(렘 17:2, 개정) 『그들의 자녀가 높은 언덕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제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렘 17:3, 개정)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렘 17:4, 개정)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하여금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원수를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를 맹렬하게 하여 영원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라』


창세기 3장 이후, 인간들은 땅을 원했습니다. 땅이 없으면 죽고 땅이 있으면 살수 있다는 의식으로 밀어붙이고 나갔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땅이 주어지니 이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른다는 이 땅에서 풍족하게 살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잊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을 잊은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특수한 땅입니다. 단순히 소유하기만 하면 살 수 있는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보이는 자에게만 허락된 땅입니다. 즉 그 땅의 소유주가 따로 계십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소유주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과 의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없는 자는 그 땅에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이 하나님의 땅에서 손 떼야 한다고 하십니다. 즉 이 약속의 땅은 결코 인간의 소유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유대는 이 약속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져야 하는 민족입니다. 약속이 약속의 백성을 소유하게 됩니다. 따라서 유대민족은 오로지 약속만을 드러내면 그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서 당겨지는 자들만이 약속에 소유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유대백성들은 산당을 지어놓고 거기서 신을 찾았습니다. 참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면서 오로지 약속만을 사용하시는데 왜 이들은 산에까지 올라가서 신을 찾아 헤매는 것일까요?

그들은 우상을 섬겼던 것입니다. 자신에게 소유된 땅과 세상을 원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누구의 소유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신명기 7:1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힘없는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애초부터 굳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힘없는 민족’이라는 사실을 서슴없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 믿고 힘있는 척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관심사가 ‘언약 생성’에 있음을 확연히 드러납니다.

이 언약이 가동되어야 여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과 의가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언약적 하나님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신은 자신들을 여유 있게 살리는 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상이란 무엇일까요? 우상이란 현재 자신의 신체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아서 변화를 모색하기 위해 찾아지는 신을 말합니다.

신의 전능하시다는 그 힘을 이용해서 지금의 형편을 탈피하려고 할 때 비는 신이 곧 우상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참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요구를 듣지를 않습니다. 오로지 확정되고 창세전부터 굳어진 그 하나님의 뜻대로 밀어붙이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고, 의로운 자를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빌 바를 알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바쳐진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있을 이유가 없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만 있으면 되는 겁니다. 우리는 몸이 아프고 가난하면, 마치 하나님의 저주받은 것인양 호들갑을 떱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가난하게 되든 부하게 되는 그것에 상관없이 오로지 하나님의 거룩과 의로움으로 우리를 하나님쪽으로 잡아당기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보는 세상에 거룩/더러움, 의/죄의 관계로만 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 이야기가 그러합니다.

우리가 보이에 그 두 사람은 부자/가난한 거지의 대칭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은 그 두 사람을 그런 차원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죄/거룩의 대칭으로 보시는 겁니다. 바로 이런 안목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당겨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보이기 위해 조성된 민족입니다.

이 이스라엘의 원천은 창세기 28:16-18에 나옵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야곱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즉 야곱은 이미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하나님 본 사람에게는 세상이 무슨 소리를 해도 양보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본 사람은 온 천지가 달려들어도 피에 대해서 양보란 없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서 부름받은 것을 압니다.

일종의 야곱의 연극 배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을 무대로 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민족은 이런 하나님의 언약의 배우가 되기를 거절하고 자신이 각본을 짜고 자신들이 살고자 하는 방식대로 이방신으로부터 도입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저 힘만 있으면 족하다고 보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기도원이라는 이름의 산당을 사람이 찾는 겁니까? 하나님의 복음이 그리워서입니까?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어디서 나오는지 몰라서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찾아내는 신을 원해서 그 신과 담판을 지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란 개인적인 포부에 바라보며 사는 존재임이 드러납니다.

