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10. 12. 19:25

더러운 귀신, 누가복음 8장 26-29절

본문 : 누가복음 8장26-29절
제목 : 더러운 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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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강-눅8장26-29더러운귀신-luk101010

더러운 귀신

2010년 10월 10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8:26-29

(눅 8:26, 개역)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눅 8:27, 개역)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눅 8:28, 개역)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신께 구하노니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눅 8:29, 개역)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더러운 귀신이 어떤 청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그 청년에게 머물러 있습니다. 청년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다. 그리고 난 뒤 예수님께서 청년에게 다가왔습니다. 그것도 청년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다. 이로소 청년의 몸은 두 세력이 마주치는 전쟁터가 되고 말았습니다. 청년의 자기 기분이나 의사나 자기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습니다. 단지 청년이 마

단지 청년이 말할 수 있는 바는, “나는 과거에 더러운 귀신 들렸으며, 그 해결책은 내 쪽에서 제시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이며, 그 예수님에 의해서 비로소 더러운 귀신을 나에게서 떠나서 제 갈 길로 가게 되었다”는 증언 뿐입니다. 인간 자신이 더러운 귀신과 예수님을 조정하거나 조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운명에서 인간 본인의 뜻이 배제되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이란 태어나면서 더러운 귀신이 노는 놀이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와서 내쫓고 정리해주시지 아니하면 인간들은 자신이 더러운 귀신일 들렸는지조차 인식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더러운 귀신은 원래 인간이 생기기전부터 하늘나라에 일하던 천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악마의 졸개인 귀신들이 선한 천사들에게 패배하지 않았다면 결코 지상에 내려와서 인간을 덮치지 않았습니다. 요한계시록 12:7-9에 보면,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더러운 귀신들은 이 인간 세상에서 자신들을 승리자로 행세하면서 지배해왔습니다. 실제 그들이 하늘나라에게 이미 패배자가 되었는데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등장했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을 상대로 붙잡고 설득에 나서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항상 인간 위에 군림하는 승리자로 자처하는 악마를 겨냥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패배자로 보시고 그 패배의 요소와 원인이 어디 있다는 것을 폭로시키십니다.

그 점을 이미 더러운 귀신들도 압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본문에 보면, “무저갱으로 들어가라 하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라고 나옵니다.(눅 8:31) 더러운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알고 그리고 그 일이 곧 예수님께서 하실 일인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사정은 더러운 귀신들이 사람에게 알려주지를 않습니다. 도리어 사람들을 자신들의 전쟁을 해야 할 하수인들로서 만들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니 예수님이 찾아온 사람과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매사 의견이 다 다르게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이 찾아온 사람은 예수님 때문에 어떤 것들이 자기 몸에서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자기 힘으로 그 어떤 경우에도 더러운 귀신을 자기 몸에서 빼내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가오시지 아니하면 자신이 귀신 들려 있는 상태인지 아닌지 조차도 분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다가오셔서 들어온 사람들은 자기 몸에서 빠져나간 그 귀신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동안 자기 몸을 관리한 원칙이 뭔가를 압니다.

에베소서 2:1-2을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찾아오신 성도 입에서만 나올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인간들은 더러운 귀신에 묶여서 어떤 식으로 살아왔습니까? 히브리서 2:14-16에 잘 나와있습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이는 실로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두려움으로 악마는 인간 세계를 지배해 오고 있습니다. 죽기를 무서워하게 만들어서 인간들은 악마가 이끄는대로 벌벌 떨면서 인생을 살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아온 사람에게는 이 죽음에 의해서 두려움이 자기쪽에서 예수님의 능력으로 떨어져나갔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에게서 귀신이 떨어져 나감을 모르는 자는 아직 예수님에게 자기 몸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예쁜 자식을 갖게 된 주부가 요한계시록 12장에 나오는 하늘나라에서의 전쟁에 관심이나 있겠습니까? 참으로 둘 사이가 멀게 느껴집니다. 자기에게 천사같은 아이가 생겼다는 것이 시답지 않을 정도로 성경에 나오는 약속에 관심이 다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만큼 우리 인간들은 오늘도 더러운 귀신의 지배를 느끼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님께서 알아서 찾아주신 자만이 그동안 자신이 더러운 귀신의 지배를 받아왔다는 것을 압니다. 그렇다면 귀신의 지배의 모습은 한 마디로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행함’입니다.

악마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함에 귀속되게 해서 그 행함으로 아무리 완벽을 기해봤자 자신의 죄를 없앨 수 없다는 절망으로 무너지게 만듭니다. 즉 찾아오신 예수님이 뭘 하셨느에 대한 관심을 끊게 만들겠다는 것이 악마의 노림수입니다. 왜 예수님에게 관심을 깒게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만이 진정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최종 승리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승자되시는 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는 단순히 회복이나 복귀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창조인데 이 창조의 모습은 우리들로 하여금 두 번 다시 과거의 생활로 못돌아가게 합니다. 이사야 65:17-18에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를 근거로 용서하셔서 지어내신 창조물을 우리가 모독하지 맙시다. 지난 과거를 늘 잊고 생각하지 맙시다. 매일의 용서가 우리를 기다립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우리의 행함으로 흐지부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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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강-눅8장26-29(더러운 귀신)-luk101010-(이 근호목사)

2010-10-12 13:26:24  이름 : 오용익


046강-눅8장26-29(더러운 귀신)-luk101010-(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8장 26절에서 2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04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8:26-29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 인의 땅에 이르러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예수를 보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당시께 구하노니 나르 괴롭게 마옵소서 하니 이는 예수께서 이미 더러운 귀신을 명하사 이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귀신이 가끔 이 사람을 붙잡으므로 저가 쇠사슬과 고랑에 매이어 지키웠으되 그 맨 것을 끊고 귀신에게 몰려 광야로 나갔더라).”


