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4. 8. 11:25

허무한 것 (예레미야 16:19-21)

허무한 것

2010년 4 월 7일                       본문 말씀: 예레미야 16:19-21

(렘 16:19, 개정) 『여호와 나의 힘, 나의 보장, 환난날의 피난처시여 민족들이 땅 끝에서 주께 이르러 말하기를 우리 조상들의 계승한 바는 허망하고 거짓되고 무익한 것뿐이라』
(렘 16:20, 개정) 『사람이 어찌 신 아닌 것을 자기의 신으로 삼겠나이까 하리이다』
(렘 16:21, 개정)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사람들의 힘으로 행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만큼 인간은 자신의 행함으로 이 세상의 형편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 말은 또한 사람들이 미리 예상한 바가 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이미 기대한 대로 될 것 같으면 그 결과 속에는 ‘인간의 기대’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어 순수한 하나님의 뜻만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이런 식의 구원은 인간의 생각과 경험으로서는 전혀 예상 못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이 된 상황에서 사적인 구원의 욕망이란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전혀 구원 예상못한 자들을 구원하시면서 그들의 구원되었음에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하나님의 의도하시는 바가 따로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21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이번에 그들에게 내 손과 내 능력을 알려서 그들로 내 이름이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이 발언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므로서 하나님 됨을 온 열방에 알리겠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0의 경우를 봅시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미리 정하신 자’를 부르시는 것은, 사적인 구원욕구를 충족하려 하심이 아니라 온 우주에 “여기 의인이 생겨났음”을 알려서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신 우리 하나님의 솜씨를 퍼뜨리게 하기 위함입니다.

TV 드라마에 보면, 어떤 부인은 자기 아들이 의사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합니다. 심지어 시장에 나가 감자를 사더라도 그냥 사면 될터인데 꼭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우리 아들이 의사인데 감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신 것에 대해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1에 보면,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주의 자리’에 등극시켰습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께서 여호와로서 일하시던 자리요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시는 자리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단순히 개인 구원에 있어 순서나 경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솜씨를 자랑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온통 죄인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봐라, 여기 엄연히 의인 있잖아!”라고 하시면서 우리 성도들을 온 우주의 자랑거리로 삼고 싶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포도나무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농부에 예수님은 포도나무입니다. 그 포도나무에서 열매가 맺히게 되는데 그 열매는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님 솜씨입니다. 제자들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님을 선택해서 믿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되면 그것은 행함에 해당됩니다. 도리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일방적으로 선택하셔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주님의 솜씨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생길 때,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없는 나라입니다. 그냥 어쩌다가 있던 나라가 애굽하고 싸워서 애굽군대를 격퇴하고 가나안 땅을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없고 그냥 애굽 나라만 있을 뿐입니다.

마치 결혼한 여인이 얼마 안 있어 임산부가 된 것처럼, 애굽 나라 내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서서히 잉태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애굽나라에서 떨어져나와서 생긴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그 이스라엘이 애굽나라에서 나오겠다고 의도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결코 애굽나라의 힘과 권세에서 탈출 할 수가 없습니다.

히브리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힘에 죽고 힘으로 삽니다. 그 힘을 애굽나라가 지니고 있기에 그 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없고 그럴 생각도 안합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에서 벗어난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나오는 고백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막 나와서 홍해바닷가에서 부르는 그 찬송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애굽기 15:2) 즉 인간의 힘으로 자신이 구원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오늘날 신약시대에서는 “내가 의인된 것은 예수님의 구원의 힘입니다”는 고백과 같은 고백입니다.

구약 때는 세상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불가능한 영광을 만방을 떨쳤다면 오늘날 신약 시대에서는 영적인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누가복음 4:6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 이 천하 만국의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얼마나 학수고대하는 복음으로 들리겠습니까.

실은 이 말은 악마가 하는 말입니다. 악마는 세상의 권세를 갖고 있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요리합니다. 그것은 평소에 사람들이 무엇이 목말라하고 무엇을 희망하면서 신에게, 예수님에게 매달리는 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여망이란 힘에 쏠립니다. 세상에서 버틸 힘만 준다면 그 자가 부처든 하나님이든 예수든 상관하지 않고 좋으신 분이라고 섬길 마음의 태세가 되어 있는 것들이 인간입니다.

인간에게는 힘만이 현실로 쳐 줍니다. 힘이 안되는 것은 현실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이 힘의 구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마치 히브리인들이 애굽나라를 벗어난다는 것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경우입니다. 그런데 스데반 집사님을 보세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그는 평화롭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마찬가지요 거지 나사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는 세상 힘으로도 장악되지 않는 다른 힘이 있었으니 곧 죄인이 의인이 되게 된 그 은혜의 힘이었습니다. 죄인을 용서하여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이 힘에 대해서 악마는 어떻게 힘쓸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힘을 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그들의 아비는 악마입니다. 그들은 뱀의 새끼입니다. 사람이란 속에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습니다. 사람은 자신들이 참새나 들풀보다도 못한 존재라는 것을 모릅니다.

자신의 어두운 면을 모릅니다. 마치 평평한 무덤 안에 들어있는 썩은 해골같습니다. 점잖은 척하지만 술만 들어가면 개가 됩니다. 인간의 본색은 신마저 농담거리로 만드는데서 극에 도달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의 조롱과 놀림과 대상으로 삼으므로서 그들은 마치 신 위에 인간이 있는 것처럼 행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로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을 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기어이 멸망시키므로서, 정말 하나님의 위대한 거룩과 공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자기 백성마저 버린다면 하물로 개같이 우리 이방인이 저주받는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공로에 입각하여 성령을 주심으로서 우리 안에 영원히 정죄당하지 않을 조건을 마련해주시니 바로 이러한 기적은 오직 우리 주님의 솜씨입니다. 이런 자만이 그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주님은 나의 힘이시오 보장이시오 환란날의 피난처이심”을 고백하는 주님의 작품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사적인 구원욕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자랑하시는 의인으로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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