인간들은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고리를 만들어가며 삽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 없이 현재를 사는 인간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이 오게 되면 자기 희망이란 용납되지 못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의를 보여주는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과거-현재-미래’의 고리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하게 되면 과거란 항상 삭제의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과거라는 꼬리를 전부 언약이라는 가위로 잘라버리시는 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잊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벌써 잊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이 개입한 현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복음 안에서 있는 현재는 나름대로 미래를 구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이 되면 이 미래는 과거의 자리에 들어서게 되면서 역시 내일 일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삭제대상이 될 뿐입니다. 이로서 성도는 매일같이 하나님의 약속, 즉 거룩과 의로 이끌림을 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증거할 것도 이것 뿐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가까이 하게 되면 산당에 올라가지 않더라도 거기에 우리를 구원해주시는 거룩과 하나님의 의가 나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과 의를 나타내는 연극 배우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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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8강-렘17장1-4(지워지지 않는 철필)-jer100414 

2010-04-16 14:19:50    녹취 : 오용익        

 
058강-렘17장1-4(지워지지 않는 철필)-jer100414-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예레미야 17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077페이지입니다.

예레미야 17:1-4

“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 준 네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또 내가 너로 너의 알지 못하는 땅에서 네 대적을 섬기게 하리니 이는 너희가 내 노로 맹렬케 하여 영영히 타는 불을 일으켰음이니라.”


창세기 3장부터 보면 인간은 땅 없이는 못삽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땅을 줬거든요. 주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 이 땅위에서 한 번 살아보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까 멋들어지게 풍족하게 한 번 살아보자.’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들은 그 땅을 보고 좋아했는데 정작 그들이 놓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가나안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될 경우에만 그 안에서 생존할 수 있는 특이한 땅이었습니다. 본문 4절에 보면 “내가 네게 준 기업에서 네 손을 뗄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네가 손을 떼야 될 시기가 왔다.’는 겁니다. 그들은 땅이 탐이 났습니다. ‘저 땅만 있으면, 저 부동산만 있으면 나는 평생 먹고 산다.’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오히려 놓쳐버린 것이 있습니다. 정작 자기 영혼은 하나님 앞에 저주받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세상신인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세상신은 생존의 힘을 얻기 위해서 찾는 신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이 대지위로 쫓겨나고 난 뒤에 살기가 무척 힘들었어요.

살기 힘드니까 ‘역시 사는 데는 힘이 최고다.’ 해서 힘을 끌어 모으고 그것을 응축하는데 매진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말 인간에게 찾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거룩함과 의로움을 보이는 것, 그것을 하나님이 찾는 겁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생존이 우선이기 때문에 생존의 힘을 먼저 달라 하는 겁니다.

‘얼마나 내가 힘을 많이 모아서 평생토록 부족함이 없이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이 일차적인 관심사인데 하나님은 그것이 관심사가 아니라 ‘내가 준 거룩이 어디 갔느냐? 내가 준 의는 어디 갔느냐?’ 이것을 찾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마다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의를 이야기하는 교회 같으면 사람들이 몰리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이 몰리는 모든 교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이교회 나오시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부자 되어서 넉넉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빨도 금이빨로 변하는 기적도 맛보면서 아쉬운 것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라고 항상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지요. 그것이 본문에 나옵니다.

3절에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지경의 죄로 인하여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여기에 산당이 나옵니다. 산에 있는 제단을 말하지요. 산당은 산에 있는 제단을 말하는데 그 산까지 왜 올라갔느냐 하는 거지요. 기도원도 대개 산에 있고 절도 산에 있는데 산에 올라가서까지 기도하겠다는 그 저의가 뭘까요?

‘하나님, 의롭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할라치면 산 밑에 있는 교회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을까요? ‘하나님, 거룩하게 하옵소서.’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심지어 성경은 더 심하게 합니다. ‘말씀이 네 코앞에 있는데 자꾸 어디에 눈을 돌리냐?’ 합니다. ‘성경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의로 교육하기에 합당하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교육하기에 합당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을 내미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상은 이 안에 들어있다.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된다. 그 하나님의 의가 너의 의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의가 네 안에 장착되어야 한다.’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받을 테니까 내가 원하는 것, 얼마 주시렵니까?’ 꿍꿍이를 따로 챙기고 있는 거예요.