본문 이야기에서 사람 이야기는 빠져 있지요. 예수님과 사람과의 대화가 아닙니다. 남들 보기에는 예수님과 사람이 대화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실은 그 사람 속에 있는 많은 귀신과 예수님이 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교회 밖의 사람들은 말하기를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이나 거기는 일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는 안 나옵니다. 만약 그거 내보내면 방송사 항의 들어옵니다. ‘우리 사람들끼리, 우리끼리 이야기하자.’ 애가 태어나서 초등, 중등, 고등, 대학교까지 다니면서 무슨 기술을 배우느냐 하면 사람과 사람이 대화하는 기술을 배워요. 사람하고 대화해야 내가 밥 먹고 사는 거예요.

귀신하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는 것은 기꺼해야 무당이나 굿하는 사람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합니다. 귀신이라는 것을 잊기로 하고 귀신은 없는 것으로 치자는 묵계아래, 합의하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귀신은 없다.’라고 귀신 없는 상태에서 ‘너는 누구며 나는 누구다.’라는 것을 서로 서로 내세우기로 작정하고 사람들끼리 모입니다.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과장입니다.’ ‘어떻게 되십니까?’ ‘나는 부장입니다.’ 이 두 사람, 과장 부장이 이야기할 때 귀신이야기가 섞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귀신 한 서너 마리 있습니다.’ ‘어떻게 되십니까?’ ‘저는 군대귀신 한 천 마리 있습니다.’ ‘천 마리요? 반갑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법은 없다 그 말이죠.

그래서 우리에게 성경이라는 것이 구닥다리처럼 혹은 옛날의 신화나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인양 간주하고 있지요. 그런데 예를 들어 우리가 은행 지점장이라는 사람을 만나면 ‘과장님, 얼마를 빌릴 수 있을까요?’ 하면 ‘예, 얼마까지 대출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것인데 그것이 아니고 ‘은행 지점장 되시는 본인이 누구신줄 아십니까?’ 이렇게 물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람은 자기의 기능을 발휘해서 그 기능발휘의 대가로 돈을 얻어서 생활하는 겁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나는 이런 존재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돈으로 오지를 않아요. 우리는 다들 ‘내가 누구다.’라는 것을 일단 감추기를 원합니다. ‘나도 감출 테니 제발 너도 감춰줘.’ 내가 누구냐 라는 것을 몰라도 되고 알 필요도 없고 딱 끊어버리고 ‘나는 이런 컴퓨터 기술이 있습니다. 당신은 무슨 기술이 있습니까?’ ‘나는 배관기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 그러면 되었네요.’ 그리고 만나서 헤어지면 끝나는 거예요.

심지어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제 어머니께서 편찮으셔서 서울에 가 계십니다. 당분간 가계시기로 했는데 혹은 영원히 그럴 수도 있겠지요. 어머니가 요즘 정신이 온전치 않으신데 20대나 30대에는 안 그랬습니다. 젊은 시절에 요리학원에 다녀서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하면서 요리자격증도 땄지요, 살림도 잘 하셨지요, 서울에서 장사도 하셨지요, 기능을 충분히 발휘했습니다.

자식들이든 며느리들이든 다 어머니를 존경했었어요. 기능이 있을 때, 기능이 있을 때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기능이 딱 떨어지니까 어머니가 형제간에 치는 탁구공격이 되었어요. ‘네가 모셔라.’ ‘네가 모셔야지.’ 타구공이에요. 사람은 그 사람이 빼먹을 기능만 있으면 그 사람을 상대합니다. 그러나 다 빼먹었다 싶으면 쓰레기입니다. 분리수거의 처리대상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교회 헌금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고 잘 나갈 때는 하나님이 상대를 안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너는 이제 교인으로서도 가치 없어.’ 하는 그 순간, 주께서 그 때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온 것은 잘난 사람 부르러 온 것이 아니다. 그래서 네 주제 파악할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그 말이죠.

오늘 귀신들린 사람 남들보다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은 귀신 두 세 마리 들려도 그걸 감추고 다니지만 이 사람은 귀신의 기가 너무 세서 감출래야 감출수가 없어요. 자기의 의지로서는 자기를 덮어씌우는 이 귀신의 힘을 어쩔 수가 없어요. 본문에서 ‘더러운 귀신’이라고 했는데 이 더러움이 보통 점잖은 사람 같으면 감추기를 하는데 이 더러움이 넘쳐버리면 자기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자기도 자기 맘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노후를 행복하게 대비하라’라는 제목의 책을 지은 사람이 누굴까요? ‘최 윤희’라는 분입니다. 몸의 기능이 잘 발휘되고 있을 때 잘 썼어요. 그렇게 잘 쓴 것은 잘못이 없습니다. 다들 동감했으니까요. 그러나 그 사람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것도 주님의 은혜지 내 실력이 아님을 그 사람은 몰랐었어요.