바꿔치기, 흥정, 마치 상거래 하듯이 ‘내가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줄 테니까 내가 원하는 이것을 주세요.’라고 나오는 거예요. 처음에는 순진하게 하나님의 의를 지키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줄줄 알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의 목적은 영생이 목적이고 하나님의 의의 유지가 목적이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의 거룩과 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풍족해져서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반드시 하나님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몽땅 하나님께 바치기 위함인데 이스라엘이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민족들에 둘러싸여서 살다보니까 자기의 속내를 드러냈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빌어서 받아내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어주면 내가 잘되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보다 더 형편이 나아지겠지, 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좋아지고 나아지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원래 그런 권한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도로 바치기 위한 나라이지 따로 한 살림 챙기기 위한 이스라엘이 아니에요. 만약에 어떤 사람을 만나서 “교회에 잘 안 나오시는데 말씀 자주 듣습니까?” “너무 바빠서 요즘 교회 갈 시간이 안 납니다.”

제가 한 말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을 한 것인데 지금 그 사람은 하나님께 바칠 시간이 없다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는데 그 사람은 내 말을 그렇게 이해 못하고 이렇게 이해할 거예요. ‘교회 봉사하고 교회 나와서 자리 좀 채워서 하나님께 뭔가 해드린 것이 있어야 복도 받을 것인데 바빠서 교회 봉사는커녕 나오지도 못하는 모양이네요.’라고 그렇게 이해하는 모양입니다. ‘나중에 안 나오다가 벌 좀 받으면 나올게.’ 하는 식입니다.

사람이 지금 벌 받고 안 받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지금 몸이 아프든 건강하든 상관없이 가난하든 부자든 상관없이 가난하면 가난한 채로 다 바치고 부하면 부한 대로 다 바치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치기 위한 특이한 나라로서 세운 겁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은 신을 보고 자기를 도와주라고 이야기하지만 이스라엘은 도리어 자기가 어떤 형편에 있든지 하나님께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생소하게 들리는 것은 우리가 성경을 잘 안 봐서 그래요. 신명기 7장 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서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족속과 여부스족속 ……” 여기 일곱 족속이 나오는데 “……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 들어갈 때 힘을 쭉 빼고 들어갔어요. ‘봐, 힘없어도 가능한 나라가 천국 맞잖아.’ 하는 겁니다. 돈 없이도 가난해도 궁핍해도 몸이 병자라도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천국인데 그 천국을 구약에서는 ‘약속이 있는 나라’라고 한 겁니다.

그 약속이라는 것이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몸이 아파도 가난해도 상관없이 힘을 쪽 빼면 힘을 뺀 상태에서,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힘 빼고 부하면 부한 대로 힘 빼고, 어찌되었든지 간에 ‘하나님, 저는 가난하고 배고프고 힘없어서 못가겠습니다.’라는 원리를 전혀 무시하면서 당겨주면서 데려가는 그것이 약속의 힘입니다. 그것이 천국입니다.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쪽으로 당기는 거예요. 당길 때 어떻게 당기느냐 하면 열심을 내고 산당에 가서 기도를 하고 자기를 치고 헌신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어찌되었든지 불쌍한 모습을 보이고 간절한 모습을 보이고 기도도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강구하고 통성으로 기도해서 하나님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잡아당겨서 하나님이 갖고 있는 전능하신 힘을 많이 뽑아내는 것, 이것이 산당의 특징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하는 것은 있는 힘도 무시하고 몸이 아파도 그것을 바로 회수해서 데려가는 것이 아니고 아프면 아픈 채로, 애가 넷이면 넷인 채로, 하나도 없으면 없는 채로, 교인수가 두 명이면 두 명인 채로, 천명이면 천명인대로, 선교사이면 선교사인 채로, 개척교회를 하고 있으면 개척교회 그대로 묻거나 따지지 않고 약속에서 힘이 나온다는 것을 네가 믿느냐, 하는 겁니다.