이것은 자기가 애쓰고 공부를 해서 이정도 실력이 나온다고 철석같이 믿었지 ‘감히 누가 나를 지배해. 그 지배를 내가 용납 안 해.’라고 아주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 망가지고 난청이라는 고질병에 걸리니까 본인 맘대로 자기인생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겠지요.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남편은 또 웬 일? 그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지요.

본문에서 예수님과 우리 인간과 대화한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사람하고 주님하고 이야기했지 누구하고 했느냐?’ 본문에서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이죠, 악마와 대화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실망스러워서 ‘그러면 예수님이 귀신과 대화하는 것을 우리가 꼭 알아야만 됩니까? 예수님이 나하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내가 중요하니까.’ 라고 생각하겠지만 우리 인간과의 대화가 보류되어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그냥 소모품이며 들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영적세계에서 활동하는 그 내막을 소개하는, 그래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놀아나고 저렇게 하면 저렇게 놀아나는 거예요. 노인들을 사기로 등쳐먹는 사람들 보세요. 노인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5만 원짜리를 백만 원짜리로 팔아먹잖아요. 그처럼 놀아나는 거예요.

노인들이 젊었을 때는 자기 딴에 똑똑하다고 했겠지만 몸이 감당 안 될 때는 뭔가 맡기고 의지하는 식으로 되는 거예요. 우리교회 부흥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주변에 있는 보성아파트 1차, 2차, 3차에 사는 노인들에게 봉투에 5만원씩 넣어서 일당주면 다 옵니다. 5만원가지고 안된다고요? 그러면 10만원씩 주지요.

도대체 인간이 아닌 귀신과 예수님과 이 이야기를 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뭐냐는 겁니다. 본문이 세 가지로 되어 있어요. 첫 번째는 귀신이 어디서 쫓겨 나와서 갈 곳이 없어서 인간세계에 왔다는 겁니다. 귀신이 먼저 우리에게 다가온 거예요. 귀신이 다가왔고 그 다음에 예수님은 귀신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귀신을 노리고 귀신들린 자에게 찾아왔고 그래서 세 번째 귀신이 풀려서 귀신은 제자리로 도로 돌아갔다, 오늘 이야기가 그 이야기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 인간이 귀신이 활동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 인간이라는 게 그러하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화나는 이야기입니다. ‘아니 감히 나라는 존재를 누가 감히 가지고 놀아.’ 가지고 노는 존재가 있어요.

그게 귀신입니다. 귀신이 갈 곳이 없어서 쫓겨나서 인간에게 덮쳤고 덮쳐서 가만있으면 좋은데 예수님이 다가오니까 귀신이 지레 겁이 나서 ‘누구십니까? 나는 당신을 압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지요. 제가 하나님의 아들이 뭘 하는지 알지요. 당신은 우리 귀신들을 쫓아내서 제 자리에 가두기 위해서 오셨지요. 분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쫓아내려고?’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우리 인간은 제 3자가 되는 겁니다. ‘두 분 지금 뭐하시죠? 두 분 지금 무슨 대화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개입할 수 없는 사태가 왜 벌어지는 데요. 내가 관여하지도 않은 사태가 자기들끼리의 선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기분 나쁩니까? 아주 기분 나쁘게 하지요. ‘저도 한마디 낍시다.’ 하고 있는데 ‘너는 빠져. 너는 이래 잡히나 저래 잡히나 노리개에 불과해. 어른들 일하는데 애들은 빠져.’

이렇게 인간을 애들 취급하는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릴 약하게 보는 겁니다. 우리는 그동안 나의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평생 동안 살았는데 성경현실에 들어가 보니까 우리는 노리개, 그것도 아주 약한 노리개, 누가 다뤄도 다룰 수 있는, 아무런 방어능력도 상실한 철없는 취급을 당하는 겁니다. ‘넌 나가 있어.’ 그런 식으로 말이지요.

여기서 성경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너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고 너를 가지고 노는 세력들이 어떤 세력들인가를 확실하게 눈뜨고 보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요한계시록 12장 7절, 8절을 보겠습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쎄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니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저희의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용이 쫓겨나서 어디로 오느냐? 땅에 내려와서 사람에게 임했다는 이야기가 죽 나와요.

요한계시록 12장 7장에서 ‘사람이 없을 때 전쟁이 일어났고 그 전쟁의 여파가 지상에 퍼져서 인간들은 에덴동산에서 뱀을 만나게 되었고 뱀이 인간을 꾀어서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어서 에덴동산에서 살지 못하고 추방되어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는, 불교에서 말하는 고해와 고통의 세계에 놓여서 아버지고생에 대를 이어 그 아들이 고생하고 그 손자가 계속해서 고생하는 대책 없는,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는 과정을 겪게 되었다. 그 원인은 바로 하늘의 전쟁 때문에 그렇다.’라고 알려주지요.