그 당기는 힘이 뭐냐, 제가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의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돈 주고 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는 그 자체로서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의로움의 증거를 부자 되고 건강한 것을 가지고 ‘아, 하나님의 의로움을 받았구나.’라고 확인하려고 하지 마세요. 아주 위험합니다. 그것은 극히 위험합니다.

자식일이 잘 풀리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가 가득 찬 줄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거지나사로는 천하에 몹쓸 인간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거지가 부잣집 대문 앞에서 기왓장으로 헌데를 긁고 있으면서 개들이 핥고 있는 그 대목까지만 우리가 봤다면 그리고 부자가 지옥가고 거지가 천국 가는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부자겠습니까, 거지겠습니까?

‘아이고, 이 거지야. 인간 참 처절하게 산다. 불쌍하다.’ 이렇게 되고 부자 같으면 ‘와, 좋겠네. 무슨 복을 저리 받아서 저런 부자가 되었는지.’ 하지만 그 한귀절만 싹 넘어가면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고 9회 말에 끝내기 역전 홈런을 맞아서 부자는 물 한 방울 안 나오는데 가고 거지는 아브라함 품에 들어가고.

부자가 얼마나 답답했던지 세상에 남아 있는 동생 걱정이 되어서 거지 나사로를 보내서 구원해 달라고 하소연을 하지만 이 성경말씀이 코앞에 있기에 그런 것이 필요 없다고 거절하지요. 이미 죽은 거지 나사로를 보내 봐야 소용없다는 겁니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에게 닥쳐올 우리자신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채찍에 감아서 당길 때 그 채찍은 돈도 아니고 힘도 아니고 교회 부흥도 아니에요. 오직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당기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당겨주는 거예요. 언젠가 제가 강의할 때 그런 이야기 했지요. 사람들이 돌잔치 할 때에 책 놓고 박사 되라고, 돈 놓고 부자 되라고, 실 놓고 오래 살라고 하는데 그 옆에 성경책을 놔두는 사람은 없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는데 구약은 옛 약속, 신약은 새로운 약속, 신약과 구약이 거지 나사로도 천국을 보내는데 제일 중요한 그 성경책을 거기에 펴 놓아야 돼요. 펴놔 봐야 애는 성경 책 집으면 부모가 ‘얘가 신학교 가려고 하나? 미쳤나’ 하고 치우겠지만 항상 우리 맘속에 하나님의 그 뜻을, 우리 마음의 죄 때문에 그런데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이스라엘의 시작을 우리가 알아야 돼요. 이스라엘의 시작은 창세기 28장 18절에 보면 나오는데 거기에 야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야곱이 돌베개 하고 꿈을 꿉니다.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하늘에서부터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하지요. 여기서 야곱이 꿈을 깨고 난 뒤에 그 돌을 가지고 특별한 용도로서의 기름을 붓고 ‘이곳에 하나님이 계신 줄 내가 몰랐구나. 이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전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야곱이 뭘 가지겠다는 것이 아니고, 내 것을 뭔가 챙기겠다는 것이 아니고 이미 야곱이 하나님 앞에 사로잡힌바 되었습니다. 이미 야곱은 하나님을 봤어요. 온 천하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이 누구냐 하면 이미 본 게 있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사람이 본 게 있으면 양보가 안 됩니다. 십자가 피를 봤다면, 천하의 개혁주의 목사들 박사들 다 가져다 들이 붓는 식으로 할지라도, 십자가 피가 나를 구원한다면 한국의 목사들 십만 명이 그게 아니라고 해도 십자가 피를 봤다면, 그 사람에게는 한국교회 목사가 이단이고 십자가만 구원이라고 감히 외칠 수 있습니다.