제가 서울 가서 조카를 만났는데 갓난애를 안고 나왔어요. 20대 후반인데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서 서울역에 마중을 나온 겁니다. 보면서 뭘 느꼈느냐 하면, ‘내가 저렇게 애를 갓 낳는 새댁 같으면 머릿속으로 무엇만 생각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해봤어요. 장난기죠. 애를 낳은 지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애가 잘 크기를 바라고 천재로 크기를 바라고 건강해서 엄마 애 안 먹이고 엄마의 영광이 되기를 바라는 그것만 몰두하겠지요.

그런데 그 순간 저는 뭘 생각했느냐하면 요한계시록 12장 7절을 생각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지요. 거리가 너무 먼 거예요. 배불러서 고통 가운데 애를 낳아서 애를 위해서 전념하는데, 새댁의 온 관심사가 ‘애 천재로 키워야지.’라고 하고 있는데 그 바깥에서는 전쟁이 벌어진 거예요. 악마와 주님과의 전쟁이 벌어진 겁니다.

그래서 용과 그의 사자들이 인간 세상에 왔다 그 말이죠. 그것을 그 새댁이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짐작을 했다 칩시다. 애를 키우지 말까요? 애한테 귀신 붙지 말도록 엉덩이에 부적이라도 하나 붙일까요? 굿이라도 할까요? 제 말은 이겁니다.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어쩔 수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선한영이든 악한영이든 영이 가지고 노는 대로 놀아날 수밖에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대로 수용을 합시다.

이것이 금식한다고 기도한다고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기도하면 기도 더 하라고 마귀가 부추기고요 금식하면 마귀가 하는 소리가 ‘20일 금식한 것도 금식이냐, 20일 더 채워서 40일 금식하라.’고 더 부추기고 남을 일곱 번 용서하면 ‘일곱 번 가지고 되겠는가, 한 700번은 해야지 용서답지.’ 이렇게 나오고 착한 일 하면 ‘겨우 그거 했다고 착한일 했다고 하는가, 아예 신장 떼 줄 정도는 되어야지.’라고 나오고 부모한테 효도하면 ‘그것도 효도라고 했나, ○○이 봐라. 돈 벌어서 제 부모한테 다 갖다 주잖아.’ 할 것인데 우리는 아무리 몸부림치고 몸부림쳐도 우리는 놀아나는 이 신세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이 사실을 우리가 일치감치 눈치 채고 그대로 운명으로 받아들입시다.

그게 해결책입니다. 기도하고 담배 끊고 술 끊는다고 인간되는 것 아닙니다. 교회 백날 다녀도 인간 안돼요. 인간 안 되는 것을 그대로 수용하자는 말이지요. 저는 교회 다니면서 사람 되는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괜히 목사들이 교인들 속이는 거예요. 돈 빼내려고. 안됩니다. 사람 되어서 천국 가는 사람 없어요.

다시 이야기할게요. 주님께서는 ‘네 주제파악이나 해라.’ 해서 주제파악당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천국입니다. ‘주여, 주님이 의인을 부르러 온줄 알았는데 말씀 듣고 보니 주께서는 죄인을 찾는군요. 죄인이요? 1등 죄인 여기 있습니다. 강도요? 너 가만있어. 내가 더 강도야, 강도 여기 있습니다. 이런 사람만 오롯이 모인 곳이 천국이에요.

사람을 괜찮은 사람 만들어서 구원하지 않습니다. 새사람이라고 할 때 그 새사람이라는 개념 자체가 달라요. 오늘 귀신들린 사람을 보세요. ‘가만있었다. 귀신이 몰려왔다.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싫다고 묶었다. 집에서 못살고 악마에 의해서 그 힘으로 결박을 풀고 나가서 무덤가를 배회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왔다. 예수님 찾아와도 영접할 힘도 없고 예수님 찾아와도 대화할 수도 없는데 내 대신 내 속의 귀신이 예수님하고 쑥덕거리면서 이야기를 하더니만 자기가 알아서 나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예수님께서 예수님의 본유의 기능을 발휘해서 예수님이 내가 들어갈 자리에 왜 네가 들어가 있느냐, 나가라, 해서 나갔다. 나중에 보니 예수님 내 안에 계셨다. 그래서 구원받았다.’

자기가 한 게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한 게 뭐가 있어요. 우리에게 귀신이 다가왔다는 것을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귀신이 다가오는 이유는 예수님이 다가오심으로 말미암아 ‘귀신의 일은 이런 것이고 예수님의 일은 이런 것이다.’ 하는 것을 중간에 있는 우리가 증거 토록 하기 위해서 귀신도 찾아들고 예수님도 찾아드신 거예요.

그것뿐입니다. 우리가 고백할 것은 뭐냐 하면, ‘우리는 전에는 귀신들린 자였습니다.’라는 고백과 이젠 그 귀신이 어떻게 나갔는가, ‘그것은 내 소관이 아니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내 속에 있는 귀신 추방해 주셨습니다.’ 세 번째는 뭐냐,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안에서 이런 일을 벌이고 계십니다.’라고 증거하고 예수님 자랑하라고 우리가 주님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 겁니다.