자기 교회 목사가 문제 있다고 자꾸 불평하지 마세요. 본인이 본 게 없으니까 자꾸 주춤주춤 하는 거예요. 본인이 십자가를 봤다면 양보 하고 싶어도 양보 못하지요. 왜냐하면 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봤으면 그 다음부터는 꼼짝없이 그 본 것으로 인하여 주님에 매인바 되는 겁니다.

약간은 허접스럽고 이상한 예가 되겠습니다만 고등학생이 우연히 베란다에 앉아 있다가 앞집의 아줌마 목욕하는 것을 보다가 그 아줌마와 눈이 딱 마주쳤다면 그 고등학생은 그 때부터 아줌마의 종이 되겠지요. ‘너 봤지. 엄마한테 이른다.’고 하면 꼼짝 못합니다. 그때부터 심부름하는 것 다 해야 돼요. ‘너 까불면 나쁜 놈이라고 엄마한테 이른다.’고 하면 ‘이르지 마세요. 우연히 그렇게 되었어요.’ ‘우연히 고 뭐고 너는 나쁜 놈이야.’라고 하면 무조건 나쁜 놈이 되는 거예요.

한 번 눈이 마주치고 들켰거든요. 십자가로 슥 눈이 돌아갔는데 주님과 눈이 마주쳤어요. 십자가를 봐 버렸어요. 그 피가 새 언약이고 그 새 언약으로 말미암아 영생 얻는 것을, 하나님의 거룩함을 얻고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을 봐버렸어요. 그 다음부터 우리는 주변의 인간들이 이단이니 삼단이니 뭐라고 우리를 향해 나팔을 불고 난리를 쳐도 우리는 주님의 종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쳐진 존재입니다. 이것은 양보할 문제가 아니에요.

타협해서 좋으면 좋고, 그렇게 할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새색시가 십자가복음을 알았더라면 그 새색시는 보살 집에 시집가도 괜찮아요. 선교할 요량으로 가면 되는 거예요. 어떤 집이든 관계없어요. 시댁에서 시어머니가 교회가지 말라고 말려도 할 수 없어요. 왜? 본 게 있으니까. 내가 봤다 이 말이지요. 내가 삼층 천에 올라가 봤다 이 말이지요.

‘화로다. 내가 망하게 되었구나.’ 이미 하나님이라는 태양 앞에서 서 버리면 세상이라는 것은 금방 꺼져버릴 희미한 촛불에 불과합니다. 복음의 광채 앞에 서 버리면 다른 것은 희미한 달빛만도 못하고 별빛만도 못하다고요. 거기에 기죽고 거기에 설설 기고 그런 것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그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거룩을 제사법으로 되풀이하면서 하나님의 거룩이 힘없는 너희들, 죄밖에 없는 너희들을 어떤 식으로 건져서 하나님의 천국 쪽으로 당기느냐 그것을 매일같이 보여준 거예요.

지난 화요일에 부산에서 그런 강의를 했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이 본문에 나오지요. 2절에 보면 “그들의 자녀가 높은 메 위 푸른 나무 곁에 있는 그 단들과 아세라들을 생각하도다.” 전부 다 우상들입니다. 우상인 것과 아닌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우상은 현재 있는 내 모습이 영 내 마음에 안 들어서 내가 더 낫게 생각하는 소망스러운 나의 모습, 지금보다 형편이 나은 내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그 변화를 모색하는 것, 그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 필요한 신을 잡아당길 때 그 신이 우상입니다.