기도를 몇 시간을 하고 헌금을 얼마를 하고,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교회 출석 꼬박꼬박 했다는 그런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하면 걱정되는 사람이 하는 말이 있어요. ‘예수님이 우리한테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돼요. 예수님이 안 찾아온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귀신이 나한테 찾아온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귀신이 나한테 왔다고 하는 사람은 이미 귀신이 추방되는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아하, 내가 옛날에 귀신들렸구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예수님이 들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뭔가 과거와 차이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거예요. 에베소서 2장 1절, 2절에 보면 ‘우리가 그때에서는 세상의 악한 신들에게 묶여 있었다.’고 하거든요.

“너희가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1) 그러면 옆 사람이 ‘어이, 김 집사 나 좀 보세요. 옛날에 당신이 세상의 영에 묶여 있었다고 하는데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해보세요.’ 할 때 줄줄 나올거 아니냐 말입니다.

그런데 ‘나는 과거에 술을 많이 먹었고 도박에 미쳐서 살았고……’ 그것은 귀신이 묶여 있는 것이 아니에요. 그런 것은 끊으면 되지요. 성경에 보면 귀신에 묶여 있는 특징이 뭐냐, 행함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것이 귀신에 묶여 있는 거예요. 교회 다녀서 천당 가려고, 목사 말에 순종해서 천당 가려고 했던 그것이 귀신들렸기에 나온 고백입니다.

귀신 안 들리면 그런 고백이 있을 수가 없어요. 예수 십자가 피가 우리를 공짜로 구원했는데 공짜로 구원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신을 뭘 로 대치하느냐 하면 ‘예수님도 훌륭하지만 네가 더 훌륭해. 네가 열심히 해야 구원받아. 은혜로 구원은 받지만 행함을 해줘야 영광은 돌려.’ 자꾸 자기의 가치와 체면과 위신, ‘내가 이렇게 아픈데 사람들이 얼마나 나를 우습게 알겠는가, 차라리 내가 자살하는 게 낫다.’는 자기 행함의 의미, 죽을 때까지 자기가 쌓아놓은 고유의 가치를 포기 못하는 것, 귀신들린 겁니다.

그 귀신의 숫자가 몇 마리인지 그것은 모르겠는데 귀신들린 겁니다. ‘목사님, 어디에 근거해서 그렇게 큰소리로 장담합니까? 본문에 보면 귀신들린 자가 하는 일이 있어요.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는 일을 지워버리는 일이에요. 예수님이 하는 일을 흐지부지 만드는 일이 귀신의 일입니다. 악마가 하는 일이 그러한데 왜 그러냐 하면 전력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자기가 패배자 된 채 나왔는데 귀신도 자존심이 있어서 이 땅에서 놀 때는 자기가 패배자로 행세하는 것이 아니고 사기를 쳐서 반대로 해요. ‘내가 승리자다. 너희들은 내 졸개고 너희들이 수단껏 내 품안에서 벗어나려고 해 봐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너희들에게 내가 승리자지. 나는 하늘에서도 승리자고 지금도 승리자다.’라고 우기는 거예요.

누가 등장하기 이전에? 예수님이 등장하기 이전에는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나와 있어요.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여기서 마귀를 뭐라고 표현했느냐 하면 마귀 앞에 붙는 것이 있습니다. 그냥 마귀가 아니고 앞에 뭐가 붙는 것이 있는데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는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는 ‘악마가 지배권을 행사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서워서 벌벌 떠는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마귀를 쫓아내시고 마귀를 쫓아내니까 그동안 두려움에 떨면서 ‘너 그러면 죽인다. 죽으면 어찌되었든 실패자야.’라고 했던 그 모든 협박 공갈에 얽매이지 않게 된 상태가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온 상태입니다.

그걸 ‘음부의 권세, 죽음의 권세를 이긴 자’라고 하거든요. 방금 봤던 히브리서 2장 14, 15절 말씀대로라면 ‘예수 믿습니까?’라는 질문을 아주 간단하게 이런 문장으로 고쳐서 할 수 있지요. ‘죽음이 겁나십니까, 안 겁나십니까?’ 이런 질문으로 대치가 되지요. 지난 금요일에 안산강의를 했는데 안산강의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라고 되어 있어요.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참 어렵지요. 이 말을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쫓아내나니.’ 이러면 예수님이라는 어떤 인격적인 실체, 마귀라는 어떤 인격적인 실체가 있으니까 쉽게 이해가 되는데 요한일서에서는 그것을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쫒나니”라고 한 거예요. 왜 요한일서에서 그렇게 표현했느냐하면 배후에 있는 예수님과 마귀, 이것을 삭제해버리고 예수님이 나타날 때는 반드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무슨 사랑이냐 하면, ‘용서해준다, 얘야.’ ‘죄를 지었어요.’ ‘용서 해준다대도 그래!’ 이게 사랑이에요. ‘엄마, 시험 또 빵점이야.’ ‘용서해 준다니까!!!’ ‘또 떨어졌어. 5수 째 접어들었어.’ ‘용서해 준다니까!!!!’ 이럴 때 자식은 사랑을 느끼잖아요. 그러니까 사랑은 뭐냐 하면  ‘화목제물로 용서를 해준다. 네가 잘해서가 아니라 내가 네 대신 어떤 일을 처리, 처리전담반으로서 처리할 테니까 너는 가만있으면 내가 알아서 한다.’라는 식으로 사랑을 해줬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본인이 처리하려고 드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나는 처리할 능력도 없는데 수학도 제대로 못해서 수학 100점 맞을 능력이 없는데, 선생님은 때리고 엄마는 또 얼마나 화를 낼까?’ 그러고 있는데 엄마가 하는 말이 ‘수학이 빵점이든 심지어 마이너스 몇 점이 되었든 관계없이 내가 용서해 준다니까! 너는 내 아들이라니까!! 너는 내 아들이니까 용서를 해준다.’ 하는 거예요.