쉽게 하면 현재 내 형편이 영 맘에 들지 않아서 안타까운 맘에 한이 맺혀서 이것보다 형편이 나은 쪽으로 변화를 시도할 때 필요해서 동원되는 신, 그게 예수가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성령이 되었든 그것이 바로 우상입니다. 그런데 우상이 아닌 하나님은 뭐냐 하면 하나님은 창세전에 계획한 대로만 그대로 밀어붙이는 거예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그 미래를 확정지어줄때만 그것이 바로 참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은 항상 우리 안에서 우상을 원하고 있는 우리와 항상 마찰과 싸움이 일어나요.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고.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해요. 기도해 봐야 보이는 것만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아버지 뜻을 아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소박한 꿈이고 뭐고 그런 것을 전부 다 버려야 돼요. 그래서 제가 화요일에 강의할 때 어려운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 만든 과거-현재-미래의 그 시간론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잘라버립니다. 이것 참 좋아요. 여러분이 과거에 어떻게 살았던 간에 걱정하지 마세요. 하나님의 복음이 개입되면, 약속이 개입되면 약속은 항상 우리를 당기는 쪽이기 때문에 우리의 꼬리를 끊어버려요. 서른 살입니까? 그러면 스물아홉 살 때까지는 도마뱀꼬리처럼 잘라버립니다.

잘라버리면 남는 것은 ‘현재 네가 너 된 것은 하나님의 당겨주는 은혜지 과거가 모여서 된 것이 아니다.’라고 꼬리를 잘라버려요. 한 50까지 사셨습니까? 49살까지는 이미 꼬리가 없어졌어요. 없어진 것을 가지고 자꾸 일기장 들추듯이 과거 찾지 마세요. 없어졌습니다. 현재 있는 것이 주님의 소유입니다. 우리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의 것으로 당겨갑니다.

그리고 난 뒤에 그래서 생긴 그 미래는 어디에 붙느냐, 아직까지 남아 있는 우리의 육적인 현재 모습의 과거에 그 미래가 딱 붙게 돼요. 제가 참 어렵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걸 쉽게 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가 있는데 과거를 잘라버리지요. 남는 것은 현재와 미래만 남잖아요. ‘아, 이제 예수 믿게 되었구나. 예수 믿었으니 오는 6월에 하나님께서 이런 복을 주실 거야.’ 그 미래가 남아 있잖아요.

그 미래를 그대로 가져다가 내일 우리의 과거로 딱 붙여버립니다. 과거로 붙여놓고 내일 오후 되면 그것이 죄라 하는 것을 보여주면서 잘라버리지요. 우리는 항상 우리 속에서 내 위주로 살지 않는 순간이 없습니다. 죽을 때 까지는 항상 ‘은혜 받았습니다.’ 해 놓고 은혜 받은 순간부터 ‘자, 은혜 받았으니까 이제 하나님께서 복주시겠지.’라고 거기서부터 또 희망찬 나의 미래를 내 중심에 의해서 만들어내요.

그것을 우리의 과거로 딱 붙이게 되면 내일되면 그것도 잘립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네가 생각한 오산이었다.’고 잘라버립니다. 잘라버리고 거기에 기준해서 새로운 미래를 주지요. 새로운 미래를 주게 되면 ‘아, 하나님께서 이런 미래를 주셨구나.’ 하고 또 기대하지요. 그 다음날 되면 그것도 이미 죄로 변했습니다. 그것을 잘라서 과거로 붙여 버립니다.

그래서 매일같이 우리는 죽고 매일같이 살아서 생명의 길은 항상 우리가 예측 못한 길로 가요. 그래서 한 번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매일같이 예수를 믿게 하세요. 매일같이 의지하고 매일같이 당겨주는 그 즐거움에 만끽하게 하십니다.

만약에 제가 이렇게 설명하지 않고 달리 설명하게 되면 ‘나는 5년 전에 예수 믿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그 때부터 어떤 희망이 있었다. 나 그 희망 아직도 안 버렸다. 그 희망을 찾아서 또 시도할래.’ 이렇게 되어버리면 그 희망 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립니다. 자기 위주로, 5년 전에 예수 믿을 때의 그 기대나 희망, 그것이 자기의 포부가 되어버려요.