배후에 있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은 ‘나 예수 믿는다, 믿는다.’ 그 말 믿지 말고 사랑이 있으면 예수 믿는 것이고 사랑이 없으면 예수 안 믿는 겁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그동안 우리를 장악했던 악마를 추방하는 기능을 해요.

정리해봅시다. 예수님의 기능은 악마를 추방한다. 악마는 ‘너는 내 밑에서 어떻게 해도 못 벗어난다. 예수 같은 그런 것은 잊어라. 그런 것은 다 쓸데없다. 너는 네가 알아서 스스로 죽음을 이기고 버텨야 돼. 이게 바로 네 행함이야.’라고 합니다. 더 간단히 정리하면 ‘내 행함으로 내가 산다.’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마귀의 꾐에 빠진 거예요.

물론 우리 안에 예수님 계셔도 우리는 육신이 있기 때문에 평소에 하던 버릇, 행세가 있어요. 그것을 관성이라 하는데, 관성이라 하는 것은 물리학에서 물건을 던지면 그 던지는 방향에 실린 힘이 있어서 멈추어도 계속 같은 방향으로 가려는 힘의 성질이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 있어도 이 육신이 어릴 때부터 배운 버릇이 관성으로 작용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몸에서 정말 두려움이 없을 경우는 언제냐 하면 주님이 우리 몸을 완전히 흙으로 만들 때, 육신이 떠날 때는 더 이상 죄지을 근거가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 눈앞에 하늘나라가 활짝 펼쳐지게 되겠지요. 이 땅에 살면서 항상 우리가 이 육신의 관성 때문에 본의 아니게 성경말씀과 위배되는 일들을 시킵니다.

하지만 언뜻 언뜻 성령께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소속이 어디다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번개같이 스쳐지나가듯이 그 십자가의 효력, 그 사랑이 ‘용서했잖아. 용서 했는데 왜 벌벌 떨고 있어.’라는 책망 아닌 책망이 우리에게 계속 주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강의 중에 이렇게 했습니다. 방금 한 말씀에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고 그 뒤에 나오는 말씀에 강조점을 둬서 이야기했어요.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는데 만약에 두려움이 있으면 형벌이 온다.’고 되어 있어요.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면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온전한 사랑’입니다. 어설픈 사랑 말고요.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주께서 쫓아내는 거예요. 우리가 장담해서 쫓아내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쫓아내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이 대목 가지고 제가 한 시간을 강의했습니다.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다.’ 제가 포인트로 잡은 것이 이거예요. 우리 생각에는 두려움 자체를 형벌로 대체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두렵다는 그 자체도 마음고생이니까 그것을 형벌로 대체하고 싶은데 그것이 아니라 ‘두려워하는 자에게는 더 큰 형벌이 다가온다.’ 하는 거예요.

이 말은,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 앞에서 계속 두려워한다는 것은 무엇에 대한 모독이냐 하면, 주님의 십자가, ‘다 이루었다.’ 하는 것에 대해서 정면으로 귀싸대기 때리는 겁니다. ‘예수 당신이 나한테 뭘 해준다는 말인가? 저리 가.’ 하고 십자가 피를 모독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가 자꾸 돈만 밝히는데 만약에 어느 교회에서 십자가 피만 전해버리면 그 목사 귀싸대기 맞습니다.

‘당신 그렇게 해서 교회 키우겠어?’ 대번에 그 교회에 평생 땅 바치고 피 같은 돈 바친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어요. ‘키우겠습니다. 크게 하겠습니다.’ 하면 환영받겠지요. 지금 마귀 들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마귀를 풀어주는 방법밖에 없는데 예수님을 우리가 싫어하냐 좋아하냐 그 문제가 아니고 우리 안에 들어 있는 마귀가 어떤 관계로서 예수님을 겁내는가, 그것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제공하는 거예요.

지금 우리는 예수님이 좋다 나쁘다 할 그런 입장이 못 됩니다. 지금 예수는 우리하고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마귀하고 상대하면서 마귀가 어떤 점에서 제일 벌벌 떠느냐, 그 점을 예수님은 우리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귀보고 이야기를 해 준다 그 말이지요.

이 땅에서 마귀는 자기가 승리자인체 했지요. 사실은 하늘나라에서 패배자인데 승리자인양 굴면서 죽음을 무기로 해서 사람을 가지고 ‘너 열심히 행해야 돼. 신앙생활도 열심히 해야 돼. 교회와도 열심히 봉사해야 돼.’라고 하면서 열심가지고 구원되는 것처럼 목사들을 앞장세워서 그렇게 사기들을 친 거예요.
뭘 해도 열심히 해야 된다고 하면서 경쟁을 시킵니다. 성경읽기대회부터 모든 것을 대회로 만들어서 시합을 시켜요. 찬양대회, 찬양대회를 왜 합니까? ‘남자의 자격’입니까? 찬양대회를 왜 해요? 예수님이 심사위원입니까? ‘한 발자국 나오세요.’ 해서 점수 매깁니까? 여러분, 교회 나오시거든 교회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게 좋습니다.

교회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마귀가 설치한 거예요. 교회가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무섭게 만들고 두렵게 만드는, 그 두려움의 원천을 상대하는 겁니다. 내가 무엇으로 인해서 두려운가, 그것은 내가 아무리 행해도 성이 안차거든요.

내가 아무리 성경을 지켜도 다른 대목 보면 또 기가 팍 죽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어쩌란 말입니까? 돈 없이는 살수가 없는데. ‘네가 먹는 것 입는 것만 생각하는구나.’ 그러면 그 생각 말고 무슨 다른 생각을 합니까? 사람들이 사는 것이 입는 것 먹는 것을 생각하지 그 외에 다른 무슨 생각을 합니까?

산에 가서 도 닦을까요? 도 닦아도 전기세 나올걸요. 기도원도 전기 쓰고 나중에 기도원에서 내려올 때는 회비내야 됩니다. 회비 낼 돈 없으면 기도원도 못갈 판국입니다. 우리가 뭘 어쩐다는 말입니까?

주님은 이야기합니다. ‘지금 너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 마귀보고 이야기하는데 마귀가 물러가서도 심심해서 자꾸 와서 ‘네가 지금 예수 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네가 생각해도 그것은 아니야. 네가 평소에 하는 행세 있잖아. 네가 육신으로 열심히 했던 것, 바로 그것을 해야 되는 거야. 지금 가정에 우환 있는 것도 다 네가 열심히 안 해서 그래.’라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쑤셔대는 거예요.

관성의 법칙에 의해서 ‘어? 진짜 그런가?’ 하게 되면 또 성령께서 (귀를 잡아서) 끌고 와서 다시 한 번 ‘내가 용서해 준다잖아. 네가 스타 되지 말고, 네가 위대한 법정스님 같이 되지 말고, 무소유 같은 것 되지 말고, 스타 안 되고 위대한 사람 안 되고 창녀 되고 세리 되어도 괜찮으니까 너는 그냥 평소대로 네 맘대로 살아. 사는 것은 네 맘대로 살고, 용서는 내 몫이다.’ 할 때 그것이 십자가의 피의 효능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십자가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 꽃을 달고 장미를 바치는데 그러면 안돼요. 십자가는 그 처참한 모습 그대로 노출되어야 됩니다. 십자가에 주님이 달렸다 그 말이죠. 그러면 우리가 거기에 달린 것이고 그 처참한 모습이 우리 모습인 겁니다. 마귀가 우리를 위장해서 그렇지 그 위장을 벗고 나면 우리의 모습은 예수님의 십자가에 달린 그 벌거벗은 모습이 우리 모습이에요. 예수님이 우리 같은 죄인이 되었으니까 그게 우리 모습인 겁니다.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상당히 중요한 것이 있어요. 잘 들어야 됩니다. ‘목사님, 십자가설교 잘 들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마귀 들렸었는데 이제는 우리가 새 사람 되었으니 건전한 사람 되었겠네요. 흔히들 교회에서 회복된다, 회복된다고들 하더니 이런 상태를 말하는구나.’하고 생각하겠는데 아니거든요! 우리를 회복시키지 않습니다. 과거의 그걸로 우리는 끝이에요.

회복은 지방교회에서 주장하고 있고 통일교도 회복을 주장해서 세력이 그렇게 커졌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보면서 순 복음 교단을 비롯한 모든 교회들이 회복을 주장해서 교회 오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복에 대한 소망을 걸어서 돈 내고 교회에 열심 내게 만들어서 회복시켜주겠다는 상품을 걸었는데 성경에는 회복이라는 개념은 없습니다.

성경은 회복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제가 사무엘하로 정리해 보이겠습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이 간통을 했어요. 부하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와 간통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두려움이 생겼지요. 두려움이 생기면 주님을 바라봐야 될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그 두려움을 해결할 방도를 모색합니다.

죄가 죄를 낳는다고 다윗이 그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우리야 장군을 전방에서 빼내서 술자리를 마련해서 술김에 그의 아내와 동침해서 잠자리를 갖도록 한 뒤에 다시 전쟁터로 가도록 하는 계략을 꾸몄어요. 우리야 장군이 예뻐서가 아니라 자기가 한 짓이 들통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이 세상에서 미워서 죽임당하는 것이 아니고 미움 사지 않더라도 입막음을 하기 위해서 죽어야 될 분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이십니다. 마귀는 예수님 보고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눅 4:34) 하지요. ‘당신만이 우리를 멸망시킬 수 있다.’는 그 예수님의 입을 막기 위해서 예수님을 죽이지요. 그와 똑같은 계열이 뭐냐, 우리야 장군입니다.