하나의 예를 들면 ‘나는 10년 전에 예수 믿고 사업하던 것 다 그만두고 목사 되기로 했다.’ 그러고 난 뒤에 한 5년 뒤에 ‘하나님 그때 예수 믿고 목사 되기로 했으니까 그 목사의 꿈을 이루어주옵소서.’ 그거 우상입니다. 그것은 자기포부이고 자기야심에 불과합니다. 주님께서는 ‘네가 목사 되나 안 되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의와 거룩이 너를 잡아당긴다는 사실을, 네가 목사가 안 되더라도 그 하나님의 의를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때 예수 처음 믿고서 목사 되려고 했는데 왜 하나님께서 저를 목사 안 시켜줍니까?’ 자꾸 이렇게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관심사는 목사가 안 되어도 괜찮고 되어도 괜찮고, 그것은 네가 알바가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약속과 거룩이 너를 구원한다.’는 그 십자가에서 의와 거룩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는 겁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되풀이 했어요. 지금부터 어려운 것인데 잘 들어보세요. 모세의 제사가 뭐냐? 쉽게 하겠습니다. 연극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리잖아요. 그것은 무대에요. 거룩한 무대에다 연극배우로서 이스라엘이 동원되고 제사장도 주연급배우로 동원되고 우리는 엑스트라 조연급 되고 단역배우가 되어서 거기서 제사장이 하나의 모형으로서 그림자로서 거룩을 어떻게 생산해내는가, 그 연극을 벌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전부 다 연극배우입니다. 오늘날 성도는 연기자들이에요. 속임수를 쓴다고 해서 연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의를 생산해내고 이 죄 많은 인간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영생을 주는가를 가정이나 사업장이나 교회를 통해서 평생토록 그 현장에서 역할을 해야 됩니다.

그러면 우리 역할은 뭐냐, 우리 역할은 죄짓는 역할이에요. 죄짓는 역할이고 우리 앞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하는 역할을 합니다. 구약에서는 누가 했느냐, 제사장이 그걸 했어요. 양 잡고 기름 바르고 피 바르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안에 세트로 다 들어 있어요.

그러면 죄를 어떻게 씻느냐? 죄는 어떻게 씻느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포부를 드러내면 지금의 포부가 내일아침 되면 하나의 욕심으로 변해져 있을 거예요. 제 사적인 욕심을 말하겠습니다. 이것은 말 하지 않았던 것이고 오늘 생방송이 되는데 그것을 말하겠습니다. 제 욕심, 제 죄가 ‘주여, 일찍 죽어서 천국가게 하옵소서.’ 그거 욕심입니다.

굉장히 복음적인 것 같지요. 굉장히 믿음이 좋아 보이지요. 자기만 편 하려고. 아내는 어쩌고. 사람이 병들고 사업 안 되면 그런 욕심이 나옵니다. ‘주여, 우세스러워서 못살겠습니다. 오늘밤이라도 연탄가스 새든지 해서 죽게 해주세요.’ 누구 맘대로? 그것도 하나님 맘 대로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죽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생산하는 기계로 만들어서 죽여요. 그게 순교자 아닙니까?

참, 정말 하나님이 빈틈이 없어요. 우리는 죽고 싶어도 못 죽어요. 왜? 하나님의 의가 ‘저런 인간도 구원받는다.’ 하는 그것을 발산할 시점에서 필요에 따라서 우리로 하여금 죽든지 살든지 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나 죽으나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고 사나 죽으나 우리의 주의 것이로다.’ 야고보서 4장 끝에 나오잖아요.

우리는 하나의 연극 연기자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잡아당겨지는 채로서 연기를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의 거룩이 우리가 소망하는 돈과 교회 부흥과 건강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연기하는 겁니다. 그럴 경우가 아니면 이 교회가 산당이 되고 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이 복음적인 것처럼 보이고 정말 신앙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일이 되면 그것도 한낱 욕심이 끼어 있다는 것을, 욕심이 스며들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줄 믿습니다. 날마다 당겨주시는 하나님의 거룩과 의가 우리가 소망하는 것보다 더 질기게 십자가 피에서 나오는 진짜 하나님의 뜻인 것을 저희들이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