그는 ‘임금님, 아닙니다.’ 하고 병사들과 같이 야숙하고 다음날 전쟁터로 떠나버렸어요. 우리야 장군에게 특별명령이 떨어집니다. 누가 죽였는지 몰라요. 대통령이 인민군과 싸우는 대한민국 사단장을 죽여 버리는 식입니다. 진짜 충성하는 장군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으로 죽여요. 우리야를 죽이고서는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봤겠지요.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애가 태어납니다. 그 애가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죽게 되었을 즈음에 다윗이 살려달라고 기도를 하지요. 그런데 애는 그대로 죽고 맙니다. 그 다음에 나타난 다윗의 태도입니다. 만약에 회복 같으면 ‘주여, 제가 이런 간통과 살인을 했는데 하나님이 모를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눈치를 다 챘군요.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제 저는 회개합니다. 난 죄인 맞습니다. 이제는 정리하겠습니다.’ 밧세바와의 관계도 끊고 더 나아가서 용감한 사람 같으면 왕의 자리도 내놓고 중이 되든지 해야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주께서 나를 회복시키셨군요.’라는 식으로 되겠지요. 그런데 성경 사무엘하 12장 24절에 보니까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애가 죽은 그 날 밤에 아내와 동침을 했어요. 이것은 회복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모든 과거의 잘못을 새롭게 창조하는 겁니다.

아까 읽었던 교독문 41번의 이사야 65장의 첫줄에 보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회복이 아니고 창조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에요. 회복이 아니고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창조는 반드시 어떤 요소가 들어가야 되느냐 하면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해야 됩니다. 어제 죄지었어요? 오늘 은혜로 살려줬습니다. 그 뜻이 뭡니까? ‘너는 오늘 내가 새로 창조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창조되었으면 ‘창조되었습니다.’ 할 것이 아니고 뭘 잊어야 하느냐 하면 어제 일을 기억하거나 마음에 두면 안 됩니다.

토요일에 술 많이 드셨어요? 여러분은 오늘 아침에 이래야 됩니다. ‘음? 어제? 몰라, 기억 안나. 오늘은 새로운 날이야. 새로운 피조물이야.’ 어제의 염려는 어제로 끝났어야 돼요. 그래야 두려움이 없는 겁니다. 오늘 용서는 오늘 용서분이 대기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는 한 사건이지만 그것이 시공간을 통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적용돼요.

‘목사님,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한테 혜택을 너무 많이 받지 않습니까? 미안스러워서.’ 그런데 그것을 누가 미워하느냐 하면 마귀가 ‘너, 너무 뻔뻔스럽다. 너, 혜택 너무 많이 받는다.’라고 우리 마음을 흔들어대고 쑤시는 겁니다. 여러분, 뻔뻔스러워지시기 바랍니다. 내 예상을 뛰어넘어 뻔뻔스러워지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정도로 뻔뻔스럽나.’ 하고 자기가 깜짝 놀랄 정도로 뻔뻔스러워야 돼요. 어제까지 간통한 여인, 그리고 그 간통한 여인의 남편을 누가 죽였습니까? 다윗 본인이 죽였어요. 살인죄가 그대로 남아 있고 간통죄가 그대로 남아 있는 그 여인, 애가 죽자마자 그 여인과 동침해서 낳은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금융브랜드 이야기가 아닙니다.

솔로몬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솔로몬 앞에서 늘 용서받았다는 것을 감사하는 거예요. 그 솔로몬을 방해하는 그것이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솔로몬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을 용서하는 자가 누굽니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창조물을 여러분의 자식으로 줬던, 여러분을 용서할, 여러분의 축복을 대변해주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죄 때문에, 마음의 간통죄 마음의 살인죄, 죄 때문에 죽었다가 다시 사신분이 누굽니까? 예수님 밖에 없어요.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그 은혜만 증거 해야 되고 예수님의 용서만 이야기해야 돼요. 용서받고 어떻게 행세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다룰 소관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할 사항이고 우리가 모였다 하면 얼마나 잘났나, 못 났나 그런 것은 묻지 맙시다. 끄집어내면 서로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다 그러니까.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그렇게 만드실 겁니다. 언제? 예수님의 십자가 피를 보고 저 피가 나를 용서했다는 것을 아신다면 과거에 교도소를 몇 번 들락거렸어도 그것은 소풍 다녀왔다고 생각하시고 잊어버리세요. 지금부터 오늘분의 죄는 또 기대됩니다.

이렇게 알지만 돌아서면 또 튀어나오는 죄, 오늘 저녁부로 해결 됩니다. 내일 되면 또 시작합니다. 늘 뻔뻔스럽게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로 사는 것, 마귀가 추방된 성령 받은 사람의 공통점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우리 행함으로 구원될 줄 알았는데 함부로 우리 속에 들어와서 겁내게 만든 세력도 있었고 우리가 원치도 않았는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두려워 말라, 내가 이미 용서했느니라, 라고 외치는 사랑의 음성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새로운 창조물 되었사오니 오직 주님의 은혜와 용서와 사랑만 가득해서 두려워하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